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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익, 교단 혁신과 정화에 매진한 불교학자
재가불교운동을 이끈 사람들
[78호] 2019년 06월 01일 (토) 김광식 jiher77@hanmail.net

1. 서언

   

이종익(李鍾益, 1912~1991)

불교혁신과 불교정화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화두의 하나이다. 지난 100년간 불교혁신과 불교정화 운동이 여러 형태로 전개되고 이를 둘러싼 논란 역시 다양하게 노정되었다. 이런 흐름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 한국 근현대 불교사를 추동하는 원동력으로, 때론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때문에 불교개혁 분야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게 축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경향과 성과를 비판적으로 보면 출가자 중심이었다. 즉 승려의 주장, 운동, 갈등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불교개혁 움직임은 출가 승려들이 주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의 역사를 세밀하게 살피면 비구니, 재가자의 참여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는 비구니와 재가자의 참여에 대한 폭넓은 자료 수집과 분석, 연구가 요청된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법운(法雲) 이종익(李鍾益, 1912~1991) 역시 재가자로서, 한국 현대불교사의 불교혁신과 불교정화 분야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동국대 교수로, 보조 및 원효 연구자로 이름이 알려졌으나, 그가 수행한 불교개혁에 대해서는 불교계의 관심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수행한 불교혁신과 불교정화에 초점을 둔 연구 작업은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그의 학자적 정체성을 조명한 글이 나왔지만, 그가 역점을 둔 불교개혁에 대한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입적한 직후에 발간된 《고 법운 이종익 박사 논문집》(1994)의 연보에 그의 불교개혁 활동이 간단하게 소개되고는 있지만, 그가 개혁에 대해 쓴 다수의 글은 ‘논저 목록’에서 누락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중흥론》(1976, 보련각)이 저서에 포함되었지만, 그의 개혁론에 대한 연구자들의 관심이 미미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필자는 근현대기 불교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이종익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동안 집필 기회가 마련되지 않았으나, 이번에 《불교평론》의 청탁을 받고 이종익의 불교개혁에 대한 전모를 소개하는 차원에서 이 글을 집필하였다. 그의 불교개혁론의 전모, 성격, 한계 등에 대한 것은 후학에 넘기고, 여기에서는 그가 주장한 혁신 및 정화의 내용만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 글이 이종익과 현대기 불교개혁론의 새로운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 해방공간의 불교혁신 활동

이종익은 1945년 8 · 15 해방 당시에는 승려였다. 강원도 양양 출신인 그는 21세 때인 1933년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출가하였다. 은사는 김운악이었는데, 그의 출가에 영향을 준 인물은 만해 한용운이었다. 유점사 시절, 이종익을 만난 이법홍(원효종 종정 역임)은 이종익이 설악산 오세암에서 한용운의 지도로 발심했다고 서술했다. 이런 출가 동기가 그가 불교개혁에 나서게 된 원인의 하나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출가한 이종익은 유점사 강원인 동국경원에서 사교 · 대교 과정을 수료했다. 그 이후인 1937년에는 개운사 강원의 수의과 과정에서 박한영에게 1년간 경전 수학을 하였다. 그리고 유점사 강원의 강사로 초빙되었다. 이 무렵 그는 일본의 와세다 대학의 교외생으로 중학과정을 마치고, 193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임제전문대학, 대정대학에서 불교학을 수학하였다. 1944년에는 대정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봉은사 포교당에서 설법하였고, 1945년에는 봉은사 강원의 강사를 역임하였다. 

아래의 글을 보면 이종익은 8 · 15 해방 전인 이 시기에 이미 불교혁신, 불교정화에 대한 뜻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쓰게 된 멀고 깊은 因緣으로서는 筆者는 二十歲에 人生의 무서운 시련 앞에 生死의 岐路에서 방황하다가 어떻게 佛陀의 恩寵 속에서 再生의 빛을 얻게 된 뒤에 身命을 바쳐 佛恩에 報答하겠다는 決意한 바 있었다. 그리고 佛敎의 原理에서 韓國佛敎의 現實을 사무쳐 보니 根本的으로 改革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벌써 三十餘年 前에 〈朝鮮佛敎振興論〉을 썼고 다음 〈朝鮮佛敎의 進路〉를 썼으나 다 刊行되지 못하고 八 · 一五를 맞았다.

이처럼 그는 해방 전에 한국불교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원력으로 〈조선불교진흥론(朝鮮佛敎振興論)〉과 〈조선불교의 진로〉를 집필하였다. 그러나 이 두 건의 글을 언제, 어디에 기고하였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이렇듯이 해방 전에 불교개혁에 뜻을 갖고 있었던 그는 해방이 되어, 식민지 불교가 퇴진하고 새로운 불교가 움트기 시작할 때에 불교개혁의 주체로 활동하였다. 이종익은 평소 불교혁신에 대해서 상의하던 봉은사 주지인 홍태욱 등과 함께 1945년 8월 28일, 봉은사 본말사 승려대회를 추진하였다. 그 대회에서 불교 유신사업 실시, 봉은사 관할 지역에 있는 적산사원(敵産寺院)의 접수, 적산사원을 포교 및 교육 그리고 사회사업의 기관으로 활용, 본말사 재산 통일, 교도제 등을 결의하였다. 이 대회의 결의에 따라 홍태욱은 즉시 관내 적산사원 10개 처를 접수하였다. 그해 9월 초, 이종익은 서울지역 청년 30여 명을 모아서 불교중앙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이종익은 구체적인 불교혁신안을 마련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옛 봉건제적인 31本山制를 폐지하고 각 道別 敎區制를 실시할 것

二. 교단은 出家 · 在家 四部衆으로 구성한다. 사부중은 同等한 佛子로 身分的 차별을 받지 않는다.

四部衆은 아래와 같이 敎籍에 등록한다.

1. 出家敎徒는 傳心修道 · 傳法度生을 그 根本 使命으로 한다.

2. 在家敎徒는 應分의 信行生活을 실천하며 敎團運營 · 宗務行政 · 三寶守護 · 福祉社會 建設에 헌신한다.

3. 敵産寺院은 일괄 접수하여 포교 · 교육 · 사회사업(고아원, 양로원, 병원 등)에 활용한다.

교단 재건, 운영, 재정 등에 대한 이 같은 혁신방안은 청년동맹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교단 측과 인수한 적산사찰의 운영권 문제로 갈등이 불거졌다. 청년동맹이 접수한 박문사, 묘심사, 동본원사, 서본원사 등이 그 초점이었다. 갈등의 여파로 이종익은 청년동맹의 본부가 있던 박문사에서 나오게 되었다. 

이종익은 박문사에서 나와 묘법사(필동)라는 적산사원에 거주하면서, 1946년 4월경 청년동맹을 조선불교혁신회(朝鮮佛敎革新會)로 전환하여 새 출발을 하였다. 혁신회는 독립운동가 출신인 고찬을 회장으로, 부회장은 이종익과 박성권이 담당했다. 그리고 본부에는 총무부(이법홍), 교무부, 재무부, 선전부, 사업부 등을 두고 회원을 모집하였다. 이런 변화 속에서 이종익이 소속된 혁신회는 강령, 지도이념, 실천방안을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먼저 강령은 다음과 같다.

 

一. 참다운 불교를 세우자, 二. 참다운 생활을 꾀하자, 三. 참다운 사회를 만들자

그리고 지도이념은 다음과 같았다.

 

一. 眞人間의 창조=인간 개조=人間 즉 佛

二. 覺生活의 건설=생활 개조=生活 즉 法 ---三寶 具現體

三. 佛國土의 실현=사회 개조=사회 즉 僧

 

이런 전제하에 혁신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정했다.

革新 三段階: 第一 단계, 교단혁신, 第二 단계, 생활혁신, 第三 단계, 사회혁신

이종익은 대처승인 재가교도는 교화중(敎化衆)으로 신분, 권리, 의무의 분한을 별도로 규정하였다. 이를 통해 불교의 대중화, 생활화, 복지사회 건설에 실질적인 역군이 되도록 의도하였다. 물론 이 구도는 승려와 재가중은 평등한 교도라는 이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불교혁신회는 혁신현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석존의 근본불교로 돌아갈 것
2. 조선불교의 사적 전통을 살릴 것
3. 外政內敎의 이념을 확립할 것
4. 불교를 사회에 개방할 것
5. 교단은 비구, 대중 兩 교도로 구성함
6. 사원은 修道, 弘化 兩 道場을 획정함
7. 재단은 통일하여 修道, 弘化 二種 기관에 제공함
8. 교도의 신앙과 직업을 분리시킴
9. 교조 석존 이외의 신앙 대상을 철폐함
10. 일체 賣佛的 행동을 禁斷함

이종익은 이런 내용으로 교단혁신 활동에 매진하였다. 위 내용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은 당시의 독신승과 재가중(대처승)의 신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였다. 

이렇게 조직, 활동 내용을 정비하고 혁신활동에 임하던 1945년 12월 28일 봉은사 주지였던 홍태욱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에 의해 암살을 당하였다. 홍태욱, 이종익의 활동이 견제당하였음을 말해준다. 홍태욱은 실종된 지 4일 만에 고려대 뒷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자 혁신회는 총무원에 진실을 밝히라고 항의하였다. 그러자 총무원 간부는 혁신회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중부경찰서에 고발하였다. 이종익은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으나,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그러자 재차 종로경찰서에 고발당해 조사를 받았다. 여기에서도 갖은 고초를 겪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혁신회에 대한 종단의 압력은 거세었다. 그 결과 혁신회는 묘법사를 떠나, 서울 종로 5가 봉은사 포교당에 일시적으로 현판을 걸기도 하였다.

지금껏 설명한 바와 같이 혁신회와 이종익은 불교혁신을 위해서 근본적인 대안을 입안하였다. 그러나 그 취지와 내용이 기존 교단(총무원)의 노선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서 압박과 탄압도 그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종익은 그에 굴하지 않고, 교단에 혁신불교의 구현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를 보여주는 것이 1946년 10월, 교단에 〈불교유신 재건안〉의 제출이었다. 이종익은 그가 기술한 〈8 · 15 해방 후 불교혁신운동〉에서 “건의안 5개항을 건의하여 교구제는 통과되고 재산통일안은 수정통과 되었으며 교도제는 보류되었다”고 하였다. 아래는 이종익이 건의한 5개항의 내용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그리하여 1946년 9월에는 중앙종회원의 1인으로서 혁신회를 대표하여 

一. 敎團制度 再建案

① 三十本山制를 폐지하고 각 도별 敎區制를 실시한다.
② 敎團은 出家 在家 사부중으로 구성하되 같은 敎徒로서 신분의 차별을 받지 않는다.
③ 전국 사찰재산은 통일하여 교단운영 사업시설의 一元化를 기도한다.
④ 사찰은 수도, 교학, 홍법, 기도, 사회사업의 五個 기관으로 구분하여 각기 그에 해당한 시설에 충실한다.

二. 불교재건사업

① 미신불교에서 정법불교에로
② 사원불교에서 사회불교에로
③ 기복불교에서 수도불교에로
④ 遁世불교에서 救世불교에로

의 4개 표어를 내걸고 그에 대한 실시 방안으로 사부중의 혼연일치하여 上 · 下院制 실시며 교도제의 실시 등을 적극 주창하였다. 그러나 그 회의에서 교구제는 채택되고 교도제는 보류되었고 재정통일안 五·三·二制로 하여 當寺에 五割, 敎區에 三割, 중앙에 二割을 분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사부중의 권리 의무 신분 규정이며 사찰 種別制며 사회사업 같은 것은 하나의 연구 과제로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위 인용문에 이종익 건의안 5개 내용이 나온다. 그는 ①교구제, ②교도제, ③사찰재산 일원화, ④사찰 종별제(種別制), ⑤사회사업이었다. 이 5개 항에서 종단이 수용한 것은 1항과 3항인 교구제와 사찰재산 일원화(5·3·2제)였다. 그러나 2항, 4항, 5항은 기존 제도를 파격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이 크기에 보류되어, 연구 과제로 남겼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이종익은 승려와 재가(대처승, 신도 등)를 철저히 구분하면서도, 평등한 교도라는 입장에서 상하 양원제를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이종익은 정화 당시에도 양원제를 주장하면서 승려와 재가자의 대등한 종단 운영을 강조하였다. 

한편, 1946년 11월 중순 불교혁신을 주장하고 강조하였던 7개 단체는 선학원에서 불교혁신총연맹(佛敎革新總聯盟)을 조직하고, 공동 행동을 하였다. 이때 이종익이 주도한 불교혁신회도 이 연맹에 가입하였다. 그런데 이종익은 그 무렵에 환속하였다. 연보에서는 이를 1946년이라고 적시하였지만, 그 시점은 현재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 그런데 당시 1946년 10월의 보도기사에 의하면 그 무렵 혁신회의 회장으로 백성욱 박사를 추대하였다고 한다. 추측하건대 그 무렵에 회장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종익의 환속과 연관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회장에 추대된 백성욱은 한용운의 제자로 중앙학림 출신이고, 3 ·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상해 임정으로 망명을 떠나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직후 1920년 초반 독일로 유학을 가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25년에 귀국하여 불교의 청년운동 · 통일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후 1930년대에는 금강산의 안양암, 지장암에서 7년간 수행 공동체를 이끌었다. 그의 회장 추대는 이종익이 추진하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현재 그를 전하는 기록은 없다.

   

범어사로 동산 스님(사진 중앙)을 찾아간 이종익(오른쪽 두 번째). 1957년 8월

한편, 이종익이 주도한 불교혁신회는 불교혁신총연맹에 가담하였다. 그런데 이 연맹은 1947년 5월 임시 중앙교무회의(1947.5.10~ 12)에서 교단을 부정하고 독자 노선을 걸었다. 그 내용은 독자적인 전국불교도대회(1947.5.8.~9, 5.14)의 개최, 교단재건안의 제출, 교단 배제, 독자 기구 결성 등이었다. 이에 따라 전국불교도총연맹과 조선불교총본원(기존 총무원을 대신한 기구)이 조직되어 이종익이 주장한 불교혁신의 성격과 동질적인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의 정부수립을 기점으로 기존 교단과의 대립하던 재야 혁신단체는 퇴진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에는 좌우익의 이념 문제, 혁신파에 대한 고발, 혁신단체의 해산, 혁신불교 내부의 이원적(보수, 진보) 노선, 김구 북행에 동참, 해주 인민회의 참가, 토지개혁의 입장 차이 등 복잡 미묘한 내용이 혼재되어 있다. 이런 사정을 이종익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언급하였다.

8 · 15 후 신진 불교인은 불교의 근본적 혁신을 기도했으나 구세력이 현실적으로 실권을 잡고 있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럭저럭 4~5년이 지나는 동안 정국과 사회는 극도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

그 뒤에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갈수록 격심해지면서 불교혁신, 재건운동이 좌절되어 갔다.

이종익은 위와 같이 간단명료하게 서술하였는데, 이종익이 그렇게 서술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해방공간에서 이종익이 청년동맹과 불교혁신회를 주도하면서 펼친 불교혁신 활동을 살펴보았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승가와 재가의 평등 지향, 자율적인 불교정화의 성격 등은 파격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불교정화 활동

이종익은 해방공간의 불교혁신 활동에서 좌절하였지만, 불교개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다시 찾아왔으니, 1954년 5월에 시작된 이른바 불교정화운동이었다.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은 불교정화를 하라는 당부의 발언(유시)을 하였다. 이 발언으로 인해 가뜩이나 어지럽던 불교 내부의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이승만의 발언은 정화운동을 야기한 핵폭탄과 같았다.

이승만의 발언이 보도되자, 불교혁신회의 지도위원이었던 승려 이대의는 서울 보문동에 살고 있던 이종익을 찾았다.

5월 어느 날 혁신회 지도위원이었던 이대의(李大義) 스님이 보문동에 살고 있는 법운거사를 찾았다. 이제 불교혁신을 할 때가 왔다. 이 대통령으로부터 대처자는 사찰 밖에 나가 살라고 하였으니 이제 교단을 혁신정화 할 때가 왔다면서 전날 혁신회의 취지를 살리자고 하였다. 대의 스님은 다만 재가자를 사찰에서 내보내는 것만을 혁신 · 정화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는 혁신의 취지와는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대의 스님 말에 동조하고 선학원을 찾아가서 김용담, 문정영(文靜影) 스님과 상의하고 또 이불화(李佛化=在烈)도 같이 만나서 교단정화를 발기했다.

이렇듯이 그는 이대의 스님의 제안에 찬동하고, 해방공간에서 실패한 불교혁신의 뜻을 살리기 위한 차원에서 불교정화운동에 가담하였다. 초창기 불교정화운동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금오가 위원장을 맡고 있던 정화추진회가 주도하였다. 그래서 효봉, 동산, 청담, 대월 등 전국에 산재한 청정 비구들이 선학원에서 개최된 승려 모임에 동참하였다. 선학원을 거점으로 정화운동이 시작되었을 때에 이종익은 문정영, 강석주, 채벽암, 민도광, 김용담, 이불화 등과 함께 정화운동의 발기인이었다.

불교정화운동은 1954년 6월 25일의 교단정화추진준비회, 8월 24~25일의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 9월 28~29일의 전국비구승대회로 구체화되었다. 이런 모임에 이종익은 이불화와 함께 참여하면서 그의 소신을 피력하였다. 당시 이종익의 소신은 다음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때에 본인도 發起人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때 나는 어데까지나 당초에 주장하던 사부대중이 동일한 불자이니 평등한 敎徒로서 다만 出家衆은 사찰에서 전심수도하여 三學을 갖추어 닦아 人天의 導師가 될 인격을 완성한 뒤에 在家衆의 軌範으로서 도사의 자격을 갖추도록 하고 재가중은 응분의 신행생활을 하되 될 수 있는 대로 가정생활은 사원 내에서 하지 아니하고 삼보수호 · 교단운영 · 사회교화 · 복지사회 건설에 헌신하는 임무를 분담하게 하라는 주장은 해방 직후 주장과 一分도 변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왕 曹溪宗이라고 할진대 宗祖를 바로 찾고 宗旨를 뚜렷이 세우고 그리고 宗統 · 宗風 · 宗紀 등을 확립시켜 祖道, 佛法을 중흥하므로 인간개조, 도의재건, 사회정화의 역사적 과업에 이바지하도록 하자는 복안이었다.

위의 글에 보이듯 그는 해방공간 당시의 불교혁신 소신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불교정화에 임한 이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안으로 祖道를 복구하여 역사적 전통에 빛나는 修道僧團을 재건하고 밖으로 시대와 사회가 요청하는 大衆佛敎를 건설하자.

그러나 정화운동이 일어나면서 그의 의도 일부는 반영되었지만, 대부분은 반영되지 않았다. 그 당시 정화의 흐름은 이른바 대처승을 사찰에서 축출하려는 젊은 승려들의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다. 일부 원로들은 주요 사찰(수도 도량) 20여 곳을 확보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불교정화를 추진하자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러나 대세는 대처승 배제라는 단순한 혁명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기에 그는 발기인이었지만 방관자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종익의 의견이 반영된 것은 조계종의 종조는 보조국사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의견은 1954년 9월, 비구승대회에서 제정된 종헌에 반영되었다. 그러자 기존 종조인 태고국사에서 보조국사로 전환된 것에 대해 당시 종정인 송만암이 강력히 반발하였다. 만암은 그에 항의하여 종정에서 사직하였다. 이른바 환부역조론(換父易祖論)이었다. 종조 변경 논란은 1954년 12월까지도 지속되었다. 그래서 종조 문제는 문교부가 마련한 대처 측(교단)과의 대화 자리에서 비구 측은 추후 전문 학자와 논의하여 정식으로 재논의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55년 8월 12일, 전국승려대회를 기점으로 종권, 사찰관리권이 대처 측에서 비구 측으로 넘어갔다. 정화운동은 불법의 재흥, 한국불교 전통의 회복, 수행풍토 조성 등의 의도로 시작했지만, 결과는 본래 뜻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그 과제를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은 조성되었다. 그렇지만 이종익은 불교정화운동을 강력비판하였다.

이른바 비구승단이란 다만 사원에서 帶妻者를 추방함으로 종권과 재산 등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것을 그 운동의 第一義로 삼게 되자 종래 이미 합법화되어 종권 · 사찰 재산의 수호 · 관리권을 장리하여 오든 帶妻宗徒는 그에 항거하고 일어서게 된 것이 이른바 비구 대처의 약 십 년간 분쟁이었다.

그것은 ‘한국불교를 어떻게 혁신 재건하는냐’의 과제와는 근본적으로 배치된 일종의 권리 · 재산 쟁탈전으로밖에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사회의 지탄과 빈축을 받을 뿐 아니라 가장 신성하여야 할 종교도의 체모와 위신을 여지없이 땅에 떨어뜨리게 되었으니 이것은 불교재건운동이 아니라 불교 자체 破滅의 행위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革新再建의 본의와는 그 방향을 달리하여 나가는 사태를 보고 본인은 두 손을 들고 1957년 58년 동안을 지방으로 가서 교육계에 투신하고 있다가

즉 그는 불교정화운동을 불교 자체의 파멸행위로 단정하였다. 그는 정화운동이 불교의 혁신 · 재건의 본의에서 이탈하여 종권 · 재산 쟁탈로 변질된 데서 그 원인을 찾았다. 그래서 그는 정화운동이 일단락이 된 1957년에는 큰 실망을 하고 서울을 떠나 지방 교육계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종익은 곧 상경하여 대각사를 거점으로 활동한 신행단체인 대각회 2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59년 무렵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인 이효봉의 요청으로 전국신도회 사무국장의 책임을 맡아 신도회의 조직, 교육, 신행 등을 혁신해 갔다. 그러면서 출가중과 재가중은 평등, 대등해야 한다는 소신에서 종회의 상하 양원제를 추진하였다. 마침 1960년 4 · 19혁명으로 비구의 위축, 대처의 재기 분위기를 따라 종단은 상하 양원제의 제도화를 추진하였다. 그래서 법적인 조치까지 하였지만 재가자 중심의 하원은 끝내 가동되지 않았다. 

   
 

그러자 당시 신도회에서는 전국대의원 대회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 결과 ‘정화과업 완수와 교단재건안’을 마련하였다. 이때 이종익은 《대한불교》 6호(1961.4)에 〈교단재건은 이렇게-전심수도 · 전법도생의 기본교육이 시급〉이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승려들의 분쟁을 종결시키고, 비구승단이라도 불타의 근본정신에 입각하여 합리적인 종단 운영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를 위해 종권을 영도권과 운영권으로 구분하여 영도권은 출가승단, 운영권은 재가중이 담당하자고 제안하였다. 구체적으로 상하 양원제의 실시를 조속히 실천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종익(신도회)의 제안은 이행되지 않았고, 곧 5 · 16쿠데타가 일어났다. 이종익은 이때 이불화와 함께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급변하는 정치, 종교의 변화 속에서 이종익은 1962년 1월, 《대한불교》 24호(1962.2)에 〈비상종회의 사명과 한국불교 재건론〉을 기고했다. 당시 그는 신도회 지도위원이었는데, 이전부터의 자신의 소신을 재차 개진한 것이다. 불교 승단은 1962년 4월 이른바 통합종단을 출범시켰다. 그래서 비구, 대처 양측이 이 종단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6개월 후, 대처 측은 이탈하여 독자 노선을 걸었다. 그리고 대처 측이 떠난 종단은 내적인 투쟁 즉 종권 갈등의 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전국신도회가 그런 흐름에 반대하는 운동을 추진하였다. 1963년 11월 17일, 중요 도시 대표자 대회가 조계사 정화회관에서 열렸다. 이종익도 서울 대표로 참가하였다. 대회에서 한 논의의 초점은 조계종을 혁신시킬 위원회를 신도회가 추진하고, 종단 혁신안을 만들어 종단에 제출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서 신도회는 성명서, 결의문 등 다수의 문건을 발표하였다. 문건의 작성자는 이종익이었다. 이종익은 자신의 소신, 신도회의 여망을 종합해 다양한 글을 집필하였다. 

이종익이 작성한 〈한국불교혁신 선언서〉의 일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보시라 오늘날 비구승단으로서

一, 정화 후 참으로 신성하고 존엄한 수행승단이 건립되었는가?

一, 불타의 평등사상과 현대적 민주원칙에 합치되는 사부중의 총의에 의한 합리적인 종단이 수립되었는가?

一, 역사적 전통을 되살릴 수 있는 福國利民 · 救世濟衆의 한국불교를 재건할 수 있는가?

一, 시대와 사회가 요청하는 교화운동으로서 국민도의재건 · 사회정화 · 정신문화 건설의 운동이 전개되었는가?

우리는 귀를 기우리고 이런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 반대의 형태가 연출됨을 바라볼 때에는 우리는 놀라고 통탄해 마지않습니다.

이런 취지에서 신도회와 이종익은 종단 운영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출가승(이부중) 중심의 교단을 실질적인 사부대중으로 개편, 종헌에 재가중의 참정권(종회, 행정, 감찰 등) 삽입, 신도의 사찰운영 참가를 반영한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이 결의문의 취지는 대체로 정화운동과 승가의 종단 운영에 대한 강한 비판이었다. 요컨대 재가자가 종단 운영에 참여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이 사태는 1963년 11월 18일 중앙종회에서 논의되었다. 종단에 제출한 건의서는 신도회장 직무대행인 김한천과 주요 도시 신도 대표자 대회 의장인 이종익이 함께 제출한 것이었다. 종회에서는 신도회의 건의를 지지한 손경산, 박벽안 등의 지원이 있었다. 

이종익은 종회에 나가서 건의 사항에 대해 설명하였다. 결과적으로 종회는 신도회의 건의를 수용하고, 논의할 조직체(종헌심위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종헌 개정으로는 나가지 않고, 1964년 1월, 기획위원회(승려 11인, 신도 10인)의 설치로 전환되었다. 즉 본질을 외면하고, 종단 운영의 자문기구로 변질되었다. 이종익은 기획위원이 되었으나 실질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기록은 찾지 못하였다. 추측하건대 신도회와 이종익의 여망은 물거품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이후 이종익의 행보는 1969년 8월 13일의 청담의 조계종단 탈퇴 선언에서 찾아진다. 종단 내의 정화운동을 강력추진하였던 청담은 한계를 자인하고, 종단 탈퇴 선언을 하였다. 그 전에 청담은 1969년 7월, 조계종 종회에 종단의 정화를 철저하게 추진하려는 〈유신재건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종회에서는 청담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청담은 종단 탈퇴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유신안의 내용에는 이종익의 의견이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 즉 종조 · 종지 · 종통의 정립, 삼학전문 도량의 건설, 출가중과 재가중의 임무 부여, 양원제 실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종익은 1963년 신도회가 만든 재건안 기획의 주도자, 기획위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재편된 기획위원회에서 탈락하는 등 종단의 배척을 받았다. 그래도 그의 불교혁신에 대한 근본적인 꿈을 버릴 수는 없었다.

나도 정화를 최초에 발기한 한 사람으로서 한국불교와 유신재건을 위하여 근 십 년간 심혈을 경주하여 보았지만 그러한 주위와 사정으로서는 중흥의 과업을 성취할 수 없으므로 일단 방하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강 건너 불타는 것을 바라보듯이 할 수는 없기에 이번에 사부종도 유지와 함께 이 재건 과업을 발기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이종익은 재차 불교혁신에 나섰다. 청담이 제출한 재건안은 청담 개인 차원이 아닌, 승려와 재가자의 결합에 의해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결합을 제공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1968년 11월 불국사 사태(사리병 사건, 승려 간의 폭력 등)였다. 

이종익은 《대한불교》(1968.11.17)에 〈한국불교 재건의 전망〉을 기고하여 종단개혁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그 사태로 신도들은 분노하였고, 1968년 11월 9일 전국 신도단체 대표들은 교법수호연합회를 결성하였다. 교법수호회는 선언대회를 개최하고, 종회에 결의문을 전달하고, 정법수호회로 명칭을 바꾸고, 청담을 고문으로 위촉하였다. 

이렇듯이 이종익은 1968년 11월 불국사 사태로 야기된 종단 사태에서 불교혁신을 재차 추동하였다. 그는 정화의 주역인 청담 · 신도회와 결합하여 종단혁신안을 기획하는 등 불교혁신에 나섰다. 그 일환으로 그는 《불교계》(1968.12~1969.5)에 〈한국불교재건론〉을 기고하는 등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청담의 총무원장 취임, 열반, 종단의 분열이라는 일련의 사태에서 종단 개혁, 불교정화의 꿈을 종단 및 스님과 함께 하는 것은 방하착하였다. 하지만 그의 꿈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이후 그는 개혁론을 다양한 지면에 기고를 통해 제안하였다. 그러면서 불교학자로서 보조 · 원효 연구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는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로 재임시에는 종학연구소를 만들어 자신의 불교의 혁신 · 정화에 대한 소신을 학문적으로 정리하였는데, 이는 종단재건의 기초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정년 퇴임 1년 전인 1976년에 그의 조계종 혁신론을 정리해서 《대한불교조계종 중흥론(大韓佛敎 曹溪宗 中興論)》(보련각)을 펴냈다. 추후, 이 저술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 요청된다.

 

4. 결어

지금까지 불교학자로 널리 알려진 이종익의 불교혁신, 불교정화에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였다. 맺는말은 앞에서 살핀 내용에 드러난 것 중에서 재음미할 주제를 피력하는 것으로 대신 하겠다.

첫째, 이종익은 해방공간에서 불교혁신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는 불교혁신회를 통해 전개되었는데 당시 불교혁신의 구도에서 이종익을 결코 배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불교혁신회 활동을 이종익과 함께한 인물인 홍태욱, 이대의, 백성욱 등의 연관성을 살필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또한 봉은사 강사를 역임한 이영무와의 비교도 그렇다. 이영무는 석왕사 출신으로 환속하여 동국대 수학, 태고종과 친근, 태고국사의 종조론 강조, 건국대 교수 등의 정체성을 가졌다. 그리고 이종익 및 이종익 주변 인물들과 한용운과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둘째, 이종익이 비판한 불교정화 운동의 문제점이다. 불교정화운동의 부정적 산물은 다양하게 지적되었다. 기왕의 그런 지적과 이종익이 제기한 비판의 내용을 비교할 수 있다. 

셋째, 조계종단의 정체성이다. 이종익은 조계종단 정체성을 민족문화의 차원에서 주목하였다. 그러면서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표방할 경우, 그에 걸맞은 종조 · 종지 · 종통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는 종조 문제만 유의하였다. 이종익은 조계종이 정체성을 갖지 않으려면 차라리 ‘대한불교’라는 종명을 내세우라고 하였다. 이런 주장은 최근 학담, 현응이 제기한 바가 있다. 이런 측면에 대한 재검토가 요청된다.

넷째, 이종익과 같은 학자, 교수의 신분으로 불교개혁론을 집필하거나 개혁운동을 한 인물을 발굴, 조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 사례는 황성기(동국대), 이영무(건국대) 등이 해당한다. 

다섯째, 이종익의 새불교운동론에 대하여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불교운동을 실천한 광덕의 사상과의 비교 연구가 요청된다. 이종익의 새불교운동은 실패하였지만, 광덕의 불교운동은 불광운동 · 불광사상으로 구현되었다. 추후 이종익과 광덕의 비교 연구 필요성을 제기한다.44)

지금까지 이종익 연구에서 유의할 측면을 피력하였다. 필자의 이 글이 이종익, 불교개혁론, 해방공간 혁신운동, 정화운동 등의 연구에 참고가 되길 기대한다. ■

 

김광식
동국대학교 특임교수. 건국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만해사상실천선양회 학술부장, 부천대 초빙교수 등 역임. 주요 저서로 《한국 근대불교사연구》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불교 근대화의 이상과 현실》 등 40여 권. 유심작품상(학술부문), 불교평론학술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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