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사부대중으로 구성된 종교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언제나 승가 중심이었다. 재가는 승가를 외호하고 수행환경을 제공하는 복전(福田)의 역할에 머물러 왔다. 재가자의 위상과 역할에 반전을 일으킨 것은 대승불교이다. 불탑 주변의 불지(佛地)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법사들이 대승불교의 흥기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자연히 대승경전에는 재가자가 종교적 권위를 가진 주체로 부상한다. 일례로 유마 거사는 부처님의 10대 제자로 대표되는 출가자들을 호통치며 대승의 정신을 설파하고, 승만 부인은 원대한 보살의 서원을 일으킨다.

승단을 후원하는 것만으로 바른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정법이 지탱될 수 있다면 굳이 재가불교를 논할 이유는 없다. 아쉽게도 한국불교는 불자의 감소보다 출가자의 감소가 더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경제적 풍요는 출가의 감소로 이어졌고, 여성의 지위 향상은 비구니의 감소로 나타났다. 게다가 출가의 고령화는 교육기회의 상실로 이어져 역량 있는 출가자의 탄생을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출가 중심의 전통이 견고하지만 더 이상 출가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고, 재가불교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재가불교운동이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갈 것인가는 함께 논의할 문제지만 재가불교가 대안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재가불교의 위상과 역할의 확대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깨달음을 얻겠다는 원력으로 출가한 스님들조차 욕망의 물결에 퇴색하는 시대에 재가자라는 이유만으로 대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재가불교운동이 성과를 내려면 출가보다 더 까다로운 원칙과 절차가 요구될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재가불교가 대안이 되려면 아래와 같은 조건과 내용에 대한 고민이 요구된다.

첫째, 재가불교운동이 성공하려면 목표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출가든 재가든 종단중흥이나 조직의 성장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불교의 목표와 모든 활동은 불법을 널리 펴는 전법(傳法)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전법은 곧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실천으로 귀결된다. 부처님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세상을 불쌍히 여겨 길을 떠나라.”고 하셨다. 그것이 불교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출가든 재가든 그것을 위해 활동해야 한다. 이런 목표를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재가라고 해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인적 구성보다 무엇을 위해 활동할 것이냐는 정견과 목표의식을 명확히 하는 것이 우선이다.

둘째, 재가는 관객에서 대안적 주체로 전환되어야 한다. 재가불교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대개의 활동은 교단의 부조리와 승가의 비위를 폭로하는 것에 치중해 있다. 물론 승단의 비위를 바로잡고 교단의 청정성을 회복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종단정화라는 명분으로 부끄러운 치부를 무차별적으로 폭로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혐오를 유발하고, 발길을 끊게 만드는 것이 대안적 실천일 수는 없다. 이런 인식과 활동은 여전히 출가 중심의 전통에 목매달고 있음을 의미한다. 스스로 독자적 모범을 구축하지 못하기 때문에 승가에 대한 비판에 매몰되는 양상을 띠는 것이다. 재가불교가 대안이 되려면 스스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승가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고,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

셋째, 조직적 기반을 확립해야 한다. 승가는 조직체로 작동하므로 때에 따라 고승이 부재해도 공동체와 대중의 힘으로 유지 전승된다. 하지만 재가는 개인의 원력과 리더십에 토대를 두고 있다. 따라서 선지식이 활동할 때는 큰 성과를 내기도 하지만 당사자가 작고하면 급격히 쇠락하거나 단절되는 양상을 되풀이해왔다. 틱낫한 스님은 “미래의 부처님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모습으로 오신다.”고 했다. 개인을 통해 붓다와 같은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특정 지도자의 리더십과 역량에 기댈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대중의 힘을 결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청년조직을 기반으로 하는 정토회나 일본의 SGI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특히 재가자 이케다 다이사쿠가 이끄는 SGI의 성장과 활동의 근저에는 조직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넷째, 시대에 부합하는 윤리와 정신을 확립하는 것이다. 많은 재가자가 승가를 비판하기 위해 내세우는 근거들은 2,600년 전의 시대상에서 확립된 율장이나 가르침이다. 그런 잣대를 금지옥엽으로 삼는다면 재가자들의 활동까지 가로막는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 데바닷타는 부처님보다 더욱 엄격한 규율과 정신을 요구했지만, 그가 내세운 원리주의는 교단을 분열시키고 파괴할 뿐이었다.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고 엄격한 계율과 원칙만을 고집하고, 그것을 근거로 비난을 능사로 삼는 것은 데바닷타의 재현을 부를 수도 있다. 선종의 발전은 중국적 상황에 맞게 율장을 재해석하여 청규를 제정한 것임을 눈여겨봐야 한다.

다섯째, 스스로 종교적 권위를 확립해야 한다. 《법화경》에 보면 선남자 선여인을 향해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법을 설하라.”고 한다. 여래의 방, 여래의 옷, 여래의 자리는 종교적 권위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는 교단적 권위, 전통적 권위를 쟁취하여 기득권을 누리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여래의 방이란 모든 중생에게 대한 자비스러운 마음이요, 여래의 옷이란 부드럽고 화평하고 욕됨을 참는 마음이며, 여래의 자리란 모든 존재의 공(空)함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에서 종교적 권위가 나온다. 욕됨을 참는 것에서 여래의 기품이 나오며, 존재의 공성을 보는 안목과 실천에서 여래의 덕성이 확립된다. 재가불교가 성공하려면 이와 같은 자세와 태도가 필요하다. 종교적 내용과 권위를 확보하지 못한 종교운동은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 스스로 실천적 모범을 보여야 한다.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 “처음도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법, 조리와 표현이 잘 갖추어진 법을 설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말에 조리가 있고 논리정연한 웅변만으로 종교운동이 성공할 수 없다. 이성과 논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종교적 실천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재가불교가 대안이 되려면 승가에 대한 비난자가 아니라, 삶과 종교적 실천에서 모범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부처님께서 전법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원만하고 완전하며 청정한 행동을 보이라.”고 당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재가가 관전자가 아니라 스스로 대안이 되려면 이상과 같은 내용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런 취지에서 이번 호에서는 ‘재가불교운동을 이끈 사람들’이라는 특집을 마련하였다. 백봉 김기추, 법운 이종익, 덕산 이한상, 중원 장상문, 불연 이기영, 일관 박완일, 미천 목정배, 멱정 여익구 등은 모두 현대 한국불교가 낳은 걸출한 선지식들이다. 어떤 분은 학덕과 인품을 갖춘 스승으로, 어떤 분은 승가를 외호하고 교단발전과 불법을 홍포하는 대시주로, 어떤 분은 사회정의를 위한 실천으로 불교의 위상을 드높였다.

이분들의 삶과 활동을 조명하는 것은 그만한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취지는 재가불교운동이 나아갈 방향과 미래에 대한 가르침을 얻기 위함이다. 이분들이 활동한 시공은 지금보다 교단이 더 혼탁하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기 전에 신심과 원력으로 길을 개척함으로써 스스로 대안이 되었다.

오늘날 재가불교운동을 주창하는 현장에서 자주 목격하는 것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깃발이다. 교단의 삿됨을 무너뜨려 정법을 세우자는 것이다. 하지만 ‘올바름을 드러내는 것[顯正]’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파사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 호에서 살펴본 여러 선지식은 스스로 모범을 창출하고, 바름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이분들과 같이 굳건한 신심과 수처작주의 정신이 바로 설 때 재가불교는 한국불교의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다.

 

2019년 6월

서재영(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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