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 앎의 대상은 크게는 우주의 기원이고, 작게는 인간 자체였다. 종교는 그런 인간의 욕구에 부응해야 했다. 브라만의 창조설, 슈라마나의 적취설(積聚說), 불교의 연기설(緣起說), 구약의 천지창조와 아담과 이브의 탄생 신화 등은 모두 우주의 기원과 인간 존재에 대한 종교적 응답이었다.
불편한 관계로 지내왔던 과학과 종교
문제는 각 종교의 성전이 사제들의 전유물이 되면서 진리 담론을 오랫동안 종교가 독점한 것이다. 진리 담론이 종교적 권위의 영역이 되면 진리는 사실이 아니라 신념의 문제가 되고, 그때 종교는 진리 담론의 생산자가 아니라 장애물로 돌변한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크게 두 가지 영역에서 과학과 대립 관계를 형성해 왔다.
첫째, 우주론에서 지오센트릭과 헬리오센트릭의 충돌이다. 중세 교회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을 옹호했다. 사실 지오센트릭은 교회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등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중세까지 여러 학자의 지지를 받았다. 당대까지는 그것이 최선의 이해였기에 교회도 그 입장을 채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상황은 변했고, 갈릴레이 역시 그의 학설을 지지했다. 지동설은 교회에 맞서는 것이었기에 그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갈릴레이의 등장은 진리 담론을 독점하던 종교가 과학이라는 새로운 전통의 도전에 직면했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둘째, 생명론에서 창조설과 진화론의 충돌이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인간과 생명에 대한 교회의 주장과 대치되었다. 모든 생명은 자연선택에 의해 점진적으로 발전했다는 진화론은 생명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창조론과 상반되었기에 충돌은 자명했다. 이런 충돌은 근대까지 이어졌다. 1925년 미국 테네시주에서는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에 맞섰던 존 스코프스는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 재판에서 창조론을 변호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세 번이나 대선후보로 나섰던 기독교 원리주의 정치인이었다. 창조론도 천동설처럼 교회가 설파한 인식이었고, 주류 사회의 담론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교회가 아무리 과학적 사실을 부정해도 세상은 기어이 바뀌었다. 바야흐로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만이 진리로 군림하는 시대가 되었다. 종교가 진리를 독점하던 시대에서 과학이 진리를 독점하는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와 과학의 관계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서구의 사례와 달리 불교가 과학과 갈등을 빚은 사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불교와 과학의 역할은 모두 우주와 인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사대설과 오온설은 인간과 존재에 대한 분석적 설명인데, 이는 과학적 방법론과 대치되지 않는다. 나아가 연기설과 공사상은 모든 존재는 개체적 실체가 없으며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교설로 생태학과 견해를 같이한다.
무엇보다 붓다는 세상을 창조하거나 원리를 창조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붓다는 세상의 진리를 ‘깨달은 자[Buddha]’로 불린다. 붓다가 깨달은 법은 여래가 이 세상에 오든 오지 않든 항상 법계에 있다[法住法界]는 것이 불교의 관점이다. 붓다는 존재의 원리인 그 법성(法性)을 깨달은 분이다. 따라서 과학적 탐구를 통해 존재의 실상에 다가가고, 그런 과정에서 얻은 지혜를 불교에서 배척할 어떤 이유도 없다.
불교와 과학의 조화가 가져올 효과
아인슈타인은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고,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라고 했다. 이는 화엄에서 믿음[信]과 바른 앎[解]이 한 쌍을 이루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믿음 없는 앎은 ‘마른 지혜[乾慧]’로 삶을 윤택하게 하지 못하며, 지혜 없는 믿음은 장님과 같아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믿음과 지혜가 조화를 이룰 때 바른 믿음이 되듯 종교와 과학도 조화를 이루어야 인간과 사회에 도움이 된다. 불교와 과학이 우호적 관계로 지낸다면 다음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 불교 교리와 사상을 보완할 수 있다. 우주의 기원과 생명에 대한 종교의 설명은 그 깊이에도 불구하고 정체되어 있다. 각 종교의 성전은 수천 년 전에 편찬되었기에 새로운 설명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종교는 교리를 독점하고, 독단화하여 새로운 학설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과학은 모든 이에게 진리로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열어 주고, 그들이 발견한 학설로 이론을 갱신하는 열린 전통이다. 다행히 불교는 진리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일례로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을 강조한다. 이는 고정불변하는 어떤 진리가 있다고 고집하지 않음을 뜻한다. 확정된 진리가 있다고 고집하는 순간 그것은 독단이 되고, 진리에서 이탈하게 된다. 따라서 진리를 고정된 교리에 가두지 않고, 경전에 기록된 것만이 진리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불법은 곧 불법이 아니다(佛法者 卽非佛法).”라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티베트의 정신적 스승 달라이 라마도 과학과 불교의 대화를 지지해 왔다. 달라이 라마는 1987년부터 시작된 ‘마인드 앤드 라이프 회의’를 통해 물리학, 생물학, 신경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과 함께 두 전통의 소통을 도모해 왔다. 과학적 지식이 불교 사상을 더욱 건강하게 하고, 불교의 지혜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둘째, 과학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 과학은 대상을 관찰하며 세계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문제는 과학적 연구와 지식이 곧 인간과 생명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적 지식이 되려 인간과 생명을 불행으로 내몬 사례는 무수히 많다. 원자물리학은 과학적 진보였지만 인류에게는 큰 재앙이었다. 앎 자체를 추구하는 과학은 윤리를 담보하지 못하며, 그 결과에도 책임지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불교는 고(苦)로부터 해탈을 추구하고, 궁극적으로 인간과 생명의 행복을 지향한다. 과학이 대상에 대한 앎 자체만을 추구한다면 불교는 앎의 윤리성과 생명에게 미칠 이익을 중시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과학의 윤리성을 제시할 수 있고, 이는 세계에 대한 해석만을 추구하는 과학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 F. 베이컨은 “약간의 과학은 무신론자로 만들지만, 더 많은 과학은 신앙으로 되돌린다.”라고 했다. 과학을 깊이 이해할수록 종교로 돌아와야 할 이유가 많아진다. 과학적 지식은 윤리와 감성을 갖추지 못한 절름발이이므로 종교와 만나야 비로소 생명의 행복을 위한 과학으로 완성될 수 있다.
셋째, 내면의 정보와 외부 정보의 통합을 얻을 수 있다. 과학은 우주와 객관 대상처럼 밖에서 답을 찾는 ‘외부로 가는 길’이다. 반면 불교는 마음을 탐구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 ‘내면으로 가는 길’이다. 불교를 ‘내면의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과 생명의 평화를 위해서는 외부 정보만으로 불가능하다. 동시에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면 정보만으로도 부족하다. 따라서 내면을 탐구하는 불교의 지혜와 외부를 탐구하는 과학적 지식의 조화가 필요하다. 이처럼 불교와 과학은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과 생명을 위해서는 상호 보완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처음부터 결정된 것은 아니다. 그 관계는 종교의 태도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 종교가 교리를 독단화하고, 과학적 성과를 거부하는 닫힌 전통이 된다면 역사적 사례가 보여주듯 둘의 관계는 적대적 관계가 될 것이다. 반면 교리에 갇히지 않고 과학적 성과로 교리를 재해석하는 열린 전통이 된다면 과학과 종교는 친구로 지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와 과학이 적대적인지 우호적인지의 문제는 과학을 바라보는 불교의 태도에 달려 있다. 이번 호에서 마련한 특집 내용이 불교와 과학의 바람직한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2024년 9월
서재영(본지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