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는 것들은 당연시된다. 늘 그 자리에 가까이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내가 필요할 때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된다. 별다른 노력을 구하지 않아도 되고, 약간의 몸짓만 해도 내게 호응을 해주기 때문에 당연하다 못해 때론 보이지 않는 대상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가까이 있는 흔하디흔한 것과는 조금 다른 무언가에 호기심과 매력을 느끼게 된다. 내 주위와는 달리 뭔가 특별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 특별함은 내 곁에 있기에 이제는 식상해진 것과는 다른 신선함으로 생동감을 느끼는 데서 온다. 그 생동감의 또 다른 세계를 맛보고 싶기에 우리는 기꺼이 약간의 특별함을 찾아다니는 유목민이 된다.

공기처럼 내 곁에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내가 필요할 때 버튼을 누르기만 해결이 되는 자판기 같은 존재 중 하나는 아마도 가족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식구는 대표적인 양날의 검이다. 누군가에겐 최고의 휴식처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최악의 짐 덩어리로 인식되는 존재가 바로 가족이라는 혈연이다. 물론 가족은 사랑을 기반으로 한 존재이고 서로를 사랑함은 분명하다. 

퇴계의 손자 사랑은 각별했던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맏손자 안도(安道)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여, 안도가 다섯 살 때는 퇴계가 손수 《천자문》을 써서 가르칠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특히 손자 안도가 본가를 떠나 있을 시기부터는 수많은 편지를 보내 조언을 하고 엄하게 꾸짖는 등 늘 관심을 가졌는데, 그 편지는 안도의 나이 15세 때부터 30세까지, 즉 퇴계가 70세에 몸져눕기 이틀 전까지 썼던 것으로 전해져 온다.

그 편지 중,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 바로 “기각첨도수(棄却甛桃樹) 순산적초리(巡山摘醋梨)”다. “우리 집의 단 복숭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쓰디쓴 돌배를 따러 온 산을 헤매고 있구나”라는 뜻으로, 엉뚱한 데 한눈파는 맏손자를 퇴계 이황 선생이 꾸짖어 나무라는 대목이다. 

우리는 주로 이 구절을 ‘가까이 있는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고 어두운 안목에 대한 탄식’을 내뱉을 때 인용한다. 그러나 나는 이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고 싶다. 

가족 간의 관계의 틀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 차이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인정받기 힘든 경우가 바로 가족 사이이다. 남들이 대단하다고 존경하고 인정받는 경우라도 정작 가족들 사이에서는 그 존경과 인정이 제삼자의 경우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그냥 일상 속에서 허물투성이의 한 사람으로만 비칠 뿐이다. 그렇기에 타인들의 열광이 오히려 어색하게 다가오기까지 한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를, 동생의 입장에서는 형을 왜 사람들이 대단하게 생각하는지 이해 안 되는 점이 더 많을 뿐이다. 

원론적인 면에서 보면, 타인의 인정보다도 더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바로 가족 사이의 인정이다. 하지만 가족 간의 인정은 참으로 힘들다. 왜냐면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본인은 상대방이 원하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상대방에게는 끊임없이 자기가 바라는 역할을 수행해주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가족의 균형과 인정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고, 사소한 서운함의 외연이 자꾸만 넓어지게 되는 것이다. 서로에게 각자가 바라는 것만 요구하는, ‘바라기’ 형태에서 비롯된 일종의 갈등 현상이다.

나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는 청년들의 대부분은 그 기저에 가족 간의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부모에 대한 서운함이 분노로 변질돼 현재의 사회생활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부모님의 직업이 소위 배운 지식인 계층이라는 점도 특징이었다. 요즘 장안의 화제인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처럼 부모의 요구나 기대치와는 달리 자식 삶의 방향성은 서로 다른 곳을 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가 바라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자, 어느 순간 이웃들에게는 (떳떳이 내놓을 수 없는 자식이라) 자식의 서열에서 지워진 채, 있는 자식도 없는 자식도 아닌 이상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에게 그 원망만 늘어난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가까이 있으면 자연히 바라는 게 많아질 수밖에 없다. 늘 몸을 맞대고 사니 당연한 이치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랄 수밖에 없으나, 문제는 그 바라는 대상이 서로 늘 어긋난다는 데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객관적 인간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지금까지 지니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초기화시킨 후, 한 여자, 한 남자의 모습으로 가족들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삶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는 나의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형으로서 누이로서 그 역할에 대입을 시켰다면, 한 남자로서, 한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객관화하여 타자의 시선으로(제3인칭 화자로서) 그 사람을 읽게 되면 여태까지 보지 못한 섬세한 면들을 발견하게 된다.

각자가 얼마나 불쌍하게 아등거리며 살아가는지를 저절로 알게 된다. 가족이라고 당연시 여겼던 그 삶이 서로에게 얼마나 버팀목이 되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황 선생의 손자 경우에도 늘 가까이 있는 할아버지는 그냥 평이하게 보여, 그래서 좀 더 특별한 무엇인가를 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가까이 있기에 무신경해지는 존재가 바로 가족이다. 가족들은 늘 곁에 있고 함께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장점보다는 단점을 먼저 발견하게 되고, 더 많은 요구를 하게 된다. 내가 그들을 지켜주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위해 그들이 있는 존재로, 무의식에서 이미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상불경보살의 시선이다. 상불경보살처럼 우리 곁에 머무는 사람을 부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갈등이 해소되기에 충분하리라. 상대방을 존중하는 상불경보살의 눈으로 바라보면 부처의 눈으로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나의 경계를 넘어 상대방을 대하게 된다. 이 순간 우리는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내 경계를 넘어 부처님과 만나는 순간은 오해가 없다. 따라서 오직 진심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뿐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영원한 것은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가족에게 먼저 대입해보면 새로운 의미를 느끼게 된다.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 곁에 머물러 주는 것만으로도 그 이상의 고마움은 없기 때문이다. 제행무상을 떠올린 우리는, 날마다 우리 집의 단 복숭아를 맛있게 먹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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