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명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면서 명상을 불교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사실 명상을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법으로 계발한 종교는 불교만 아니라 힌두교, 고대 유대교, 초기 기독교 성부, 이슬람 수피파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다양하다. 이들 종교는 모두 명상을 중요한 종교 실천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으며, 동아시아에서 전승되어온 심신 수련 전통인 도교의 양생술, 신선도, 기공 등에서도 명상은 중요한 수행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 도심을 걷다 보면 여기저기 간판을 내걸고 성업하고 있는 기공과 태극권 등 다양한 형태의 양생술과 휘트니스 클럽까지 진출한 요가, 그리고 한국 고유 종교를 표방하는 여러 형태의 신선도, 단학 등도 명상을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내세우고 있다. 

불교명상만 아니라 요가나 양생술 등 대부분의 수행법이 호흡 수행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언뜻 보면 이들 사이에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불교명상은 다른 종교에서 실천하고 있는 명상과 어떤 점에서 다를까? 방법의 측면에서 볼 때 유사성이 두드러지는 것과 달리, 명상수행을 통해 도달하려고 하는 최종적인 목표를 살펴볼 때 그것들 사이의 차이는 분명해진다. 불교명상의 목표는 고통의 종식, 다시 말해 열반의 증득이라는 점에서 무병장수 또는 불사(不死)를 추구하는 도교의 양생술과, 신의 세계로의 초월을 목표로 하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전통 종교 실천과 다르다.

하지만 인도 종교전통에서 열반의 증득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수행의 목표이기 때문에 불교만의 특징이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인도 종교전통과 불교명상의 차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더 엄밀한 탐구가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불교와 다른 인도 종교전통의 차이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라는 삼법인(三法印)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 불교는 모든 현상이 연기하고 있으며, 그 연기의 원리가 ‘무상, 고, 무아’라고 본다. 따라서 열반의 증득은 삼법인의 깨달음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다른 명상법은 ‘무상, 고, 무아’라는 원리를 깨닫지 못할까? 삼법인 중 ‘무상’의 진리는 다른 종교에서도 핵심적인 진리로 가르치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의 《장자》는 ‘무상’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통해 모든 현상세계가 영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많은 종교는 현상세계의 무상함을 강조하면서 초월적 자아의 영원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브라흐만교는 무상한 현상세계의 근원으로서 아트만이라는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실체가 존재한다고 강조하며, 현상세계를 초월하는 방법으로서 명상수행을 통한 ‘범아일체’라는 우주적 통합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는 인도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상세계 배후에 존재하는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실체를 부정한다. 오히려 ‘무아’, 즉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로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무상과 무아를 깨닫는 것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는다. ‘무상’에 대한 교리가 ‘초월적 자아’ 또는 ‘신성’에 대한 강조로 귀결되는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는 ‘무상’을 ‘무아’의 근거로 이해한다. 이처럼 삼법인 가운데서도 ‘무아’는 다른 종교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불교만의 독특한 원칙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아’의 가르침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비교적 쉽게 이해되는 ‘무상’의 가르침에 비해 ‘무아’의 가르침은 많은 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무아인데 어떻게 내가 존재할 수 있지?” “무아인데 어떻게 내가 윤회를 할 수 있지?” 등등은 불교를 공격하는 입장에서 종종 제기되었던 질문들이다. 그것은 무아론이 우리가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사 사유를 통해 ‘무아’의 가르침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체득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불교는 무아를 체득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로 명상수행을 제시한다. 부처님조차 보리수 아래서 성도하기 전까지 수많은 명상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것처럼, 모든 명상법이 열반이라는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아를 체득하기 위해 어떻게 명상을 해야 할까? 무아를 체득하기 위한 불교명상은 다른 수행법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에 앞서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가 무엇인지, 특히 현대 심리학은 자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2. 현대 심리학에서 본 자아

평소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언어심리학자들이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중 90% 이상이 ‘나’와 관련된다고 한다. “내가 했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나를 뭐로 본 거야?” “나에게 잘 해줬어.” 등등의 문장에서 보듯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내가’ ‘나를’ ‘나에게’ 따위의 표현들을 사용한다. “이건 내 거야.”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한다. 주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 우리말보다 영어를 비롯한 서구 언어의 경우 더 두드러지는데, 비틀스가 노래했듯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나 파티에 모인 사람들의 대화 가운데 “내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전부 나(I), 나에게(Me), 나의 것(Mine)”이다. 

‘I, Me, Mine’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의 세 가지 모습이다. 자기 개념은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갖게 된다고 한다. 만 2살부터 아이들은 ‘I’ ‘Me’ ‘Mine’이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한다. 이와 같이 ‘나’와 ‘너’를 말로 구별한다는 것은 2세 아동이 자기와 타인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대화에서 말하고 있는 ‘나’와 그것을 듣고 있는 ‘너’를 추론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폐증상이 있는 아이들은 인칭대명사를 혼동하거나 사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먼저 ‘I’에 대해 살펴보자. ‘나’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떤 존재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사용할까? 우리는 나 자신을 유일한 개체로 인식한다. 그것이 명백하게 존재하고, 느끼고, 인식하고, 행동하고, 알고, 생각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내가 타자와 구분되는 개별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특히 생각하는 능력은 ‘나’라는 주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 간주되는데,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에 의해 ‘생각하는 능력’은 나의 존재를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로 생각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나’라고 말할 때 대부분 ‘몸’을 가리킨다. 몸은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몸이 없어지는 것, 즉 죽음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으로, 우리는 몸이 없으면 ‘나’도 없다고 느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곧 ‘나’의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만큼 ‘자아’에 대한 집착은 강력하다. 그런데 ‘나’는 몸이 아니라 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이 몸을 움직이고 먹이고 재우는 것이 ‘나’가 아닐까? 다시 말해, ‘나’는 몸을 주관하고 통제하는 주체가 아닐까? 그렇다면 몸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의 소유물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엄밀히 생각하면, ‘내 몸’만 아니라 ‘내 생각’도 나라는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나의 것(Mine)’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가 움직이는 유형의 몸이 아니라 그것을 주재하는 어떤 비물질적인 것, 다시 말해 ‘마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나’가 마음이라면 나는 내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사람들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고백한다. 심지어 심리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 마음 때문에 심한 고통을 받기까지 한다. 이처럼 ‘내 마음이라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면, 그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몸이나 마음이 나 자신이거나 나의 소유물이라면 그것은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 붓다는 몸이나 마음을 ‘나’라고 간주하는 우리의 통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비구들이여, 물질(色)은 자아가 아니다. 만일 물질이 자아라면 이 물질은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면 그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물질은 자아가 아니기 때문에 물질은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물질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

‘나 자신’ 또는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몸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면 나의 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느낌(受)과 지각(想), 의지(行), 생각(識)과 같은 마음의 현상들도 ‘나’ 또는 ‘나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I’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자아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믿지만 그런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두 번째로 ‘Me’를 살펴보자. 우리는 존재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나’, 다시 말해 ‘주어로서 나’ ‘I’는 나로서 활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순간, 다른 어떤 것을 대상으로 만든다. 내가 있으면 상대가 생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나의 대상, 다시 말해 나의 행위와 사고와 판단이 가해지는 대상이 된다. 따라서 그 대상을 나 자신처럼 생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렇게 ‘주어로서 나’가 다른 것들을 대상으로 삼음과 동시에 ‘나’는 다른 것의 대상이 된다. 내가 다른 존재들을 대상으로 삼는 만큼 그들도 나를 대상으로 삼게 된다. 따라서 ‘I’는 불가피하게 자아의 두 번째 모습인 ‘Me’를 동반한다. 상대방이 주인이 되어 나에게 어떤 행위를 할 때 나는 그 대상이 되는데, ‘Me(나에게, 나를, 나한테)’는 ‘주어로서 나’와 반대되는 상황에서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주어로서 나’는 외부의 대상을 나에게 귀속시킨다. 이처럼 나에게 귀속된 것을 ‘나의 것(Mine)’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몸과 생각처럼 나의 활동에 따라 형성되는 것을 ‘내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내가 사용하는 물건들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과 집도 나의 소유물이며 ‘내 절’ ‘내 고향’ ‘내 나라’ 등등 나보다 더 큰 외연을 갖는 종교, 지역사회, 국가까지도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형태가 없는 정신적인 활동도 나에게 귀속된다고 생각한다. 지식기반사회에서는 내 생각, 내 아이디어도 나에게 귀속된 소유물이라는 생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서 저작권 같은 것이 재화로 환산될 수 있는 나의 소유물로 간주된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모두 나에게 귀속되는 것이며 나의 부속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나를 형성하는 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없어지면 자신도 사라진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과연 내 생각이 나의 것일까? 생각은 나에게 떠올랐다가도 금방 사라진다. 조금 전에 들었던 생각이 잠시 뒤에 다른 생각으로 바뀌어 있다. 생각은 잠시도 머물지 않고 변한다. 이렇게 변하는 것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느낌도 계속 바뀐다. 빈방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썰렁하지만 조금 있으면 채워진 느낌이 든다. 만약 그 느낌이 내 것이라면 나 역시 그처럼 가변적인 존재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느낌은 바뀌지만 나는 바뀌지 않는다’고 믿는다. 유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생리적, 심리적 변화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근본적인 속성은 변치 않으며 일관적이라고 믿는다.

붓다는 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각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을 다음과 같이 일깨웠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우리는 ‘I, Me, Mine’을 나의 세 가지 모습이라고 생각하여 모든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를 근거로 자아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타당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 나의 모습

어떤 것이 진짜 내 모습일까? 내 모습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몸조차 직접 인지하지 못한다. 나는 내 뒷모습을 보지 못한다. 내 얼굴도 보지 못한다.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은 팔, 다리와 고개를 숙여 볼 수 있는 몸통의 앞부분이 전부다. 남들이 다 보는 내 몸의 모습을 정작 몸의 주인인 나는 보지 못한다. 거울을 통하지 않고서는 완전하게 나를 볼 수 없다. 거울이 없으면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부분적으로밖에 지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이미지는 거울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진짜일까? 거울을 통해서 보는 내 모습은 볼록렌즈냐 오목렌즈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비추는 각도에 따라서도 달라 보인다. 이른바 얼짱 각도에서 보이는 내 모습과 그렇지 않은 각도에서 보이는 내 모습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굴곡이 없는 평면거울에 비춰보아도 내 모습을 정확하게 비출 수 없다. 더구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좌우가 바뀌어 있다. 거울 속에서 나의 오른쪽은 실제로는 나의 왼쪽이다. 거울은 내 뒷모습도 비추지 못한다. 이처럼 거울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이미지는 조각나 있고 불완전하다. 

그런데 동물들에게 거울을 비춰주면 자기 이미지를 공격하거나 아니면 다른 동물인 줄 알고 달아난다. 동물들은 거울의 이미지가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처럼 행동한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보고 자아의 이미지를 상상할 줄 안다. 인간만이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자신의 이미지임을 안다. 이 차이가 인간과 동물을 결정적으로 다르게 만드는데,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인간은 거울을 통해 자아 이미지를 갖게 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거울이 없으면 나도 없다. 

라캉은 ‘나’라는 존재가 거울을 통해 만들어진 허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어린아이 발달단계 중 거울을 보면서 자아 이미지를 갖게 되는 단계를 ‘거울 단계’라고 이름했다. 그는 이것이 인간의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거울 단계에 어린아이는 비로소 자아 이미지를 갖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인간 외에도 침팬지 같은 고등동물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자신인 줄 안다고 한다. 침팬지 실험을 통해 침팬지의 얼굴에 칠을 바르고 거울을 보여주면 손을 거울에 갖다 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얼굴에 갖다 댄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침팬지가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기 얼굴임을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침팬지 새끼가 거울에 투영된 모습이 자기 모습인 줄 알고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것과 달리, 어린아이는 계속 거울을 보면서 웃고 좋아하고 옆에 있는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반응을 한다. 

라캉은 이런 반응이 인간의 아이에게만 나타나는 독특한 것이며, 그것을 ‘자기애’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물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져 결국 물에 빠져 죽는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시스처럼, 인간의 어린아이는 자기의 모습을 보고 애착을 느낀다. 나르시스의 이름을 따서 자기에 대한 애착을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르는데, 라캉은 자기에 대한 애착이 자아의 이미지에 덧붙여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실제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불완전하고 파편화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거울을 통해 완전한 인간의 이미지를 본다. 매일 거울을 바라보면서 만족을 느끼는 ‘거울 공주’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상화시켜서 바라본다. 이상적인 자아의 이미지는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시켜 보게 만든다. 이처럼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실제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거울의 가짜 이미지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방식을 라캉은 ‘상상적인 것’이라고 불렀다. 

라캉이 지적하듯 우리의 ‘자아’는 상상된 것, 일종의 자기 이미지이다. 라캉은 자아 이미지 형성에 타자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만족보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행동한다. 라캉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명품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도 명품의 효용이나 자기만족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명품을 갖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나도 명품을 갖고 싶은 것이다. 모두 선망하는 명품을 소유함으로써 나의 욕망이 충족된다. 그러므로 만약 세상 사람들이 명품을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명품을 갖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타자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인간의 반응은 상상된 자아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나는 나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 ‘나’는 상상된 것이다. 자기 사랑(amour-propre)은 바로 내가 나 자신의 자아에 속한다는 느낌으로, 나에 대한 집착을 발생시킨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나 자신을 자유롭게 내어주지 못하게 되는데, 자기 사랑이 과도하면 허영심과 자기애를 넘어 자만심으로 발전한다. 나의 자아가 내가 체험하는 유일한 축이며 이 축을 중심으로 나머지 세상이 돌아간다고 느낀다.

자기 사랑은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전환시킨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재산’으로 ‘소유’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 결과, 나의 몸도 내 것이고 나를 넘어선 세계도 내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자아의 존재는 얼굴과 몸을 넘어 자신의 주변으로 확장된다. 정상적 감각운동을 통해 신체 일부를 피부 너머의 공간으로 뻗는다. 이때 우리는 자신/타인의 경계를 가로질러 간다. 이것은 신체적 자아 이미지와 외부 세계를 절묘하게 뒤섞은 행동인데, 이처럼 외부 현실에 개입하는 자아를 자아-지시적 자아(intrusive self-referent self)라고 부른다.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 외부 대상은 관찰자와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관찰자는 그 대상을 지시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런데 두정엽 후부 피질과 그 주위의 후부 상부 측두엽 고랑에 손상을 입은 환자는 외부 대상을 정상적으로 지시하지 못한다고 한다. 정상적인 지시의 틀이 망가졌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되돌리게 된다. 이런 손상을 가진 환자는 신체 외부의 사물을 지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사가 의사 몸의 특정 부위를 지시하라고 요구하면 자기 몸 중 그 부위를 지시한다. 그는 자아-지시적 자아에 사로잡혀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의 경계를 넘어 타인의 경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나’와 ‘내 것’만 존재하며, 자기-안-여기/ 타인-바깥-거기의 구분이 없다.

그런데 정상적인 사람들도 신체 밖의 공간에 손을 내밀어 사과를 잡을 때 비슷한 경험을 한다. 그는 신체 밖의 공간을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손을 내미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을 점유한다. 자아-지시적 자아는 우리가 외부 세계를 볼 때마다 자동적으로 작동하며, 거기에 사과가 있으면 잡아채어서 ‘나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공간은 ‘나의 외부 공간’으로 개념화되지 않고 즉각적으로 살아 있는 손과 사과를 감싸 안아 나의 영역이 된다. 위에서 본 환자의 경우처럼 자기 지시의 문제가 생길 때 다른 사람의 것도 나의 것이고 내가 보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라고 잘못 인식하는 증세가 발생하지만, 심각한 병리적 상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은 모두 자기 지시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자기 지시적 자아가 작용하여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수없이 경험한다. 예를 들어 오늘 백화점에서 지갑을 샀다고 가정해보자. 조금 전까지 그 지갑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하나의 상품이었다. 그런데 값을 치르고 내 손에 넣는 순간, 그것은 내 것이 된다. 그 지갑에 어떤 변화가 발생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것을 나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엄밀하게 따지면 그 지갑은 그 누구에게도 속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의 소유물로 생각하여 집착하거나, 만약 명품 가방이라면 자신의 매력이나 인격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심지어 신체 일부처럼 느끼기도 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강의를 들을 때 사람들은 특정한 자리에 앉는 습관이 있다. 어느 자리에 앉아도 괜찮지만, 사람들은 특정한 자리를 선호하여 한 번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곤 한다. 이렇게 한 번 두 번 같은 자리에 앉다 보면 지정석이거나 누구의 허락을 받은 자리가 아니어도 어느새 내 자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강의실에 늦게 도착해서 보니 다른 사람이 내가 앉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여러분들의 반응은 어떨까? 대부분의 사람처럼 ‘누가 내 자리에 앉았지!’라고 생각하며 마치 나의 것을 침범당한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다. 외부 세계의 사과를 낚아채어서 내 것이라고 점유하는 것처럼 강의실에 있는 빈 의자를 내 것으로 점유한 것은 우리 뇌의 자아-지시적 기능 때문이다. 이렇게 ‘I’가 외부의 사건에 ‘I’로 반응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이 습관적 경향은 자아-지시적 자아가 무의식적으로 기능하는 것을 강화시킨다. 정상적이지만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즉각적인 집착은 바로 이 자아-지시적 자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모든 집착은 우리 모두가 가진 자아-지시적 자아가 원인이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통상적 지각은 객관적인 현실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한다. 부풀려진 자아가 들어가서 지각체를 왜곡한다. 모든 인지 과정에서 자아는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지만, 그것은 허구적이며 상상된 것에 불과하다. 불교에서 ‘자아’ 관념을 근본 망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무언가를 대상화하고 사물화시켜 내 마음대로 하려고 드는 ‘나(I)’는 ‘나에게(Me)’를 대상으로 가진다. 주어로서 나는 공격적이고 거만한 성향이 있다. 반면 ‘Me’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떤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대상이 된 ‘나에게’를 의미한다. 따라서 ‘Me’는 수동적이며 타자의 공격에 무력하게 노출되어 있다.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고 느끼면서 내가 박살 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Mine’은 모든 개별적이고 사적인 생각, 견해, 신체 부분을 ‘내 것’이라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탐욕스럽고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 ‘Mine’은 편향된 견해를 지니고 있고 그 견해에 매달린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매달리고 내 물건, 내 것을 꽉 쥐고 놓지 않는다. 모든 애착과 집착은 나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다. 

이상으로 자아의 세 가지 모습을 살펴보았다. 현대 심리학은 붓다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고 영속되기를 희망하는 자아가 오히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고통과 불행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무아의 자각을 통해서만 고통을 없애고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이 오늘날 더 설득력을 갖는 이유이다.

 

4. 무아를 자각하는 불교명상

우리는 평소 무심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머릿속에서 수없이 많은 생각이 오간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여러 가지 현상들이 계속 의식에 떠오르고 변화하여 사라져간다. 나의 생각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생각의 무더기만 있을 뿐이다. 충격적인 것은 그 많은 생각들 중 거의 대부분이 나 자신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나에 대한 생각들’을 왜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는 것일까? 왜 그런 생각들 때문에 고통받는 것일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생각들로 나의 이야기가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내 몸에 조금만 통증이 있어도 ‘내가 아프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조금만 상처를 받아도 “내가 상처를 입었어.”라고 말한다. 

소리를 듣거나 음식을 맛볼 때, 몸의 감각을 느낄 때,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를 때, 어떤 기분이나 느낌이 들 때, 우리는 이 단순한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나’라는 존재를 만든다. 우리는 단순한 감각적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라는 개념과 연관 짓고 그로부터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변화가 이어지는 것을 ‘나’라고 부르면서 그 ‘나’가 변치 않고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명상은 이러한 자아동일시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지금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을 주의를 집중해 살펴보자. 내가 주인이 되어 느끼고 생각한 것 같지만 느낌과 생각들이 있을 뿐이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화하는 생각이나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통찰함으로써 그것들의 주재자로서 ‘나’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것이 어떠한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것이 어떠한 느낌이건 (……) 그것이 어떠한 인식이건 (……) 그것이 어떠한 심리현상들이건 (……) 그것이 어떠한 알음알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생각들을 들여다보면서 ‘그것들이 진짜일까’라고 물음으로써 생각이 단단하고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텅 빈 현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이 나일까?’라고 질문해보라. ‘이 생각도 내가 아니다’ ‘저 생각도 내가 아니다’ 이렇게 부정해가다가 마침내 ‘그것은 단지 생각일 뿐이야’라는 통찰에 미치게 되면, 비로소 우리 자신의 사고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그제야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는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이런 통찰을 얻을 때 마음은 더 이상 우리를 속이지 못한다.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이 말씀하셨듯이 생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다만 생각을 알아차리지 못할까 염려하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생각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이 상태에서 우리는 ‘나’라는 의식이나 주관적인 의도를 넘어서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할 수 있으며, 자아 이미지에 갇혀서 고통받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의집중 이전의 단계에서 작용했던 I-Me-Mine의 모든 흔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불교 수행의 핵심은 그동안 ‘나’라고 생각해온 것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데 있다. 간혹 명상 과정에서 특별한 체험을 하는 경우, 그 경험이 너무 특별하고 좋기 때문에 ‘내가 체험했다’ ‘나는 특별한 존재야’라고 생각을 덧씌우고 그 경험을 ‘나의 경험’이라고 여기며 집착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하지만 명상 과정에서 경험하는 많은 것들도 ‘나’가 아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거의 전부 자기중심적인 것이라는 데 그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명상적 체험조차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면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명상을 통해 특별한 체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오히려 명상을 방해한다. 그런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명상적 체험으로 돌아가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상황은 더 고통스러워지고 명상은 더욱 어려워진다. 명상을 하면서 내 체험이 남다르고 나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또 평범한 일상사와 다른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경험을 내 것이라고 집착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그것은 명상과 무관한 것이 된다. 간화선을 주창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깨달음도 구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깨달음조차 ‘내 것’이 아니다. 불교명상은 무아를 철저하게 깨닫기를 요구한다. 

초기불교 수행법은 사념처, 즉 신체감각과 느낌, 생각, 법에 대하여 내가 없음을 자각하도록 만든다. 이에 반해, 조사선 수행법은 존재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주체가 무엇인지, 다시 말해 자아-지시적 자아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것의 공성, 즉 ‘나’라는 것이 허상임을 자각하도록 이끈다. ‘I’라는 본능적인 관념을 떨쳐내기 어렵기 때문에 자비명상은 ‘I’를 가족과 주변의 사람, 나아가 나의 적에게까지 확장시키는 방법을 통해 ‘나’를 사라지게 하고 무아의 상태로 들어가게 한다. 그 결과 행복감, 열정, 기쁨 등과 같은 긍정적 감정뿐만 아니라 에너지의 항진 및 각성이 일어난다. 

자기중심성을 놓아버리는 것은 수행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수많은 실험과 경험을 통해 자동동작 모드로 전환할 때 운동수행 능력이 향상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서양의 주류 심리학에서는 최근까지 자아가 강한 사람이 성취도가 높아 문제해결 능력이 뛰어나며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고 믿어왔지만, 최근 들어 이 주장을 반박하는 새로운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그에 따르면, 자아의식이 강한 사람보다 ‘나’라는 생각을 덜 하는 사람, 나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보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보는 사람이 더 성공적인 인생을 살 확률이 높다고 한다. 

실제로 자신을 항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상황이 자기 기준에 맞으면 잘 해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더 실패하기 쉽다. 강한 자아는 성공적인 일에서는 순기능을 하지만 실패했을 경우에는 역기능을 한다고 한다. 반대로 자신의 어떤 면은 긍정적이지만 다른 면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유연하게 처리할 수 있다. 무아는 명상만 아니라 성공적인 삶을 위한 기반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야’라는 고집과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계속 변화하는 과정에 있음을 자각하면서 살 때 우리는 훨씬 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 

사람의 기질과 성향, 능력의 차이에 따라 사념처, 참선, 자비명상 등 다양한 명상법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불교명상의 목표는 ‘I, Me, Mine’을 ‘We, Us, Ours’로 전환시키는 데 있다. 무아의 자각을 통해 우리는 갈망과 욕구에서 해방되어 부정적인 습관을 버리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인내심과 관용의 태도를 갖게 된다. ‘바로 여기’에 집중함으로써 단순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통찰을 얻으며 안정된 상태에서 유연성과 개방성을 펼칠 수 있다. 나아가 이기심 없는 자비심으로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나’라고 하는 것이 가상이며 가변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자아의 세 가지 모습은 다음과 같이 전환된다. ‘I’라는 ‘교만한 나’는 ‘성취된 나’로 변화하며, 타인의 대상이 된 ‘Me’라는 무력하고 두려워하며, ‘괴로운 나’는 ‘밝은 나’로 바뀌며, ‘Mine’에 매달리고 ‘집착하는 나’는 ‘자비로운 나’로 거듭난다. ■ 

 

명법
구미 화엄탑사 주지.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동 대학원 미학과 졸업(박사). 해인사 국일암에서 성원 스님을 은사로 득도. 운문승가대학 졸업. 주요 저서로 《선종과 송대 사대부의 예술정신》 《미국 부처님은 몇 살입니까?》 등과 〈서양 현대예술에 나타난 선과 오리엔탈리즘〉 〈한국불교의 세계화 담론에 대한 반성과 제언〉 외 논문 다수. 원효학술상 수상.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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