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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의 불교학자 <38> 김삼룡
한국 미륵신앙의 현장을 통괄하다
[77호] 2019년 03월 01일 (금) 양은용 ilsan@wku.ac.kr

1. 할머니의 신행에서 비롯된 선택의 삶

   

문산(文山) 김삼룡(金三龍)
(1925~2014)

한국 근현대의 격변하는 사회상황은 생민을 도탄에 몰아넣고 있었다. 서구의 열강제국이 한국을 전장으로 삼아 세력을 과시하며 혈투하는 가운데, 사직은 무너지고 드디어는 이국의 침탈로 모든 것을 빼앗기면서 식민지 시대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 굴곡진 시대의 종교사상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보면, 첫째는 전통사상의 근대적 변모로, 고유신앙 사상 위에 전개된 불 · 유 · 도 삼교의 변화된 상황에 대처한 새로운 구세이념의 선포이다. 둘째는 서구사상의 전래와 수용으로, 서구의 정치 · 사회사상과 함께 들어온 기독교의 토착이며, 셋째는 민중사상의 자생으로, 버려진 민중들 속에서 자각한 선지자들에 의한 민중종교, 즉 신종교의 창립이다. 

이들 종교사상은 전국적인 현상이었지만, 특히 호남지역에서는 호남간선(湖南幹線)을 중심으로 미륵신앙과 민중종교 사상이 아우러져 일대의 성역을 이루고 있었다. 민중종교 사상의 특징을 개벽(開闢)으로 본다면, 도시는 문화공간이 되고 도로는 확산통로가 되어 개벽사상의 거대한 띠를 형성한 것이다. 문산 김삼룡(文山 金三龍, 1925~2014) 박사의 연구상황을 조명하면서 이러한 호남간선과 관련된 사조를 되짚어 보는 것은, 그 가운데서 그의 삶과 신앙, 그리고 학문과 사상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문산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 그리고 도시화 · 산업화과정을 거쳐 세계보편윤리를 모색하던 새천년의 벽두를 살았다. 그의 생애는 원불교와의 만남을 통해 전개되는데, 크게 6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성장교육기로, 1925년(1세) 출생에서부터 1938년(14세)까지의 재가 유 · 소년기이다. 제2기는 출가수행기로,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少太山 大宗師, 朴重彬, 1891~1943) 문하에 출가하여 주경야독으로 수행과 연구를 시작, 1956년(33세)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원광대학 강사로 임용되기까지의 청년기이다. 제3기는 창학교수기(創學敎授期)로, 원광대학 강사로 대학의 기틀을 쌓는 데 참여하고부터 1972년(48세) 원광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교무처장에 취임하기까지의 장년 1기이다. 제4기는 연구활동기로, 원광대학이 종합대학으로 개편되고부터 대학과 교단, 그리고 지역사회를 잇는 활발한 활동과 함께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익산문화와 미륵신앙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1986년(62세)에 총장에 취임하기까지의 장년 2기이다. 제5기는 경영지도기(經營指導期)로, 원광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여 교단과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어른으로 대내외의 활동을 전개하고부터 2000년(76세) 정산종사(鼎山宗師, 宋奎, 1900~1962)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성업을 성공리에 마치기까지의 장년 3기이다. 제6기는 수양보은기(修養報恩期)로, 정산종사 관련 성업의 회향으로부터 원로수도원에 안주하여 교단 원로로 수양하며 법문집 등을 펴내는 보은행을 하다가 2014년(90세) 열반에 들기까지의 만년기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삶이 원불교 교단의 성립과정에 역할을 한 조모 김해운(莖陀圓 金海運, 1872~1959)의 신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정읍시 북면 화해리에 살던 그녀는 모악산 금산사와 대원사 등을 찾으며 미륵신앙을 깊이 믿어왔다. 그러던 중 경상북도 성주 태생으로 1918년 스승을 찾아 호남지역의 선지식을 역방하던 정산종사를 모악산에서 만나 집으로 안내하여 기도하도록 보필했다. 1918년, 이곳에 영광에서 대각(大覺, 1916)을 이루고 교화활동을 시작한 소태산 대종사가 찾아와 정산종사를 만남으로써 원불교의 창업주와 후계 종법사라는 사제가 성립되었다. 

농부인 부친 종산 김도일(鍾山 金道一) 선생과 모친 천고성화(千古城華) 여사의 3남으로 태어난 문산 김삼룡은 유시부터 총명정직하고 근면강직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의 농사일을 돕고 있던 그는 원불교 총부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할머니의 신행 관련 인연이 그의 진로를 열어준 것인데, 소태산 대종사의 문하에 든 그는 출가교역자인 전무출신(專務出身)을 서원하여 선택적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 초창기 교단의 산업부 · 보화당 등에서 근무하면서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이어가다가 학원생이 되고, 광복과 함께 교단이 교육사업을 준비하여 1946년 유일학림을 개설하자 제1기생으로 3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1949년(25세)에 득도(得度)하였다. 

감찰원 사서부 차장을 시작으로 교역에 임한 그는 원광대학이 개교한 1952년(28세) 군산교당 교무로 발령받아 2년간 근무하다가 교수 요원으로 선발되어 1954년 동국대학 불교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1956년 졸업과 동시에 원광대학 강사로 피임되었다. 이때 시작된 그의 강단 생활은 일생을 종시(終始)한다.

문산은 1959년(35세) 전임강사, 이듬해 조교수로 승진하면서 ‘포교학 개론’ 등을 강의했다. 그가 교단과 대학의 역직을 두루 거치면서 지도자로 활약한 것은 1964년(40세) 원불교중앙청년회 회장에 피선되면서부터인데, 1966년(42세) 교학처장에 임명된 이래 대학의 행정과 경영에 주력했다. 1968년(44세) 원불교 반백년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에 피임되고, 반공연맹 전라북도지부 운영위원을 시작으로 지역사회의 현안사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듬해 원불교신문사 설립과 함께 사장에 취임하고, 말레이시아의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면서 국제관계에도 발을 내디디며, 

이후 각종 종교 · 학술 행사로 자주 국제대회에 참석했다. 1971년(47세) 전라북도 도정자문위원에 위촉되면서 지역사회 전반에 걸쳐 교육 · 행정 · 사회발전 등 각종 활동을 의욕적으로 전개했다. 종합대학 승격을 위해 학내 구성원은 물론 지역사회의 유지들을 규합하여 진력하였고, 그 결과 1972년 원광대학교로 승격되면서 교무처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며, 같은 해에 전라북도 교육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73년(49세) 대학 내에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를 부설하고 연구소장에 취임했다. 이는 익산 지역이 마한 54국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건마(健馬)가 금마(金馬)로 비정되고 있고, 역내에 왕궁평 · 대소왕릉과 함께 동양 최대 규모인 미륵사지 등이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역유지들의 요청에 응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후술할 바와 같이 문산의 학문연구나 지역사회활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1974년(50세)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고, 이듬해 대만 문화대학(文化大學)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미륵사 창건에 대한 미륵신앙적 배경〉을 비롯한 미륵신앙의 연구결과를 거듭 발표했다. 이들을 통해 1976년(52세)에 전북학술대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원불교의 수위단원(首位團員)에 피선, 이리시민의 장(문화공로상) · 전북 문화상을 수상하며, 저서 《익산문화권의 연구》를 출간했다. 1978년(54세) 이리시 시정자문위원회 회장에 피선되며, 이듬해에는 전라북도 체육회 부회장 · 전라북도 지방문화재위원회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80년(56세) 원광대학교 부총장에 취임하고, 원불교교수협의회 회장에 피임되었다. 이듬해 전라북도 애향운동본부 부총재에 피선되고, 전라북도 도민의 장(문화장)을 수상했다. 1983년 한국불교학회 부회장에 피선되며, 역저 《한국미륵신앙의 연구》를 출판했다. 이듬해 이 저서로 일본 쓰쿠바대학(筑波大學)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85년(61세) 일본어판을 출판했다. 그리고 이듬해 원광대학교 총장과 함께 부설 원불교사상연구원장에 취임하여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 대학경영을 담당했다.

문산은 총장에 취임한 후에도 여전히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 소장을 겸하였다. 백제 왕도와 관련된 익산 지역 일대를 끊임없이 발굴하고 학술대회를 개최하면서 연구지와 조사보고서를 제출했다. 국립문화재연구원 등 국가기관에서도 관련 지역을 발굴 조사하여, 다양한 유물이 속속 출토되었다. 1987년(63세)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전라북도 애향운동본부 총재에 취임했으며, 이듬해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90년(66세)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서울평화교육센터 이사장에 취임하고, 이듬해에 원불교 종사위 법훈을 수증했다. 1993년(69세) 한국사상사학회 회장, 책 읽는 나라 만들기 추진위원장을 맡고,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회 공동회장에 취임했다. 이듬해에 모스크바대학에서 명예 철학박사를 취득하고,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공동대표를 맡았다. 1995년(71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하고 원불교학회 초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전라북도 어른상을 수상했다. 특히 지역사회의 어른으로 새만금간척사업, 이리시와 익산군의 도 · 농 통합에 의한 익산시의 탄생 등 각종 현안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리고 2000년(76세)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수행했다. 

   

익산역사 유적 관련 국제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하는 김삼룡 박사(2010)

문산은 퇴임 후 원불교 원로수도원에 유숙하면서 저서 출간, 회고록 작성, 선진들의 현창사업 등에 시간을 보내면서도 익산의 백제문화권 개발에 꾸준한 관심과 함께, 익산의 서동(薯童) 축제를 통하여 경주와 자매교류 추진에 앞장서는 등 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1973년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의 설립과 함께 미륵사지 발굴을 시작하고부터 30년이 지난 2004년(80세), 마침내 익산은 고도(古都)로 지정받게 되었다. 2007년(83세) 익산사랑장학재단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2009년(85세) 익산시 백제문화지킴이 추진위원장에 취임했다. 이 모임이 익산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운동으로 이어졌으며, 2014년(90세) 원불교 개교 100년을 내다보는 시기에 열반에 들었는데, 그 이듬해에 문화유산으로 등재가 이루어졌다.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에서 발의한 이 사업이 공주 · 부여와 공동으로 등재되는 결실을 보게 되었으니, 문산이 뿌린 씨앗이 마침내 결실을 가져온 것이다. 

 

2. 백제문화 탐구에서 미륵신앙 연구로

문산의 학문연구는 명쾌하다. 익산지역의 백제유적 발굴조사에서 비롯하여 미륵신앙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원불교 사상이나 익산지역의 문화에 관한 연구가 없지 않지만, 이들 또한 미륵신앙과 직접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의 사상은 조모의 신행으로부터 비롯된 인연 덕분에 종교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곧 원불교에 대한 새 회상관(會上觀) 위에 전개된다. 그는 말했다.

대종사님 설법 가운데도 우리나라와 세계의 전망, 용화회상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 때 춤을 많이 추었다. 최도화 선진이 “이 세상에 미륵불의 출세와 용화회상의 건설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사람이 많사오니 미륵불은 어떠한 부처님이시며 용화회상은 어떠한 회상이오니까?”라고 여쭈니, “미륵불이라 함은 법신불(法身佛)의 진리가 크게 드러나는 것이요, 용화회상이라 함은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의 대의가 널리 행하여지는 것이니라.”라 답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미륵신앙관이 곧 그의 신앙관이며, 그가 익산의 미륵사를 중심으로 한 미륵신앙 내지 익산의 고대문화에 관심을 갖는 연유이다. 그가 남긴 〈잠언(箴言)〉에는 이러한 신앙관이 잘 나타나 있는데 다음과 같다.

萬有何處來   만유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來從母胎來   오되 모태에서 좇아 왔고
去向母胎去   가되 모태를 향해 간다
萬古如如法   만고에 여여한 법
願生龍華會   원컨대 용화회상에 나서
直遇彌勒佛   미륵불을 만나리라.

그는 여러 저술을 남기고 있는데 주요 논문은 다음과 같다.

① 〈마한 · 백제문화의 어제와 오늘〉 《원광문화》 12, 원광대학교, 1975 
② 〈미륵사 창건에 관한 미륵신앙의 배경〉 《마한 · 백제문화》 1,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 1975
③ 〈고대 익산지역 수로고〉 《논문집》 10, 원광대학교, 1975
④ 〈백제의 익산천도와 그 문화적 성격〉 《마한 · 백제문화》 2, 1977
⑤ 〈백제 미륵사상의 역사적 위치〉 《마한 · 백제문화》 4 · 5, 1982
⑥ 〈익산문화권 연구의 회고와 전망〉 《마한 · 백제문화》 6, 1983
⑦ 〈미륵사상과 정 · 상 · 말 삼시사상〉 《마한 · 백제문화》 7, 1985
⑧ 〈근대한국의 미륵사상〉 《한국근대종교사상사》 박길진기념간행위원회 편, 원광대출판국
⑨ 〈일제하 교단의 수난〉 《원불교칠십년정신사》 성업봉찬회 편, 원불교출판사, 1989
⑩ 〈소태산대종사의 인간상〉 《인류문명과 원불교사상》 성업봉찬회 편, 원불교출판사, 1991
⑪ 〈미륵신앙의 원류와 전개〉 《마한 · 백제문화와 미륵사상》 김삼룡기념간행위원회 편, 원광대출판국, 1994
⑫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본 익산-수로교통로를 중심으로〉 《마한 · 백제문화》 15, 2001
⑬ 〈익산문화권의 형성과 배경〉 《익산의 선사와 고대문화》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 편, 익산시, 2003
⑭ 〈익산 미륵사 창건의 배경〉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 편, 같은 책
⑮ 〈익산의 선사와 고대문화〉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 편, 같은 책

이들 가운데 ⑨와 ⑩의 원불교 관련 논문을 제외하면, 모두 익산의 미륵사와 그와 관련된 미륵사상이 전부이다. 그가 전국의 미륵신앙 현장을 샅샅이 찾아 거듭 답사하면서도 발표논문은 익산의 미륵사를 중심으로 한 미륵사상에 집중되고 있다. 

예컨대 ③과 ⑫에 주목해 보면, 이는 미륵사와 왕궁평에 이르는 수로(水路)에 대한 연구이다. 익산지역은 백제의 고도이면서도 오랫동안 농촌 지역으로 남아 있다가, 1912년 호남선을 개통하면서 현재의 역세권(驛勢權)을 중심으로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인 당시 미작(米作) 정책을 중심으로 수리조합 등이 생겨나면서 1925~1937년까지 만경강의 직강호안(直江護岸) 공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완주의 경천저수지가 완공되면서 1933~1935년까지 호남지역의 분기점을 이루던 황등제호(黃登提湖)를 메워 폐호하고 있다. 따라서 백제 시대에 통행하던 물길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문산은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백제왕궁과 미륵사에 이르는 교통로를 고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음을 말해준다. 이는 물론 문산 학문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미륵신앙의 메카인 익산 미륵사를 중심으로 한 연구로 귀결된다. 

이는 그의 저서에도 같은 경향으로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다. 

① 《원불교》(공저) 원광대출판국, 1973
② 《익산문화권의 연구》 원광대출판국, 1977
③ 《한국미륵신앙의 연구》 동화출판공사, 1983
④ 《韓國彌勒信仰の硏究》(日文 저서) 敎育出版センータ, 1985
⑤ 《창조를 위한 여백》 동화출판공사, 1985
⑥ 《미륵불》(공저) 대원사, 1991
⑦ 《동방의 등불 한국》 행림출판사, 1994
⑧ 《봉황과 더불어》 원광대학교, 1994
⑨ 《생불님의 함박웃음》 원불교출판사, 2000
⑩ 《전무출신으로 살았습니다》(회고록) 원불교출판사, 2014

이 가운데 ⑩은 회고록, ⑧은 의식사 모음집이다. ①과 ⑨는 원불교 관련이며, ⑤와 ⑦은 수상집이다. 그리고 ②-④와 ⑥이 백제의 익산 천도와 미륵사 그리고 미륵신앙을 다룬 것이다. 그리고 ⑦은 한국의 산하대지와 먹거리 · 자랑거리, 한글과 태극기 등의 각종 대표적인 사항을 7개 부문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미륵반가사유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륵신앙을 중심으로 한 문화 바탕 위에 한국문화를 한국문화의 심오하고 깊은 상징적인 바를 고찰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기념논집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문산의 화갑 · 고희를 기념한 논집으로, 다음과 같다.

① 《한국문화와 원불교 사상》 김삼룡기념간행위원회 편, 원광대출판국, 1985
② 《소태산대종사와 원불교 사상》 김삼룡기념간행위원회 편, 원광대출판국, 1994
③ 《마한 · 백제문화와 미륵사상》 김삼룡기념간행위원회 편, 원광대출판국, 1994
④ 《미륵사상의 본질과 전개》 한국사상사학회 편, 서문문화사, 1994

이 논집들에서는 그가 소속된 원불교의 교의사상과 연구 분야인 마한 · 백제문화와 관련된 미륵사상이 주제로 드러나고 있다. 

①은 화갑기념 논집으로, 한 · 중 · 일 삼국 연구자들의 논고 47건을 전후 5편으로 나누어 실었다. 1편은 총괄 2건, 2편은 선사 · 백제문화 13건, 3편 불교사상 13건, 4편 원불교 사상 14건, 5편 기타 문화 · 사상 5건이다. 박길진 총장은 〈하서〉에서 “문산의 학문적 관심이 미륵사상을 향해 있는 것도 흥미롭다. 이것은 문산이 미래를 향한 무한한 희망을 지니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단순히 희망이라기보다는 인류의 미래가 광대한 불국토(佛國土)로 화하길 바라는 불타는 서원(誓願)의 징표일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②는 고희기념 논집으로, 원불교 관련 29건의 논고를 3편으로 나누어 실었다. 1편 소태산대종사의 인간과 사상에 12건, 2편 원불교 사상의 구조와 전개에 10건, 3편 원불교 사상의 사회적 대응에 9건을 실었다. 이들은 화갑논집의 두 주제 가운데 하나로, 문산의 신앙과 학문의 지반이라 할 수 있다. 

③도 고희기념 논집으로, 마한 · 백제문화와 미륵사상에 관한 42건의 논고를 3편으로 나누어 실었다. 1) 마한 · 백제문화편에 15건, 2) 익산문화권과 백제사상에 11건, 3. 미륵사상편에 16건이 배치되었다. 화갑논집의 두 주제를 ②와 나누어 편집한 셈이다. 

④ 역시 문산의 고희기념 논집으로, 한국사상사학회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그의 연구분야와 관련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이에 발표된 11건의 논고를 모아 엮었다. 미륵사상의 원류와 본질, 그리고 전개를 다루고 있는데, 한 · 중 · 일 삼국의 미륵신앙과 그 사상이 갖는 성격까지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문산이 진행해 온 연구주제를 학계 관련자들이 나누어 다룸으로써 연구 진행의 현단계를 적실히 보여주고 있다.

 

3. 한국 미륵신앙 현장을 통괄하는 조사연구

   

《한국미륵신앙의 연구》(1983)

문산의 미륵신앙 연구의 결과는 전술한 역저 《한국미륵신앙의 연구》14)에 집약되어 있다. 이의 일본어판은 일본의 미륵신앙 현상 등을 보정하였다. 미륵신앙의 원류와 역사, 그리고 현상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그가 조사 · 발굴해 낸 자료를 풍부하게 싣고 있다. 전국의 석불을 대상으로 전수조사하는 작업을 펼쳤고, 그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대만, 홍콩, 일본의 신앙현장도 섭렵했다. 사진자료와 분포도 등을 싣고, 관련한 사상을 경전에서 지역적 특성까지 고찰하였다. 

그는 “우선 관련 문헌자료를 찾아야만 하였고 또한 현장에 널리 펼쳐져 있는 민간신앙적 자료도 찾아야만 했다. 이처럼 미륵신앙 연구를 위한 자료조사를 하는 동안 특히 현지조사를 통하여 필자의 심금을 크게 울린 것은 어느 불교 신앙보다도 미륵신앙이 민중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라고 밝혀, 미륵신앙이 민중층을 바탕으로 전통사상의 형성 ·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저서는 권두에 미륵신앙 관련 주요 도판을 싣고, 전권을 8장과 부록으로 구성하였다. 1장 총론은 미륵신앙의 기원, 미륵신앙의 성립과 그 전개, 2장 삼국시대 미륵신앙과 그 역사적 위치는 고구려 · 백제 · 신라 삼국의 미륵신앙의 역사적 위치를 논하였다. 3장 백제 미륵신앙과 계율사상은 계율주의적 백제불교가 미륵신앙을 발전시킨 바를 논하고, 4장 백제 미륵신앙의 특성과 그 역사적 전개는 율령사회에서 미륵사를 창건하고 미륵신앙을 전개한 바를 논하였다. 5장 고려 미륵신앙의 전개는 불교의 호국적 전개 속에 미륵신앙의 경향을 논하고 특히 구(舊) 백제 지역의 미륵신앙 현상을 밝혔다. 6장 조선시대의 미륵신앙과 그 전개과정은 숭유억불정책과 미륵신앙, 그리고 미륵신앙의 민간신앙적 요소를 다루고, 7장 구한말 신흥종교의 발생과 미륵신앙의 역할은 구한말의 사회변동과 신흥종교의 발생, 신흥종교에 나타난 미륵신앙의 특징을 밝혔다. 

   

《미륵불》(1991)

8장 한국 미륵신앙의 특질은 결론으로, 인도 · 중국 · 한국 · 일본 각국의 미륵신앙이 갖는 특징을 논하고 있다. 인도의 경우가 미륵경전을 바탕으로 한 원류라면, 중국의 경우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을 미륵으로 숭배함으로써 역사적 신앙의 특징을 띠었고, 일본의 경우는 한국의 미륵신앙이 전파되었으나 큰 유행이 없었던 것으로 본다. 따라서 미륵신앙이 왕성하게 전개되고 신앙된 곳은 한국이며, 특히 백제의 미륵사를 중심으로 한 미륵신앙과 그 흐름이 중핵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본문에서도 백제의 미륵사상을 세밀하게 다룬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이다. 

부록의 한국 미륵신앙 자료는 1) 자료개관에 이어 2) 미륵신앙의 분포현황을 한국과 일본으로 나누어 실었다. 전국의 행정구역에 따른 미륵신앙의 분포 도표를 작성하여 장소 · 불상 형태 · 방위 · 입지 관계 · 신앙 형태 · 제작 시기 · 현상 · 크기 등을 전수조사하고 있어, 미륵신앙 현장을 통괄한 의미가 드러난다. 3) 한국 미륵신앙 분포도(分布圖)는 남한 지역의 지도에 현황을 제시하고 있다. 4) 본문자료는 주요 미륵 사진자료와 5) 현존하는 미륵신앙 조사자료는 한국 · 일본 · 대만 · 홍콩으로 나누어 사진자료를 제시하였다. 모두가 현지를 방문하여 작성한 자료이므로 미륵신앙의 제 현상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간 한국 미륵사상에 관한 연구는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관 · 학 · 연 어디에서도 신앙 현상의 전체를 망라 · 섭렵하여 조사 · 정리한 경우는 없다. 이를 문산은 오랜 기간에 걸쳐 통괄 · 조사하여 저서로 정리했으며, 관련 지역과 사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보완하였다. 그 가운데 익산 미륵사지의 발굴과 동탑(東塔)의 재건, 지명(知命) 법사가 주석하던 사자사(獅子寺)의 재건을 이루고, 이 미륵신앙의 현장인 미륵사와 왕궁평을 중심으로 고도(古都) 지정을 받아내고, 마침내 백제역사문화지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도록 이끌었다. 이와 함께 새만금 간척지가 지역갈등을 유발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전라북도에서는 그를 진정한 어른으로 우러른다.

필자는 원광대학교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 창립 당시의 학술대회에 이웃 연구소 조교로 이에 조력하고, 1983년 이후는 통역 등을 통해 문산과 함께해 왔다. 최초의 학술대회 때 문산이 고대의 천도(遷都)에 대해 질문하자, 동국대학교 총장 황수영(黃壽永, 2018~2011) 박사가 이에는 왕궁터 · 산성 · 사찰 · 왕릉의 네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하는데, 익산은 왕궁평에서 궁터가 발견되었고, 오금산성을 비롯하여 주변에 산성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양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가 있고, 대왕릉 · 소왕릉이 가까이 있어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비정되기 때문에 고도가 틀림없다고 답하였다. 

문산은 이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간직하면서, 조선시대의 서민 사이에 유행한 미륵신앙 형태에 대해서도 분명한 견해를 보였다. 미륵은 특히 노불(露佛)이며 입상(立像)인데, 석가불 다음에 나올 부처이므로 밖에 서 있고, 밖에 있으니 석불(石佛)이며, 또한 민간에서 조성하므로 형태를 따지지 않는 무정형불(無定型佛)이라는 것이다. 한국 미륵신앙의 현장을 지킨 연구자로 깊은 통찰력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4. 문산의 미륵신앙과 그 사상

그려면 문산의 미륵신앙과 그 사상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미륵신앙은 미륵삼부경인 《미륵상생경》 《미륵하생경》 《미륵성불경》에 바탕하고 있지만, 초기경전 · 대승경전에 두루 나타나 있다.

미륵신앙은 이들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 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의 두 길로 제시되고 있다. 상생신앙은 지극한 미륵신앙을 통하여 죽은 후에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에 왕생(往生)하여 받들다가, 불멸 후 56억 7천만 년을 보낸 뒤 미륵보살이 하생할 때 함께 지상에 내려와 인간의 몸으로 성불하여 용화회상(龍華會上)의 3회 설법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이다. 하생신앙은 미래세상에 용화회상의 3회 설법을 듣게 되는 인연을 얻어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이다. 상생신앙이 적극적 신앙인 데 비하여 하생신앙은 소극적 신앙이지만, 미륵정토인 용화회상을 중심으로 보면 미륵이 출세하여 성불을 이루고 인간을 구제하는 법회를 여는 데 초점이 모인다. 법회는 당래세(當來世)에 인간수명이 8만4천 세를 살며, 성품은 인화하고 고루 십선업(十善業)을 닦는데, 인간으로 태어난 미륵보살이 용화수 아래서 성불한 미륵불로서 화림원(華林園)에 모인 대중에게 경을 설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제1회의 설법에 의하여 아라한(阿羅漢)을 얻는 이가 96억 명, 제2회 설법에 의하여 아라한을 얻는 이가 94억 명, 제3회의 설법에 의하여 아라한을 얻는 이가 92억 명으로, 이들 법회를 일러 용화삼회라 한다.

문산은 이 염부제(閻浮提)로 불리는 인간계에서 이루어지는 미륵보살의 출세와 성불, 그리고 3회 설법을 중시한다. 여기서 경전에 설하는 불멸 후 56억 7천만 년은 유한한 인간에게는 매우 만나기 어려운 유구한 세월인데, 이를 법의 흥망과 결부시켜 정 · 상 · 말 삼시사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그는 “미륵이 미래세에 하생한다는 그 시기를 말법(末法)시대로 상정하고 이와 같은 말법사상과 미륵신앙이 결부된 역사가 전개되었는데, 말법사상이란 불멸 후 일정 기간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이 서로 병행하여 사람들이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며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하는 정법(正法)시대가 계속되나, 이윽고 얼마 후에는 교와 행만이 남고 증이 없는 상법(像法)시대가 되고, 또 다음에는 교만 있고 행도 증도 없는 불법의 쇠퇴와 함께 인심이 악화하고 악사(惡事)가 횡행한다는 말법시대가 온다고 하는 사상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고대 한국에서 제작된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

그런데 삼시사상은 정 · 상 · 말 삼시를 각 5백 년으로 보는 설에서부터 각 천 년, 혹은 5백 · 5백 · 만 년으로 보는 설 등 여러 가지인데, 문산은 이를 각 천 년으로 보고 현대를 미륵출세의 시기로 상정하고 있다. 예컨대 한국 미륵사상의 전개를 불교가 전래한 삼국시대 율령사회의 사회윤리, 신라 이후의 정치 및 혁명사상, 그리고 조선 이후의 이상사회 건설이념이라는 3단계로 파악하고, 그 세 번째 단계에서 특히 근대사회에서 미륵신앙이 두드러지게 나타남은 한국적 특징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문산은 미륵사가 있는 익산 지역을 미륵신앙의 메카로 보면서 주변 지역을 수없이 답방하였다. 그리고 미륵사를 세워 백제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던 무왕의 꿈은 백제 멸망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그 신앙이 민중층에 뿌리내려 확산하는 특징을 가졌다고 본다. 그리하여 미륵사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미륵도량 모악산 금산사와 북쪽으로 은진미륵의 반야산 관촉사, 넓혀져 남쪽으로 선운산 선운사와 북쪽으로 속리산 법주사, 그리고 더 넓혀져 남쪽으로 일본과 북쪽으로 금강산 발연사로 확대되었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역사적으로 근대 한국의 미륵신앙이 신종교와 관련되어 특히 호남지역에 분포된 것 또한 범연히 볼 수 없다고 같은 논문에서 주장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의 국보 1호인 교토 우즈마사의 광륭사(廣隆寺) 미륵반가사유상은 불교예술의 극치로 불린다. 불교이념의 상구보리(上求菩提)는 명상(瞑想, meditation)으로, 하화중생(下化衆生)은 미소(微笑, smile)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존철학자 야스퍼스(K. Jaspers, 1883~1969)는 이 미륵상을 참배하고, 특별한 감회를 간직하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인간 존재의 가장 완성된 모습의 표징(表徵)으로, 갖가지 모델에 접해 왔다. 고대 그리스 신들의 조상(彫像)도 보았고,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많은 뛰어난 조상도 본 일이 있다. 그러나 그들 어디에나 아직 완전히 초극(超克)되지 않은 지상적 인간적인 것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이지(理智)와 미(美)의 이상을 표현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조상에도 지상적인 때와 인간적인 감정이 아직 어디엔가 남아 있었다.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을 표현한 로마 시대의 종교적인 조상에도 인간 존재의 정말로 정화(淨化)된 기쁨이 완전히 표현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어느 것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아직 지상적인 감정의 때를 남긴 인간의 표현이며, 진실로 인간 존재의 궁극에까지 도달한 모습의 표징은 아니었었다.

그런데, 이 광륭사의 미륵상에는 실로 완성된 인간 존재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모든 시간적인 것, 속박을 넘어선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가장 원만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까지 수십 년간의 철학자로서 생애 중에, 이만큼 인간 존재의 진실로 평화한 모습을 표현한 예술품을 본 일이 아직 없었다. 이 불상은 우리 인간이 가진 마음의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실로 남김없이 최고도로 나타내고 있다.

 

미륵반가사유상을 통하여 실존, 즉 맑고 향기로운 인간본질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야스퍼스는 감동하고 있다. 그런데, 문산은 이 사유상이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분명히 했다. 현지를 방문하여 살피면서 조성된 재료에서부터 광륭사에서 숭신하는 과정까지를 하나하나 짚고 있다.23) 미륵신앙이 인간의 궁극적 이상향을 집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광륭사의 미륵반가사유상은 고대 한국인이 염원했던 미륵신앙의 한 표현이며, 그러한 염원이 오늘의 일본인들에게도 전승되고 있는 셈이다. 

문산은 이러한 미륵신앙의 사례를 국내외를 통괄하여 하나하나 밝혀 정리하고, 그 배후에 나타나는 사상을 고찰하고 있다. 따라서 미륵신앙은 그의 삶의 원천이며 학문과 사상의 구극처로, 자신은 그러한 미륵신앙자로 생애를 종시한 것이다. ■

 

양은용
원광대학교 명예교수. 원광대 및 동 대학원 졸업. 일본 교토불교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한국불교사상사 전공으로 원광대 한국문화학과 교수, 한국종교학회장 등 역임. 주요 논저로 〈한일양국의 미륵상조성과 미륵사주불〉 〈신라 심상과 일본의 화엄학〉 등의 논문과 《한국근대사상사탐구》 《한국학 여명기의 인물과 학문》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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