특집 | 재가불교운동을 이끈 사람들

2015년 2월 8일은 미천철우(彌天哲宇) 목정배(睦禎培, 1937~2014)의 열반 1주기였다. 유족들과 대한불교법사회 가족, 선후배들이 약수법사(藥水法寺)에서 그의 덕화를 기렸다. 미천은 《범망경보살계본휘해》와 《붓 가장자리에 마른 글》로 우리 곁에 다시 왔다. 필자도 그의 법사리를 친견하면서 삼배를 올렸다.

이 글을 청탁받을 때, 필자는 망설였다. 그냥 하는 손사래가 아니었다. 몇 건의 선약을 소화하기엔 벅찬 일정이 있었다. 필자 선정에 어려움이 있음을 알고는 그만 깜냥을 깜빡했다. 미천이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조교로 있을 때부터 이어온 45년간의 인연, 그 그리움 때문이었다.

특유의 환한 미소, 자상함, 재담을 가진 그를 동산 · 운허 · 청담 · 석주 · 효당 · 성철 · 지관 스님, 덕산 · 대원 거사, 불국생 · 명원 보살 등 승속이 아껴주었다. 대한불교법사회 ‘세제불교운동(世諦佛敎運動)’은 그런 토양 속에서 태어났다. 미천의 빛이요, 생명이며, 한국불교의 미래로 말이다.

1. 이 사람을 후원해 주세요

1937년 3월 25일 관향은 경남 사천, 밀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용수(龍洙), 어머니 조쌍이(趙雙伊)의 7남매 중 막내다. 세존단지에 치성드리는 어머니를 보면서 불교에 훈습되었다. 부산 해동고등학교 재학 시, 대각사 부산불교학생회에서 활동하면서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교리연구반, 불교합창단, G · F소년단(Green Fire), 이 셋에 다 가입하면 ‘앞장대’가 된다. 미천은 ‘앞장대’로 활동했다. 부산 시내를 목탁 소리로 깨우던 도량석, 가네코 다이에이(金子大榮)의 《불교학개론》, 거기에다 진해 영산법화사에서 들은 법화 스님의 강의, 이 모두가 그의 신심을 북돋웠다. 또 정화운동이 시작되면서 대중강연회, 신도 집회가 잦았던 대각사를 찾은 청담 스님과는 운명적 만남으로 이어졌다. 김영봉 스님, 이대의 스님, 지효 스님도 그 무렵 대각사에 오신 듯하다고 했다. 그렇게 큰스님들을 뵙는 것이 행복했던 앞장대의 몇 학생들은 입산을 모색했다. 그때의 사정을 이렇게 떠올리고 있다.

그때 청담 스님이 마음을 깨쳐야 한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도를 깨쳐야 한다 그랬습니다만, 도를 깨치려면 큰스님을 만나야 하는데 그럼 부산에서 제일 큰스님은 누군가 이래 여쭈어보고 그랬더니 경봉 큰스님이라 그래요. 경봉 큰스님이 도인이래요. 해서 그렇다면 경봉 스님을 뵙는 것이 좋겠다 해서 경봉 스님을 찾아 극락암으로 갔죠.

도인, 경봉(鏡峰) 스님을 찾아가 단행한 출가, 고2 겨울방학 때였다. 《천수경》을 외고 극락선원 선방에서 입선과 방선이 한 찰나였던 삼매도 맛보고, 자장암 ‘금와(金蛙)보살’도 친견했다. 그러다가 시장에 심부름 갔다가 가오리회에 마신 막걸리로 사달이 났다. 삼동결제가 해제되기 전날 밤, 셋은 수계식 참여를 두고 새벽까지 옥신각신했다. 결국 ‘계를 수지하지 못해 범계자가 되기보다 계를 받지 않고 도피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 그 길로 극락암을 빠져나와 줄행랑을 쳐 학교생활로 되돌아갔다. 단기출가에 그치고 만 것이다.

1958년 대학 진학 무렵, 원자물리학의 서울대냐, 전액 장학금의 조선대냐의 기로에 섰다. 선배의 충고로 둘 다 아우른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했다. 동국대는 타 대학 학생들이 도강할 정도로 기라성 같은 석학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미천은 법열을 느꼈다. 종비장학금에다 성적우수 장학금까지 받았다. 그 시절 미천은 조계사와 하숙집, 기원학사(불교과 기숙사)에서 기거하며 공부했다. 조계사에서는 공초 오상순과 한 방에서 기거하였고, 조계사합창단을 지도하던 정민섭과도 가깝게 지냈다. 또 새벽예불과 운력에 빠진 적이 없는 종정 동산 스님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가까운 선학원도 자주 출입했다. 청담 스님, 출가 시절 먼발치로 보았던 운허 스님, 대의 · 벽암 · 범향 · 석주 스님도 뵐 수 있었다. 여름방학을 이용한 지방 순회강연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대전 ・ 대구 ・ 부산에 소재한 종립학교, 그 지역의 몇몇 사찰, 마산 · 강릉의 포교당, 경주, 포항, 영주, 주문진, 속초까지 함께했던 고 김인덕, 박동기는 잊지 못할 법우였다. 그들은 당시 약수법사 천불전에서 미천을 도왔다.

1963년 대학원 시절, 《우리말 팔만대장경》을 간행할 때 편집 ・ 교정을 보던 이보다 더 큰 자부심도 맛보았다. “이 초고를 읽으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석학들의 대작불사에 대학원생이 ‘발간취지문’을 썼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그해 미천은 ‘UBC(Unified Buddhist Club, 遊飛詩)’를 조직, 총섭이 되었다. 화랑들처럼 산하를 순유(巡遊)하면서 비상(飛翔)하는 한 사상[詩]을 기르자는 뜻이었다. 학기 중엔 근교의 산을, 방학 때는 설악 ・ 속리 ・ 지리 ・ 한라산까지 등반했다. 그 시절 안호상 박사를 따라다니며 강의를 듣기도 하고, ‘단군의 집 건립운동’에 열성을 보인 불국생 ・ 명원 김미희 보살을 만났다. 건립운동은 유야무야되었지만 명원의 은혜로 박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또 ‘UBC’의 일원이었던 반야심 보살과 화촉을 밝힌 것도 이때였다.

그런 미천을 아껴준 분이 청담과 성철 두 스님이다. 봉암사 공주결사(共住結社)가 무산된 지 17년, 청담은 도선사에 실달학원(悉達學園)을 열어 그 염원을 이루고자 했다. 현판식 날, 미천은 운명 같은 말을 들었다. “니도 출가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성철 스님의 격려에 “철우도 출가해야 하는데……” 하고 청담 스님은 말끝을 흐렸다. ‘너는 머리 깎은 중이 아니라 학자가 될 것이다’ 재가불자, 미천의 앞날을 내다보았던 경봉 스님의 말씀이 오버랩되었다.

다음 해 봄, 도선사 토요정진법회 때 청담은 미천의 길을 열어주었다. 새벽까지 예참하고, 스님의 설법도 끝나 하산하려는데 스님이 명함 한 장을 주었다. ‘덕산 거사님, 이 사람을 후원해 주세요’ 명함 뒷면에 적힌 메모였다. 《대한불교》 신문 발행인이었던 스님이 이한상(사장)에게 취직을 부탁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미천은 불교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3년 남짓한 기자 시절엔 희비가 엇갈리는 일도 몇 있다. 김룡사로 성철 스님을 취재 갔을 때, 강요나 다름없는 3천 배를 하고 절값을 받아냈다. 박사공부 하는 데 쓰라는 학비였다지만 ‘내 상좌해라’던 족쇄를 풀어준 것이었다. 1966년 천축사 무문관 낙성식에 관응 스님을 취재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사장의 카메라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해 10월 효봉 스님께서 미양(微恙)하시다는 소식에 표충사를 갔다가 좌탈입망하신 스님의 법구를 취재 간 차로 서울로 운구한 일도 있었다. 이렇듯 큰스님들을 모셨던 불연은 미천의 꿈을 북돋웠다.

1967년 불교문화연구소 조교에서 1975년 전임강사가 될 때까지 역경원 ・ 교사편찬위원회 ・ 법당건립위원회, 전국신도회 ・ 대한불교청년회 ・ 불교학동인회 ・ 한국불교연구원 ・ 대원회 등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문명대, 이민용, 김항배 등과 《원효전집》 《한국고승전집》을 펴내면서 학자의 자질을 인정받고, 교사(校史) 편찬, 법당건립을 주관하면서는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이선근 총장이 대학교 이전 부지를 물색할 때는 몇 차례 미천을 대동했던 일 등 덕분에 ‘목박사’ ‘지하총장’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간사로 있던 교사 편찬실이 본관 지하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학교일 전반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었다.

전임강사가 된 후에도 지하총장의 활약은 눈부셨다. 불전간행 ・ 기획 ・ 한국불서편찬 ・ 동국80년사 등 각종 위원회, 불교문화연구소(원) ・ 불교대학 ・ 불교대학원장 ・ 동국대학교 비서실장 등, 거기에다 신라문화원선양회 ・ 민족문화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 대한불교진흥원 ・ 한국불교대원회에 관여하고 성철선사상연구원장직을 수행하면서 이름을 내외에 떨쳤다. 

쌓은 연구업적도 엄청나다. 화갑기념논총인 《미래불교의 향방》에는 저 ・ 역서 35권, 논문 55편으로 90여 편이 실렸다. 행여 챙기지 못했거나 그 이후의 것까지 합치면 족히 100편은 되리라. 정년 후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초대 총장에 초빙된 것은 여향천재청(餘香千載淸)이라고나 할까.

2. 오롯함, 반듯함, 말끔함-세제(世諦)불교를 꿈꾸다 

1982년 5월 미천은 A4용지 8쪽짜리 소책자를 선보였다. 제호는 〈아사달〉, 표지를 겸한 첫 쪽의 글이 ‘아사달을 내면서’이다. ‘UBC’를 이끌 때부터 미천은 홍익인간 사상에 깊이 몰두하였고, 뒤에 ‘아향(阿鄕)’을 조직하여 불교음악을 창달할 때도 그랬다. 〈아사달〉은 우리 겨레에게 던지는 화두였다. 그 해답을 홍익인간에서 찾고자 하였기 때문에 ‘성장하는 청소년들과〔我〕’ ‘올바르고 착실한〔思〕’ ‘아침을 맞이하는〔達〕’ ‘아사달(阿思達)’한 ‘광명사회의 발원(發源)’이 되자는 서원이기도 하다. 

이는 ‘세제불교(世諦佛敎) 운동’의 묵시적 선언이었다. 염주를 두른 합장한 손이 높은 산을 향하고 있는 삽화. 산은 수미산(須彌山)이고, 손은 미천의 손이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은 산꼭대기에 도리천이 있고, 그 중앙 선견성에는 도리천의 임금 제석천왕이 있다. 제석천은 제석인데 환인과 동일인이다. 해서 필자는 ‘수彌산’ 선견성의 ‘제석天’을 향한 간절한 바람에 합장하는 ‘미천 목정배’로 본다.

1988년 2월 대원정사에서 교법사 ・ 군법사 ・ 일반법사 등 각 분야 법사들이 대중불교 활성화를 위해 ‘대한불교법사회’를 창립, 초대회장에 미천을 선출했다. 이때 미천은 대원불교교양대학의 학장이었고, 또 기관지 《대중불교》의 편집을 맡고 있었다. 미천이 불교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어언 20년, 기자로, 강사로, 그리고 교수가 된 지도 10년이 훌쩍 넘은 때였다. 대한불교법사회의 출범은 《아사달》의 명시적 선언, 곧 세제불교운동이었던 것이다. 법사회의 강령도 만들었다. 구법 ・ 수행 ・ 교화, 곧 대승 ・ 보살 ・ 법사이다. 그래서 1996년 1월 19~21일 홍제암에서 열린 겨울소집교육의 주제가 ‘한국불교와 세제불교’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다시 세제불교운동의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世’는 인간이 살고 있는 영역이며 공간이다. ‘諦’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세상에 상즉하는 진리이어야 한다. 부처님은 ‘眞諦’의 세계에서 살도록 명하고 있지만 우리 중생은 여기서 살고 있고, 사바에서 허덕이고 있다.

사바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사바에서 바르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 사바에서 오롯하게, 반듯하게, 말끔하게 사는 길이 바로 세제불교를 외치는 함성이다. 우리는 함성만 지르지 말고 세제 속에 담겨 있는 조용함의 의미를 찾고, 그 조용함이 마음을 맑혀 부처님같이 오롯함, 반듯함, 말끔함의 세제 속의 진제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불교교리의 현대화, 참 불교의식 그리고 세제불교의 길을 앞서가는 법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세제불교운동의 길〉이라는 제하의 글이다. 사바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사바에서나마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바에서 바르게 사는 법, 그것을 미천은 ‘오롯하게, 반듯하게, 말끔하게’로 표현하고 있다. ‘~하게’는 ‘시키다’ ‘시작하다’는 동사이다. 오롯하지 못하고, 반듯하지 못하고, 말끔하지 못하니까 ‘오롯하게, 반듯하게, 말끔하게’ 하자는 세제의 함성인 것이다. 그래서 제시한 것이 ‘불교교리의 현대화’ ‘참 불교의식’ 그리고 ‘세제불교의 길’이다. 이 셋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1) 불교교리의 현대화

미천이 말한 불교교리의 현대화 내용, 그 일부를 요약 발췌해 보았다.

불교가 참다운 깨달음을 구현하기 위한 표현 중의 하나는 ‘전미개오(轉迷開悟)’이다. 미(迷)는 사물관리에 어두운 것, 혼돈된 것, 무지한 것 등을 표현한 무명(無明)이다. 오(悟)는 진리를 밝혀 아는 원리, 완전하게 깨닫는 지혜, 열반 등 진리의 실체임과 동시에 진리의 능동성을 의미하는 오롯함이다.

미(迷)의 세계는 악업이 작용한다. 악의 업력은 강하다. 악습과 구습이 혼합되어 바르게 살려고 하는 의식을 어둡게 만든다. 불교에서는 이 세계의 현상을 무명이라고 하였다. 밝지 못한 세계는 괴로움과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 무명의 부수적인 산물이 곧 고(苦)라는 것이다.

생활이 욕망의 세계를 현실화시키려고 한다면, 생명은 본질의 세계를 자각하려는 것이다. 생명의 실체가 오(悟)의 세계에서 능동적 발광체(發光體)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전미(轉迷)는 현존적 모순을 개혁하려는 점진적 수행이며, 개오(開悟)는 본질적 실체를 구현하려는 궁극적 자각인 것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위에서 말한 〈세제불교운동의 길〉은 2008년에 간행된 《세제불교의 이론과 역사》에 다시 등장한다. 내용은 변함이 없지만, 이 책 ‘머리말’에서 보충하고 다듬어 정제된 표현을 더했다. 

이러한 무명을 극복하기 위하여 삼보에 대한 개념도 오롯함, 반듯함, 말끔함으로 풀이하는 세제불교운동을 전개한 지도 어언 20년이 되었다. 부처님의 어디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오롯한 깨침을 이룩하여 거기에서 방정 광대한 반듯한 정법을 설파하셨고, 부처님의 오롯함과 그 교설인 반듯함을 따르는 수행자는 말끔함으로 정진하여야 한다.

“오롯함, 반듯함, 말끔함이 쉬운 듯한 말이지만 여기에는 불(佛) ・ 법(法) ・ 승(僧)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약간은 애매했던 표현이 이 ‘머리말’에서는 “부처님[佛]의 오롯함과 그 교설[法]인 반듯함을 따르는 수행자[僧]는 말끔함으로 정진하여야 한다”고 하여 ‘불 ・ 법 ・ 승’ 삼보를 ‘오롯함 ・ 반듯함 ・ 말끔함’으로 대체하고 있다. 세제불교운동의 이론이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쓴 글 모음이라 《미천세담(彌天世談)》이라 했던 것을 이론 체계를 갖추고 《세제불교의 이론과 역사》라 하였다. 그래서 〈자괴(自愧)〉를 머리말 대신으로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2) 참다운 불교의식(意識, 儀式)

민족의 성쇠는 역사인식의 연계성이 확실해야 한다. 그 민족의 역사인식이 확고부동하면 현실적 고난이 있더라도 역사 개발의 원동력을 재생할 수 있다. 

본시 불교의 근본교리는 평등이며 자유이다. 인간적 연기와 사회적 연기가 하나 되어야 한다. 즉 인간은 해탈하고 사회는 정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번뇌를 벗어버리는 자각적 당체가 되어야 하고, 사회는 번뇌를 탈각하는 평등적 인과가 운용되어야 하는 바탕이다. 인간 내면의 아집을 깨달음으로 향진시켜야 하고, 사회구조의 모순을 자연스러움으로 위상을 전향시켜야 한다. 인간을 해탈시키지 아니하고는 평등을 생활화할 수 없고, 사회를 정화하지 아니하고서는 자유를 구가할 수 없다.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대중의 불교화가 화급하다고 본 것이다. ‘불교의 대중화’가 아닌 ‘대중의 불교화’를 제시했다는 말이다. 섣불리 대중화한다는 미명하에 ‘음주식육(飮酒食肉) 무방반야(無妨般若)’라 한다면 불교를 흐리게 하거나 진리의 세속화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문화현상 제반을 불교화하여야 한다. 문학 ・ 연극 ・ 음악 ・ 영화 등 생활 전체에 불교적 사상이 훈습되게 해야 한다. 미천이 시 ・ 서 ・ 화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우주법계가 하나임을 다시 인식하여야 한다. 인간과 우주가 주종의 관계라는 지배 사고에서 탈피하라는 말이다. “한 티끌 속에 모든 우주가 공존하고 있다”는 의상 스님의 법성게를 그 예로 들었다. 이처럼 대중의 불교화, 문화현상의 불교화, 법계 무진연기의 자득, 이런 것이 불교의식으로 화급하게 자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살피겠다.

3) 세제불교의 길

미천은 민족의 성쇠는 역사인식의 연계성이 확실해야 한다고 보았다. 역사인식은 문화계승의 원초적 힘이며 문화 창달의 근원적 터전이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역사성을 되돌아보고 있다.

한국불교는 초기에 계몽적 교학에 힘입었으므로 급기야 대승적인 구세불교로서 깃발을 높이 세워 원효(元曉)의 일심(一心), 보조(普照)의 진심(眞心), 서산(西山)의 선심(禪心), 만해의 유심(唯心)으로 전승되는 일관된 마음의 체용을 밝히어 왔다.

원효는 일심으로 왕에서부터 땅꾼 사복에 이르기까지 교화하는 보편적 대중교화의 단초를 열었다. 보조는 진심불교로 사부중을 결사했으며, 서산 또한 선심으로써 구국 ・ 제민하였으며, 만해는 유심으로써 민족을 유신하였다. 이 네 가지는 곧 민족적 자부심을 지니게 하며, 일승귀명하는 정신을 새기게 하였다. 세제불교를 표방하고 다시 결사한다는 것은 혁명이 아니라 자각이다. 불교교리의 보편화, 불교신앙의 강력화, 불교조직의 연계화, 불교활동의 사회화, 불교문화의 생활화, 불교정신의 민족화, 불교포교의 세계화 등 세제불교운동의 이념을 구현하는 자각운동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3. 세제불교 30년-구체적 활동

2018년 대한불교법사회는 창립 30주년을 맞이한 자리에 《세제불교 삼십년사(世諦佛敎 三十年史)》를 선보였다. 그간의 자취를 다음의 표와 같이 간추려 놓았다. ‘태동과 확산 시기’는 미천의 생애 전반(前半)에 해당하고, ‘정립 시기’는 그 후반이다. 여기에서는 ‘정립 시기’ 미천의 활약 두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1) 불교음악의 현대화 ・ 대중화

1997년 3월 24일 장충동 소피텔 앰배서더호텔 그랜드볼룸에서 미천의 화갑기념노총 봉증식이 있었다. 은법학인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당시 교계 신문의 기사 “시평-한 불교학자의 화갑잔치”를 읽어 본다.

무형문화재 안숙선 여사가 목 교수가 지은 ‘달맞이’라는 시를 창하는가 하면, 김영임 여사의 ‘회심곡’도 구성졌고, 재간 덩어리 배우인 김성녀 씨의 ‘거룩한 손’ 등 목 교수 작시 노래가 박범훈 지휘의 동국국악관현악단과 중앙불교합창단의 협연으로 장내를 압도했으니 예술을 모르는 이들이라도 대단한 잔치를 못 느낄 수 없다. 거기에 일본에서 온 부부 예인이 박범훈의 ‘메나리’를 일본 고유 악기로 연주하는가 하면, 이미 세계적으로 그 명성을 떨친 바 있는 김덕수 ‘사물놀이’가 좌중을 흔들어 놓은 격정적인 연주를 곁들이니 그 감흥도 대단하다. 홀 안에서 식사 중이던 가수 김태곤까지 예정에 없이 무대로 끌려나와 무반주로 ‘청산은 나를 보고’를 멋들어지게 부르니 금상첨화가 아닐쏘냐. 

불교음악의 현대화 ・ 대중화를 위한 미천의 열정이 잘 나타나 있다.

다음 페이지에 실린 표의 곡들은 미천의 시가 박범훈을 만나 국악으로 태어난 것들이다. 그는 중앙대 총장,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을 지낸 국악인이다. 1999년 미천의 지도 아래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둘은 국악의 현대화 ・ 대중화로 통했다. 미천은 그에게 범성(凡聲), 뇌음(雷音)이라는 호를 지어주며 대중적 소리, 세상에 울림을 주는 천둥소리 같은 음악을 만들라고 격려했다. 그런 인연으로 김성녀와 김영임과도 인연이 닿았고, 안비취의 비명을 짓기도 했다. 김성녀는, 1996년 뉴장충빌딩 1층에 법사도량을 개원할 때 많은 이들이 화환을 보내 축하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다. “좋은 소리 들려주고 사는 게 얼마나 값진 보시인지 모른다”는 경기명창 김영임(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의 호는 소민(素民)이다. 서민적인 노래를 들려주는 사람으로 거듭나라며 미천이 지어준 것이다.

전통 국악이 현대화된 모습은 여러 측면에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통 〈회심곡〉은 꽹과리 반주에 가사에 한문이 많다. 또 연주도 한 번에 죽 이어진다. 하지만 현대화된 〈‘97 김영임회심곡〉은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한글로 바꾸고, 범종과 법고를 반주로 사용하며, 또 곡 내용에 맞게 ‘부모님 은혜’ ‘몇 번이나 산다고’ 등 7곡으로 나누어 소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가야송(가야금의 노래)〉은 2007년 9월 KBS 국악관현악단이 〈현의 노래〉로 초연했을 때부터 큰 화제를 모았던 25현 가야금 병창이다. 이 곡은 2009년 국악의 대중화를 목표로 시작한 국내 최초의 국악 브런치(brunch) 콘서트인 ‘정오의 음악회’에서 연주되다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상설공연 ‘2016-2017 국립극장레퍼토리 시즌’ ‘명인명곡’ 코너에서 계속 연주되었다.

또 〈용성〉은 서가(序歌)로 시작하여 출가, 3 · 1운동, 용성불사, 대각운동, 나라 생각까지 백용성 스님의 생애를 14부로 담은 장시이다. 박범훈이 이를 칸타타(Cantata, 交聲曲)로 작곡하여 1998년 4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현대화된 찬불가들은 기존의 찬불가들처럼 피아노 반주의 합창곡 형식이 아니라 국악관현악의 반주에 독창과 중창, 합창이 결합되는 형태를 띠고 있다. 미천이 품어왔던 불교음악의 현대화가 하나씩 구체화된 것이다. 그런데 찬불가의 효시가 용성 스님의 〈왕생가〉 〈권세가〉로 알려져 있다. 그 가사와 악보가 《대각교 의식》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1927년부터 시작된 현대 찬불가 운동을 미천이 이어갔다는 점이 돋보인다.

미천과 박범훈, 그리고 김성녀 이들은 우리 문화와 민족정서가 깃든 찬불가의 보급을 위해 ‘아향(阿鄕)’이라는 불교음악연구회를 조직, 새로운 형태의 불교음악, 즉 신민요풍의 불교음악 창달의 성과물을 냈다. 조계사에서 조계사합창단 지휘자 정민섭과 가까이 지내고, 불교문화연구소 조교 시절에는 화청(和請)을 조사 ・ 녹음했던 일 등은 미천이 의도한 불교음악(의식)의 사회화와 다름없다.

 

2) 세제불교 전법계맥(傳法系脈)

법맥(法脈), 계맥(戒脈)은 그리 낯설지 않은데 미천은 계맥(系脈)이라고 했다. 그냥 계보(系譜) 정도로 이해해도 괜찮을 것 같다. 2013년 10월 3일 ‘세제불교전법계’ 법회를 봉행하면서 용성진종 ・ 동산혜일 ・ 퇴옹성철에서 미천으로, 다시 재가법사들에게 이어주면서 ‘세제불교전법계’라 명명하였다. 발의법사, 구수법사, 불퇴법사, 보처법사의 계위로 세분하여 모두 217명에게 수계하였다. 다시 “용성 ・ 동산 ・ 성철 ・ 미천은 어떻게 보면 한국불교의 정맥인 것이다! 감(堪) ・ 인(忍) ・ 대(待)의 정신이 바로 삼취정계의 정신임을 절감하였다”며 이를 재천명하였다. 동산 스님의 문집에 “견디고 참고 기다리라. 큰스님께서 평소에 좌우명처럼 생각하시고 자주 쓰셨던 휘호였다”고 한 그 말씀을 늘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동산 스님의 감인대는 三聚淨戒를 새롭게 정의한 것으로 堪은 律儀儀戒, 忍은 攝善法戒, 待는 攝衆生戒로 보셨으며,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오롯하고, 반듯하고, 말끔함입니다. 항상 오롯하고 반듯하고, 말끔한 불자로 살아가야만 동산대선사의 정신을 이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때 미천은 큰 병중에 있었다. 후사를 걱정하여 다음의 표와 같이 바톤터치(batonpass)한 것이다.

삼취정계는 그의 논문 〈삼취정계의 현대적 의미〉에서 이미 천착했던 것이다. 그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감 ・ 인 ・ 대’ 즉 오롯하고, 반듯하고, 말끔함으로 새롭게 정의한 것이다.

4. 서원의 철학 ・ 서원의 신앙 ・ 서원의 행동-미래불교의 향방

2012년 10월 2일, 미천은 상계백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앞 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산 대종사 사상의 재조명’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동산 스님의 계율〉을 발표하였다. 특히 ‘글그림전, 우리 동네 구경 오세요’는 생애 의지를 보이려는 욕망, 아니 서원이 하나 되고, 그 서원이 발원으로 꽃 피어야 한다는 몸짓이었다.

또 이런 일화도 있었다.  

1974년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 저녁, 동국대 목정배 교수 강의시간으로 기억된다. 강의가 한참 진행되는데, 빠꼼히 문이 열리더니 노인 한 분이 들어섰다. 워낙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닫는 바람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노인이 들어오시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듯 강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키가 자그마하고 허름한 차림새의 노인은 나는 듯이 가벼운 걸음으로 천천히 교실 뒤편에 가 앉으셨다. 때마침 교수님의 질문이 학생들에게 떨어졌다. “도단학성(道斷學成)이 뭐지요? 이게 어디에 나오는 말입니까? 도단학성, 도단학성” 그날 강의는 그런 식의 질문이 많았다. 학기 초인 탓이었던지, 아니면 교수님의 밀어붙이는 강도가 커서였던지 대답이 그렇게 쉽게 나오지 않았다. 누구에게 지목이 떨어질지 몰라 강의실 안에 약간의 긴장감이 돌던 어느 순간, “와 이리 대답을 못하노. 척척 대답을 해야제.” 하는 투박한 음성이 들려왔다. 학생들의 대답 없음을 안타까워하심이 역력한 음성이었다.

미천이 대원불교교양대학에 출강하던 때의 일화이다. 노인은 대원 거사 장경호요, 장소는 대원불교교양대학 강의실이었다. 대원 거사를 롤모델로 삼고, 서원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대원 거사에 관한 일화가 4곳에 소개되고 있다. 《붓 가장자리에 마른 글》 38-40과 〈에필로그〉 중 ‘불교계 거목 대원 장경호’가 그것이다. 

 

38-1) 만해 한용운은 〈불교유신론〉에서 산중불교를 도시불교로 만들어야 하고, 법회 형식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만해의 이상이 실현되지 아니하였다. 불교의 전통성이 변이되지 않고, 또한 통불교적인 무애성으로 말미암아 한국불교의 신앙형태는 복잡과 통속적이었다. 이러한 불교를 변이시키려고 원력을 세운 분이 있었다. 바로 말하면 대원 장경호 거사였다.

38-2) 대원불교대학의 개교는 한국불교 현대사에 획을 긋는 일이었다.

39-1) 대원 장경호 거사는 대원정사를 개창하고 대원불교교양대학을 개원하므로 산중 중심의 불교가 도시화되고 사회화되는 데 시원을 열었다. 

39-2) 이처럼 대원 장경호 거사는 불교현대화는 대중화가 되어야 한다는 의지를 공고히 하였다. 한국불교의 사회화는 동국철강의 창립자이신 장경호 어른의 돈독한 불심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현대의 유마 거사로 추앙받아야 할 것이다.

40-1) 나는 불교를 믿고 난 후 훌륭한 거사 수행인이신 대원 장경호님을 만난 것을 법열로 느낀다.

에필-1) 한국불교는 이 시대, 이 민족의 전통종교로서 그 본연의 힘을 발휘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용트림이 대지(大地)를 가르며 흥왕(興旺)하니, 그것은 불교의 대중화 물결이 된다. 참다운 믿음, 적극적인 신앙생활, 사회를 안녕과 질서 속에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말씀이 모든 이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어야 한다’는 대중불교의 외침이 이 땅의 불가(佛家)가 가야 할 필연의 길이며 시대의 요구였다. 이러한 정신이 발아하던 시절, 1970년대 한국 굴지의 철강업을 경영하던 거목(巨木) 장경호 거사는 불교 중흥의 도약을 서원하며 이정표를 세우니, 이것이 한국불교의 재가신앙에 있어 커다란 전환기를 이루는 역사적 시점이 된다.

에필-2) 이 자리에는 주로 현대적인 불교의식, 대중교육제도의 신설, 시민선방 운영, 대중포교를 위한 언론, 출판사의 창설, 대원정사 운영계획 등이 거론되어 역사적인 대중불교운동의 발기적 모임이 되었다.

에필-3)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고 하나, 거사는 스스로 시대를 새롭게 하였으니, 그것은 대중불교의 횃불을 든 것이요, 모든 재가불자의 향도(向導)가 되었음이다. 진실로 20세기에 유마 거사가 재현했음으로 비추어 볼 수 있으리라.

불교대중화의 외침으로 중흥의 도약을 서원한 이가 대원 거사이다.(에필-1) 그는 “1972년 2월 매주 토요일 정기 좌담회를 열었다. 대은 ・ 영암 ・ 탄허 ・ 성수 ・ 무진장 ・ 운송 ・ 서경보 등의 스님들, 김동화 ・ 조명기 ・ 장원규 ・ 이종익 ・ 홍정식 ・ 김영태 ・ 목정배 등 동국대 불교과 교수들, 그리고 언론계 등 각계각층의 인사가 망라되었다.” 이분들이 대중불교운동의 발기인이 되어(에필-2) 장경호 거사가 대원불교교양대학을 개원하였으니, 불교대중화 즉 불교의 도시화 ・ 사회화의 시원이 되었다.(39-1) 그래서 대원불교대학의 개교는 한국불교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이다.(38-2) 그렇기 때문에 대원거사는 현대의 유마거사로 추앙받아 마땅할 것이다.(39-2) 그런데 이런 불교대중화는 위로 만해 한용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38-2) 그래서 대원 거사와의 만남을 법열로 느낀다.(40-1) 대원 거사가 대중불교의 횃불을 들고, 재가불자의 향도가 되어 ‘불교의 대중화’가 아닌 ‘대중의 불교화’를 이끌었기 때문에 20세기에 유마 거사가 재현했다고 기린 것이다.(에필-3)

미천은 10년 넘게 대원회에서 일했다. 아니 대원 거사를 롤모델로 삼으며 꿈을 설계해 간 것이다. 그 불교대중화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대한불교법사회를 조직하여 ‘세제불교운동’으로 펼쳐 나갔다.

서원의 삶도 있다. 윗글에서 ”도단학성(道斷學成)이 뭐지요? 이게 어디에 나오는 말입니까? 도단학성, 도단학성.” 김희균 보살은 ‘그날 강의는 그런 식의 질문이 많았다’고 하여 강의 형식에 초점을 두었지만 필자는 강의내용이 중요하다고 본다. ‘道斷學成’은 ‘度斷學成’의 오기(誤記)이다. 그렇다면 ‘도단학성(度斷學成)’은 무엇인가.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고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도(度) ・ 단(斷) ・ 학(學) ・ 성(成)’의 잘못이라서 그렇다.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는 노랫말이 생각난다. 이것은 바로 법회 끄트머리에 합송하는 사홍서원의 끝 글자를 모은 것이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이것을 총원이라고도 한다. ‘사홍서원이 뭡니까? 총원이 뭔가요?’ 그렇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도단학성‘이 뭐냐고 묻는 젊은 강사, 미천의 재기발랄함에 노 거사는 나중에 학장직을 주어 그를 믿었다.        

좀 더 이어가 보자. 새롭게 해석한 사홍서원 때문이다. 간추리면 이렇다.

‘중생무변’의 중생은 생명이다. 그 무량무변한 생명의 실상에 대해 존귀하고 자애하는 마음으로 승화시키고 실천하는 보살행자가 되자는 생명철학이다. ‘번뇌무진’의 번뇌는 의식의 편향된 변고(變故)이다. 번뇌는 생명의 살상, 침탈로 이어진다. 때문에 편견, 사견이 없는 정각의 사고의식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법문무량’의 법은 부처님의 교설이다. 그걸 다 배워 부처님같이 각행이 원만해야 한다. 무량하다는 그 법은 사실은 하나이다. 생명의 상관성인 연기법인 것이다. ‘불도무상’은 완성자, 정각자, 부처 그 자리를 이루겠다는 발원이다. 중생 모두가 부처님의 자비에 섭수될 때 섭수되는 중생은 생명의 해방을 맞이한다.

이건 엄청난 대원력이다. 불교의 원력은 사바의 중생만이 아니라 지정각(智正覺) 세계에 살고 있는 생명을 실상연기로 살게 하고, 반야연기로 공존될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대원이 성숙된다. 따라서 무량차원의 법계에서 모두 성불하는 서원의 철학, 서원의 신앙, 서원의 행동으로 보살행이 되어야 참다운 사홍서원이 될 것이다. 미천은 그런 서원을 우리에게 남긴 원력보살이었다. 봉암사 결사가 출가자의 바로미터였다면 세제불교는 재가불자들의 결집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재가와 출가, 출가와 재가가 바로 섰을 때 불교도 원래 위치로 복귀된다. 대한불교법사회를 이끈 미천, 그는 “니가 이 세상에 왔으면 니 나름대로 연극을 해라”는 30년도 더 된 경봉 스님 말씀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꽃향기는 천 리를 가고 사람의 덕은 만 년 동안 스며든다고 했다(花香千里行 人德萬年熏). 또 복숭아와 오얏은 말이 없어도 그 나무 아래에는 저절로 오솔길이 생긴다(桃李不言下自成蹊)고도 했다. ‘2001년 오늘의 한국불교’라는 설문조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로 선정된 미천, 헌신적인 대중불교운동, 교수의 본분사 이 둘을 새의 양 날개처럼 펼치며 충실하고 뜨겁게 살았다. ■

 

최성렬
 조선대학교 명예교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 박사). 조선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철학과 교수,  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장, 인문과학대학장, 범한철학회회장, 새한철학회회장 등 역임. 〈보조 수심결의 일고찰〉 〈원돈성불론의 십신에 대하여〉 〈간화결의론의 분석적 연구〉 〈보조의 화엄신론 이해〉 등 30여 편의 논문이 있다. 현재 (사)록양고문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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