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우리 민족 심성을 흘러내리는 문화적 원형(原型)이라는 실감을 바탕으로 본지에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불교〉를 7회에 걸쳐 연재했다. 20세기 초 최남선과 이광수 2인문단 시대로부터 시인 2만여 명에 이르는 21세기 초까지 주요 시인들의 시 속에 드러난 불교적 양상을 살핀 것이다. 

그 결과 우리 현대시사 1백10년의 흐름과 불교는 궤를 같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각 시대의 특징과 고통과 함께하고 있음은 물론 신체시, 자유시, 서사시, 산문시 등 우리 현대시 최초의 시 양식과 초현실주의, 해체주의, 아방가르드 등 새로운 시적 경향에도 불교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가 왜 우리 현대시에 이리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가. 불교를 깊이 있게 연구하며 전방위 문화 활동을 펼친 최남선이 말했듯 직간접적으로 불교의 감화를 받지 않은 우리 문물은 없다. 오래전 토착화된 불교가 우리 문화의 원형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불교와 시의 본질과 방법론상의 친연성을 빼놓을 수 없다.

송나라 시인 오가(吳可)는 일종의 시 창작법 시 〈학시시(學詩詩)〉 세 편 모두에서 “시 배우는 것은 참선 배우는 것과 같다(學詩渾似學參禪).”고 시작했다. 스스로 온전히 깨쳐야 하고, 시성(詩聖) 두보(杜甫) 같은 전범(典範)에 매이지 말아야 자재롭고 원만함에 이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와 선은 같다고 했다. 

송나라 시론가인 엄우(嚴羽)도 《창랑시화》에서 “선도는 오로지 묘오에 있고, 시도 또한 묘오에 있다(禪道惟在妙悟, 詩道亦在妙悟).”고 했다. 시는 이치에 매이지 않고, 언어의 그물에 빠지지 않은 성정(性情), 본디의 마음을 읊는 것이 최상이라 했다. 이치나 언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이 우리네 본성이고 불성(佛性)이며 그러기에 알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기에 묘오한 것 아니겠는가.

이렇듯 방법론이나 요체에서 시와 선은 같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선가(禪家)와 시단(詩壇)에서는 시선일여(詩禪一如)란 말이 통용돼오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시와 불교의 선은 각기 예술과 종교로서 그 차원이 다르다. 

금나라 시인 원호문(元好問)은 “시는 선가에 꽃 비단을 얹어 주었고, 선은 시단에 옥 다듬는 칼을 주었다(詩爲禪客添花錦, 禪是詩家切玉刀).”고 서로의 영향 관계를 절묘하게 비유했다. 도니 묘오를 전하는 방법론적 차원에서만 같다는 것이다. 

명나라 보하(普荷)는 〈시선편(詩禪篇)〉에서 “선이면서 선이 없을 때야 시가 되고, 시이면서 시가 없을 때야 엄연한 선이 된다(禪而無禪便是詩 詩而無詩禪儼然).”고 했다. 시와 선은 같아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하여 선을 참구하면서 시작에 몰두하고 있는 황지우 시인도 “선은 언어라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깨달음을 얻으면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지만, 시는 도의 경지까지 가버리면 끝나버린다. 시는 도의 경지까지 가면 안 되고 그 근처에서 어른거리다가 다시 내려오고 하는 경계상의 떨림”이라며 시와 선의 차이를 시작 체험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현대시사 주요 시인들의 시 속에 불교는 어떻게 배어들어 현대시사와 동반하고 있는가. 창작 동기와 착상에서부터 언어와 상상력과 기법의 표현적 차원 등 시 쓰기의 전 과정에서 불교를 어떻게 만나고 활용하며 어떤 효과를 내고 있는가. 현대시 세 가지 흐름인 서정, 참여, 실험시의 대표 시인들과 그 시편들로 살펴본다. 


불교 세계를 심미적, 감동적으로 울리는 불교적 서정시

먼저 우리 현대시사에 큰 획을 그었고 현대 불교시를 본격적으로 세우고 논의되게 한 만해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을 들여다보자.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며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대중을 위해 시로 써서 펴낸 시집이 《님의 침묵》이다. 

《님의 침묵》은 시집 끝에 밝혀놓았듯, 1925년 8월 29일 늦은 밤 백담사 오세암에서 탈고됐다. 직전인 6월 7일, 만해는 그곳에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탈고했다. 《십현담》은 당나라 선승 동안상찰이 10개의 화두를 걸고 칠언절구 형식으로 읊은 게송(偈頌)으로 후학들이 원주(原註)를 달아 펴내 선승들의 수행에 지침이 돼오고 있는 책이다. 

만해는 그런 《십현담》 원문 밑에 원문을 비평하는 ‘비(批)’와 원문대로 해석하려 한 ‘주(註)’를 덧붙였다. 선의 요체를 시적으로 전한 《십현담》을 독자적으로 비판, 주석하면서 만해 또한 많은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님의 침묵》은 그런 깨달음, 고단위 관념인 선의 형이상학적 경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시로 무명에 빠진 중생들을 깨우치려 펴낸 시집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골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적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한용운 〈알 수 없어요〉 전문 

총 6행으로 된 이 시는 행마다 물음으로 마감하며 시의 반복 효과와 함께 선의 화두를 던지는 효과도 내고 있다. 화두(話頭)란 문자 그대로 말의 머리를 뜻한다. 말문을 여는 말이면서 말문을 닫아버리게 하는 말이다. ‘이 뭐꼬?’라 물으며 말문을 열리게 하는 생각마저 끊어버린 이언절려(離言絶慮) 지경에서 본체며 본성을 스스로 깨치게 하는 말이 화두다. 

선가(禪家)의 그런 언어도단(言語道斷)의 화두를 참 서정적으로 아름답게 던지며 사랑하는 연인들의 가슴까지 이심전심(以心傳心) 절절히 울리고 있는 시가 〈알 수 없어요〉다. 우리네 사랑과 그리움을 가이없이,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로까지 승화시켜가고 있는 서정시, 연애시로 지금도 대중들이 많이 읽고 낭송하는 시다. 

다시 찬찬히 읽어보면 시 전체가 질문이면서도 또 우주만물이 다 불법을 드러내고 운항한다는 불교세계관이 답을 하는 시다. 불교세계관이 시에 흔적 없이 녹아들어 불교적 바탕 없이도 널리 읽히는 시다. 표제작인 〈님의 침묵〉도 그렇고 〈나룻배와 행인〉 등 대중들이 좋아하는 만해 대표시들 문면(文面)에는 불교가 표나게 드러나지 않아서 시 자체로 좋은 시들이다. 

이처럼 《님의 침묵》은 불교적 깨침을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널리 전하려는 의도에서 창작됐다. 그러면서도 언어도단 지경인 깨침의 궁극을 ‘님’으로 구체적으로 형상화해 만인에게 절절한 연애시 형식으로 전하고 있다. 시의 전 층위에서 시의 문법에 충실해 불교를 떠나서도 우리 현대시사의 우뚝한 봉우리를 점한 시집이 된 것이다. 

승려 출신인 만해가 불교세계관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시를 끌어들였다면, 불교를 시에 끌어들여 우리 현대시단에 우뚝 선 시인이 미당 서정주다. 원호문의 표현대로 시는 만해에게 꽃 비단을 얹어 주었고 불교는 미당에게 옥 다듬는 칼을 준 것이다.

“불경을 읽으면 영생(永生)을 알게 된다. 그것도 막연한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영생의 구체상과 영생을 자각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알게 된다.” “불교에서 배운 특수한 은유법의 매력에 크게 힘입었음을 여기 고백하여 대성(大聖) 석가모니께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미당은 자신의 영생, 영원의 시 세계는 물론 시의 수사법 및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시 작법까지 불교에 힘입은 바 크다고 틈만 나면 밝히곤 했다.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 

— 서정주 〈내가 돌이 되면〉 전문

이분법적인 감정이입의 비유나 상징 등의 수사 없이 그저 훤한 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어법처럼 자연스럽고 명징하다. 윤회,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의 이치를 ‘되고’를 자꾸 반복하는 시법 자체로 드러내고 있다. 윤회가 시로 육화되며 단순한 반복법을 넘어 자꾸 무언가로 전화(轉化)돼가는 이치의 깊이까지 자연스레 보여주는 것이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 〈동천(冬天)〉 전문

5행의 짧은 시인데도 온 우주를 울리는 시다. 인과관계의 사실적인 이치, 시어 하나하나의 정밀한 선택과 절차탁마, 그리고 행마다 4음보 율격의 변주(變奏)가 자연스레 흐르고 있다. 우리 모국어의 가락과 혼, 거기에 실린 민족의 정한(情恨)을 절도 있게 끊고 이어 울림이 더 큰 시다. 

해서 시인 지망생들이 시를 배우고 시인들도 자신의 시를 경계하고 가다듬을 때 가장 많이 전범으로 삼고 있는 천의무봉의 시가 〈동천〉이다. ‘미당을 통하지 않고는 시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는 우리 시단의 통설을 낳게 한 시가 바로 이 〈동천〉이다.

미당은 가슴속에서 꾸밈없이 그대로 솟구쳐 나와 사람의 심장을 울리는 말을 ‘직정언어(直情言語)’라 부르며, 그런 수식 없는 언어로 ‘순라(純裸)의 미(美)’를 추구했다. 본성에서 울려오는 말로 삼라만상과 일체가 되어 독자와 법열(法悅)을 함께 느끼자는 게 순라의 시학이다. 

〈동천〉은 5년여간 마음속에서 고치고 또 고쳐나간 시다. 나이 마흔 넘어 어떤 여인에 대한 연정의 불을 태우며 그 불을 식히기 위해 한겨울 얼어붙은 마포 서강변을 헤매다 겨울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를 보고 착상한 시다. 그러나 그 불타는 핏빛 연정을 우선 몇 년간 차분히 가라앉히다 겨우 다섯 줄로 나왔다고 짧은 산문 〈동천 이야기〉에서 밝혔다.

미당은 〈시를 하려는 사람들에게〉란 글에서 “한동안 반성기를 가지고 천천히 그 감동의 흥분을 가라앉혀서 마음을 출렁이다 잔잔히 가라앉은 호수같이 하여서, 잘 안정된 호면의 거울에 시상을 다시 비춰 빈틈없이 살펴볼 수 있도록까지 되어야 한다”며 맑은 본성에서 시가 울려나올 것을 주문했다.

이런 미당의 시어와 순라의 시학, 그리고 시작 자세 역시 불교에서 끌어들인 것이다. 아무 수식이나 형용 없이 마음속에서 솟구친 ‘직정언어’는 언어도단의 지경에서 터져 나온 불이문자(不離文子)와 흡사하다. 켜켜이 쌓인 의미를 털어버리고 시인과 대상이 의미가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만나는 언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언어를 치워버리고 본질로 직격해 들어가는 시작(詩作) 자세와 순라의 시학도 선승의 자세와 흡사하다. 원래가 불심(佛心)인 자성(自性), 본성을 들여다보기 위해 천 날 밤 마음을 맑게 닦아놓고 있지 않은가. 그런 자성을 우주 삼라만상 뭇 생령도 알아차리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동천〉을 읽는다면 이 짧은 시 한 편이 팔만대장경의 불교세계를 다 끌어안으며 속세의 임을 향한 그리움을 직정적으로 간절하게, 전율이 일 정도로 서늘하게 전하고 있는 시가 된다. 이렇게 미당은 착상에서부터 시의 전 층위에서 불교적 감화를 받고 있다.

이승훈 시인은 역저 《선과 아방가르드》에서 〈동천〉을 선시로 보며 “서정주는 망념을 떠나 감정과 욕망을 제거하고 맑은 마음을 보는 이념거정(離念去情)을 강조한다”고 했다. 물론 그리 볼 수도 있으나 ‘이념거정’은 불교 수행 자세이지 시의 자세는 아니다. 언어는 물론 언어에 묻어나는 생각과 인정(人情)을 아주 떠날 수 없는 게 시의 운명이고 그래야만 시로서 엄연할 수 있다. 

“짐(朕)의 무덤은 푸른 영(嶺) 위의 욕계(欲界) 제2천(第二天),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구름 엉기고, 비 터 잡는 데-그런 하늘 속.

내 못 떠난다.” 

〈선덕여왕의 말씀〉 마지막 대목이다. 해탈이 아니라 인간적인 사랑, 정이 타오르는 욕계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당은 〈내 시와 정신에 영향을 주신 이들〉이란 글에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져가는 영원의 윤회-이것을 쉬어버리고 해탈하라는 석가모니의 말씀”이지만 “나는 윤회를 조끔 더 해보고 싶다”고 했다. “아직 이 정(情)이, 이것이 속계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못 되는 줄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라며 정을 강조했다. 만해의 《님의 침묵》이 시집 자체로 우뚝한 것도 이 정, 인간적인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습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이운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해탈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 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들였습니다. 

— 한용운 〈선사(禪師)의 설법(說法)〉 전문

《님의 침묵》에 실린 다른 시편들에 비해 비교적 직설적이고 메시지가 분명한 이다. 번뇌의 단초인 “사랑의 쇠사슬”을 끊으라는 것이 선사의 가르침이지만 그 속박의 줄인 사랑, 정을 내려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만해의 《님의 침묵》과 미당의 시편들이 우리 현대시사의 한 봉우리를 점하면서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불교세계에 기초했거나 끌어들였어도 시로서 엄연한 데 있다. 불법이나 이치의 궁극에 따라 생각과 정을 완전히 끊어 해탈하지 않고 생각과 정을 잘 다듬었기에 선으로 읽힐 수 있으면서도 시로서 엄연한 것이다.

만해와 미당에게 드러나듯 불교는 이렇게 우리 현대 서정시에도 엄연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시의 시다움, 시성(詩性)을 갖추고 독자와의 감동의 소통을 중히 여기는 서정과 민족의 심성에 밴 불교는 끊임없이 교호하며 불교적 서정시를 낳고 있다


어두운 시대 중생을 여의지 않는 불교적 참여시

부텨님이 되랴거든
중생을 여의지 마라
극락을 가랴거든
지옥을 피치마라
성불과 왕생의 길은
중생과 지옥 

만해가 1928년 《일광(一光)》 창간호에 발표한 〈성불(成佛)과 왕생(往生)〉 전문이다. 민족의 핏줄에 흘러든 시조 형식과 불교정신에 입각해 일제하 민족운동을 일깨운 시다. 불교는 이렇게 서정시뿐만 아니라 시대의 어둠과 고통을 걷어내려는 참여시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대 약한 자의 벗,
맨발 벗고 이 가시밭길을 밟으라
여기 황야에 나를 이끌어
목놓아 울게 하라.

이 세상 더러움
오로다 나로 하여 있는 듯
오늘 신음하는 무리 앞에
진실로 죄로움을

제 눈물로 적시어 씻게 하느니
오오 시(詩)여 빛이여 힘이여!

조지훈 시인이 1959년 펴낸 4번째 시집 《역사 앞에서》에 실린 시 〈그대 형관(荊冠)을 쓰라-미(美)의 사제가 부르는 노래〉 후반부다. 이승만 정권 말기의 어둠과 더러움을 시의 빛과 힘으로 밝히고 씻어버리자는 참여시다. 〈승무〉 등 불교적 서정시 절창을 남긴 조지훈 시인은 이렇게 산문(山門)과 상아탑에서 나와 하화중생(下化衆生),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온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푸른 하늘은〉 전문

김수영 시인이 4 · 19혁명 직후 발표한 시이다. 실천적 혁명의식이 배어 있으면서도 서정적으로 잘 갈무리된 시다. 시 흐름이 무엇을 물으며 단호하게 자유를 향한 실천을 부추기고 있다. 해방 후 등단한 김 시인은 도시문명과 시민의식을 현대적으로 드러낸 모더니스트로 출발했다. 그러다 이 시처럼 시대의 어둠에 맞서는 혁명, 참여시로 들어왔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隱密)도 심오(深奧)도 학구(學究)도 체면도 인습(因習)도 치안국(治安局)으로 가라
(중략)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反動)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1964년 발표한 시 〈거대한 뿌리〉 부분이다. 잘못된 세상과 시대를 후련하게 꾸짖는 거친 직설화법의 이 시는 기존 시단에 대한 전례 없는 불온한 반동이었다. 현대시사에서 볼 때 이 시 자체로 새로운 시학, 즉 ‘반시(反詩)’ 탄생이 선언됐다. 기성의 것을 부정하며 주체적이고 본질적인 깨달음에 이르려는 선가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는 말을 떠올리게도 하는 시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 시인이 시론이랄 수 있는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한 말이다. 머리나 심장으로 시를 쓰는 어떤 관념이나 감상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위 같은 ‘온몸의 시학’의 현실감으로 밀고 나간 시인이 김수영이다. 

김 시인의 온몸의 시학은 기성의 지식이나 관념을 배제하고 주체적으로, 온몸의 체감과 실천으로 깨닫는 선적 깨달음에 닿아 있다. 철저한 부정과 반동의 불굴의 자유의지는 현실적 자유이면서 선가의 해탈 혹은 무위진인(無位眞人)을 향한 것이었다. 

선에 있어서도,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가 까맣게 안 들렸다가 다시 또 들릴 때 부처가 나타난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 음(音)이 바로 헨델의 망각의 음일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작품을 잊어버릴 것이다. 자기의 작품이 남의 귀에 어떻게 들릴까 하고 골백번씩 운산(運算)을 해보지 않아도 되는 그의 현명만이라도 나 같은 우둔파 시인에게는 얼마나 귀중한 ‘메시아’인지 모르겠다.

“선(禪)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누워서 하는 선, 즉 와선(臥禪)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로 시작되는 산문 〈와선〉 마지막 대목이다. 김 시인은 와선을 “부처를 천지팔방을 돌아다니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골방에 누워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처나 자기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부처를 기다리는 가장 태만한 버르장머리 없는 선의 태도”라고 평하고 있다.

자신 안에 부처가 있으니 부처나 경전이나 조사에 매이지 말고 성불하라는 ‘버르장머리 없는’ 조사선(祖師禪)의 핵심에 시인도 모르게 가닿은 것이다. 이 글에서 음악 감상에도 조예가 깊은 김 시인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며 ‘와선의 미학’을 떠올리고 있다.

“헨델은 베토벤처럼 인상에 남는 선율을 하나도 남겨주지 않는다. 그의 음(音)은 음이 음을 잡아먹는 음이다”라며. 애증이나 운명의 갈등에서 힘차게 우러나는 베토벤의 선율은 그야말로 벅찬 감격의 인상이다. 그에 비해 화성(和聲)에 충실했던 헨델은 천상의 화음처럼 낙천적이지만 인상적 선율은 없는 ‘망각의 음’이라는 것이다.

그런 헨델의 “음이 음을 잡아먹는 음”을 바깥소리가 안 들렸다 다시 들려오는 소리, 즉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고 아무리 부정했지만, 결국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본디의 소리로 선과 잇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작품도, 쓰는 것도, 독자도 계산에 넣지 않을 때 그런 본디의 음, 망각의 음은 들린다며 ‘온몸의 시학’을 ‘와선의 시학’과 연결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진보적 이념과 자유, 그리고 참여를 내세운 4 · 19세대 시인과 평론가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시 〈폭포〉의 후반부다. 곧은 소리를 내며 곧은 소리를 부르는 폭포 소리는 자유, 혁명이면서 모든 것이 사상(捨象)된 본디의 소리라 할 수 있다. 해서 뭐라 의미할 수도 규정할 수도 차별할 수도 없는 선적 직관의 찰나로 그대로 읽어도 좋을 시다. 

참여시의 비조(鼻祖) 격으로 추대되는 김 시인의 시에도 이렇게 불교가 영향을 끼치며 우리 시단에 시대별로 명칭을 달리하며 주류로 흘러든 저항시, 민중시, 노동시 등 참여시 계열에도 불교가 힘 있게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물이 본디대로 차별 없이 어우러지는 화엄세상을 이루려는 하화중생의 실천적 수행 덕목과 참여시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아방가르드 최전선에서 선과 만나는 불교적 실험시

겨울 하늘은 어떤 불가사의의 깊이에로 사라져가고,
있는 듯 없는 듯 무한은
무성하던 잎과 열매를 떨어뜨리고
무화과나무를 나체로 서게 하였는데,
그 예민한 가지 끝에
닿을 듯 닿을 듯 하는 것이
시일까

언어는 말을 잃고
잠자는 순간
무한은 미소하며 오는데
무성하던 잎과 열매는 역사의 사건으로 떨어져 가고,
그 예민한 가지 끝에
명멸하는 그것이
시일까. 

— 김춘수 〈나목(裸木)과 시 서장(序章)〉 전문

 

감상적 서정시로 출발해 이미지즘, 관념시, 존재론적 시, 사물시, 무의미시 등 현대시의 모든 양상을 다 보여주며 시 자체를 통해 해탈에까지 이르려 한 시인이 김춘수다. 우리 현대시사를 시와 시론을 통해 이끈 김 시인이 시의 본질, 본디의 진면목에 대해 묻고 있는 시이다. 언어를 잃어야 무한실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서 선과 그대로 만나고 있는 시다. 

“근원을 바로 잘라버리는 것은 부처님이 인증했으니, 잎을 따고 가지를 찾는 일을 나는 못한다(直截根源佛所印, 摘葉尋枝我不能)”. 선객들이 교본처럼 여기는 당나라 영가대사 현각의 《증도가(證道歌)》 한 구절이다.

아무리 번뇌, 윤회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런 망상만 더해가는 마음. 그런 잎과 가지 같은 마음, 그 근원을 바로 잘라버리고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언어도 내려놓는 근본적 처방을 선은 지향한다. 위의 시 또한 그런 마음과 언어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찾아드는 것이 시란 것이다.

“시는 해탈이라서/ 심상(心象)의 가장 은은한 가지 끝에/ 빛나는 금속성의 음향과 같은/ 음향을 들으며/ 잠시 자불음에 겨운 눈을 붙인다.”(〈나목과 시〉 끝부분)처럼 해탈에 이르기 위해 언어에서 의미를 버리고 소리로서만 무의미 시 세계로 나갔다. 릴케의 순수관념, 하이데거의 실존철학과 현상학 등 서구 시정신과 지성을 두루 섭렵한 김 시인은 이렇게 시를 써나가며 선의 언어도단과 만나게 된다.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더듬이 일자무식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불러다오.
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김 시인이 25년간 매달려 쓴 장편연작시 〈처용단장〉 일부다. 언어는 있되 의미가 발붙일 곳 없는 시다. 의미를 철저히 차단해 음향만 남게 한 무의미시의 본보기다. ‘사바다’는 무엇이고 어떻다는 의미와 형상이 있어야 하는데 “사바다는 사바다”라는 동어반복으로 문맥을 차단하고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이미지 생성도 차단해 오직 음향만 남은 시다.

“말을 부수고 의미의 분말을 어디론가 날려버리고 이미지를 응고되는 순간 처단해 버린 시” “완전을 꿈꾸고, 영원을 꿈꾸고, 불완전과 역사를 아주 아프게 무시해버린 시”가 무의미시라고 김 시인은 밝혔다. 그런 시를 통해 선적인 해탈을 꿈꾼 것이다.

뻔한 소리는 하지 말게.
차라리 우물 보고 숭늉 달라고 하게.
뭉개고 으깨고 짓이기는 그런
떡치는 짓거리는 이제 그만 두게.
훌쩍 뛰어 넘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딱 떼게.
한여름 대낮의 산그늘처럼
품을 줄이게
시는 침묵으로 가는 울림이요
그 자국이니까 

— 김춘수 〈품을 줄이게〉 전문

김 시인이 말년에 쓴 시이다. 말 많은 후배 시인들을 경계하기 위해 지은 이 시는 알기 쉽게 풀이한 선문답처럼 들린다. 김 시인의 전위적인 시적 실험에는 이렇게 본질세계로 직관(直觀), 직격(直擊)해 들어가 해탈하려는 선의 요체가 가부좌 틀고 있다.

이승훈 시인은 시에서 자아와 대상과 언어를 소거시켜가며 텍스트로서 시 자체, 시 쓰는 행위만 남게 한 아방가르드의 백척간두에서 선을 만나 선시학을 일궜다. 오규원 시인은 두두물물(頭頭物物)의 실상을 드러내려 한 날이미지의 실험에서 선과 만났다. 황지우 시인은 모든 기성의 것들을 해체하는 해체시를 선보이며 가장 시적인 것이 선적 세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실험파, 아방가르드는 그 최전선 백척간두에서 선과 만나고 있다. 시인과 대상과 언어를 지워나가는 방법론에서 시와 선은 운명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지워나간 영점, 아방가르드의 끄트머리는 소통 부재의 허무, 시로서는 죽음이라는 것을 아방가르드 시인들의 극단적인 시편들은 보여주고도 있다.

그래서 평상심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 평상심은 이전의 평상심이 아니라 돈오(頓悟) 이후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다. 인습에 갇힌 상집(常執)의 산과 물을 ‘아니다’라며 철저히 차단하고 부정하고 깨부수는 단집(斷執) 이후에 본 요오(了悟)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본디 세계로 돌아온 활구(活句)로 시와 세계를 새롭게 되살려내고 있다.


‘불교적’ 서정, 참여, 실험시 장르가 가능할 불교의 시적 영향

이처럼 우리 현대시의 세 갈래, 서정시와 참여시와 실험시의 대부 격인 서정주, 김수영, 김춘수 시인의 시 세계에도 불교가 스며들고 운명적으로 선과 만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선일여’나 ‘시심이 곧 불심’이라는 말이 우리 현대시사 모든 시대와 경향을 망라하여 두루 통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상과 만나 한순간에 터져 나온 감흥을 운문으로 표현한 게 서정시다. 동서고금 시의 강심수로 흐르며 시대에 따라 참여시와 실험시의 격랑을 일으키게도 하는 시의 근본이 서정시다. 

나와 대상은 하나라는 동일성의 시학과 과거의 회상과 미래의 예감을 포괄하는 한순간의 감흥, 포에지로서의 순간성의 시학이 서정의 양대 시학이다. 이런 서정시학은 일즉다 다즉일 등 불교세계관, 특히 한순간 문득 깨치는 선의 돈오각성과 연결된다.

애초에 선적 깨달음을 시화한 만해의 《님의 침묵》은 물론이고 미당을 비롯한 서정시 계열의 주요 시인들이 서정시학의 최고봉에 이르기 위해 나름대로 불교에 기대고 있다. 착상은 물론 시의 전 층위에 불교 사상과 선적 방법을 끌어들여 시를 가다듬고 깊이를 주며 불교적 서정세계를 일구고 있는 것이다.

1961년 4 · 19혁명 이후 시단의 주류로 떠오른 참여시 계열의 현실주의 시에도 불교적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만해가 일제하 탄압과 무명에 빠진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님의 침묵》을 펴낸 불교의 실천적 수행 덕목 하화중생을 시대의 어둠을 걷기 위해 시로서 적극 따른 것이다.

기존의 질서, 시로 말하면 기존 시의 형태나 문법 등 규율을 파괴, 참신한 시를 선보이려는 실험파는 어느 시대든 시대의 전위에 서고 있다. 인간의 인식에 의해 만들어진 기존의 언어와 형태와 사고방식 등을 전방위에서 파괴하고 새롭게 세계의 본질을 드려내려 한 아방가르드는 그 절정에서 선과 운명적으로 만나고 있다.

이처럼 서정시는 물론이고 참여시, 실험시 계열에도 ‘불교적’이란 관형어를 붙여 그 계열의 하위 장르로 불러도 될 정도로 불교는 우리 시 전반에 두루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하는 선과 선시

그렇다면 불교, 특히 선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부처는 누구고, 태어나기 이전 너는 누구고, 법열이며 도는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다. 팔만사천의 불경으로도, 평생의 말로써도 다 답할 수 없는 그런 궁극의 지경을 직접 깨달아 체험, 해탈에 이르는 수행이 선이다.

불교에서 열반에 이르기 위한 여섯 가지 실천 덕목인 6바라밀, 즉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 중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정이 선이다.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면벽 선정에 들면서, 또 노장(老莊)의 도가(道家)와 공맹(孔孟)의 유가(儒家)와 교류하면서 선은 중국불교 특유의 선종으로 발전하게 된다. 

석가모니는 깨달은 후 홀로 법열(法悅)에 머물 것인가, 입을 열어 중생들을 깨우칠 것인가 7일간 묵상한 후 말하기를 선택했다. 그 뒤 45년간 쉼 없이 설법하면서도 “나는 한 마디도 말한 바 없다”고 열반에 들 때까지 확인시키곤 했다. 설법, 말은 법열의 지경에 오르도록 하는 방편일 뿐이기 때문이다. 

면벽 수행하는 달마에게 혜가가 찾아와 제자 되기를 청했다. 거절하자 혜가는 팔뚝을 싹둑 잘라버리고 고통에 울부짖으며 “마음을 편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 아픈 마음을 내게 달라” 하니 혜가는 “마음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다” 했다. “바로 그것이다. 나는 너의 마음을 이미 편하게 해주었다”는 달마의 말을 듣는 순간 혜가는 깨달음을 얻어 달마의 첫 제자가 되어 선가(禪家)의 2조(二祖)가 되었다.

“깨달음의 나무란 본래 없고, 밝은 거울도 본래 없네.(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때 끼고 먼지 인단 말인가?(本來無一物,何處惹塵埃)”

조계산 보림사에서 선을 크게 진작시킨 육조 혜능이 오조 홍인으로부터 의발을 전수하게 한 게송이다. 홍인의 상좌 신수가 스승으로부터 인가받기 위해 지은 “몸은 깨달음의 나무고, 마음은 밝은 거울이네. 무시로 부지런히 닦고 털어서. 때 타거나 먼지 끼지 말도록 하세”란 게송을 보고 지은 것이다.

이 두 게송을 본 홍인은 신수에게 “본성의 문 앞에 이르렀는데 문 안에 들지는 못했다”며 “이 같은 자세로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내쳤다. 그러면서 본래 한 물건도 없는 지경에 든 혜능에게 의발을 전수한 것이다. 그런 혜능에게 법을 이어받은 신라 유학승들이 조계산에서 돌아와 선맥을 이으며 오늘 한국불교의 주류인 조계종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선은 위없는 깨달음의 궁극에 이르기 위해 인습과 학습이 켜켜이 밴 언어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이언절려라, 언어를 떠나고 생각도 끊어 본디의 마음과 세상 여래지(如來地)로 들어가는 것이다. 해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가르침 밖의 것을 따로 전하며,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키며, 본성을 들여다보면 성불한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는 선의 4구게가 나오게 되었다.

선시는 선 수행과정과 깨달음을 드러내거나 법통을 전수할 때 짤막한 운문 형식을 사용하면서 비롯됐다. 석가도 입을 열어 설법했듯 불립문자의 선가에서도 악을 써 꾸짖는 할이나 방망이로 분별심을 내리치는 것보다 입을 열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불리문자(不離文字)이니 인언현리(因言顯理)요 의언진여(依言眞如)가 선가의 언어다. 

그러니 지극히 압축되고 역설적인 반상(反常)의 언어가 될 수밖에 없다. 한마디 말로 홀연 생사를 초월하고(一言之下 頓忘生死), 단숨에 초월해 여래의 지경으로 들어가는(一超直入 如來地) 언어가 선가의 언어고 게송이다. 

이런 게송들이 당나라에 들어와 완성된 자수와 운율, 형식을 갖춘 정형시인 근체시의 영향을 받으면서, 또 시인들이 그런 선가의 일초직입의 문법과 상상력을 흡수하면서 시선일여란 말을 낳게 한 것이다.

 

시는 언어의 예술, 선은 언어도단의 종교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어느 하나를 떼어놓고 바라보아도 언어가 발 디딜 틈은 없다. (중략) 우리는 결국 신(神)을 말 속에서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된다. 그것은 결국 하나의 사물도 말 속에서는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된다. 그런 안타까운 표정이 곧 말일는지도 모른다. 시는 그런 표정의 정수(精粹)일는지도 모른다. 누가 시를 산문을 쓰듯, 자연과학의 논문을 쓰듯 쓰고 있는가? 시는 이리하여 영원한 설레임이요, 섬세한 애매함이 된다.

김춘수 시인이 역저 《시론(詩論)》에서 선의 4구게를 빌려와 언어와 시를 규정한 말이다. 언어와 시 문법을 끝없이 실험하며 우리 시를 현대화시킨 시 쓰기 체험과 동서양 문예이론을 섭렵하여 내린 나름의 위 결론에서 시와 선의 동질성과 차이점을 읽어낼 수 있다.

언어의 불구성(不具性)을 극복하고, 언어에 의해 차단되고 가려진 본성이며 실재에 도달하려 함에서 둘은 한통속이다. 나와 너의 참모습을 직관, 통찰해내려는 시선과 마음에서는 같다. 

그러나 선은 불립문자인지라 묵언정진(黙言精進)이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위없는 깨달음, 훤하고 훤한 본성의 지경으로 들지만 시는 언어로 지은 절집이라서 어떻게든 말로 짓고 전해 주어야 하기에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영원한 설레임이요, 섬세한 애매함”의 안타까운 표정 그 자체가 시의 정수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요, 선은 언어도단의 종교이다. 시는 그런 불구의 언어로 최상의 시 세계에 이르는 예술이지만 불교, 선은 반야의 위없는 깨달음에 이르면 언어의 사다리를 치워야 하는 도며 법이며 종교이다. 

문득 깨우침이 있을 때 불가에서 흔히 말하는 ‘한 소식’의 진경을 심미적으로 형상화, 감동적으로 전하는 게 시다. 우주 모든 것이 함축된 현현의 순간적 감동, 일상적 언어나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 감동을 어떻게 독자들에게 온전하게 전해야 하는가에서 시의 미학은 나온다. 

“진리는 스스로 그리고 보편타당성 있게 표현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자아의 심혼과 확연한 생활에서의 타당성 안에 표현되는 것이다. (중략) 감동의 언어 형성을 가능하게 하려면 일회적인 시적 상황의 현재화가 요긴한 것이다.” 문예이론가 볼프강 카이저가 《언어예술작품론》에서 한 말이다. “일회적인 시적 상황의 현재화”는 시적 순간의 현재화, 구체화, 육화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지금 여기의 구체적 상황에서 자아와 대상이 교류하며 내적 경험이 구체적으로 결정(結晶)된 것이 시이기에, 격언이나 잠언 등 아포리즘의 무시간성, 추상성을 뛰어넘어 감동을 주는 것이다. 

수용미학적 관점에서 시를 시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시 텍스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소통에 의한 수용에 있다. 시 텍스트에서 일상적 의미를 벗어난 난해하고 침묵하는 부분이나 공간은 시 각 층위의 상호작용에 의해 희미하게라도 제시해주게 마련인 길을 따라 독자들이 그 의미를 구체화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시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독자와 소통이 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김춘수 시인이 지적한 대로 선의 4구게에는 언어가 발 디딜 틈은 없다. 언어도단과 이심전심의 지경은 시의 영역이 아니라 신과 종교의 영역이다. 그래도 그런 영역을 향해 시는 불구의 언어 탑을 쌓으며 발돋움하고 또 하기에 영원한 설렘이요 섬세한 애매함의 표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표정이 독자들에게 되레 감동적으로 수용, 확장돼 신의 지경까지 들게 하는 게 시 아닌가.


불심과 시심의 오묘한 조화를 위한 감동의 시적 형상화

한국현대시사 1백10년의 시들을 쭉 읽어 내리며 선적 직관과 상상력은 보이나 미적으로 형상화되지 않았거나 소통이 안 되는 시편들도 많이 봤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라며 모든 것을 부정하고 끊는 단집(斷執)에 빠져 주체 못 하는 시편들도 더러 있다.

또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보이는 대로 느낀 대로 쓰는 시편들도 많다. 주객 대립을 초월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여여(如如)하게 보는 깨달음의 경지를 그저 밋밋하게 흘려버려 안타까운 시편들도 있다.

근래 들어 불교시가 시단에 일반화되면서 여행시처럼 불교적 세계가 주제화되지 못하고, 그저 풍물적, 소재적 차원에 머물고 마는 시편들도 여전히 많다. 다른 한편으론 불교, 선 문법에만 기대어, 내용 없이 진정성을 의심케 하는 시편들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런 시들의 문제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거나 일부러 기댔으나 시로서 엄연하지 못한 데 있다. 시의 전 층위에서 심미적으로 형상화되지 못한 데 있고 무엇보다 대중과 소통하려는 따뜻한 정이 없다는 데 있다.

때문에 날로 우리 시단의 큰 흐름을 이뤄가고 있는 불교시가 시로서도 성공하려면 이제 불교가 눈에 띄게 소재적 차원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소재에서 주제로 흔적 없이 녹아들어야 할 것이다.

불교시도 시인 이상, 불교나 선의 문법이 아닌 시 문법을 따라야 한다. 특히 불교나 선에 조예가 깊을수록 그쪽 문법에 기울어 시를 버리기 십상일 테니 더욱더 시 문법에 따라 형상화해 시로서 엄연해야 할 것이다. 속세의 문법과 정을 저버리면 시로 설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시의 가장 큰 덕목인 감동의 소통에 좀 더 주의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도 홀로 법열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든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려 했듯 시에서도 그러해야 할 것임을 우리 현대시사 1백10년 시편들을 읽어가며 실감했다.

“부처님법은 사부대중들의 실질적인 고민으로 꽉 차 있으며 이를 구체적으로 질문하고 구체적으로 답해주기 때문에 시 언어의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충분한 역할을 한다.”

젊은 불교시인을 대표하며 시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문태준 시인의 말이다. 실질적인 고민을 구체적으로 풀어주려는 부처님의 설법과 마음이 시의 폭과 깊이, 에너지를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인터넷 공간의 생활화로 글로벌 사이버 신유목시대로 정처 없이 접어들었다. 또 가상현실이나 인공지능이 세를 키우며 인간의 정체성 혼란을 가중시켜 나갈 것이다. 

이런 혼란과 혼돈의 시대일수록 우리 사회와 인간의 정처와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불교가 더 긴요해질 것이다. 실제로 21세기 들어 더 많은 젊은 시인들이 불교에서 새롭게 시적 에너지를 찾고 있고 또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단작 중 불교적 에너지가 충만한 작품들을 적잖게 볼 수 있다. 

해서 앞으로 불교시가 시단에 더 큰 흐름을 이뤄나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불교시는 부처님의 마음, 불심과 그것을 대중에게 어떻게든 펴려는 따뜻한 인간적인 마음, 시심의 오묘한 접점을 나름으로 찾아 시로 들어가야 시로서도 우뚝할 것이다. ■

 

이경철
문학평론가 · 시인. 동국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2010년 《시와시학》(시) 등단. 저서로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 《미당 서정주 평전》 등과 시집 《그리움 베리에이션》이 있다. 현대불교문학상(평론 부문), 질마재문학상 등 수상. 현재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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