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들어가며

인류는 인류진화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난 1970년대에 들어와 매우 의미심장한 걸음을 한 보 내딛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큰 진보를 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인류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죽음 뒤의 세계에 관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이전에 인류가 죽음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정보는 대부분 종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종교는 그 종교 나름대로의 도그마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많은 경우 그 종교가 갖고 있는 죽음관은 그 도그마에 의해 윤색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그런 종교들이 제시하는 죽음관은 그리 객관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대중적인 불교 신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죽음 뒤의 세계라는 것은 절의 명부전에 그려져 있는 ‘한빙지옥’이나 ‘칼산지옥’이니 하는 매우 우화적인 것에 그치고 만다.

그런데 이런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비록 우화적인 사후생관(死後生觀)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죽음 뒤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이 인류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해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은 근대에 들어와 서양에서 유물론 혹은 과학이 발달하면서 완전히 다른 양상을 맞이한다.

이른바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으로 무장한 수많은 근현대의 인텔리들은 그들의 유물론에 입각해서 죽음 뒤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과학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가시적으로 실험될 수 없는 것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사후생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불가지론적인 입장에 서야지 부정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된다.

죽음 뒤의 세계는 아예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해야지 실험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태도라 할 수 있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이러한 계몽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세상에는 사후 세계를 부정하는 태도가 만연했고 지금도 비슷한 양상에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에는 사후 세계를 인정하면 흡사 미신적이거나 덜 지성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지식인연 하는) 태도마저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인류의 죽음관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 것은 이른바 근사체험(Near-Death Experience, 줄여서 NDE라고 한다)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후부터의 일이다. 근사체험은 임사체험이라고도 하는데 큰 사고 같은 것을 당해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 돌아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체험을 말한다. 이 체험들이 학계에 보고되면서 1970년대 이후부터 많은 학자들이 매우 객관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죽음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구는 주로 미국 학자들에 의해 주도됐는데 이 노력은 결국 1980년대에 국제근사학회(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Near-Death Studies)와 같은 학회의 구성으로 이어졌다. 이 학회에서는 일년에 수차례 Journal for Near-Death Studies이라는 이름의 학술지도 내고 있고 소식지도 내는 등 아주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이 글은 이런 과정을 거쳐 축척된 근사체험을 일별하는 것인데 주로 미국 학자들의 연구에 의거한 것임을 밝혀둔다.

1. 근사체험 연구의 시발과 전개

전 세계적으로 근사체험에 대한 연구를 촉발시킨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75년에 출간된 레이몬드 무디 2세의 『잠깐 보고 온 사후의 세계(Life after life)』(유근일 역, 정우사, 1977)라는 책이었다. 이 당시 이미 세계 죽음학의 권위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도 같은 주장을 하고 다녔지만 그는 책으로 연구 결과를 밝힌 적이 없어 무디의 저서를 근사체험 연구의 시발서라고 말한다(그런데 이 책의 서문은 다름 아닌 퀴블러 로스가 썼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근사체험에 대한 연구는 19세기 말에 살았던 스위스의 지질학자 앨버트 하임(Albert Heim)에 의해 촉발이 되었다.

그는 알프스 등반 중 조난을 당했던 사람들의 체험이 유사한 것을 발견하고 그들의 체험을 비롯해 비슷하게 치명적인 사고를 당한 사람들, 즉 큰 부상을 입은 군인이나 노동자들이 겪은 체험을 수집해 발표를 했다. 이때의 발표 내용을 보면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근사체험자들의 체험과 매우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사체험에 대한 실제적인 시발 연구가 된 자신의 저서에서 무디는 의사로 재직하고 있으면서--그는 동시에 문학박사(Ph. D)이기도 하다--150 여명의 근사체험자들을 만나 면담했고 그것을 정리해서 처음으로 근사체험에 관한 책을 내게 된다. 그 뒤에도 무디의 책 말고 비슷한 주제를 다룬 연구 결과물들이 있었지만 여기서 그것들을 다 다룬다는 것은 지면의 제약 상 힘들기 때문에 다른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런데 무디의 책은 엄밀히 말하면 학술서라기보다는 대중서에 가까웠기 때문에 과학적인 접근법으로 행했던 것은 아니었다(근사체험자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무디의 연구가 과학적으로 재평가를 받는 것은 5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1980년에 미국 코네티커트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케니스 링(Ring)이 『Life at Death』(이 책은 우리나라에는 번역이 안 되었고 일본에는 부분적으로만 번역이 되었다)라는 제목의 책을 쓰면서 비로소 근사체험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시작되게 된다.

링은 이 책에서 근사체험자들이 겪는 사건을 유형적으로 분류하고 그것을 산술적으로 통계를 내어 여러 경우의 수에 맞추어 매우 면밀한 연구를 유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성종교에 매우 열심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근사체험을 했을 때 어떻게 다르게 체험을 하는지 따위가 그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당했을 때의 상황, 즉 사고사인지 병사인지 자살인지 등에 따라 체험의 내용이 달라지는가에 대해서도 면밀한 조사를 했다. 링은 특히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겪는 변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종종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인생관이 180도로 완전히 바뀌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링은 여기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하게 적고 있다. 링의 저서를 읽어보면 곧 알 수 있지만 그의 연구는 근사체험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린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링과 함께 미국에는 수많은 근사체험 연구자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들의 연구를 집대성해 대중들이 읽기 쉽게 만든 책이 있는데 애트워터(P. M. H. Atwater)라는 연구자가 쓴 『The Complete Idiot's Guide to Near-Death Experiences』(알파 북스 출판사, 2000)가 그것이다.

2. 근사체험이란 무엇인가? --그 내용과 단계들

이제 우리는 본론에 도달했다. 죽었다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근사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인이지만 일본 교토 대학서 교편을 잡고 있는 칼 베커 교수에 의하면 죽었다 살아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 가운데 미국인은 10%만이 근사체험을 했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우리는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근사체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단계는 체외 이탈체험이다. 이 체험은 종종 유체 이탈(幽體 離脫)체험이라 불리는데 유체라는 단어의 뜻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용어인 체외 이탈 체험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것을 영어로는 ‘Out-of-Body-Experience'라 한다(줄여서 OBE라고도 한다). 체외 이탈이란 목숨이 경각에 있는 사람의 의식이 몸을 빠져 나가 자신의 몸이나 주위의 사람들을 보는 체험을 말한다.

이 체험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위에서 인용한 베커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0대 중에는 60명 중에 한명 꼴로 이 체험을 자연스럽게 한다고 한다. 더 충격적인 일은 2차 세계대전이나 월남전 때 부상당한 병사 가운데 많은 수가 이 체험을 한 것으로 보고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영혼의 상태로 몸을 빠져 나와 미국에 있는 자기의 집에 돌아가 모친이나 아내들을 만났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게 이들이 영혼 상태로 방문했을 때 가족들이 어떤 상태로 있었는가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모친이나 아내가 그들의 영혼을 목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영혼이 몸을 빠져 나갈 때 소음이 들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음은 캄캄한 어둠과 함께 등장한다. 몸을 빠져 나간 영혼 앞에 캄캄한 어두운 공간 혹은 동굴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은 그 굴을 매우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체험을 한다. 이렇게 지나가면서 주위에서 아는 영혼들도 만나고 전혀 모르는 영혼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굴 끝에 보이는 환한 빛이다. 이 빛은 말할 수 없이 밝게 나타나는데 그렇다고 태양과 같이 눈이 부셔 못 뜨는 그런 식의 밝기는 아니라고 한다.

이 동굴 혹은 터널 체험은 왜 하는 것일까? 여기에 링은 매우 고무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다. 즉 터널 체험은 우리의 의식이 삼차원적인 감각의 차원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영혼의 사차원적인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 링에 의하면 이 사차원적인 세계에서는 이른바 근원적 실재(primary reality)가 물질이 아닌 (에너지의) 진동(frequence)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육체만 존재하는 이 삼차원 세계와 사뭇 다름을 보인다. 터널 체험은 이렇게 다른 세계로 가는 과정에서 겪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터널을 통과하면 매우 아름다운 세계를 만난다. 즉 이승에서 보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아름다운 꽃밭 등을 보고--그 아름다움을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아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곳에서 영혼은 자신이 저승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안내자와의 만남이다. 이 안내자는 아주 밝은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보통 ‘빛의 존재(Figure of Light)'라고 불린다.

이 존재는 빛 말고도 붓다, 예수, 마리아, 보살 등과 같이 인간의 모습을 띠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저승에서 만나는 다른 존재들과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존재와의 교통도 전부 텔레파시로 한다. 이 단계에서 이 존재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의 삶을 영상으로 회고하는 것이다. 이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중요한 일들이 아주 생생한 영상으로 눈앞에서 펼쳐진다고 한다. 이른바 삶의 회고이다. 이승을 떠나기 전에 이 생을 정리하는 것이리라. 이 생을 살면서 특히 자신이 잘못했던 일들을 회고하게 되는데 자기가 해를 준 사람의 입장에 서서 자신이 얼마나 무모하고 이기적이었나를 철저하게 깨닫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빛의 존재는 해당 영혼을 질책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시종일관 사랑의 감정으로 대한다고 한다.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완전히 다른 새 사람, 한 마디로 말해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적인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이 빛의 존재와의 만남 때문이라고 한다. 이승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때 삶의 회고를 통해 체험자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배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사는 이번 생의 삶에는 확실한 소명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이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않고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오는 것은 이 생에서의 소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스로 깨달을 수도 있고 빛의 존재로부터 깨침을 받을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면 보통 영혼들은 다시 자기 몸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이 빛의 존재는 대관절 무엇일까? 여기에서도 링은 앞의 책에서 매우 통찰력이 넘치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링에 의하면 이 빛은 평상 상태의 자아가 아니라 전체적 자아(total self) 혹은 진아(眞我, higher self)이다. 링이 말하는 이 자아는 불교에서 말하는 참된 나와 너무 흡사해 놀랄 지경이다.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자.

진아(higher self)는 너무 경외스럽고 너무 압도적이며 너무 사랑스럽고 무조건 받아주는데(마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엄마처럼) 각자의 개별화된 의식에게는 너무나 낯설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와는 확실히 ‘다른’ ‘분리된(separate) 것으로 느끼게 된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진아는 자신을 밝게 빛나는 황금빛으로 나타내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상위의 형태로(in higher form) 나타나는 자기 자신일 뿐이다…(중략)... 그 황금빛은 내재되어 있는 자신의 신성이 나타난 것(reflection)이며 진아를 상징한다. (죽은 당사자가) 보는 빛은 바로 자기 자신의 빛인 것이다.

이 정도 되면 이건 과학적인 설명이 아니라 거의 종교적인 설명에 가깝다. 원래 근사체험은 이렇게 종교적인 체험과 흡사한 점이 많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 다다랐다. 영혼들은 이곳에서 장벽(barrier)을 만나 전환점을 맞는다. 이 장벽을 넘어가면 이승으로는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그런데 이 장벽은 문화마다 다르게 나타나 재미있다. 예를 들어 태어나 사막만 보고 산 아랍 사람들은 이 장벽이 사막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 반대로 태어나 바다만 바라보고 산 폴리네시아 사람들에게는 바다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한국인의 경우에는 아마도 강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영혼은 몸으로 돌아와 새 삶을 살기 시작하는데 도대체 이 근사체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3. 부정할 수 없는 근사체험의 진실성

많은 사람들이 근사체험이 꿈에 불과하거나, 산소결핍증이나 병적인 상태에서 생겨난 환상이라고 매도하는데 이 두세 체험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우선 환상이나 꿈은 명확한 이유 없이 또 주제의 연결이 없이 그저 변화해가지만 근사체험에서는 일관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장면이 변화해간다는 점이다. 또 꿈은 지극히 사적이라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근사체험은 인간과 시대를 넘어 비슷한 부분이 너무 많다.

한편 꿈이나 환상 속에 나타나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나 가상적인 인물이 많은데 근사체험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은 전혀 나오지 않고 죽은 사람이나 종교적인 인물만 나온다. 이외에도 다른 점이 많지만 다 각설하고 꿈은 꾼 다음에 대부분 잊어버리지만 근사체험은 잊어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그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만 지적하고 싶다.

퀴블러 로스에게 근사체험이나 죽은 뒤의 삶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로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지금까지 인류가 죽은 뒤의 삶을 믿게끔 강요받았지만 이것은 앎의 문제이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베커 역시 다른 저서에서 인간이 죽은 후 인격이 계속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몸은 몸이되 육체를 갖지 않은 몸을 상정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에게 보이는 몸과 보이지 않는 두 개의 몸이 있다는 이론은 동양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생소한 것이 아니다.

힌두교의 베탄타 철학을 따르면 우리는 세 개의 몸을 가지고 있다. 즉 물질적인 몸(gross body)이 있고 비물질적인 몸으로는 미세한 몸(subtle body)과 원인체(原因體, causal body)가 있다. 초기에 영혼의 모습을 띤 몸이 미세한 몸에 해당한다면 원인체는 앞의 두 몸의 근원이 되면서 끝까지 남는 몸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원인체가 우리의 진정한 영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미세한 몸도 결국은 사라진다).

우리가 여기서는 힌두교나 불교가 말하는 윤회를 언급하지 않을 것이지만 사람이 만일 윤회를 한다면 죽음 뒤에 또 다른 형태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된다. 이 방면에서는 이안 스티븐슨 교수 같은 사람들의 연구가 선구자적 위치에 있지만 베커는 방금 전에 인용한 책에서 윤회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서양에서 연구된 것을 정리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가령 프란시스 스토리(Francis Story) 같은 학자에 의하면 사람은 다시 태어날 때 자신이 죽은 곳으로부터 수백 마일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또 티벳의 사자의 서를 발굴하여 서방에 알린 것으로 유명한 에반스 웬쯔(Evans-Wentz)는 윤회는 그 본인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윤회할 때 성별이 바뀌지 않는다고 믿으면 그는 한 성으로만 태어나게 되고 성별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성이 바뀌어 태어나는 것이 그것이다. 한편 파커(Parker)는 윤회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당사자가 잔인하게 죽었던지 혹은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나 물질에 대한 강한 욕망 등을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덴마크의 마르티누스(Martinus)는 어려서 죽은 사람은 윤회하는 속도가 정상적으로 죽은 사람보다 빠르다고 적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어려서 죽은 관계로 이생에서 별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영계에 가더라도 새롭게 배울 게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들은 믿기 힘들 뿐만 아니라 검증하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한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을 과학적이지 않다고 해서 내칠 수도 없지 않을까? 그러나 어찌 됐든 이러한 자료들도 죽은 뒤의 생존 가능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근거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4. 근사체험이 가져오는 변화

나는 앞에서 이미 근사체험자들은 체험 후 말로 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고 언급을 했다. 여기에 대한 연구도 상당하게 되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이 변화들에 대해 본 것 가운데 링이 면담한 한 체험자의 서술이 가장 포괄적인 것 같아 그것을 축약해서 소개했으면 한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사랑의 증가
오라나 챠크라를 보는 영적 능력의 확장
죽음에 대한 공포가 완전히 사라짐
윤회와 같은 동양종교의 교리에 관심을 갖게 됨
채식주의자가 됨
이혼 등 중요한 관계에 변화가 생기고 직업도 타인을 돕는 직종으로 변환함
덜 종교적이 되지만 더 영적이 됨
환경 보호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됨
다른 사람을 더 이상 판단하지 않음
삶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우주에 대해 배우는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됨
덜 물질적인 삶을 살게 됨

이외에도 예언이나 영적 치유 같은 초자연적인 능력이 생기는 등 많은 변화가 있지만 모두 생략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서 볼 일은 이 덕목들이 하나 같이 세계의 고등 종교들이 핵심 가르침으로 제시했던 것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껏 종교에서 가르치는 사랑과 자비, 돌봄, 용서 등 여러 덕목들에 대해서 왜 우리가 이 덕목들을 따라야 되는지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교주가 그렇게 말했다든가 아니면 경전에 그렇게 씌어 있기 때문에 따라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본 근사 체험의 연구를 통해 우리 인류는 이 종교들의 가르침이 있는 그대로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가면서

이 글의 맨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지만 인류는 근사체험에 대한 연구가 가능해지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연구는 인류가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불교를 포함한 세계종교들이 늘 주장하던 높은 덕목들의 당위성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사실 불교에서 다른 사람을 진정한 자비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칠 때 대부분의 우리들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확실한 이유를 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근사체험을 통해 보면 우리는 이미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결과가 될 수 있다. 근사체험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체험 동안 빛의 존재와 만날 때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링은 이것을 이렇게 정리했다..

거기에는 (빛으로부터) 어떤 비난도 없다--당신은 심판 받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있다.
당신은 완전한 자비심으로 대해진다.
당신은 이미 용서받았다.
당신은 그저 (빛과 함께 삶을 회고하면서) 당신의 삶을 바라보고 이해만 하면 된다.

다소 기독교적인 설명이지만 그 뜻은 충분히 드러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종교는 죽음학의 입장에서 조망할 때에 그 의의와 가치가 제대로 드러날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해진다. 실제로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종교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죽음과 종교의 관계는 서로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관계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해서 근사체험에 대해 주마간산격으로 보았는데 역시 아쉬운 것이 많이 남는다. 우선 드는 아쉬움은 너무 서양, 그것도 미국학자들의 연구에 의존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이 분야에 관한 한 미국학자들의 연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는 근사체험 혹은 죽음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는 지경이라 인용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다음에 아쉬운 것은 불교적 관점에서 이 근사체험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쓰지 못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죽음에 대해 많은 문헌들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죽음을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문헌은 뭐니 뭐니 해도 티베트의 “사자의 서”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입장에서 근사체험을 조망하는 일은 매우 의미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필자의 역량이 되지 않아 포함시킬 수가 없었다.

다만 근사체험이라는 것은 죽음 문턱을 건너갔다 온 아주 잠깐의 시간을 대상으로 했다면 ‘사자의 서’는 그것을 훨씬 넘어서 저승 깊은 곳까지의 세계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정도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불교 교리와 근사체험의 연관 관계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좋은 연구 거리가 될 터이니 숙제로 남기고 이 작은 글을 마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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