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가을, 우리 불교TV 제작B팀은 경남 함양의 황석산 자락을 찾아갔습니다. 존경하는 큰스님을 뵙고 법문을 듣는 프로그램 〈염화실 탐방〉 ‘성수 스님 편’ 제작을 위해서였습니다. 뒷날에 ‘뜰 앞의 잣나무’로 개명된 〈염화실 탐방〉은 불교텔레비전의 간판 프로그램. 석주 스님, 일타 스님, 서옹 스님, 성수 스님이 1차 취재 대상이었습니다. 

찾아간 ‘황대선원’은 조립식 가건물 두엇으로 단출했습니다. 대담 형식이었던 〈염화실 탐방〉에서 질문자는 한학의 천재로 알려진 송찬우 교수. 스님의 상좌이기도 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녹화가 시작되자 스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예, 그 말씀이 ○○경전 ○○에 나오지요.’ 하고 송 교수가 자신의 식견을 토로 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토가 달리면 스님의 활구법문은 즉시 죽은 문자반야로 둔갑되었습니다. 차라리 그냥 잠자코 듣는 것보다 못한 상황이 계속됐습니다. 몹시 거슬렸던 저는 급기야 그런 식으로 토 달지 말라고 송 교수를 제지했습니다. 웬만하면 그렇게 지식발표를 하다가도 금방 밑천이 드러나 저절로 조용해질 만도 했지만, 워낙 아는 게 많다 보니 말마다 ‘주석질’이 끊이지 않았던 겁니다. 

당시 질문 안(案)을 뽑기 위해서 우리 팀원들은 자주 밤을 새우곤 했었습니다. 실은 이를 핑계로 술자리가 목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질문 중에는 ‘스님께서 큰절 직지사에 주석하시면, 모시는 저희도 안심되어 좋고, 대중들도 무량법문을 듣게 되어 좋은데 왜 이렇게 궁벽한 곳에 지내십니까?’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질문을 송 교수가 하자 곧바로 성수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평생 남의 말만 섬겼을 뿐, 내 말 한마디 스스로 한 적 없고……. 해서 이곳에 와서 까치 그분들이 오기에 하루 법문하고, 또 하루 법문하고…… 하니, 까치 그분들이 더 잘 듣는 거 같아…….”

한 장소에서만 녹화를 하면 너무 지루하게 될 것을 걱정하여, 서너 곳 옮겨가며 인터뷰를 했습니다. 마침 가을이어서 감을 따서 드리는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송찬우: 스님, 감 드시지요.

성수 스님: 응, 고맙네. 그런데 혹시 자네 감 맛을 아는가?

송찬우: …… 

(이후는 전혀 대본에 없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경전에도 없는 말이죠.)

성수 스님: 나는 “감님 고맙습니다.” 하고 먹네. 나는 70년이 훨씬 더 지났는데도 아직 설었네. 그런데 이 감은 1년도 되지 않아서 이렇게 완전히 익었네…… 그래서 “감님 고맙습니다.” 하고 먹네.

 

바람 소리 탓에 픽업된 오디오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방송에서 이 부분은 제외되었습니다. 첫날 장시간 녹화를 마친 후, 우리는 염화실에서 주신 따뜻한 차 한잔 마시며 성수 스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태응’과 ‘송찬우’ 두 상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먼저 태응 스님은 어렸을 때, 좀 둔했다고 합니다. 동진출가를 한 태응 스님은 한문을 잘 익히지 못해서 사형들에게 꿀밤 당하기 일쑤였는데, 그때마다 눈물 콧물 흘리며, 절 바로 아래의 속가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집에 가면, ‘여러 형제에서 입을 하나 줄이자고 출가시켰는데 오면 어쩌느냐’고 달래고 달래서 또 올려보냅니다. 그렇게 스님은 너덧 차례 집과 절을 오갔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시 멀리서 올라오더랍니다. 성수 스님은 중간에서 ‘태응’을 부둥켜안고 같이 엉엉 우셨다고 합니다. 왠지 모르게 그냥 눈물이 나더랍니다. 아무튼 그 이후로 태응 스님은 다시는 집으로 가지 않았고, 오랜 세월 천일기도를 몇 번씩 하시는 등 큰 원력으로 불교TV를 세우는 등 두터운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먼발치에서 뵈었던 직원의 입장에서 보면, 태응 스님은 직원들을 선방 수좌처럼 대우하시고 높여주던 분이셨습니다. 케이블TV 광고시장이 열리기 전이라, 전혀 수익이 없어서 곳곳에 화주하러 다니기 바쁘셨고, 뒷날엔 경영난으로 불교TV 주식이 소각되어 반(半) 사기꾼처럼 되어버렸지만, 허름한 폐교에 석상들과 함께 풍진을 겪으셨어도 마음 좋게 그냥 허허 웃던 분이셨습니다.

반면에 송찬우 교수는 출가할 때부터 한학의 천재로 주목받던 기대주였다고 합니다. 송 교수를 상좌로 받자 성수 스님 주변의 스님들이 모두 부러워했답니다. 불문에 든 16세에 이미 사서와 《시경》을 보던 송 교수는 이후 탄허 스님 문하에서 동양고전의 유현한 세계로 더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승가의 선망과 달리 16년 뒤, 32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퇴속했습니다. 물론 이후 가장 난해한 유식(唯識) 경전과 어록들을 번역하고 강의하는 등 거사로서 뚜렷한 업적을 이뤘습니다. 달라진 두 상좌의 길에서 인생의 묘한 함의(含意)를 읽습니다.

아무튼 당시는 다들 조금은 서툴고 설익은 때였습니다. 열정이야 넘쳤지만, 제작진의 경험은 일천했고, 불교 발전을 위해 기쁘게 응해주셨지만, 스님과 출연자에겐 조금은 낯설고 멋쩍은 모습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7년이 지나 성수 스님도 태응 스님도 송찬우 교수도 모두 떠났지만 ‘아직도 나는 설었다’라고 말씀하시던 그 모습과 말씀이 잊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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