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우리가 절에 가서 대개 무엇을 하는지 돌아보면, 기본적으로 축원등(祝願燈) 밝히는 일 외에는 흔히 뭔가를 먹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평소에도 절에 식사 때를 맞춰 가면 서로서로 ‘공양(供養)’을 권하면서 비빔밥이나 국수 혹은 차와 절편을 먹을 수가 있었다. 주위에서 심지어 불자도 아니라는 사람들이 어쩌다 절에 들렀다가 좋은 대접을 받았다는, 그 ‘절밥’의 예찬(禮讚)도 종종 듣는다. 그러고 보면 불자들이 자기 절에 소속하는 대중(大衆)이 아닌 외부인에게조차 왜 밥을 먹이고, 그 밥은 어찌 그리 맛이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절집에서 식사를 굳이 ‘공양’이라고 말할 때는 달리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물론 요즘에 개신교 교회나 가톨릭 성당에서도 신자들이 함께 밥을 먹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그 원조는 단연 불교의 절집일 터다. 또 언제부터인지 소위 사찰음식은 사찰 바깥에서부터 현대인의 건강식으로 주목을 받아온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지구촌 K-culture의 새로운 장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생겼다. 불자들이 절에서 밥 먹기란, 얼핏 평범한 경험이므로 모두가 유심히 살피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그 자체가 불교문화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일찍이 교과서에도 실린 《심청전》에서 ‘공양미 삼백 석’이 소개되었으니, 공양의 뜻이 널리 짐작은 되고, 더군다나 불자라면 불교 경전 어디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용어가 공양이다. 예컨대,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는, 부처님께서 구시나국(拘尸那國) 사라쌍수(娑羅雙樹) 사이에 머물며 열반에 드시려고 할 즈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마하살 · 비구 · 비구니 · 우바새(優婆塞) · 우바이優婆夷) · 여러 왕과 왕비와 권속 · 대신과 장자 · 천녀 · 용왕 · 귀신왕 · 코끼리왕 · 사자왕 · 날짐승왕 · 삼천대천세계 천신 등이 몰려와서, 자기들이 준비한 공양물을 부처님께서 받아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때의 공양물은 음식만이 아니라 온갖 금은보화 · 온갖 꽃과 향 · 비단 깃발과 일산(日傘) 등등의 재물인데, 부처님이 잠자코 공양을 받지 않으시므로 모두 전전긍긍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소개된다.
그러다 우바새 순타(純陀)의 절절한 요청인, “저희의 가난과 곤궁함을 없애주시고 한량없이 고통받는 중생을 건져 주십시오”에 부응하여 마침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다. “음식을 보시하면 차별 없는 두 가지 과보가 있는데, 첫째는 받고 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覺]를 얻는 것이며, 둘째는 받고 나서 열반에 드는 것이다. 나는 지금 너[純陀]의 마지막 공양을 받고 너로 하여금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을 구족하게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두루 모인 이들을 위하여 순타의 공양을 받아주신다는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몹시 기뻐하며 찬탄한다. “훌륭합니다. 순타여, 그대는 이 세상에서 큰 공덕과 소원을 성취하였습니다. 마치 우담바라꽃이 세간에 드문 것처럼,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시는 것도 어렵고, 부처님을 만나 신심을 내고 법문을 듣는 것은 더욱 어렵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려 할 때 마지막 공양을 올리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대반열반경》 1-2권, 제1 〈수명품〉).
불교에서 공양이란, 앞의 경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공여자(供與者)의 지극한 존중과 경의(敬意)에 기초하는 행위이다. 불자가 법당의 부처님 앞에서 무언가를 바칠 때의 마음가짐을 상상하면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음식이든 무엇이든, 공양을 드리는 마음이 그러할 때에 공양을 받는 마음은 어찌해야 마땅한가. 예를 들면, 불자들은 식사에 앞서 ① 이 음식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이 들었는지, ② 나의 덕행이 이 음식을 받을 만한지, ③ 과오와 삼독(三毒) 없애기를 근본으로 삼고 있는지, ④ 음식은 이 몸을 유지할 약으로 여기는지, ⑤ 도업(道業)의 성취를 위해서 받은 음식인지 등을 스스로 살피는 〈오관게(五觀偈)〉를 외우곤 한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불자가 음식을 취할 때 이처럼 성찰하는 마음가짐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식사일 뿐, 불교 특유의 ‘공양’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출가 불자들이 여러 가지 공양을 받을 때 엄격하게 지켜야 할 지침들은 각종 율장(律藏)에 자세히 나와 있다. 부처님 당시 인도 사회는 수행자들의 거처에서 취사(炊事)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음과 더불어, 수행자의 품평과 탁발(托鉢)로 생계를 유지하는 걸사(乞士) 공동체로서 필요한 규율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정치 · 경제 · 사회 · 자연적 여건이 서로 다른 인도 등 남방지역과 한국 등 북방지역에서 승가의 살림살이가 동일할 수 없으니, 출가자들에게 주어진 공양의 규율도 어느 면에서 변용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작금의 생활 여건에 좀 더 부합하는 계율 제정을 기대하는 가운데서도 공양에 관련된 이슈가 적지 않다.
법을 수호하는 이는 바른 소견을 갖추고 대승 경전을 널리 설하며, 임금의 일산(日傘)이나 기름병 · 곡식 · 과일 따위를 손에 가지지 않으며, 이양(利養)을 위해서 임금과 대신과 장자들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또, 시주(施主)들에게 아첨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위의(威儀)를 갖추어서 파계자(破戒者)들의 항복을 받는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계행과 법을 수호하는 스님이라 할 것이며 중생의 진정한 선지식이 되고, 그의 마음은 너그러워 바다와 같을 것이다. 어떤 비구가 이양(利養)을 위하여 다른 이에게 법을 말하고 그의 무리도 스승을 본받아서 이양을 탐한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대중을 깨뜨리는 것이다. 세 종류의 대중이 있으니 첫째는 파계하는 잡승(雜僧)이며, 둘째는 어리석은 승[愚癡僧]이며, 셋째는 청정승(淸淨僧)이다. 파계하는 잡승은 깨뜨리기가 쉽지만, 계행을 지키는 청정 승가를 이양한다는 인연으로 깨뜨릴 수는 없다.
— 《대반열반경》 권3, 제2 〈금강신품〉
그러면 실제로 청정한 출가 대중은 무엇을 · 언제 · 어떻게 먹어야 옳겠는가. 이따금 불교계에서 시비(是非)를 부르는 육식과 채식에 대한 해석, 그리고 식당작법(食堂作法) 등을 포함한 전통적 의례에 관한 문제가 이번 특집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또한, 불교의 남방문화권에서 시행되어 온 음식 공양과 북방문화권에서 그것의 고유한 특징과 차이점들을 대조해 볼 것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주제로서, 불교계 외부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큰 관심을 받아온 ‘사찰음식’이란 과연 무엇인지, 소문대로 건강한 식단인지, 그간 사찰음식을 표방해 오던 개념들과 그 영양학적 특성도 차제에 알아보고자 한다.
혹자는, 시류(時流)처럼 소개되는 사찰음식이 불교적 공양과 수행이라는 본연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마치 호사가들의 식도락(食道樂)을 위한 메뉴 정도로 취급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표하기도 하는데, 불자의 입장에서 공감되는 문제의식이다. 음식은 사람의 몸이 되고, 불교에서 이 몸이란 곧 법의 그릇[法器]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음식 공양의 중요성을 누누이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온 지구인의 건강한 심신을 위해서 진정한 사찰음식이 대중화 · 세계화될 수 있다면, 그 역시 굳이 반대할 이유를 찾지는 못할 것 같다.
평소 우리가 대하는 음식들을 단순한 먹거리로 소비하지 않고, 뭇사람과 천지자연으로부터 주어진 공양물로 받아들여서 음미하는 자세를 지킬 수 있다면, 현재의 지구 생태계 전체가 좀 더 건전해질 것으로 본다. 이러한 판단은, 특정한 종교와도 상관없이 거의 모두의 신앙심에 가까워지면 좋겠다. 수시로 섭취하는 한 그릇의 음식을 앞에 놓고, 그것이 평범한 식사로 끝날지 혹은 의미 있는 공양으로 심화될지 그 경계를 살피면서 조금 더 옳게 나아가도록 결정하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 각자의 몫이 아닌가. ‘식사와 공양 사이’에서 시시각각 통찰과 깨우침이 일어나고, 그리하여 온 세상에 공양하는 공덕이 충만해진다면, 이 또한 멋지지 아니한가.
2024년 6월
이혜숙(본지 편집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