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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일,대중포교에 평생을 바친 명설법가
특집 | 재가불교운동을 이끈 사람들
[78호] 2019년 06월 01일 (토) 유응오 arche442@hanmail.net
   

 박완일(朴完一, 1935~2018)

2018년 10월 26일, 83세를 일기로 일관(一觀) 박완일(朴完一, 1935~2018) 법사가 별세했다. 박완일의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불교계 언론은 고인 이름 앞에 ‘부루나 존자’라는 별호를 썼다. ‘부루나 존자’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 박완일 법사는 설법을 제일 잘하는 재가불자로 알려졌다.

박완일 법사가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 약력은 아래와 같다.

전라남도 광주 출생, 정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효봉 선사 문하로 출가해 참선 수행하였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와 동 대학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동국대학교 강단과 여러 강연회를 통해 불교와 인생과 철학에 대해 강의하였다. 전국신도회장을 역임했고, 월간 《법륜》을 발행했으며, 한국사회교육연구회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약력 가운데 불교사적으로 의미 있는 대목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박완일이라는 성명 뒤에 붙는 법사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여러 강단 및 강연회에서 불교에 대해 설법했다는 것이다. 둘째, 재가신도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조계종 전국신도회의 사무총장을 거쳐 제14, 15, 16, 18대 회장을 역임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불교종합지로 창간된 월간 《법륜》을 발행하면서 “산중불교에서 시민불교로, 사찰불교에서 가정불교로, 의식불교에서 생활불교로”라는 구호에 걸맞은 문서포교를 펼쳤다는 사실이다. 박완일 법사의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은 결국 ‘포교’라는 하나의 단어로 귀결된다. 그런가 하면, 박완일 법사의 개인사에서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은 1952년 효봉 선사 문하로의 출가, 수행과 그가 선봉에 서서 이끌었던 1960년의 4 · 19혁명이다. ‘출가’라는 정신적 혁명과 ‘4 · 19’라는 역사적 혁명의 체험이 박완일 법사가 전 생애 동안 펼친 설법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먼저 효봉 선사 문하로 출가해 수행했던 인연에 대해 살펴보자.

고은 시인은 〈불교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박완일 법사, 법정 스님과의 인연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내 사형 구산 스님이 정화종단의 초대 전남종무원장으로 부임해서 광주 동광사에 종무원을 개설했습니다. 내가 가서 정화운동을 도왔습니다. 그 무렵 나는 대담무쌍하게 전후의 지성에 불교사상을 접목한 강설을 했습니다. 목포 정혜사에 한때 체류하며 목포극장에서 ‘각존과 실존’ 강연을 했습니다. 그때 목포의 청년 지식인, 대학생들이 나의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목포상과대학을 중퇴한 박재철입니다. 그는 해남 우수영이 고향인데 목포 시내에 숙식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절에서 숙식할 수 있는 청년학생회 총무를 맡게 해서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다 입산출가를 결심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오대산으로 갈까 하다 내 사제 일관(박완일)이 통영 미래사로 가는 길에 그를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내 영향을 많이 받던 시절입니다. 그 뒤 미래사에서 함께 지내다 그는 초발심자경문을 익히고 곧 행자에서 사미계를 받았습니다. 효봉 문중의 하나가 된 것이지요. 그 당시 미래사에는 만년의 석두 스님도 향봉도 계봉도 함께 있는 중시하(重侍下)의 3대가 아주 작은 절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은 시인의 회고에서 알 수 있듯, 박완일 법사는 환속 전까지 일관 스님이라는 법명을 지니고 있었다. 효봉 스님의 문하로 출가한 까닭에 구산 스님과 일초 스님(고은 시인의 환속 전 법명)이 사형이 되고, 법정 스님이 사제가 되는 것이다. 

효봉 스님의 문하로 출가한 인연으로 박완일 법사는 효봉 스님, 구산 스님, 혜융 스님을 회고하는 글을 남겼다. 그는 〈시비〉라는 글에서 효봉 스님을 “근세 한국에 훌륭한 선지식이요, 고승”이라고 정의하면서 은사에게서 배운 가르침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젊어서 효봉 스님을 꽤 긴 세월을 모신 인연이 있다. 워낙 도가 깊고 덕이 높은 분이라 항상 사람이 끊이지 않았는데 하루는 스님들이 효봉 스님께 와서 다른 사람 이야기를 했다. 대개 장본인이 없는 곳에서 하는 말이란 좋은 쪽보다는 험담이 욕이 많은 법이다. 그 사람이 뭐가 틀렸다, 뭐가 잘못됐다는 등 듣기 안 좋은 소리를 하면 효봉스님은 그저 그 말이 옳다 그르다를 따지지 않고 머리를 끄덕끄덕하며 계속 듣고만 계셨다. 이렇게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계시면 남을 욕하고 시비하고 비방하던 그 스님이 “스님, 주무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면 효봉 스님께서는 “아니, 안 잔다. 내가 다 듣고 있느니라.”라고 답하셨다. 내가 옆에서 보기에도 무척 답답했다. 한 시간 이상을 일방적으로 계속 누군가를 지칭하며 매도하고 몹쓸 사람이라고 흉을 봤다. 효봉 스님은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말 다 끝났느냐?”고 물었고, 그 스님은 “예, 끝났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비로소 효봉 스님께서는 입을 여셨다. “네 말을 잘 들었다. 다만, 내가 하고픈 말은, 이놈아 너나 잘해라!” 남을 신나게 욕하던 스님도 효봉 스님의 말씀을 듣고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참으로 깊고 깊은 마음의 효봉 스님이시다. 혼자 들떠 남을 비방하는 사람에게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말해 봐야 그 들뜬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마저도 나쁘다고 욕할 테고, 그저 ‘너나 잘해라’라는 짧은 한 말씀에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박완일 법사가 효봉 스님께 배운 불법의 요체는 인식론적으로는 ‘옳고 그름의 시비는 내가 상대방이 되고 상대방이 내가 될 때 사라지게 된다’는 것, 즉, 양변을 여읜 뒤에야(不二) 비로소 중도(中道)에 들 수 있는 이치였고, 실천론적으로는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나부터 잘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박완일 법사는 〈스님, 참 좋으시겠습니다〉라는 제목의 조사(弔辭)를 통해 구산 스님의 열반을 추도했다. 이 조사는 대표적인 승려 문인인 정휴 스님이 “‘이제 나고 드는 것 없는 본처에 돌아갔으니 얼마나 좋습니까.’라는 의미가 깃든 선의 근본 요지가 잘 나타난 글”이라고 찬탄할 만큼 명문이다. 이 조사 중 구산 스님과의 인연이 담긴 부분을 일부 발췌해본다.

제가 스님을 처음 뵌 것은 통영 도솔암 시절이었고, 효봉 스님을 모시고 토굴에 있을 때였습니다. 스님은 그때에도 일만 하셨고 어린 저희에게도 일만 시키셨습니다. 어쩌다 쌀 한 톨 배춧잎 하나라도 버리게 되면 그날은 벌로 밥을 굶어야 했습니다. 놀고먹는 사람은 도적놈이라고 하셨습니다. 혼자 공양을 드실 때도 늘 발우를 쓰시던 스님, 큰스님. 도인 대접을 받으시던 그 시절에도 스님의 은사요, 법사인 효봉 스님 앞에서는 어린 자식같이, 손주같이 하인들보다도 더 공손하게 스승을 공경하고 절대 복종하시던 그 옛날 스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위 내용이 사형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구산 스님에 대한 회고담이라면, 아래 내용은 수행자로서 귀감이 된 구산 스님의 모습이다. 

가야산 수도암 시절, 삼 년 장좌불와 정진 끝에 대오(大悟)를 이루신 후에도 열반에 드실 때까지 일생 동안 선과 일밖에 모르시던 스님. 세상이 온통 모양으로, 형식으로 돈과 명리를 탐하는 추세로 살아가는 이 말세에 고집스럽고 철저한 스님으로, 당당한 선사로 하고 싶은 소리를 다 하고,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마치고 스스로 가는 날을 정해 놓고 앉아서 웃으며 가신 스님, 사내대장부로 한세상을 왔다가 이보다 더 멋지게, 장하게, 거룩하게, 살다 갈 수가 있겠습니까!

위의 글에서 효봉 스님에게서 구산 스님으로 이어지는 가풍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박완일 법사는 돈과 명리에 좌우되지 않고 하고 싶은 소리를 하고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이 불제자의 자세라고 봤던 것이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일이란 “자기 하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남을, 이웃을, 중생을 위해서”하는 일이다. 박완일 법사는 〈부끄러운 인생〉이라는 글을 통해서 사형사제 사이였던 혜융 스님의 입적을 기리기도 했다. 박완일 법사는 지리산 토굴에 들어가 15년 동안 두문불출 수행하다가 입적한 혜융 스님에 대해 “중은 사람이 아니다. 중이 사람 노릇 하다 보면 공부하고는 십만팔천 리야. 한 세상 안 나온 셈 치고 공부해야지.”라는 효봉 스님의 가르침대로 살다간 수행자로 칭송했다.

효봉 스님의 행장 기록을 보면 1951년 여름부터 1954년 3월까지 통영의 용화사 도솔암과 용화사 뒤편 토굴에서 안거하였고, 1954년 여름철에는 미륵산 너머에 구산 스님의 원력으로 미래사를 세우고 토굴에서 용맹정진한 것으로 명기돼 있다. 1954년 여름철 미래사의 조실은 효봉 스님, 선덕은 계봉 스님이었고, 함께 수행했던 상좌는 향봉, 구산, 지환, 혜융, 법달, 활연, 원명, 법정 스님 등이었다. 이 상좌 중에는 일관 스님, 즉 박완일 법사도 있었다. 

한편 박완일 법사는 한국불교의 대강백인 탄허 스님과도 인연이 깊다. 효봉 스님이 통영의 용화사 도솔암에 주석할 때 탄허 스님과 월산 스님이 함께 수행했기 때문이다.

박완일 법사는 환속 후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했고, 4 · 19혁명이라는 역사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박완일 법사는 1960년 4 · 19혁명 당시 동국대 불교학과 학생회장으로 선봉에 섰다. 시국이 혼란한 틈을 타 폭력배 150여 명이 조계사를 접수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는 종로경찰서에 있던 다른 학생들과 함께 지프를 나눠 타고 조계사로 향했다. 박완일 법사는 〈불교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동국대생들이 조계사에 도착해 당시 경내에 있던 폭력배들을 몰아냈다. 곧바로 종로 2가에 소재한 불자의 집에 몸을 피하고 계시던 동산 스님을 모셔왔다”고 회고했다. 당시 동산 스님은 박완일 회장에게 “수고했다.”고 격려의 말을 전했다. 

박완일 법사는 4 · 19혁명에 대해 “3 · 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국민의 분노가 분출한 혁명”이라고 정의했다. 4 · 19혁명 당시 동국대 학생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700~80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모였다. 집회를 간단히 마치고는 학교 깃발과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문으로 진출해서 을지로를 거쳐 시청, 그리고 경무대까지 달렸다. 맨 앞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선봉에 섰던 사람도 불교학과의 이융성 학생이었다.

박완일 법사에게는 4 · 19혁명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박완일 법사는 이후 민주학생연맹 의장과 전국학생위원장연석회의 의장을 맡아 4 · 19혁명 정신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 앞장섰다. 이어 ‘데모규제법과 국가보안법 등 2대 악법철폐를 위한 전국학생투쟁위원회’ 주최로 열린 서울시청 앞 집회에서는 학생대표로 연설하기도 했다. 

4 · 19혁명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난 1980년에 박완일 회장은 〈4 · 19, 그로부터 20년〉이라는 글을 통해 4 · 19혁명의 정신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을 역설했다.

4 · 19를 업고, 4 · 19를 팔고, 4 · 19의 덕을 본 사람들은 사라진 것이다. 4 · 19,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의 4 · 19는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시끄러운 사람들, 귀찮은 사람들로 버림받고 천대받고 지내왔다. 직업 정치인들의 명분과 장식용으로만 이용만 당해왔다. 필요할 때만 찾는 4 · 19가 되었다. 지금도 학생들을 의식하고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비겁한 짓이다. 순수한 학생들의 양심을 정략에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야욕의 재물로 쓰지 말아야 한다. 학생들도 그들의 이상을 값싸게 팔지 않아야 한다. 다시는 이용당하지 말아야 한다. 제힘으로 서야 한다. 제 가락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4 · 19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나는 수유리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봐야겠다.

그가 수유리에 가서 만나봐야겠다는 친구는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박명수 전 중앙대 총장, 서청원 전 한나라당 의원 등 4 · 19혁명에 동참했던 동지들일 것이다.

당시 박완일 법사는 불교계 정화운동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선진규(전 대한불교청년회, 전국신도회 회장) 더불어민주당 전국노인위원장은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봉화산 정상에 호미 든 관세음보살을 조성한 게 1959년의 일입니다. 당시 자유당 독재에 탄압을 받고 보릿고개를 넘느라 배가 고파야 했던 국민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비구 · 대처승 간의 분쟁으로 땅에 떨어진 불교의 위상을 다시 일으키자는 뜻으로 관음보살의 손에 한민족의 대표적인 농기구인 호미를 쥐여준 것입니다. 심신개발, 사회개발, 경제개발, 사상개발 등을 통해 새로운 불교를 열자는 데 의견을 모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박완일 전 전국신도회장입니다. 그런 까닭에 호미 든 관세음보살을 친견할 때마다 많은 사람이 떠오르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박완일 전 전국신도회장입니다.

1961년 5 · 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박완일 법사는 다시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뒤, 산사로 숨어들어야 했다. 그의 도피 생활을 도와준 것도 스님들이었다. 은사인 효봉 스님과 직지사의 전 조실인 녹원 스님, 봉선사의 전 조실인 월운 스님의 도움으로 그는 군인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도와준 스님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항상 간직했다.

4 · 19혁명과 5 · 16 군사쿠데타라는 질곡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과정에서 박완일 법사는 반승반속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이후 그가 평생 주력한 것은 불법홍포와 사회변혁이었다. 그가 대학에서 불교학과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박완일 법사는 재가자 중에서는 최고의 명강사였다. 그가 대중강연을 시작한 것은 동국대 불교학과 1학년 때부터였다. 그는 여름방학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부처님 얘기를 들려줘야겠다는 생각에 불교대학 학장을 찾아가 대중강연을 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불교대학 학장이 써준 추천서 한 장을 들고서 그는 전국의 사찰과 중 · 고등학교를 찾아다녔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윤청광 씨(방송작가, 전 동국출판사 대표)가 그의 강연을 듣고 동국대 진학을 결심했다니, 그의 강연이 얼마나 호소력이 짙었는지 알 수 있다. 

   

남북불교단 회담에 대표로 참석한 박완일 전국신도회장(사진 왼쪽, 1989.10)

전국신도회 사무총장 시절에는 전국순회법회를 열었다. 당시 그는 신도회 회장이었던 김제원 씨가 준 8톤 트럭을 개조해 간이무대 겸 법당을 조성했다. 트럭을 개조하는 데 당시로는 거금인 750만 원이 들었다. 특수 제작된 영사시설과 고성능 마이크 시설을 비롯하여 각종 부대시설을 완비했고, 대형불화(폭 1.5m, 길이 1.8m) 20폭을 제작했다. 불화에는 인과응보, 생로병사, 부처님의 탄생, 출가, 성도, 열반, 지옥도 등이 담겼다. 이 불화에 대한 설명은 법정 스님이 맡았다. 〈지옥문〉 〈세조대왕〉 등 2편의 불교영화와 신도회 활동상황을 담은 홍보영상도 준비했다. 

언제든 법상이 될 수 있는 트럭을 몰고서 그는 전국 31개 시 · 군을 돌아다녔다. 시 · 군의 기차역, 버스터미널, 학교 운동장 등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강연을 했다. 강의 내용은 대부분 불교에 대한 것이었으니 강연이라기보다는 설법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었다. 이 순회법회는 가는 곳마다 평균 1만여 명 이상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뤘다. 당시 조계종 기관지인 《대한불교》는 박완일 법사의 순회법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시작된 전국순회법회는 가는 곳마다 집회기록을 경신하며 평균 1만여 명 이상의 시민들이 운집, 크게 성황을 이뤄 교단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의 밝은 빛이 온누리에 비치도록 불음을 전파하는 이 불사는 우리나라 불교사의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다.

설법을 듣고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누구는 차에 기름을 넣어주었고, 누구는 저녁을 사주었다. 전국순회법회는 찾아가는 법회가 아니라 찾아오는 법회라는 점에서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강사로 이름을 떨치다 보니 대학은 물론이고 기업과 전국의 행정부처에서도 강연을 요청해왔다. 그가 강연하지 않은 대학과 대기업이 없을 정도였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도 많이 다녔다. 한창 바쁠 때는 하루에 7, 8군데에서 강의를 했다는 그는 전국 국공립 사립대학 중에 강의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삼성, 현대, 금호, LG 등 대기업을 비롯해, 전국 시 · 군 행정부처에서도 강의 요청이 쇄도했다. 

그의 설법을 듣고서 불교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중 한 사람이 엄상호 전 건영그룹 회장이다. 엄상호 회장은 회사 직원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박완일 법사의 설법을 들을 수 있었다. 둘의 인연은 깊어져 엄상호 회장은 박완일 법사가 회장직을 맡고 있던 전국신도회 부회장직을 맡았다. 엄상호 회장은 이후 불교계 인재를 발굴하는 불교인재원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박완일 법사가 평생을 바친 것은 재가신도 운동이었고, 그 정신이 발현된 조직이 전국신도회였다. 박완일 법사가 전국신도회 활동에 본격적으로 팔을 걷은 것은 1967년 상반기에 사무총장 소임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는 사무총장이 되자마자 전국 24개 교구본사 단위의 신도회를 조직하는 데 노력했다. 불과 3개월 만에 전국 1,200개의 사암 단위 지부까지 조직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추진력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신도 조직이 완료되자 그는 1967년 5월 25일 당시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전국불교도 대표자 대회를 개최하고, 한국불교의 현대화 및 대중화를 역설했다. ‘산중불교’에서 ‘도심불교’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시 · 군 단위의 포교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날 대회에서 전국신도회는 9월 30일까지 시 · 군 단위 171개 지회 신도회 조직을 완료하기로 결의하였다. 행정단위 신도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신도회 산하에 서울 · 경기 · 강원, 충북 · 충남, 전북 · 전남 · 제주, 경북 · 경남 등 4개 지역별 본부를 두었다. 

박완일 법사가 사무총장을 맡은 뒤 전국신도회는 1년도 되지 않아서 ‘중앙신도회-4개 지역신도회-시 · 군 지부 신도회-사암 단위 신도회’라는 행정조직 체계를 갖추었다. 행정조직이 정비된 뒤 재가불교의 위상이 드높아졌다. 전국신도회가 법회 정례화를 권고했던 터라 시 · 군 지회 소속 회원들은 당해 교구본사에서 개최하는 불교 행사에 반드시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교구 신도회가 활성화되다 보니 교구본사의 법회에서 교구 지부회장이 축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비구, 비구니 스님 중심의 법회에 재가신도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었다. 또한, 법회 때마다 신도가 육법공양을 올리는 것도 이때 정례화된 것이다.

전국신도회는 이듬해인 1968년, 불교의 현대화와 불교계 정화에 노력했다. 5월 2일 제1회 불교근대화를 위한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종전(宗典)편찬위원회를 발족할 것과 교화사 제도를 신설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또한, 7월 초순경 조계종 총무원의 후원을 얻어 폭력배자원건설단원 4백여 명을 대상으로 교화 및 포교에 나서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전국신도회는 이를 위해 종비생 출신 포교사 4명을 제주 수자원개발공사 건설현장과 춘천 소양강댐 도로이설공사장에 7월 10일부터 파견했다. 11월 18일 오전 10시 조계사에서는 전국신도회를 중심으로 한 11개 신행단체가 주축이 돼 교법수호 전국신도단체협의회를 구성했다. 

이 단체의 결성에 원인을 제공한 것은 불국사 경리부정 사건이었다. 불국사 경리부정 사건으로 인해 감찰원들이 주지 스님의 승복을 벗기고 불국사를 강점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박완일 법사는 이 단체의 간사장직 맡기도 했다. 이 단체는 교법수호선언문을 통해 △ 조계종 종회는 조속히 율의와 서정(庶政)을 쇄신할 것 △ 조계종은 종헌 제8조에 의거, 종단 내에서 재가보살의 위치를 정립할 것 △ 출가보살은 그 수도행각의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수계 · 안거 · 포살 등 제반 율의를 현대에 적응시킬 것 △ 재가보살의 생활을 단순한 재시와 기복의 테두리 속에 방치하지 말고 온전한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할 것 등이었다. 약 4백여 명의 불자들이 참가한 이 날 대회에서 박완일 법사는 경과보고를 했다. 

1969년 3월 14~15일 개최한 제10차 대의원대회에서 당시 정계의 실세였던 이후락 씨가 신임회장으로 피선됐다. 그러나 이후락 씨가 회장을 맡은 지 1년 1개월 만에 주일대사로 발령을 받아 1970년 4월 19일 회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1970년 4월 18~19일 전국신도회는 총무원에서 제11차 대의원대회를 개최해 제8대 회장에 김제원 씨를 선출했다. 김제원 씨는 당시 〈경향신문〉 사장과 신진자동차 회장으로 있던 언론계와 재계의 거물이었다. 김제원 씨를 회장으로 추천한 것도 박완일 법사였다. 

김제원 회장이 취임하면서 전국신도회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10월 10~16일 개최된 세계불교지도자대회는 한국불교 최초의 국제대회였다. 이 대회에는 23개국에서 외국 대표 300여 명, 국내 대표 650여 명이 참가한 까닭에 세계에 한국불교를 알리고 상호 교류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전국신도회는 이어 10월 20일~12월 20일 두 달 동안 제1차 국가안보와 화랑호국사상 고취를 위한 육 · 해 · 공군 순회 대강연회를 개최했다. 이 순회법회는 83개 부대 약 22만 명의 장병이 강연을 듣는 성과를 거뒀다. 박완일 법사가 연사로 나선 이 순회강연회는 군불자 배가운동과 군법당 불사의 도화선이 되었다. 

특히, 1970년에는 전국신도회의 대규모 전국순회강연이 활성화돼 9월 26일 전국순회불교법회단을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이 단체의 단장 역시 박완일 법사가 맡았다. 전국순회불교법회단은 1차 1970년 10~11월 2개월의 일정으로, 2차 1972년 4~11월 8개월의 일정으로 전국의 시 · 도 · 군청 소재지 단위로 순회법회를 열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역의 신도회가 구성되고 조직이 강화됐다.

이후 박완일 법사는 제14, 15, 16대, 18대 전국신도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재가불교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가 전국신도회장을 맡게 된 데는 10 · 27법난의 영향이 컸다. 이와 관련 선진규(전 대한불교청년회, 전국신도회 회장) 더불어민주당 전국노인위원장은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10 · 27법난 당시 상황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10 · 27법난 당시 전국신도회의 긴급회의가 열렸어요. 그 이튿날, 총무원에 나가 보니 청년회에서는 제가 보안사령부에 잡혀갔다는 소문이 이미 나돈 뒤였어요. 어떤 사람은 ‘연행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벌써 나왔느냐’고 묻기도 했죠. 아마도 제가 긴급회의에서 신군부를 비판하는 강성발언을 했던 까닭에 보안사에 잡혀갔을 것이라고 추측했던 것이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실제로 신군부가 저를 연행하려고 했다고 해요. 10 · 27법난의 여파로 최재구 회장은 자진사퇴해야 했고, 이어 박완일 부회장이 회장직을 승계했어요.

1997년 1월경 조계종 중앙신도회가 창립을 앞둔 시점에서 박완일 법사는 전국신도회장직을 사임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조계종단의 신도회가 양분되는 것을 막기 위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국신도회 재건이 역부족임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전국신도회에 몸담으면서 펼친 활동 중 하나는 문서포교이다. 당시 전국신도회는 월간지인 《법륜》을 발행했다. 《법륜》에는 참된 신행활동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 논설이 게재되어 문서포교라는 본연의 역할을 다하였다. 

하지만 창간호 표지에 머리 없는 부처님의 사진을 실어 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경책을 받는 일이 있었다. 머리 없는 부처님은 일제로부터 탄압받았던 한국불교계와 불교정화 과정에서 분종할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과거사를 상징하는 것이자 향후 한국불교의 미래는 사부대중이 함께 머리 있는 부처님을 바르게 모셔야 한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법륜》의 편집책임자가 조계종 총무원에 가서 정중한 사과를 한 뒤에야 문제는 일단락됐다. 이후 전국신도회 내에서 박완일 법사의 역할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법륜》의 발행인 역할도 맡게 되었다.

박완일 법사는 《법륜》 창간 20년을 맞아 〈법륜 20년〉이라는 글을 실었다.

20년의 세월을 오직 한 생각, 바른 수레, 지혜의 수레, 법륜을 굴려 왔다. (중략) 일찍이 만해 한용운 선생과 퇴경 권상로 선생이 ‘망하기를 원하거든 불교 잡지를 만들라’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모르고 속는 것은 바보요, 알고도 속은 것은 더 큰 바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대에 태어나서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기에, 가야 할 길이기에 바보인 줄 알면서도, 망할 것을 알면서도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리창파에 소리치고 절규하는 심정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 마음의 눈, 지혜의 길, 올바른 삶의 수레 법륜을 굴리고, 또 굴리고 굴려갈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땅의 중생들이 제 몫을 다하고, 제 가락 제 멋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20년 동안 불교계 월간지를 발행했던 박완일 법사의 심정이 잘 묻어나는 글이다. 실제로 박완일 법사는 잡지를 발행하는 과정에 당국의 몰수를 당하기도 했고, 시대에 앞서는 개혁의 주장을 하다가 외면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제작비와 원고료의 압박도 컸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박완일 법사는 쉼 없이 《법륜》을 발행했다. 박완일 법사가 마당발이었던 까닭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고은 시인을 비롯한 많은 문장가들이 《법륜》에 원고를 준 것도 온전히 박완일 법사의 공로였다. 그의 이러한 원력으로 여러 법연이 연결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정범 소설가이다. 이정범 소설가는 《법륜》의 기자로 일했고, 그 인연으로 인해 효봉 스님의 행장을 극화한 《붓다가 된 엿장수》(동쪽나라)를 썼다. 이정범 작가가 효봉 스님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박완일 법사에게서였다.

박완일 법사는 명설법가이자 재가불교 운동의 구심점이자 문서포교의 산증인이었다. 하지만 제도적 개혁을 위한 그의 노력은 어느 부분 역부족이었다.

정치는 이상적 사회를 지향하나 그 이상은 실현 가능해야 하므로 현실에 바탕을 둬야 한다. 하지만 그가 바라본 이상은 고준(高峻)했던 반면 그가 살았던 현실은 부박(浮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박완일 법사는 정계 진출을 위해 제13,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아쉽게 낙선하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이상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정계만이 아니었다. 그가 주장했던 조계종단의 4부중 제도는 여전히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이다. 

신흥사 사태의 수습을 위해 1983년 8월 20일 열린 제78회 임시중앙종회에 박완일 법사는 전국신도회장 자격으로 참석해 “불교 중흥을 위해서 4부대중의 일치된 힘으로 4부대중이 참으로 불교중흥에 동참할 수 있게끔 하는 그런 제도의 마련이 병행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창했다.

하지만 1994년 종단개혁 당시에도 사찰운영위원회에 재가자가 참여하는 극히 제한적인 4부중 제도의 실현에 만족해야 했다. 

   
 

비유컨대 박완일 법사는 재가불교계의 우뚝 솟은 산이라고 할 수 있다. 드높은 산이기에 지켜야 할 대목과 넘어서야 할 대목이 있을 것이다. 지켜야 할 대목은 그가 평생 펼친 재가자 포교의 역량이다. 찬불가의 음원조차도 좀처럼 찾지 않는 지금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세민 스님(현 조계종원로회의 의장)의 독경만큼이나 불티나게 팔렸던 그의 강연 테이프가 그리운 시절이다. 대중이 그의 강연을 좋아했던 까닭은 쉽고 재밌기 때문이었다.

출가자도, 신도도 감소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 어느 때보다도 그처럼 대기설법을 펼칠 수 있는 강사가 필요한 때이다.

또한, 전산화 혁명 이후 하나둘씩 불교계의 신문과 잡지들이 폐간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처럼 수십 년 동안 문서포교에 이바지할 사람이 필요한 때이다.

그런가 하면 넘어야 할 산은 그가 미완으로 남겨둔 불교계의 정화와 사부중 제도의 올바른 정착일 것이다. 

설령 재판부가 조계종과 태고종의 분규에서 조계종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1,600년간 한국불교의 법통을 계승한 주체가 조계종임을 인정한 것을 ‘정화’라고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화’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박완일 법사의 〈다시, 만해 한용운을 생각하며〉12)의 일부분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선생은 이 불교유신론에서 첫째, 불교 교리와 경전을 대중화해야 하며, 둘째, 불교계의 제도와 재산을 대중화하라고 주장했다. 사회와 대중이 불교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가 중생과 대중사회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갈파한 선언은 오늘의 한국불교계에도 소리 높여 외쳐져야 할 뼈아픈 경종이 될 것이다. 선생의 말과 같이 불교는 모든 곳에 있고 만인의 것이며, 모든 사람의 정신적 생명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유응오
소설가. 〈불교신문〉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으로 등단. 불교계 언론사에서 기자, 편집장으로 근무했음. 주요 저서로 장편소설 《하루코의 봄》과 불서 《10 · 27법난의 진실》 《영화, 불교를 만나다》 등. 현재 직지사 종무실장, 현대불교문인협회 계간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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