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미타를 향한 일심의 시학

저자소개 : 정효구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 ·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는 《상상력의 모험 : 80년대 시인들》 《맑은 행복을 위한 345장의 불교적 명상》 《일심(一心)의 시학, 도심(道心)의 미학》 《한용운의 《님의 침묵》 전편 다시 읽기》 《붓다와 함께 쓰는 시론》 《신월인천강지곡(新月印千江之曲)》 《님의 말씀》 《다르마의 축복》 등 다수가 있다. 현대불교문학상 수상.

 

1. 불교시학에 이르는 길

정효구✽의 《불교시학의 발견과 모색》(2018)은 1985년 등단 이후 30여 년간 쉼 없이 이어진 저자의 시와 삶에 대한 드넓은 성찰의 산물이다. 평론가이자 문학연구자로서 저자는 우리 시의 현장과 역사적 궤적을 넘나들며 참으로 많은 글을 써왔다. 종횡무진에 가까운 왕성한 현장비평과 광범위한 학문적 연구만으로도 대단한 일인데, 언제부터인가 저자는 자신만의 사상과 독자적인 시학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아니 어쩌면 그토록 치열한 탐사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모색 끝에 이르고자 하는 궁극의 지점이 더욱 간절했으리라 생각된다. 

2007년 《한국 현대시와 평인(平人)의 사상》을 기점으로 하여 정효구의 시학은 변화한다. 문학을 현상적으로 살피는 데서 나아가 중심된 사상을 통해 그것을 새롭게 조명하는 데 힘쓰게 된다. 현실을 관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문학을 통해 파악한 이 시대의 삶이 너무나 불합리하고 위태롭게 여겨져 이런 상황을 그대로 보고만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길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시를 읽는 것만으로는 현실의 대안을 찾기가 어려웠던 저자는 동양의 경전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된 유불선의 경전 공부는 점차 불교 경전으로 집중된다. 다양한 불교 경전에서 저자는 자신이 꿈꾸던 아름답고 참다운 정신의 경지를 발견하고 심취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악화 일로에 있는 인간사의 질곡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중생심(衆生心)’을 벗어나야 한다는 깨달음을 근간으로 새로운 시학을 시도하게 된다.

그 첫 성과인 《한국 현대시와 평인(平人)의 사상》(2007)을 비롯하여 《마당 이야기》(2009), 《맑은 행복을 위한 345장의 불교적 명상》(2010), 《일심의 시학, 도심의 미학》(2011), 《한용운의 《님의 침묵》 전편 다시 읽기》(2013), 《신월인천강지곡》(2016), 《님의 말씀》(2016), 《다르마의 축복》(2018) 등 많은 저서에서 저자의 저술 활동은 더욱 확장되고 자유로워진다. 평론이나 논문 외에도 시와 산문 등 다양한 형식으로 불교적 성찰의 결과를 표현하게 된다. 

《불교시학의 발견과 모색》은 저자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불교적 성찰이 도달한 현재의 지점이며, 구체적으로는 《일심의 시학, 도심의 미학》을 잇는 학술적 성과물이다. 이 책에 이르러 저자는 드디어 ‘불교시학’이라는 사용하기로 한다. 지금까지가 불교시학에 이르기 위한 모색 단계였다면 이제 좀 더 분명하게 ‘불교시학’을 앞세우고 이를 자신의 중심 사상이자 시학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다. 제목에 걸맞게 이 책은 근대시와 시학의 비판적 대안으로서 불교시학의 가치와 가능성을 보여주는 역작이다. 

 

2. 감동과 발견의 시학을 위하여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불교시학의 심층’에서는 불교시학의 근본원리를 설명하는 원론적인 글들과 그것의 시학적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탐색한 글들이 주를 이룬다. ‘제2부 불교시학의 확장’에서는 불교시학과 관련하여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시와 사유에 관해 폭넓게 조명하고 있다. 

불교시학의 원론에 해당하는 〈일심(一心) 혹은 공심(空心)의 시적 기능에 관한 시론(試論)〉과 〈‘시적 감동’에 관한 불교심리학적 고찰〉에서는 시에서 느끼는 ‘감동’의 특성을 불교심리학적으로 밝혀낸다. ‘시적 감동’의 해명은 저자가 불교를 공부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고 불교시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해나가고자 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저자가 ‘시적 감동’의 특성과 원인을 본격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감동’과 유사한 감정들을 구분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저자의 구분에 의하면 공감에는 자아중심적 유아(唯我)가 느낄 수 있는 이해, 생각 이입과 감정 이입, 애호, 감격과 통쾌가 있고, 자아초월적 무아(無我)가 느낄 수 있는 납득, 감탄, 전율, 감동이 있다. 감동은 자아초월의 공감 중에서도 최고의 상태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무화되면서 일심과 공심에 이르는 길이다. 감동은 영적 공감이기 때문에 이성과 자아중심성이 자리 잡은 근대 사회와 근대시에서는 만나기 힘든 감정이다. 저자는 감동에 이르는 시의 저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비심, 대아심, 공심, 일심, 영원성 등 인간 심층에 내재하는 고차원의 마음 작용을 회복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 고차원의 마음 작용에 이를 수 있을까? 원론에 해당하는 앞의 두 편의 글에 이어지는 한용운, 구상, 이승훈, 조오현, 최승호, 정일근의 시에 대한 각론이 그 구체적인 탐구에 해당한다. 

저자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고제(苦諦)의 자각에서 견성 혹은 정견에 이르는 상구보리(上求菩提)의 과정을 거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자비심에 도달하면서 고액의 해결을 성취하는 치유의 과정으로 새롭게 파악한다. 구상 시집 《그리스도 폴의 강》에서 ‘화쟁(和諍)’의 상생적 세계를 발견한 것은 구상의 삶에 대한 포괄적 이해와 여러 종교에 대한 편견 없는 사유가 작동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동안 주로 해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을 실천한 시인으로만 평가되었던 이승훈의 시를 소아에서 무아로, 업아(業我)에서 묘아(妙我)로 변화해간 자아탐구의 과정으로 파악한 것도 흥미롭다. 

승려인 조오현의 연작시 〈절간 이야기〉에서는 사찰 본연의 폐쇄성과 세속을 향한 개방성이 구현된 특수한 장소성을 읽어낸다. 최승호의 《달마의 침묵》은 그간 산문집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시집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난해하고 새로운 이 시집의 형식과 사유에 천착하여 그 의미를 밝혀낸다. 정일근의 시에서는 무심(無心)과 무사(無事)의 경지에 이른 평화와 자유의 삶을 발견하고 공감한다. 이밖에 〈한국 현대문학에 그려진 원효(元曉)의 삶과 사상〉도 매우 흥미로운 글이다. 저자는 신라인인 원효가 근대와 후기 근대 내내 여러 소설 속 주인공으로 호출되면서 당대 삶과 조응하는 현재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앞으로도 불교인으로서 원효로부터 리얼리티의 새 지평을 열어갈 수 있으리라고 예측한다.

2부에서도 저자는 풍부한 불교 지식으로 다채롭고 깊이 있는 시 해석을 시도하고 근대 물질문명의 한계에 부딪힌 우리 시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 거시적 차원에서 근대시는 카르마 즉 유아(唯我)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며, 카르마를 넘어서는 다르마 즉 무아(無我)의 세계는 영원성의 시학으로 구현되었다고 본다. 파라미타 즉 대아(大我)의 세계에서는 공심(空心)이 공심(公心)으로, 분별심(分別心)이 일심(一心)으로 전변하는데, 이러한 단계에서 감동의 시학이 가능해진다. 감동의 시학은 이기적 자아와 도시 문명 속에서 협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피로를 넘어서 전체성과 전체상에 대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의 마지막 글에서는 흥미롭게도 저자 자신의 30여 년에 이르는 글쓰기의 여정을 서술한다. 성경의 ‘에덴동산’과 바슐라르의 ‘무상의 꿈꾸기’에 연원을 두고 있는 저자의 비평적 글쓰기는 이후 ‘우주공동체와 문학의 길’을 모색하게 되고, 나아가 동양적인 사상의 탐구에 이어 ‘불교시학’을 정립하는 데 이르게 되었다. ‘에덴동산’의 꿈에서 ‘화엄세계’의 꿈에 이르기까지의 수십 년의 여정이 참다운 삶을 찾기 위한 부단한 수행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불교시학의 가능성과 과제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 책은 저자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시와 삶의 길 찾기가 도달한 현재의 지점이자 새로운 차원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 불교와 시는 많은 유사성을 지닌 것에 비해 그동안 하나의 시학으로 자리 잡을 만큼 본격적으로 연관성을 탐구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시와 불교 양자를 각각 깊이 탐구하고 접합시켜 봄으로써 저자는 다음과 같이 불교시학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 

첫째, 불교시학을 통해 근대시의 결핍된 부분을 파악하고 보완할 방법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근대시를 있는 그대로 탐구하는 것만으로는 문제점을 거시적으로 통찰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어렵다. 근대시의 결핍된 부분은, 분별의식과 차별의식이 심화하면서 자아의 지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때문에 부정의식에만 머물게 된 근대인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긍정에 이르지 못하는 부정의식은 근대시가 좀처럼 ‘감동’의 차원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저자는 오랫동안 많은 시를 만났지만 감동을 일으키는 시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 의문을 품고 그 근본적인 원인을 찾던 끝에, 이러한 근대의 삶과 정신의 특징에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대안을 불교의 정신에서 찾는다. 아상(我相)에 사로잡혀 있는 중생심을 벗어나 참지혜를 얻고 자기초월적 감동의 시학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둘째, 이 책에서 시도한 불교시학은 종교 이전에 철학이나 사상으로서 불교가 갖는 가능성을 확장했다는 의미가 있다. 저자는 불교 경전 이외의 많은 불교 관련 연구서들을 통해 존재와 세계의 현상과 본질에 대한 불교의 뛰어난 통찰력을 확인한다. 그중에서도 저자가 여러 번 인용하고 있는 데이비드 호킨스에 의하면 불교는 “인간의 의식지수가 0부터 1000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이해하고 있는 종교이며, 인간을 찰나와 무한 속에 함께 놓고 볼 수 있는 종교이고, 극미와 극대를 함께 볼 줄 아는 종교이다.”(285쪽)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불교의 독특하고 심원한 이해방식을 통해 시에 나타나는 자아탐구의 과정을 새롭게, 심층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불교가 제시하는 인간 이해의 방식은 근대 학문에 국한되지 않는 더욱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설명력을 갖는다. 불교시학은 인간 정신에 대한 심층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의 방법론으로서 불교의 가능성을 재인식하게 한다.

셋째, 이 책에서 불교시학은 불교와 시의 결합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종교나 사상과의 다양한 접속 가능성을 보여준다. 구상의 시는 그동안 가톨릭 신앙과 관련해서만 논의되었는데, 저자는 그의 시에 나타나는 불교성과 불교적 상상력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새로운 이해를 도모한다. 저자는 최승호의 시에서도 불교와 노장사상, 기독교를 아우르는 일심의 구현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승훈 시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 자아동일성에서 벗어나 의타기성(依他起性)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대목에서도 서구의 첨단 사상과 불교의 소통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원효에 대한 소설적 형상화가 시대마다 달라지는 양상을 통해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정신적 지평이 접속하고 변화하는 장면을 포착해낸다. 저자는 이 밖에도 기존의 접근 방법에 불교적인 이해를 더하여 상이한 종교나 사상 간의 유사성을 확인하고, 더욱 확장된 사유를 불러온다. 

정효구의 불교시학은 수많은 시와 경전, 사상에 대한 그간의 내공 가득한 공부의 산물이다. 공부가 깊은 것과 그것을 잘 설명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인데, 다행히도 저자는 방대하고 난해한 이론을 최대한 쉽고 분명하게 풀어낸다. 현대인에게서 멀어진 불교의 심오한 뜻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이다. 평론가로서 자신이 짊어진 ‘구업(口業)’을 ‘선업(善業)’으로 이끌고자 하는 뜻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저자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불교시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냈다. 앞으로의 더 큰 성취를 위해서는 꾸준히 일반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불교의 심오한 경지를 쉽게 설명하려는 노력이 역력한데도 저자가 이르고자 하는 참지혜와 감동의 차원이 드높기 때문에 독자들은 현실과의 거리감을 크게 느낄 수 있다. 현실 세계와 화엄 세계 사이에 건너기 쉬운 가교를 놓는 대중화 작업이 부단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상록과 산문집, 시집 등을 통해 표현해온 실감 나는 언어 수행이 꾸준히 병행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시의 저변에 자리 잡은 불교적 사유들을 다각도로 밝혀서, 그것이 모두의 심성에 내재해 있는 자연스러운 본성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이혜원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199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저서로 《현대시의 욕망과 이미지》 《세기말의 꿈과 문학》 《현대시 깊이 읽기》 《현대시의 윤리와 생명의식》 등 다수가 있다. 김달진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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