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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중계-실천적 무아와 형이상학적 무아*
[77호] 2019년 03월 01일 (금) 임승택 sati@knu.ac.kr

 *  이 논문은 2018년 11월 10일 ‘자아와 무아, 오해와 진실’이라는 주제로 동국대 고순청세미나실에서 개최된 불교학연구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발표되었다.
 

1. 시작하는 말 

무아(無我, anattan)란 자아(我, attan)의 부정을 의미한다. 붓다가 이 교설을 내세운 이유는 윤회(輪廻, saṁsāra)가 종식된 해탈(解脫, vimutti)로 이끄는 데 있었다. “아라한에게는 내세울(施設) 윤회가 없다.”라는 경문은 무아를 실현한 아라한의 경지가 과연 어떠한지를 드러낸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는 자아 혹은 ‘나’를 중심으로 인과적 관계로 엮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나’ 혹은 자아에 매여 있는 한 자신과 타자, 안과 밖, 과거와 미래 등에 대해 초연하기란 불가능하다. 자아 혹은 ‘나’에 대한 집착이 강화될수록 갈등과 불만족의 괴로움은 그 깊이를 더해간다. 바로 이것이 괴로움의 순환구조 즉 윤회의 작동 원리일 것이다. 무아란 그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이미 두 편의 논문을 통해 무아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비판한 적이 있다. 〈무아 · 윤회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서는 한국불교학계에서 통용되는 무아 이해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특히 무아와 윤회의 교설을 모순적 관계로 파악하거나 혹은 상호 공존적 관계로 이해하려 했던 그간의 여러 시도가 두 교설 모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한편 〈무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의 양상들〉에서는 무아에 대한 이해방식이 ‘형이상학적 무아’와 ‘실천적 무아’로 대별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붓다가 가르친 무아는 실천적이었던 반면에 후대에 등장한 각종의 무아 해석은 형이상학적 색채를 띤다는 것이다. 필자는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의 대표적 사례 3가지를 들고서 거기에 내포된 문제점을 열거하였다. 이러한 선행 연구는 니까야(Nikāya)에 일관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실천적 무아’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포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실천적 무아’는 오온(五蘊) 각각에 대해 무아(無我)라고 선언하고서 그것은 ‘나의 것(mama)’이 아니고, 그러한 ‘나(aham)’는 있지 않으며, ‘나의 자아(me attā)’ 또한 그렇다고 언급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논리는 무아의 적용 대상이 오온이며, 오온을 통해 ‘나’라는 존재를 내세울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시킨다. 또한 해당하는 경전들의 후미에는 ‘이와 같이 보고 듣는 제자(evaṃ passaṃ sutavā ariyasāvako)’는 탐냄을 떠나 해탈에 이른다는 내용이 뒤따른다. 이와 같은 경문들은 경험적으로 드러난 자아의 허구성을 확인하는 것을 통해 해탈로 이어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필자는 바로 이것을 ‘실천적 무아’의 전형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내용을 전하는 경전들에는 형이상학적 견해(diṭṭhi)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무기(無記, avyākata)의 가르침을 위배하지 않고서 ‘나’ 혹은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내용이 나타날 뿐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실천적 무아’는 무아 자체를 내세우는 주장이나 견해마저도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실제로 니까야에는 무아를 주장하는 것마저도 ‘견해의 족쇄에 묶인 것(diṭṭhisaṃyojanasaṃyutto)’이라고 언급하는 경우가 나타난다. 자아에 대한 주장이든 무아에 대한 주장이든 관념적 독단으로 치달을 위험성을 간파했던 것이다. 필자는 새롭게 주목한 경문들을 통해 ‘실천적 무아’의 정당성을 내세우고자 하며, 선행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소개된 다른 유사 경문들에 대해서도 ‘실천적 무아’라는 관점을 적용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 논문을 통해 무아란 견해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괴로움의 제거와 해탈의 성취라는 실천적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선행 논문들로부터 이어지는 필자의 일관된 의도는 ‘형이상학적 무아’에 빠지지 말고 본래적인 ‘실천적 무아’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2. 무아(anattan)라는 견해(diṭṭhi)

《아비야까따상윳따(Avyākata-saṃyutta)》에는 ‘자아가 있다’고 말하면 상주론(常住論)에 빠지게 되고 ‘자아가 없다’고 말하면 단멸론((斷滅論)에 빠지게 된다는 가르침이 나타난다. 또한 《아시비사왁가(Āsīvisavagga)》에는 ‘나는 있다(asmīti)’라는 것도, ‘나는 이것이다(ayam aham asmīti)’라는 것도, ‘있을 것이다(bhavissanti)’라는 것도, ‘있지 않을 것이다(na bhavissanti).’라는 것도 ‘망상에 빠진 것(papañcitam)’이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범망경(梵網經, Brahmajāla-sutta)》에도 사후의 자아가 지각을 지니고서 존속한다는 16가지 주장을 비롯하여, 사후의 자아가 소멸한다는 7가지 주장들이 견해(diṭṭhi)와 갈애(taṅhā)의 의해 동요된 것일 뿐이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들 경전에 따르면 자아를 주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아에 관련된 주장이나 견해를 내세우는 것마저도 붓다의 의도와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한편 《일체번뇌경(Sabbāsava-sutta)》에 나타나는 아래의 인용문은 사변적 관심에서 추구되는 무아의 위험성을 더욱 직접적으로 경고한다고 할 수 있다. 자아뿐만 아니라 무아에 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그들 모두에 대해 비판한다. 

그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마음을 내는 그러한 자에게는 6가지 견해 가운데 하나의 견해가 생겨난다. [1] ‘나에게 자아가 있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2] ‘나에게 자아란 없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3] ‘자아로써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4] ‘자아로써 무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5] ‘무아로써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혹은 그에게 이런 견해가 생긴다. [6] ‘이러한 나의 자아는 말하고 경험하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경험한다. 그런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법이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견해에 갇힘, 견해의 험로, 견해의 왜곡, 견해의 몸부림, 견해의 족쇄에 묶인 것이라고 한다.

인용문에 언급된 [1]의 ‘나에게 자아가 있다.’라는 견해, [3]의 ‘자아로써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 [6]의 ‘이러한 나의 자아는 말하고 경험하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경험한다는 등’의 견해는 자아를 주장하는 일반적 논리로 간주할 수 있다. 반면에 [2]의 ‘나에게 자아란 없다.’라는 견해, [4]의 ‘자아로써 무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 [5]의 ‘무아로써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는 자아의 부재 혹은 무아를 내세우는 부류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무아를 언급하는 후자의 셋은 자아를 주장하는 전자의 셋과 동일하게 취급되고 있으며, 6가지 모두가 ‘견해의 족쇄에 묶인 것(diṭṭhisaṃyojanasaṃyutto)’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용문에 거론된 6가지 견해의 족쇄는 앞서 언급한 《아시비사왁가(Āsīvisavagga)》에 나타난 자아의 유무에 관한 망상의 구체적 사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아시비사왁가》의 후미에서는 망상에 처한 상황에 대해 ‘질병을 지닌 것’ ‘종기를 앓는 것’ ‘화살에 맞은 것’ 등으로 비유하면서, 망상이 없는 마음으로 머물러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망상이나 견해에 매몰된 상태에 대해 치료가 요구되는 비정상의 상황으로 보았던 것이다. 한편 《마두삥디까숫따(Madhupiṇḍika-sutta)》에서도 망상의 발생 과정을 분석한 연후에 그것의 대처 방안을 제시한다. 망상에 대해 환대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면 탐냄 · 견해 · 의혹 · 자만 · 무명 등의 잠재적 성향이 사라지고, 싸움 · 논쟁 · 언쟁 등의 악하고 불건전한 법들도 사라지게 된다고 가르친다. 망상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형이상학적 난제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침묵했던 무기(無記, avyākata)의 가르침과도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실천적 무아의 양상

견해(diṭṭhi)로서의 무아는 망상에 해당하며 악하고 불건전한 법으로 일컬어진다. 그렇다면 무아의 가르침을 버려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제부터는 ‘실천적 무아’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이것은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 혹은 바른 지혜(sammappaññā)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 해탈로 이끌어주는 실제적 역할을 수행한다. 아래는 ‘실천적 무아’의 전형으로 간주할 만한 경문이다.

……모든 물질현상(色) 그것은(etaṃ) ‘나의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지니는] 그(eso)는 ‘나’가 아니며, [그것을 지니는] 그(eso)는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바로 그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어떠한 느낌(受)이든 [중략], 어떠한 지각(想)이든 [중략], 어떠한 지음(行)이든 [중략], 어떠한 의식(識)이든, 과거든 미래든 현재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열등하든 우수하든, 먼 것이든 가까운 것이든 모든 의식, 그것(etaṃ)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지니는] 그(eso)는 ‘나’가 아니며, [그것을 지니는] 그(eso)는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바로 그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고 듣는 거룩한 제자는 물질현상에 대해 싫증 낸다. 느낌에 대해…… 지각에 대해…… 지음에 대해…… 의식에 대해 싫증 낸다. 싫증 내면서 탐냄을 떠난다. 탐냄의 떠남으로부터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게 된다.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완성되었고, 해야 할 일은 행했고, 다시는 이러한 상태로 [향함이] 없다고 알아차린다. 

인용문은 니까야에 등장하는 무아에 관한 서술 방식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혹한 범부들에게 물질현상(色) 등 오온(五蘊)이라는 경험적 요인은 자아 혹은 자아정체성의 근거가 되곤 한다. 그러나 이 경문에서는 오온 각각에 대해 ‘나의 것’이 아니라고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자아라든가 자아정체성과 연결시킬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또한 오온이 귀속되는 그러한 존재를 내세울 수도 없게 된다. 결국 오온을 통해 ‘나’ 혹은 ‘나의 자아’를 내세우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그것은(etaṃ) ‘나의 것(ma-ma)’이 아니고, 그는(eso) ‘나(aham)’가 아니며, 그는(eso) ‘나의 자아(attā)’가 아니다.”라는 대목에 초점을 모은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라는 첫 번째 구절만이 오온에 상응하는 성(性)을 취하여 주어가 중성인 ‘etaṃ(그것)’으로 묘사된다. 나머지 두 구절의 주어는 남성 주격인 ‘eso(그는)’로 바뀌어 서술되고 있다. 칼루파하나는 이 차이에 대해 오온이라는 경험의 소유자로 간주할 만한 어떤 신비적 실재를 상정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마지막의 자아(attā)라는 표현은 신비적 실재로서의 ‘나’라는 개념을 거부한 뒤에도 ‘나’를 절대적인 허구로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그것의 사용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나(ahaṃ)를 대신하여 되풀이한 것이라고 한다. 칼루파하나는 자아라는 용어에는 형이상학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이라는 서로 다른 의미와 용법이 있지만, 형이상학적 의미만큼은 오온에 의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붓다 논변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초기불교의 무아를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스티븐 콜린스(Stev-en Collins) 또한 유사한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앞서 인용한 부류의 경문들과 함께 《무아상경(無我相經, Anattalakkhaṇa-sutta)》과 《대인연경(Mahānidāna-sutta)》의 사례를 추가로 지목한다. 예컨대 《무아상경》에서는 자신의 육체(色)에 대해 ‘이렇게 되어라.’ 혹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오온을 통제하는 내부의 주재자(主宰者)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재자로서 자아 또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힌다. 한편 《대인연경》에서는 느낌(vedanā)이라는 경험 내용을 통해 자아의 존재를 주장하는 세 가지 경우에 대해 비판한다. 먼저 느낌이 자아와 동일한 것이라면 느낌이 소멸할 때 자아 역시 소멸한다고 말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느낌과 자아가 완전히 다르다면 느낌을 통해 자아를 말하려는 시도 자체가 부적절한 것이 된다. 마지막으로 느낌과 자아의 개별성을 인정하되 자아가 느낌을 소유한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느낌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에서는 자아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노출한다. 콜린스가 분류한 이들 3가지 무아의 유형 역시 철저하게 경험적 사실에 빗대어 부정적 방식으로만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의 무아는 경험적 요인에 근거하여 자아를 내세울 수 없다는 방식으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절대주의적으로 특정한 견해나 주장을 공표하는 것과는 다른 분위기이다. 무아의 적용 대상이 되는 오온이란 머릿속 생각이 아닌 실제 삶을 통해 마주하는 경험의 단편들이다. 따라서 니까야의 무아 관련 언급은 오온과 같은 개개의 요인들을 일일이 반복적으로 열거하는 수고로움을 피하지 않는다. 뿐만이 아니라 오온 이외의 다른 다양한 경험적 요인에 대한 분류법을 무아에 적용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눈(眼) · 귀(耳) · 코(鼻) 등의 감각기관(根), 눈의 의식(眼識) · 귀의 의식(耳識) 등의 감각의식(識), 나아가 눈에 의한 접촉(眼觸) 등의 마음현상(法)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언급한다. 심지어 땅(地) · 물(水) · 불(火) · 바람(風) 등의 요소(界)에 대해서도 ‘나의 것’이 아니며, 또한 이들을 통해 ‘나’ ‘나의 자아’를 내세울 수 없다는 언급을 되풀이한다. 이와 같이 무아의 적용 대상은 경험에서 포착할 수 있는 일체의 것으로 확대된다. 

그런데 앞서 인용했던 유형의 경문들에는 정작 무아(anattā)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나’ 혹은 자아로 오인될 수 있는 요인들을 부정하는 방식의 언급이 묘사될 뿐이다. 따라서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를 거부하는 논리가 무아라는 용어와 실제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별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래의 경문은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물질현상(色)은 무상(無常)이다. 무상인 [물질현상] 그것은 괴로움(苦)이다. 괴로움인 [물질현상] 그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물질현상]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지니는] 그는 ‘나’가 아니며, [그것을 지니는] 그는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바로 그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느낌(受)은 무아이다… 지각(想)은 무아이다…… 지음(行)은 무아이다…… 의식(識)은 무아이다. 무아인 [의식]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것을 지니는] 그는 ‘나’가 아니며, [그것을 지니는] 그는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바로 그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인용문은 오온이라는 경험 요인에 대해 무상하고, 괴로우며, 무아라고 언급한다. 또한 무아인 그것에 대해 ‘나의 것’이 아니며, ‘나’라든가 ‘나의 자아’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기술한다.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를 거부하는 이유를 다름 아닌 무아에서 찾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무아의 원어인 ‘ananttā’ 혹은 ‘anattan’은 접두사 an과 일반명사 attā 혹은 attan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이것에 대해 브롱코스트(Bronkhorst)는 ‘자아를 결여한다(without self, 無我)’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아니다(not the self, 非我)’라는 의미로 분석한다. 이것을 뒷받침하듯이 한역(漢譯)에는 무아 못지않게 잦은 빈도로 비아(非我)라는 표현이 사용되곤 한다. 

사실 ananttā의 의미에 대한 논의는 그간 여러 학자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필자는 이 용어가 등장하는 문맥에 대한 고려의 필요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ananttā라는 단어 자체만을 따지자면 ‘자아를 결여한다(無我)’는 것은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언급이 된다. 반면에 ‘자아가 아니다(非我)’라는 것은 자아의 존재 여부와는 무관한 언명이다. 따라서 이 둘은 전혀 상이한 의미로 귀착된다. 그러나 니까야에서는 물질현상 등의 경험 요인을 가리켜 ‘ananttā’라고 기술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이러한 문맥을 반영하자면 ‘ananttā’란 ‘물질현상 등은 자아(‘나’)를 결여한다(無我).’라거나 ‘물질현상 등은 자아(‘나’)가 아니다(非我).’라는 의미가 된다. 결국 이 둘은 물질현상 따위가 ‘나’와 무관하다는 것으로, 어떠한 의미를 취하든 서로의 차이는 크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후자가 ‘ananttā’가 등장하는 문맥에 더 충실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전자가 배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니까야에 나타나는 무아를 살펴보는 작업에서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서술 양식이 있다. 아래에 인용하는 유형의 경문들이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물질현상(色)은 무상(無常)이다. 느낌(受)은 무상이고, 지각(想)은 무상이고, 지음(行)은 무상이고, 의식(識)은 무상이다. 비구들이여, 물질현상은 무아(無我)이다. 느낌은 무아이고, 지각은 무아이고, 지음은 무아이고, 의식은 무아이다. 일체의 지음(諸行, sabbe saṅkhārā)은 무상이고, 일체의 법(諸法, sabbe dhammā)은 무아이다. 

맨 마지막의 “일체의 법은 무아이다.”에 우선 초점을 모을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부분은 오온이라는 경험적 요인들 각각에 대해서는 무상과 무아가 공히 적용되지만, 이들을 ‘일체의 지음(sabbe saṅkhārā)’으로 묶는 경우에는 무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무아에 대해서는 ‘일체의 법(sabbe dhammā)’이 그렇다는 방식으로 적용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라훌라는 무아의 적용 대상은 오온 따위의 유위의 현상(有爲法)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일체의 법’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고 언급한다. 무상과 괴로움은 유위의 현상에 한정되는 것이고, 무위의 법(無爲法)인 열반(涅槃, nibbāna)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열반마저 무상하고 괴롭다면 열반의 의의와 가치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상이 언급될 때에는 유위의 현상계를 포섭하는 지음(saṅkhārā)이 주어로 사용되는 반면, 무아가 언급될 때에는 유위와 무위 모두를 포함하는 법(dhammā)이 주어가 된다는 것이다. “일체의 법은 무아이다.”라는 구절은 열반이라는 궁극의 이상마저 스스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무아의 적용 대상은 오온이라는 경험 요인을 넘어 열반까지를 포함하며,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영역으로 확대된다. 범부의 삶에서든 아라한의 경지에서든, 어떠한 경험이라도 바로 그것을 ‘나의 것’으로 귀속시킬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4. 형이상학적 무아와의 비교

앞서 언급했던 ‘실천적 무아’의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붓다가 가르친 무아란 구체적인 적용 대상을 지닌다. 예컨대 물질현상(識) 등의 오온을 비롯하여, 감각기관(根)과 감각의식(識) 따위의 인식 조건, 접촉(眼觸)이나 갈애(愛) 등의 마음현상, 심지어 땅(地)이라든가 물(水)의 요소(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붓다는 무아라고 말할 때 바로 이들 현상에 대해 “‘나’가 아니다.”라거나 혹은 “‘나’라는 존재를 결여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되는 무아란 구체적인 실천적 과정을 통해 확인해 나가야만 하는 특징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실천적 과정에 연계되는 만큼 ‘이와 같이 보고 듣는 자는(evaṃ passaṃ sutavā)’ 물질현상 등에 대한 탐냄을 떠나 해탈에 이른다는 후속 과정이 뒤따른다. 그러나 붓다 이후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실천적 무아’는 퇴색하는 듯하다. 가르침에 대한 체계화 작업과 더불어 형이상학적 해석 경향이 부각되기 시작한 까닭이다. 

필자는 〈무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의 양상들〉이라는 선행 연구를 통해 이들의 사례를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실천적 무아’와의 비교를 위해 이들의 특징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단멸론적인 방식으로 ‘윤회를 부정하는 무아’에 대해 살펴본다. 사실 단멸론적 주장은 니까야에서도 이미 언급되는 것으로, 특히 죽음 이후 자아가 소멸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또한 이러한 사고는 현대에 만연한 유물론과도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윤회의 주체가 되는 자아를 부정하는 까닭에 태생에 의한 신분의 차별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호소력을 지닌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해석이 나름의 의의를 지닐 수는 있겠지만 붓다의 의도에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부정도 긍정도 원칙적으로 가능하지 않으며, 이것을 위배할 경우 무기(無記)를 저촉하는 셈이 된다. 

다음은 ‘비아와 교체 가능한 무아’이다. 이러한 무아 해석은 초월적 자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무아란 경험적 존재로서의 ‘나’는 참된 ‘자아가 아니다(非我)’는 의미이며, 궁극의 초월적 자아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불교 이전의 우빠니샤드 문헌을 비롯하여, 부파불교 시대의 보특가라(puggala, pudgala) 이론이 이러한 논리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붓다는 집착의 대상이 되는 거짓 자아만을 거부했을 뿐이며, 참된 영혼 혹은 진실한 자아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śa)》에서 지적하듯이, 그러한 진실한 자아가 인과적 관계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오온과 마찬가지로 경험에 종속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한편 반대로 완전히 초월적인 것이라면 어떠한 작용이나 영향도 기대할 수 없는 무의미한 존재가 되고 만다. 《구사론》에서는 이 두 가지 이유를 거론하면서 굳이 초월적 자아를 내세울 명분이 없다고 지적한다. 

세 번째는 무아의 논리로써 윤회를 규명해 들어간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업(業)의 상속(相續, saṃtāna)에 의해 윤회는 지속되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불변의 존재로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불변불멸의 주체 혹은 자아가 없이 윤회가 진행되는 것을 일컬어 ‘무아 윤회’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무아와 윤회를 공존적 관계로 보게 되면 극복되어야 할 상태인 윤회와 그것을 넘어선 경지인 무아를 동일한 차원에 귀속시키게 되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이것은 무아를 실현함으로써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실천적 과정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특히 이 입장을 고수하는 학자들은 연기설(緣起說)에 대한 상호의존적(相互依存的) 해석에 근거하여 무실체성(無實體性)으로서 무아를 거론한다. 그러나 상호의존적 연기란 초기불교의 연기 해설과는 거리가 있으며, 무아의 실현 여부와는 무관하게 윤회는 계속된다는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필자는 〈무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의 양상들〉에서 다루었던 사례들을 ‘무아라는 견해(diṭṭhi)’에 귀속시키고자 한다. 이들의 주장은 앞서 언급했던 ‘실천적 무아’와 구분되는 특징을 공통적으로 지닌다. 이들이 내세우는 무아는 그 적용 대상이 현실 삶에서 마주하는 오온 등의 구체적 경험 요인이 아니다. 추상적인 교리를 무아라는 개념 위에 덧씌운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사후의 자아라든가 초월적 실체 혹은 연기의 원리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무아란 특정한 이론을 내면화함으로써 실현해 나가는 특징을 지닌다. 그럼에도 이들 각각은 해결이 곤란한 자체적인 논리적 난점들을 안고 있다. 또한 앞서 ‘실천적 무아’에서 확인했던 싫어함(厭離, nibbinda)이라든가 탐냄의 떠남(離貪, virāgā), 해탈(解脫, vimutta)과 같은 일련의 과정이 뒷받침되지도 않는다.

5. 무아 실현의 모색

무아에 대한 논의가 타협 불가능한 대립적 양상으로 갈린 현대의 사례를 언급하고자 한다. 라훌라(Walpola Rahula)와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의 경우가 그것이다. 그들의 논의는 언뜻 소통이 가능해 보인다. 예컨대 라훌라는 무아에 접근하는 올바른 태도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어떤 주장이나 견해도 취하지 않고 아무런 관념적 투사도 없이 단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야말로 무아를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이다. 영혼 없음이나 자아 없음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을 부정적인 것이거나 단멸론적인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한편 나카무라 하지메 또한 붓다는 애초 특정한 교리의 확립을 목표로 했던 것이 아니었으며, 유아설(有我說)이든 무아설(無我說)이든 모두 미혹한 범부를 구제하기 위해 설해진 방편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무아에 관해 대론을 펼쳤던 이 두 학자에 대해 ‘견해(見, diṭṭhi)’나 ‘망상(戱論, papañca)’이라는 용어를 떠올리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논의는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극한 대립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라훌라는 오온의 무아를 언급하면서 존재는 오로지 오온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며 그 밖의 다른 것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오온 안에서뿐만 아니라 설령 오온 바깥에서 오온과 유리되는 한이 있더라도 무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붓다는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인 방식으로 아뜨만이나 영혼 혹은 자아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정반대 입장에서, 나카무라 하지메는 초기불교의 견해는 ‘아뜨만 이외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아뜨만이다.’라든가 ‘이것이 나의 것이다.’라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에 따르면 초기불교의 무아설은 단계적인 과정을 통해 정착되었으며, 최초기의 단계에서는 아뜨만을 승인했고, 바로 그것은 ‘진실한 자기’로 파악되었다고 한다.

라훌라와 나카무라 하지메는 무아에 대해 상반된 논의를 펼쳤던 현대의 대표적인 두 학자이다. 그들은 특정한 주장이나 견해에 매이지 말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남이라는 실천적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천적 측면으로부터 이탈하여 양립 불가능한 정반대의 결론에 다다르고 만다. 여기에서 필자는 그들의 주장을 한꺼번에 동조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또한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에서 발견했던 문제점을 그들에게서도 목격하게 된다. 한쪽은 아뜨만 이외의 어떤 것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방식으로 ‘완전한 자아’를 내세우고, 다른 한쪽은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인 방식으로 ‘완전한 무아’를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이들 중 어느 쪽이 맞느냐의 여부에 대해서는 결론을 유보하고 싶다. 다만 여기에서는 양쪽 모두가 추상적인 교리적 내용을 절대주의적인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지적하고 싶다. 바로 이 점에서 필자는 ‘무아라는 견해’에 대한 비판이 그들에게도 적용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에도 나름의 이유와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또한 붓다 당시에 설해진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적 무아만을 무작정 고집하는 것도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필자는 무아의 원래 취지를 되살리는 작업을 포기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이상에서 언급한 두 학자의 사례는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에서 보았던 부정적인 측면들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서 드러나는 절대주의적 태도는 독단적 관념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가르쳤던 붓다의 모습과 다르며, 어느 한쪽만을 일방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 같은 경직된 분위기를 조장한다. 필자는 2장에서 언급했던 니까야 경구들이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으며, 거기에 대한 적절한 대책도 이미 내놓고 있다고 판단한다. 견해(diṭṭhi)의 족쇄에 매이는 것은 치료가 요구되는 비정상의 상황이라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니까야에서는 무기라는 소극적 대처법만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범망경(Brahmajāla-Sutta)》에는 반야(般若, paññā)로써 여섯 접촉장소(六觸入處)의 일어남(集)과 사라짐(滅)과 맛(味)과 잘못됨(過患)과 벗어남(出離)을 알아차리라는 언급이 나타난다.44) 망상이나 견해는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으며, 그것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을 재생산하여 갈등과 분란을 증폭시킬 수 있다. 여섯 접촉장소를 알아차리라는 《범망경》의 가르침은 망상과 견해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지 말고 인식이 발생하는 첫 순간의 생생함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3장에서 언급했던 눈의 의식(眼識)이라든가 눈에 의한 접촉(眼觸) 따위를 ‘나의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경문들과도 맥락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숫따니빠따(Suttanipāta)》에서는 ‘내가 있다’는 따위의 망상의 뿌리를 제거하는 방법을 더욱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마음 지킴(念, sati)’을 확립하여 망상을 다스려 나가야 한다는 가르침이 그것이다.45) ‘마음 지킴’이란 초기불교의 명상을 특징짓는 고유의 술어로서, ‘무아라는 견해’에 빠지지 않고 무아를 실현해 나가는 적극적인 처방이 될 수 있을 것이다.46) ■

 

 

임승택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미국 UCLA에서 방문학자(visiting scholar) 과정을 마쳤고,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에서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동국대학교에서 《Paṭisambhidāmagga의 수행관 연구》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무아 · 윤회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 등의 논문 다수와 《초기불교 94가지 주제로 풀다》 《붓다와 명상》 등 50여 편의 저서 및 역서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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