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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의 불교학자 <37> 한기두
불교학 여명기에 파수공행(把手共行)하다
[77호] 2019년 03월 01일 (금) 원영상 wonyosa@naver.com

1. 무시선(無時禪)의 여정

   
진산(震山) 한기두( 韓基斗) (1933~2016)

그를 길에서 본 지가 오래되었다. 아니 이미 천화(遷化)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늘 하늘을 보며, 먼 곳을 응시하던 그의 모습. 인사를 하면 “허허.”라는 말이 먼저 나온 그의 너털웃음. 그립다. 선자(禪者)치고는 너무나도 평범했던 그의 그림자. 겨울바람이 부는 이때쯤, 그가 좋아했던 학교 교정의 건물 모퉁이로 바람을 타고 돌아서 가는 뒷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어디쯤 가고 있을까.

그의 한국불교사, 선학 연구, 고경 읽기 시간은 오래전 조사들의 풍모를 대하듯 설레었다. 편안한 개량한복을 입고 교단에 서서 파안대소하며, 학생들의 숨소리 가득한 허공을 파하고 진여를 향하는 그의 조용한 할(喝) 소리는 하나의 경전이 되어 심금을 울렸다. 은퇴 뒤에도 현대문명의 뒤안길에서 진실을 설파하며, 세계를 누비던 그의 살활자재의 모습을, 그의 목소리를 이제는 겨울바람 속에서 듣게 되었다.

나는 그가 열반에 들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호스피스 병원으로 갔다. 한 눈은 이미 병마가 지배하고 있었다. 감긴 지 오래되었다. 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지혜를 말년에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 남은 눈으로 이야기를 했다. “여여(如如)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마지막 왼쪽 눈으로 껌뻑껌뻑 신호를 보냈다. 여여하다! 나는 한 손을 잡았다. 그리고 염불 십 편을 마음속으로 올렸다. 통했나보다. 그는 다시 한쪽 눈을 떴다 감았다 반복했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흔들었다. 아, 잘 가겠다는 인사구나!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10시간 후 그는 열반에 들었다. 나는 이생에 그가 마지막으로 간 길을 따라가지 않았다. 이미 자유자재한 몸. 더 이상 좇아가 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따뜻한 기운이 밀려오는 초봄, 《벽암록》 제4칙에서 원오극근 선사가 수시(垂示)하듯이 청천백일 가에 매달려 지난(至難)한 겨울을 보낸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으니. 

한기두(韓基斗, 1933~2016)는 1933년 충남 서산군에서 출생했다. 원불교에 입교한 것은 해방 2년 후인 1947년이다. 이어 제3대 종법사를 역임한 대산 김대거 종사의 추천으로 원불교 교역자를 칭하는 전무출신을 서원하였다. 당시 전북대와 원광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포광 김영수로부터 불교학의 탄탄한 기본을 다졌다. 정식 교무가 되어 1957년 서울 보화원에서 일한 후, 1962년 원광대학교 조교수를 시작으로 2002년까지 만 40년 동안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재직했다. 이 기간 원불교 교역자를 배출하는 기숙사 사감을 역임하면서 뜨거운 종교적 정열을 가슴에 안기며, 수많은 교무를 배출했다. 

그는 지혜와 자비의 대승정신을 선열(禪悅)을 통해 전파하였으며, 그의 영향으로 현대불교인 원불교의 토대가 튼튼하게 구축되었다. 또한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 1891~1943)의 불법연구회가 초기에 근대적 불교결사체로서 선의 정신에 기반한 개혁불교임을 파악했다. 새로운 불법운동이자 현대문명의 질곡을 타파하는 종교 운동체로서 원불교 교학의 기틀을 확립하는 가운데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오래된 새길’을 걷도록 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은퇴 후에도 자신이 기른 후학들의 현장에 나가 진두지휘하며 점검하는 나날을 보냈다. 2006년까지 미국 포교의 정신적 지주로서 원불교 미주교구 교령을 역임하였다. 

한기두의 법명은 정원(正圓), 호는 진산(震山)이다. 원불교에서는 법위등급의 최고 단계인 대각여래위 바로 아래 단계인 출가위에 올랐으며, 종사라는 법훈을 받았다. 세수는 84세, 법랍은 62년이다. 그의 학문적 제자로는 불교학 연구에 김영두, 노권용, 양은용, 정순일, 김방룡, 김도공, 필자, 도교 연구에 김낙필, 원불교학에 박상권, 서양철학에 김도종, 김성관을 배출하였으며, 동학(東學) 연구의 최고봉이자 현 원광대학교 총장인 박맹수 교수는 그의 조카사위이다.

그는 저명한 불교학자들인 김동화, 조명기, 이기영,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과도 교유하였으며, 격의 없는 학문적 담론을 통해 한국불교학의 학문적 전통을 세우는 데 투신하였다. 특히 제방의 선사들과도 도방하(都放下)의 자세로 시공을 초월한 선담(禪談)을 즐겼다. 불교와 원불교는 한 집안이며, 이 우주가 커다란 하나의 일가임을 늘 강조하는 입담은 마치 황벽희운의 풍모와도 같았다. 나는 그의 선적 언어가 선사의 심지법문과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대안정사에서 배휴가 고승들의 초상을 보고, 황벽에게 거침없이 “영정은 여기 있건만 고승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황벽이 “배휴” 하고 부르자마자, “그대는 어디 있는가?”라고 일격을 가하듯이 만나는 사람마다 그들의 심혼을 일깨웠다.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그의 티 없이 맑은 얼굴과 우주 저편으로 통하는 눈동자는 후학들의 가슴에 깊게 파고들었다. 그를 대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영혼이 처한 지금 이 자리가 우주의 중심임을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렇다고 잣대로 잰 것처럼 규격에 넣지 않았다. 

그는 젊은 시절 학생들과 전국 각지를 돌며 동고동락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섰다. 입처개진(立處皆眞)의 여실함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중에서도 이생 모진 업장으로 괴로워하는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진물 나는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지장보살 같은 그의 활불 행적에 대해 정부는 1985년 대통령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하는 중에도 더운 여름 저녁 서늘한 서풍이 불어오는 마을 어귀 어디쯤에서 결가부좌를 틀었고, 찬 겨울에는 살을 에는 북풍이 타고 넘는 마을 뒷산 마루에서 화두를 들었다. 만년에는 원불교 원로원 법당의 새벽 어스름 속 맨 앞자리에 좌복을 깔고 앉아 원적무별한 선정삼매에 들었다. 

원불교의 최고 지도자인 경산 장응철 종법사는 그의 열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법문을 내렸다. “수많은 산봉우리 흰 구름 법복 삼고, 숱한 물줄기 쉼 없이 법설을 읊조리네. 돌부처는 무슨 일로 열반 춤을 추는가? 오고 갈 때 한없는 동행락을 누리리로다(千峰白雲爲法衣 萬水無休說法頌 石佛何事涅槃舞 去來無數同行樂).” 여기에 무슨 부연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 불법의 대의인 성불제중의 활로를 손끝 발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걸어갔다는 점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제생의세(濟生醫世)의 길, 석가모니불이 대의왕이 되어 만 중생들에게 절대의 영약을 주었듯이, 그 또한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치유하고, 세상을 치유하는 선자(禪者)로서 그 길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떠났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그렇게 노래 불렀던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 무시선(無時禪)의 삶이었으리라.


2. 한국불교학의 토대 구축

일제강점기하에서나 해방 이후에나 한국불교학계는 일본불교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근대불교학의 시작은 일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국불교를 연구하는 기본적인 틀이나 방향이 정립되었을 리 만무하다. 이 점은 어디 한국불교학계만 그렇겠는가. 식민지 모국의 학이 그렇듯이 식민지하의 모든 학문은 제국에 복무하는 시녀에 불과하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불교학은 해방 후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했을까? 아직 장담하기에 이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자의든 타의든 식민지학으로서 역할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일제 하 숱한 친일 불교인들의 행적에 대한 반성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여전히 가슴 아프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고 난 후에 이 땅 위에서 피어난 불교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해 내는 방법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 단기간에 걸친 경제개발 과정처럼 한국불교학 또한 여전히 난개발의 과정에 처해 있다. 과연 한국불교학이라는 전체적 조망을 가지고, 이 땅 민중과 지성들, 그리고 조사들의 지난한 몸짓을 얼마나 그들의 현재에 가깝게 드러내고자 했는가, 돌이켜볼 일이다. 

한기두의 학문적 작업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이 땅의 불교 또는 선은 과연 어떻게 토착화되어 갔는가 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조선에 이르는 선사상의 맥, 결사운동, 선 논쟁, 조사론, 불교유신 등 한국적 토양에서 성장한 한국불교의 모습에 그대로 대면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의 초기 연구논문집이 《선사상사요(禪思想史要)》(1964), 《한국선사상에 있어 2종선과 3종선》(1969), 그리고 《백파(白坡)의 선문수경(禪文手鏡)》(1970)이며, 나아가 박사학위 논문이 〈신라시대의 선사상〉(1975)이라는 것은 그의 학문적 문제의식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 하나는 원불교학이다. 뒤에서 구체적으로 논하겠지만, 이는 한국불교학의 연장선에서 연구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산중불교를 비판하고 탄생한 원불교지만 전통적 사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원불교 또한 대승정신을 바르게 구현하고자 나온 불교임을 뜻한다. 한기두는 이 점에서 불교의 사상과 정신적 토양을 기반으로 원불교의 현대적 역할을 심도 있게 논한다. 말하자면 원불교는 석가모니불로부터 시작된 모든 불교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조선불교의 명맥을 잇는 개혁불교의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한국불교학의 여명기에 혼신을 다해 공헌하였는데, 당시 한국불교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던 한종만과 함께 연구하며, 원광대를 대표하여 선학을 포함한 초창기 한국불교학계의 여러 학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한국선과 관련하여 1987년 개원한 보조사상연구원의 창립 멤버이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한 서적으로는 《한국불교사상》(1974), 《한국불교사상연구》(1980, 개정판), 《한국선사상연구》(1991)가 있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해방 후, 한국불교학의 토대 구축을 염두에 두고 온몸을 던져 쌓아 올린 흔적이자 역작이다. 

성타(性陀) 스님은 《한국불교사상》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대부분의 연구서가 현실의 신앙생활과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면, 교리나 학문의 체계와 계통을 무시한 단편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본서는 이러한 양면의 단점을 보완했을 뿐 아니라, 학문의 나열에 앞서 진지한 수행의 자세와 구도의 정신에 입각하여 성불이란 인류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것을 희구하고 염원하여 엮은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불교학의 본령은 이 뜻이 근본이 되어야 한다. 

불교학이 여러 인문학과의 차별성이 있다면 무엇인지, 불교학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지, 불교학을 연구하는 자는 언제나 이 문제로 조고각하(照顧脚下)해야 한다. 한마디로 불교학은 그 언어가 어떤 형태로 표출이 되었든 근본은 진리를 향한 구도의 학문이다. 한기두의 학문적 지향점을 성타 스님은 명확히 간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기두는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가 1969년 법주사에 들러 우연히 수도하는 도반 성타 스님을 만나 ‘한국불교’를 함께 연구하자고 의기투합한 것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사찰에 들러 다양한 자료를 구했으나 스님은 바빠서 자료만 제시하며 도와주어 혼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 저술은 제방의 선자들이 한국불교의 역사를 고민하던 흔적이 짙게 묻어 있다. 

목차를 보면 이러한 의미가 완연하다. 8장 가운데 서론과 결론을 뺀 내용 구성은 한국불교사상의 주맥, 한국 화엄사상(성불하는 문), 한국의 천태사상(총화하는 장), 한국의 선지(禪旨), 선지의 논쟁, 한국 불교인의 구도정신이다. 《한국불교사상연구》에서 다소 개정되었으나 그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기두는 한국불교야말로 한국사상의 주축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서론에서 “한국사상을 요해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불교를 찾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싶다”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은 동료로서 한국 종교학은 물론 신종교학을 확립한 류병덕이 한국 근대종교를 이해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그는 근대종교의 창시자들을 한국철학의 계보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발원대로 《한국철학사》(한국철학회 편, 1987)에 수록되었다. 그것은 수운 최제우의 후천개벽 사상, 일부 김항의 정역사상, 증산 강일순의 신명사상, 홍암 나철의 삼일철학, 소태산 박중빈의 일원철학을 말한다. 동양에서 종교는 곧 철학의 시원이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는 문화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상에서도 한국철학의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원효나 지눌이 뛰어난 종교가이면서 또한 사상가인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리고 최남선이 그랬듯이 한기두는 한국불교가 중국, 일본과는 다른 점을 조화와 회통으로 보고 있다. 한국불교의 성장 발전을 다양한 사상이 하나로 회통하는 것에서 찾았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한 용광로에 끌어넣어 하나의 주물처럼 만든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그는 통일신라시대에 설일체유부, 성실종, 중도종, 유식종, 열반종, 법화종, 화엄종, 율종, 정토종, 진언종의 각종 종파가 들어와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나서야 원효의 십문화쟁을 논하고 있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원효의 화쟁사상이 신라의 다양한 종파성을 일심으로 극복해내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 《한국불교사상연구》(1980)

한국불교에 대한 연구 성과가 축적된 지금 읽어도 그의 글은 신선미가 넘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학문적 엄밀성에 입각, 불교사상의 등장이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며, 한국사상사의 전개라는 대의를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상은 무릇 역사와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위적으로 사상적 계보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물을 다룰 때도 조사의 수행과 신앙력을 함께 싣고 있다. 어느 조사든 발심→출가→구도 및 수행→깨달음→제중의 대승적인 사이클을 늘 염두에 두고, 불법 본연의 정신에서 파생된 것이 불교사상임을 증명해 내고 있다. 

결론 또한 한국불교를 통으로 보는 그의 안목에서는 당연한 귀결의 논지다. 그는 천육백 년간의 한국불교 특징을 회통하는 원리, 학무상사(學無常師, 스승이 한 분만이 아니고 과거 현재 모든 조사의 깨달음의 언어는 물론 그 외 모든 가르침을 스승 삼는 것)의 정신, 겸학하는 종지, 의리(義理)를 놓는 공부라고 한다. 이 얼마나 불교의 내적 의미에 충실한 언어인가. 이처럼 불교학만큼은 서양의 언어 논리에 구속받을 필요가 없음에도 지금의 후학들은 논리적 정합성에만 치중하여 불교나 불교학 본래의 사명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이러한 학문적 기술 방식은 결국 한국선의 연구로 직입할 수밖에 없다.

그는 한국선의 다양한 문제점들을 이해하는 것은 한국불교를 이해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느카리야 카이텐(忽滑谷快天)의 《조선선교사(朝鮮禪敎史)》 이후 한국 선사상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 연구물인 《한국선사상연구》 서문에서 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전통적인 불법승 삼보의 신앙체계를 무너뜨리지만 사고의 혁명을 통해 다시 전통사상을 불러일으키고, 둘째, 불타 이전과 이후에도 살아 있는 법신의 영원성을 확인하는 가운데 이심전심의 전등(傳燈)의 진리가 전승되고 있으며, 셋째, 선의 안목에서 제왕도 한갓 중생으로 보일 정도로 민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발전해 왔다고 한다. 마지막 대목에 대해서는 특히 민중 안에서 평등한 의식을 가지고 신앙을 넘어선 신앙생활로 살아가는 길이 선사상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귀족화된 한국의 선을 비판하며, 한국 선가들이 현실사회에 대한 관심과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질타한다. 한국선의 풍토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기두는 한국 선풍의 역사를 신라는 산문선(山門禪), 고려는 선교화회선(禪敎和會禪), 조선은 조사선, 근대는 새 시대의 선불교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전 역사를 다시 나누어 신라를 초기선, 고려를 중기선, 조선 후기부터 근대까지를 후기선으로 과감하게 구획하고 있다. 선자(禪者)의 통찰력이다. 구체적인 논의로 들어가서는 명철한 학자로서 자세를 투철히 견지한다. 

예를 들어 9산선문에 대해 신라시대에는 9산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며, 《조당집》을 분석, 위앙종 계열인 순지(順之)의 활동과 사상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9산선문 또는 9산선종은 신라시대부터 개창하여 후대까지 남았던 9산산문을 통칭한다고 한다. 이 용어가 쓰인 것은 11세기 말 고려 선종(宣宗) 때 승과에서 승도를 선발할 때 발생한 것으로 본다. 사료적 엄밀함이다. 한국선의 역사에 대한 균형감각은 중 · 후반의 기술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려에 해당하는 중기 선에서는 사상적 계보를 정리하는 한편, 선을 중흥한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와 수선사의 창건에 대해 이전의 혜소(慧炤)국사와 인연이 있음을 밝히고, 고려불교의 결사운동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어 정혜결사의 본질과 변천, 보조선의 본질구조, 삼종문, 《선문보장론》과 진귀조사설, 그리고 고려 후기의 선사상과 여말선초의 천태 ・ 법화선으로 전개한다. 한국선은 어떻게 뿌리를 내려 정착되어 가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한기두의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 《선과 무시선의 연구》(1985)

이러한 고민은 바로 후기 선에서 백파의 《선문수경》으로 촉발된 선문 논쟁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그는 백파의 상대인 초의의 《초의전집(草衣全集)》(제2집, 1993) 간행에도 참여했다. 논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한국선의 본질을 향한 선사들의 치열한 학구열에 대해 감탄하는 것이다. 불교의 역사는 논쟁의 역사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한국, 일본이 대표적이다. 유불선 삼교-엄밀히 말하면, 일본은 신불습합의 과정에서 신도와 논쟁이 이루어졌다-의 논쟁은 이들 나라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했다. 선교 논쟁은 불교의 깨달음 문제를 윤택하게 했으며, 조선 후기의 2종선과 3종선, 백파와 초의의 논쟁은 불교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유구하게 계승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한기두는 이를 통해 현대불교의 앞길을 새롭게 바라보자고 외치고 있다. 

그는 근대 조사들의 선풍진작 운동이 앞의 논쟁을 자기화한, 현대불교의 저수지임을 밝힌다. 경허의 동성불과계사(同成佛果稧社), 용성의 만일결사, 만공의 ‘나’의 참구, 한암의 불출산문(不出山門) 등이 그것이다. 한편으로 그가 주목한 것은 원불교다. 그 자신이 속해 있는 교단이기도 하지만, 원불교야말로 근대적 의미의 불교결사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원불교학의 수립 

불교와 원불교의 관계는 무엇인가. 필자 또한 이 분야에 대해, 원불교는 불법승 삼보를 근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개혁불교라는 점을 개진하고 있다.(〈소태산 박중빈의 불교개혁사상에 나타난 구조고찰〉 《신종교연구》 30호, 2014.4) 그리고 근현대에 남방 및 동아시아에서 발생한 다수의 불교계 교단 및 종단을 참여불교(Engaged Buddhism)라 보고, 원불교 또한 여기에 속한다고 판단한다. 불교학과 원불교학을 동시에 연구한 한기두 또한 이 문제에 대해 평생의 화두처럼 학문적으로 풀어나갔다.

그는 〈불교와 원불교〉(《원불교학연구》 8집, 1978)에서 원불교가 불교와 일치한 점, 혁신한 점, 새 불교의 전망을 기술하고 있다. 첫 번째 관점에서는 불타와 박중빈이 동일한 진리를 깨달았으며, 불타의 위대한 지혜와 능력을 스스로 제시함으로써 박중빈이 그와 일치된 심경을 가졌다는 것과 함께 불법을 무상대도로 보고 교법의 주체를 삼았다는 것을 들고 있다. 두 번째 관점은 박중빈의 《조선불교혁신론》과 〈불교정전(佛敎正典) 개선론〉을 통해 4가지를 든다. 불교의 역사적 전통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일상적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고 한 점, 고유명사인 석가교(釋迦敎)에서 일반에게 보편화된 불법이자 보통명사인 불법으로 돌리자는 점, 등상불 숭배에서 부처의 마음인 일원상(一圓相) 신앙을 제시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분 수행이 아닌 모든 교법을 회통하는 전면수행을 표방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원불교를 보는 이러한 시각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불법, 즉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은 진정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이다. 그는 무엇 때문에 깨달았고, 누구를 위해 맨발로 세상 속을 걸어 다녔던가, 하는 질문을 다시금 던지게 하고 있다. 원불교를 보는 한기두의 눈은 불법 본래의 사명을 일깨우기 위한 하나의 시금석을 제시하고 있다. 비단 원불교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불교, 아니 세계 모든 불교계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법의 탄생과 목적을 되새겨보자는 점을 불교와 원불교의 관계를 통해 재차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한기두는 박중빈이 불교가 장차 세계적인 대주교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상기시키며, 그가 전망한 미래의 불법을 정리했다. 박중빈은 불법으로 세계가 한 집안이 될 것이라고 보고, 미륵불은 진리불이 크게 드러나 처처에 불상 아님이 없는 세계를 상징하며, 용화회상은 일체중생이 다 함께 성불하여 사사불공(事事佛供, 접하는 사람과 일마다 부처님께 불공하듯이 대하는 것)하는 법을 제시했다고 한다. 

또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고, 영과 육을 쌍전하며, 과학과 도학을 병진하는 것으로써 내외가 겸전하는 원만한 대문명세계를 건설할 것을 표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처럼 불법이 구현되어 모든 차원에서 평등한 세계가 도래하리라는 점을 전망했다고 본다. 이는 오늘날 불법을 사회화하고 있는 세계 모든 불교교단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종교와 과학과의 공존, 인류가 공유하는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가치를 불교는 이미 내적으로 간직하고 있으며, 그래서 불법은 동진해서 이제 서진하고 있는 것이다.

원불교 최고의결기관인 수위단(首位團)에서는 ‘원불교는 새불교로서의 새종교’라고 발표했다(1992.10). 원불교의 선법이 자명하게도 불교에 기반하고 있듯이, 한기두는 원불교에 대한 이러한 교단의 정의(定義)를 학문으로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 실제로 헬레나 노르베리가 라다크를 살리기 위해 분투한 《오래된 미래》를 빌려 원불교는 불법의 토양 속에서 자라난 ‘오래된 새 길’을 걷는 중이다. 땅에서 홀로 솟아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박중빈은 자신의 깨달음에서 나온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는 삼교의 종지를 일관할 뿐만이 아니라, 일심을 통해 모든 종교의 가르침과 천하의 모든 법이 사통오달이 될 것이라고 한다(박중빈 어록 《대종경(大宗經)》 교의품 1장). 말하자면, 기원 전후에 불교가 중국에 뿌리내리면서 도교 및 유교와 치열한 논쟁을 통해 공존하며 서로를 발전시킨 과정과 같은 맥락 위에 원불교는 서 있다. 동아시아의 풍요로운 정신적 토양 위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있다. 또한 원불교는 사부대중이 화합하며, 승속의 차별이 없는 대승불교의 사명을 구현하기 위해 불법 스스로 부단하게 배출한 교단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와 원불교의 가장 큰 가교 또는 공통의 기반이자 새로운 길이 한기두의 평생의 작업인 무시선의 연구다. 1985년에 학문적 역작인 《선(禪)과 무시선(無時禪)의 연구》가 출간되었다. 여기서 무시선은 무처선(無處禪)이라고 해도 좋다. 시간과 장소가 따로 없다는 말이다. 

선이 종래 출가자의 전유물이라는 인습도 많이 사라져가지만, 선방에서라야만 제대로 된 선수행을 한다는 인식은 여전하다. 물론 깨달음을 향해 평생 재색명리를 돌아보지 않고 한길로 매진하는 눈 푸른 납자가 불법의 보배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궁극적으로는 선과 삶이 일치되어 일회적인 인간의 존재 의미가 스스로 수긍되고 납득되는 낙처(落處)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면 선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따라서 그는 한 생각 잡고 놓는 힘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작업이 인류사의 초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이를 인간운동, 인간회복운동으로 부르고 있다. 마하트마 간디 또한 자신의 자서전에서 《바가바드기타》를 애독하며, 한 생각의 중요성을 늘 자각하며 살았다고 한다. 위대한 사람치고 이처럼 선의 궁극과 통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니 모든 분야에서 진인 혹은 달인은 무의식중에도 선수행의 과정을 밟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유형무형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그저 탄생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박중빈은 자신의 깨달음의 연원을 석가모니불에게 대고 있으며(《대종경》 서품 2장), 불교가 장차 세계적인 주교가 될 것으로 예언(같은 곳 15장)했다. 그리고 교단 초기부터 대승불교의 정신을 계승하여 불법의 시대화 ・ 생활화 ・ 대중화를 선언했다. 박중빈이 불법을 주체 삼아 완전무결한 회상을 이루겠다고 선언한 것에 기반하여 한기두는 원불교는 불법을 완결시키는 교단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핵심에 선사상이 놓여 있다. 이를 증명해가면 갈수록 원불교는 백장회해 이래 중국 선종이 추구하고자 했던 가풍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한기두가 원불교가 최종적인 선법으로 내세우는 무시선을 중국의 보리달마와 육조혜능, 그리고 이후 조사들의 사상에 연원을 대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무시선의 출현을 구체적으로는 하택신회의 무념사상으로부터 시작해 보명과 곽암의 〈목우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원에서 그 원류를 찾고 있다. 무시선을 평상심으로 생활하는 길이라고 보고, 네 단계로 해명하고 있는 것을 선사상사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챙기는 마음공부로써 주의하는 공부심, 둘째는 심력을 써서 경계에 부동하는 대중심, 셋째는 일체경계에 맡기되 무위자연으로 돌아가 진리에 계합하는 공부이자 본연심으로 돌아오는 공부, 마지막 넷째는 어떤 경계에서도 부동한 마음을 마음대로 활용하는 용심 공부의 단계라고 한다. 단순하지만 각각의 단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종래에 정혜쌍수에 기초하여 정을 혜의 체요, 혜는 정의 용이라 보고 자심이 고요할 때만 치중하여 계를 경시해왔던 점을 반성해야 한다. 무시선은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 선법이므로 선을 수행하는 법 자체가 동정일여이며, 따라서 동정 간에 공부를 쌍수하여 계정혜의 삼대력을 얻어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것의 핵심에는 자성이 모든 행위와 분리되지 않는 상태에 놓여 있고 한다. 《육조단경》에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응하되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이 바탕이 되는 것이다. 무시선은 변화무쌍한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2012년 후학들이 개최한 《육조대사 법보단경: 선지식이여 자성의 문을 열자》의 출판을 기념한 학술회의에서 한기두는 “《육조단경》은 정법에 입문한 불교인들에게 영생을 통해 변할 수 없는 무상의 계단을 세워 준 중심 법문”이며, “깨닫지 아니하고 습관으로 이뤄지는 행위는 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다양한 면에서 밝혀 주고 있다.” “진여자성의 작용으로 한 마음이 밝아지면, 육근이 비록 견문각지의 작용을 한다 해도 그것은 만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진성은 언제나 자유자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혜능 이후 다양화된 선의 세계를 다시 소급한다면 이처럼 진여자성에 기반한 육조선이 될 것이다. 생활선은 바로 “심지무비 자성계(心地無非自性戒), 심지무란 자성정(心地無亂自性定), 심지무치 자성혜(心地無痴自性慧)”의 자성삼학을 자유자재로 굴리는 것이다. 한기두는, 혜능이 주장한 것은 경계에 대응하는 생활불교이며, “일상생활을 떠나 불교를 공부하려는 것은 마치 토끼에게서 뿔을 찾으려는 것과 같다”고 일갈한다. 결국 무시선의 근본 원리는 자성삼학으로 귀결된다. 

원불교 《정전》에서 무시선법의 강령은 “육근이 무사(無事)하면 잡념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하면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라”는 것이다. 일심이야말로 원효사상의 중핵이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여래의 한 가지 맛의 설법은 마침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음이 없다”고 설파했다. 허공과 삼천대천을 다 집어삼키는 일심이야말로 모든 불보살과 중생이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일심은 진제와 속제를 아우르는 반야중도를 말한다. 

그러니 일거수일투족이 정의롭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결국 한기두가 자신의 심사(心師)로 삼은 박중빈의 깨달음의 세계인 일원상의 진리가 갖는 공원정(空圓正)의 3대 속성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 원불교학의 기초를 세우기도 했다. 원불교 사상서인 《원불교》(공저, 1973)와 종립대학인 원광대에서 가르치기 위한 교재인 《원불교학개론》(공저, 1977)과 《종교와 원불교》(공저, 1978, 1992)를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저술했다. 그리고 불법연구회의 박중빈이 열반 직전, 제자들과 함께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원불교의 핵심 경전인 《정전(正典)》에 대한 종합개론서를 만년에 저술했다. 《원불교 정전연구: 교의편》(1996)과 《원불교 정전연구: 수행편》(1997)이 그것이다. 《정전》의 원래 이름은 《불교정전》(1943)이었다. 원불교의 교서편수 과정의 일환으로 1962년 재편되어 《정전》의 이름으로 나왔다. 현재는 총서편, 교의편, 수행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기두는 절차탁마한 평생의 학문적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광야에 흘러 대지를 비옥하게 한 전통의 물줄기 위에 신선하고도 새로운 맛을 지닌 원천수를 합쳐 튼튼한 대해장강의 불법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마지막 여정이었다. 

   
▲ 원불교 종사위 법훈을 받고 가족 친지와 함께한 한기두 교수. 오른쪽 네 번째(2010)

4. 체로금풍(體露金風)의 삶 

한 승려가 운문 선사에게 “나뭇잎이 시들어져서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나무는 자신의 앙상한 본 모습을 드러내고, 천지에는 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가득하다”라고 대답했다. 체로금풍이다. 《벽암록》 제27칙이다. 한기두는 운문 선사의 일갈처럼 탈속과 자재(自在)의 경지를 노니는 것과 같았다. 가끔은, 불성을 가지고 있는데 왜 수행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풀기 위해 중국의 천동여정 문하에서 수행하다가 심신탈락을 경험한 일본의 도겐(道元) 선사가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상상하기도 했다. 열반을 몇 해 앞두고는 필자에게 도겐의 《정법안장》을 읽어야겠다고 했다. 인연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니 그는 지눌의 대를 이은 고려의 진각국사 혜심(慧諶)과도 닮았다. 혜심 스스로 호를 무의자(無衣子)라고 칭한 것처럼 한기두는 무의자와 같은 삶을 지향했다. 그는 홍윤식과 함께 저술한 《한국불교》(1974)에서 혜심의 무의자 의미를 이렇게 푼다. 불타가 금란의를 제작한 의미는 정법상전에 있었다. 달마대사로부터 육조혜능에 이르기까지 행해진 것 또한 불타가 상전한 뜻과 통한다. 그러나 이후 의발을 전수하지 않는 의미는 전수했던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인지가 발달할 때는 탈을 벗고 참을 지니고 있는 알맹이 그대로 드러내는 만큼, 천지만물 허공법계와 막 통하도록 교선(敎禪)을 떠나 방편 없는 본연을 파헤친 성자의 근본 뜻이 여기에 있다고 한다.

진심직설이다. 한국의 간화선 확립에 실질적으로 주력한 혜심이야말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인물이다. 그가 있었기에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확립된 것이다. 간화야말로 사물의 본질을 보는 것이다. 보는 것만이 아니고 그 본질이 현실 속에 진실이 되어 살아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활구다. 한국불교가 선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史實)을 그는 역력히 밝혀냈다. 

한기두는 혜심의 어록에서 “사구에 붙잡히지 말고, 활구에 살아라”라는 말을 그대로 잡아낸다. 그리고 살불살조의 정신을 이렇게 말한다. “비록 불법이 불타정법일망정 자기 스스로 불법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사구요 활구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구 하에서 볼 때는 천어만어(千語萬語)가 불여일묵(不如一黙)이요, 천문만문(千聞滿聞)이 불여자견(不如自見)이라고 혜심은 소리친다.” 한기두가 말하듯이 자성을 떠나지 않은 지혜가 활구다. 이처럼 눈 뜨고 보면 세상사 활구 아님이 없다. 성철 스님의 사자후가 된, 청원행사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선어야말로 5가7종의 지류가 의지하는 원천의 샘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혜심의 선을 일미선이라고 한다. 한 가지 맛의 선. 그리고 그 일미선의 원류를 《선문염송》의 귀종 화상에게서 찾는다. 5종의 선법을 배운 승려에게 봉 두 대로 일미선의 맛을 보게 한 것이다. 한기두는 이를 근거로 혜심이 지리산 산상 무주암에서 좌선게를 지은 것을 들었다. “앉음을 앉으려는 앉음은 앉음이 아니요, 선을 선하려는 선은 선이 아니로다. 이 좌선의 참뜻을 알려 하거든 불 가운데 연꽃을 찾아보라(坐坐坐非坐 禪禪禪不禪 欲知坐禪旨 看取火中蓮).” 그는 화중련(火中蓮)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말고, 화두 속에 강조된 요지에 불과하다고 보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 세계가 정혜를 골라 맞게 하는 조작보다 승하다고 보는 것이 혜심의 입장이라고 한다. 이 일미선에 정혜와 지관이 함께 들어 있어 지속할 수 있는 제호의 일미가 바로 이 선이 아니냐고 본다. 

이 일미선 덕분에 지눌과 혜심을 포함한 16국사가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유교가 판치는 가운데에도 강원에는 강백들의 기백이 허공을 갈랐으며, 진실을 찾는 참수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선방에서 어깨를 치는 장군죽비 소리가 산문 밖까지 들렸다. 한기두 또한 그 길 위에 있었다. 선원에서 강원으로, 강원에서 선원으로 윤회전생 해온 이력이 이렇게 역력하지 않다면, 이 땅의 선풍을 기억 너머의 기억으로 어떻게 이렇게도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가. 그것은 문자에 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한 맑은 영성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분명 이 땅의 참된 진실을 기록하기 위해 잠시 들른 것이다. 

그리고 그저 떠나지 않았다. 이제 막 피어 오른 새로운 불법, 전통 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원불교에 대해서도 풍요로운 미래를 기탁했다. 오히려 그의 발길은 새 불법에 대한 기대로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기러기 떼가 무리를 지어 이 하늘 저 하늘을 넘나들듯이 한기두 또한 동시대의 불교인들과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파수공행의 길을 걸었다. 그의 한 손은 과거를, 또 한 손은 현재에 충실하면서, 깨달음과 자비에 기반한 시기상응의 대승정신이 원만구족하게 전개되도록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이리라. ■ 

 

원영상
원불교 교무, 원광대학교 정역원 연구교수. 원광대학교 졸업. 일본 교토(京都)불교대학에서 일본불교사상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주요 논문으로 〈근대 일본불교와 민족주의-鈴木大拙를 중심으로〉 〈한용운과 세노오 기로의 불교혁신사상 비교연구〉 〈광복 후 분단체제에 대한 원불교의 대응과정 연구〉 등과 저서로 《동아시아불교, 근대와의 만남》(공저), 《일본문화사전》(공저) 등이 있다. 현재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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