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수 강남대 교양학부 교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걸까?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곰곰 생각해보면, ‘나’라는 존재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날부터 시작된 것만도 아니고, 내 육체적 죽음으로 끝나는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출생 전 태아 상태로 있을 때도 ‘나’이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씨앗이 만나 이제 막 꿈틀대기 시작한 그 수정체도 ‘나’가 아닐 수 없다. 어찌 그것만 나의 기원이겠는가? 난자와 정자를 만들어낸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이 어찌 ‘나’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어머니, 아버지 몸의 일부도 ‘나’이다. 어머니 아버지뿐이던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나의 기원은 조부모, 증조부모에게 연결되고, 더 올라가면 인류의 첫 조상에게까지 연결될는지 모른다.

시대적으로 소급해 올라가서만 나의 기원이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의 수평적 관계망 안에도 내 삶이 들어있다. 내가 아침에 먹은 밥 한 공기 없이 어찌 내가 살아갈 수 있겠는가. 밥 한 공기가 내 밥상 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하늘의 태양과 내리는 빗물, 땅 속의 양분도 있어야 하니, 내 생명의 기원은 자연 자체로 확장된다. 게다가 나의 어머니가 살아온 환경, 취했던 양분과 지식이 어찌 오늘의 나와 무관할 수 있겠는가? 따져보면 실상 나를 나 되게 해준 원인은 셀 수 없을 만치 많다. 한 마디로 무한하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나 되게 해준 필수불가결한 원인들인 것이다. 한 마디로 전 우주가 오늘의 나를 나 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그리스도교인은 나를 나 되게 해준 것들의 근원을 ‘하느님’이라며 다소 인격적으로 표현하며 고백한다.

또, 나는 죽어서 어떻게 될까? 죽고 나서 화장을 하면, 한 시간도 못돼서 나는 한줌 흙이 되고 만다. 매장을 한다고 해도 몇 년, 몇 십년 안에 그 흙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나의 세포를 이루고 있던 것들이 무덤가의 풀 뿌리로 흡수되어 풀잎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한 송이 민들레꽃으로 피어나기도 할 것이다. 들풀을 뜯는 소의 몸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고, 바람에 따라 떠도는 민들레 홀씨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민들레 홀씨 속에 그 어떤 사람의 세포가 있을지도 모르고,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세포가 소나무 잎의 모습으로 피어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 한 마리가 무덤가의 풀을 뜯고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잔인한 노릇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또 그 소를 잡아먹고 살아간다. 그리고는 몸 속에서 새로운 생식세포들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내 몸의 일부가 또 다른 몸의 일부가 될 수 있고, 다른 몸의 일부가 내 몸의 일부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니 오로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가 시작되었다는 말도 불완전한 답이다. 그 이전부터 이미 나는 다른 모습으로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죽고 나서 무로 돌아간다고 하는 말도 불완전하다. 이 세상에 사라지는 것은 없다.

어렸을 때 놀던 초등학교 운동장의 정글짐에 내 손때가 묻은 채 남아있을 수도 있고,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흘렸던 땀이 대기와 섞였다가 다시 빗물이 되어 떨어져 땅 속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 사라지는 것은 전혀 없다. 우리가 감각기관으로 파악할 수 없을 뿐, 자연 법칙에 따라 그저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이렇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연의 순환 법칙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악인이든 의인이든, 어떤 신분의 소유자이든 이러한 법칙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불자들은, 아니 고대 인도인들은 인간이 죽어서 송아지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윤회적 사고방식을 키워 왔다. 그것이 불교를 통해 우리 사회에도 친숙한 개념이 되어 온 것이다. 설령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솔직한 눈으로 자연의 순환 현상을 관찰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세계 해석이다. 이런 것들은 한 마디로 ‘나’라는 존재를 전 우주적 존재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파악하려는 자세의 일환인 것이다. 이것은 종파적 해석과 상관없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인 것이다.

죽음 그리고 심판

그렇다면 죽음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죽음이란 무엇인가? 삼라만상에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을 눈여겨 본다면, 죽음을 그저 심장이나 뇌 기능의 정지 등의 의료적 정의만으로 끝낼 수는 없을 것이다. 좀 더 의미를 담아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죽는다는 것을, ‘나’라는 것을 앞세우며 살아온 지난 날의 모든 삶을 전적으로 대 자연 앞에 내어맡기는 행위로 풀어보고자 한다. 종교적인 언어, 가령 그리스도교적인 언어로 바꾸면 죽음이란 인간 하나하나의 삶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생명의 근원이 되는 존재에게로 온전히 되돌려드리는 행위이다.

내 이름으로 행한 모든 생생한 실재들, 초등학교 시절에 놀던 학교 운동장 정글짐에 묻은 내 손 때마저 나의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라며 돌려드리는 행위가 죽음인 것이다. 신께 돌려드린다는 점에서 죽음은 심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모든 삶이 생생한 실재가 되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뜻밖에 성서학자 로핑크도 이와 상통하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하느님을 궁극적으로 만날 때, 하느님이 우리를 일생동안 사랑하시던 그 선하심과 사랑의 척도를 체험하는 가운데, 우리 눈이 우리 자신에 대해 스스로 열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서운 어떤 놀라움으로 우리의 독선, 우리의 무정함, 우리의 냉혹함, 우리의 이기주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한 평생 쌓아올린 모든 자기 기만과 환상이 일순간에 붕괴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숨겨두었던 가면들이 벗겨질 것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또는 다른 사람에게 연기해보이던 모든 것을 우리는 이제 중지해야 한다. 이는 끝없이 고통스러운 일이며 마치 불과 같이 우리를 스쳐 지나갈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 앞에서 찬란히 빛나실 때, 우리는 우리가 참으로 존재했어야 할 모습과 실제로 존재하던 모습을 동시에 깨닫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심판이며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적절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심판의 정도는 결국 인간이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비교될 때 드러나는 그 차이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이미 심판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의 몸을 온전히 벗어버릴 때 우리 자신의 본 모습, 실상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리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입장이라 하겠다.

이 때 죽음, 심판 등과 관련하여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시간 관념이다. 죽고 나면 분명히 우리의 몸은 사라진다. 몸이 없다는 것은 감각기관이 없다는 것이다. 감각기관이 없으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며 체험했던 우리의 온갖 체험이 사라진다. 그러한 체험이 사라지면, 우리의 의식을 지배했던 시간이 사라진다. 시간이란 어떤 사실이 지속되고 있음을 감각 기관을 통해 체험하는 한 양식이다.

우리의 몸이 어떤 사실들에 대해 순간순간 반응하는데 그것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우리는 흔히 시간이 흐른다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몸을 벗어버리고 나면 그러한 시간 개념도 사라진다. 보고 듣고 만지는 온갖 감각기관들이 정지하기 때문이다. 이 때 비로소 시간을 넘어서게 된다. 그렇기에 죽음이야말로 시간을 넘어 영원에 참여하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인간은 이미 하느님 안에서 살아오고 있는 것이지만, 숨을 거두는 순간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 ‘나’라고 하는 존재는 더 이상 시간 안에서가 아니라, 시간의 저 편에 실존하게 된다. 몸을 벗어버리고서 참여하는 하느님 세계는 시간 내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세계는 영원하다. 하느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베드로후서 3,8)는 성서의 구절은 이런 식으로 풀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이 시간 너머, 즉 영원에 계시다면, 모든 사람이 전혀 다른 시간에 죽었다고 해도 ‘영원’에서 만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원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도식이나 흐름이 없기 때문이다. 시간의 차원에서는 과거와 미래를 나누지만, 과거에 죽은 이나 미래에 죽을 이나 모두 영원에 참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내가 숨을 거두는 순간 전 인류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 인류에 대한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도 이런 식으로 풀 수 있을 것이다. 몸을 버리는 순간 몸을 지니고 살면서 행한 모든 것이 영원의 세계에 결정적으로 합류하게 되니,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영생(永生)이다.

신과의 만남, 그것은 영원한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이 때 그 신과의 만남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신이 준비해놓은 장치가 바로 ‘부활’(復活)이다. 이어서 살펴보겠지만, 부활은 우리가 흔히 영혼이라고 말하는, 즉 우리의 내밀한 삶의 총체에 신이 어떤 식으로든 형상을 입혀주는 사건이다. 육신은 사라지되 그 육신을 지니고서 행한 행위 전체가 입는 영적인 몸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런 해석들은 육신을 가지고 경험하는 시간의 차원을 넘어선 곳을 염두에 둘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죽음, 내세, 영원 등의 문제는 바로 이런 식으로 일반화시켜 표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활의 일반적 의미

부활 개념은 좀 더 세심한 이해를 요청하는 부분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가 하느님에 의해 “다시 일으켜졌으며”, 그처럼 모든 인간도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일으켜질 것”이라고 믿는데, 이런 식의 부활 개념은 그리스도교 성립의 근거이자 핵심이면서도 수천년 동안 신학자들을 괴롭힌 문제이기도 하다. 왜일까?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주지하다시피, 부활은 역사적 인물 예수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듯이 우리의 몸도 다시 살게 되리라는 희망의 표현이다. 문제의 핵심은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할 때, 그 살아남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일반 그리스도교인은 예수의 부활을 육체의 생물학적 소생(蘇生)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만, 엄밀하게 보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소생은 필연적으로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이승의 삶의 단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예수가 살았다가 다시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부활은 일단 소생과 다르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의 부활은 죽음이 허무한 파멸로 끝나지 않고 그 안에서 모든 역사의 궁극적 의미가 드러났음을 뜻하기 위해 사용된 다소 ‘신화적’인 언어이다. 예수의 죽음이 도리어 생명의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에서 진정한 생명이 유지되어가는 모습을 체험한 제자들로부터 죽음의 사건이 더 큰 생명을 드러내 보여준 역설적 사건일 수 있음을 뜻하는 부활 신앙이 생겨난 것이다.

게다가 성서에서는 예수가 부활 후에 승천(昇天)했다고도 말한다. 예수가 하늘, 즉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갔다는 뜻인데, 그것 역시 예수가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갔다는 강력한 신앙의 표현이다. 그러고 보면, 부활이나 승천이나 결국은 같은 말을 하려는 것이다. 예수 사건이 제한적 시공간 안에 머물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하며, 죽음 역시 역설적이게도 영원한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생명의 사건이 된다는 뜻이다. 더욱이 종국적으로는 부활이 모든 인생의 궁극 목적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다.

로핑크의 말을 한 번 더 가져와보자: “부활이란 전인간, 한 사람이 자신의 모든 체험과 자기 과거 전체, 자기의 첫 입맞춤과 자신의 첫 눈(初雪), 그가 이야기한 모든 말, 그가 행한 모든 업적과 함께 하느님께로 가는 것을 뜻한다. 이 모두는 어떤 추상적 영혼 그 이상의 어떤 무한한 것이기에, 죽음을 통하여 사람의 영혼만이 하느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부활이란 영혼만이 아니라 몸을 가지고 행한 모든 행위가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게 되는 어떤 사건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부활 관념은 원칙적으로 예수에 대한 신앙적 조명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예수에게서 그러한 체험을 하게 되었을까? 부활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확인하려면 역사적 예수의 삶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예수

서기전 64년에 로마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식민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런 뒤 도시화를 도모했다. 그러자 성전이 있던 도시 예루살렘에서 거리가 먼 지역일수록, 농촌 지역일수록 그 흐름에서 소외되었다. 많은 농민들 중에 빈자들, 거지들이 속출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보잘 것 없는 동네 갈릴래아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이러한 사회 구조를 비판했다.

단순히 비판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판에 부응하는 실천적인 삶도 함께 살았다.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면서 인간 평등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다. 낮아진 이들이 도리어 높아질 때가 오리라며 이들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이들과 ‘밥상 공동체’를 이루어나갔다.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이들에게 밥을 마련해 주고 함께 나누면서 이 세상의 주인은 생명과 희망의 하느님이라고 가르쳤다. 이 밥상도 자기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며 몸소 가르치고 또 그렇게 믿었다. 바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고 실천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바실레이아 투 테우’를 직역하면, ‘신의 다스림’이 된다. 신이 다스리는 행위, 즉 신의 주권이 곧 하느님 나라이다. 인간이 아닌, 신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을 차별하고 억압하지만, 신은 생명과 사랑을 근본으로 하기에 차별당하고 억압당하는 이를 더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신은 생명의, 희망의, 구원의 신이었다. 지금의 현실이 비생명적이고 절망스러운 비구원적 상황에 처해있는 듯하지만, 신이 그러한 상황을 역전시켜주실 때가 곧 오리라는 희망을 예수는 온 몸으로 선포한 것이다. 그러면서 절망하는 죄인들과만 주로 어울렸다.

병자들을 어떤 형식으로든 치유해주면서 그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삶을 살았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에게 큰 감화를 받았으며, 특히 로마의 도시화 과정 속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농촌 출신 빈자들이 예수를 따라 예수와 같은 선교에 나섰다. 이들은 정말 저분이야말로 하늘로부터 온 지혜에 근거해 가르치며, 그렇게 살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은 하늘이 주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의 기득권층, 종교 지도자들에게 큰 도전이었다. 예수는 정치 지향적이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에 비판적인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예수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존 지도자들에게는 위협이 되었다. 그런 예수가 모세의 인도 하에 이집트 노예생활로부터 탈출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갔다. 거기서 당시 로마와 결탁되어 있었던 성전 중심의 질서에 도전적인 발언과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서 예수는 신성 모독죄로 체포되었고, 로마에 반역을 도모한 정치범으로 몰려 로마 법률에 따라 십자가에서 사형당한 것이다. 서기 30년 4월경의 일이었다.

부활, 웰 다잉에 대한 한 해석

다소간의 추측과 해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까지는 대체로 역사 안에 벌어진 일들이다. 문제는 여기서 특별한 의미를 보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술한대로 이미 예수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은 예수 사후에도 그의 정신에 따라 선교 운동을 해나갔다. 그러면서 이미 죽은 이의 기운이 여전히 자신들 안에 움직이고 있음을 절감했다. 그러면서 히브리 성서를 읽어보니, 예수는 조상 대대로 읽어오던 성서에서 이미 예견되어 있던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은 신의 영원한 섭리 속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신앙적 확신도 들었다.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신 구조를 확 바꾸어 놓고 여전히 자신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예수는 사실상 살아 계신 분이라고 믿게 되었다. 부활 신앙도 여기서 생겨나게 되었으니, 결국 죽었으나 살아있는 예수의 모습을 더욱 확실하게 전하는 방식이 부활인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그렇게 실천하고자 했던 신이 과연 자신들을 잊지 않으시고 자신들을 위해 예수를 죽음 가운데서 일으켜주셨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단순한 환상이나 허구나 조작이 아니다. 당시로서는 가장 절절하게 예수를 체험하고 전하는 방식이었다. 예수는 여전히 살아서 자신들과 함께 거한다는 확신 속에서 제자들은 산 것이다. 부활은, 처참하고 억울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제대로 된 죽음(well dying)에 대한 한 신앙적 해석인 것이다.

그런 원리 하에 부활에 대한 다양한 표현 방식들도 생겨났다. 성서에도 부활에 관한 증언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최대의 전도자였으며 예수의 부활을 최초로 증언한 바울로는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받을 수 없다”(고린도전서 15,50)고 말한다. 죽으면 몸은 땅 속에서 썩어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썩어 없어지지 않을 그 무엇, 즉 영혼은 언젠가 하느님이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변화시켜주시리라는 것이 바울로의 부활관이었다.

바울로는 예수의 몸이 ‘소생’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죽으면 몸이 땅에서 썩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 썩어갈 몸은 영원하지 않으며 따라서 몸에 집착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언젠가 하느님이 그 영혼을 썩지 않을 어떤 형태로 바꾸어줄 것이라는 확신은 분명히 가지고 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린도전서 15:35-49) 그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는 것, 바울로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부활이다.

그리고 그 형태를 바울로는 “영적인 몸”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결국 부활은 영적인 몸으로의 변화이다. 부활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 영원한 하느님과 함께 하기 위한 몸의 근본 변화인 것이다. 육체적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단순한 소생이 아니다. 바울로는 예수가 이미 하늘에서 이런 영적인 몸을 입고 있다고 믿었고,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부활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데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도 “부활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처럼 언젠가 그런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바울로보다 약간 후대의 문헌인 루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육체성을 강조하며 부활한 예수의 몸을 직접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식으로 묘사했다.(루가복음 24,39) 예수님의 몸뚱아리가 다시 일어난 것처럼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초자연적 기적, 예수의 육체성에 집착하던 당시 대중적 상황을 반영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늦은 서기 100년경의 문헌인 요한복음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제자 토마에게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복음 20,29)며 훈계하는 내용이 나온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그런 부활보다는 그분이 없이도 늘 체험할 수 있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예수의 지속적인 현존이 곧 그의 부활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육신을 지닌 예수가 말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사실은 육신에 매이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는 말인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육신의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지속적으로 현존하는 그를 느끼는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 우회적으로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적 부활 신앙은 바로 지금 예수를 느끼고 체험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고도 풀 수 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을 살짝 바꾸어 일일시부활일(日日是復活日)의 의미로 풀어쓸 수 있는 개념인 것이다. “매일 매일이 부활의 날”, 즉 매일 매일이 예수의 살아있음을 체험하는 날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와 함께 루가복음과 비슷한 시기의 작품인 마태오복음(27장)에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에서 자고 있던 많은 이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들은 나중에 거룩한 도시에 들어가서 많은 이들에게도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로는 예수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예수보다도 먼저 부활한 이들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이 엄청난 일이 왜 마태오복음에만 나오는 것일까? 거기에는 무덤 속에 있던 죽은 이들이 부활했다는 ‘역사적’이고 ‘생물학적’ 사실을 밝히려는 의도보다는 예수의 죽음이 그만큼 의미있는 사건이고 결국은 죽은 이들은 물론 죽어가는 이들을 비롯한 죽음의 세계에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음을 말하려는 마태오의 의도가 들어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었음을 말하고자 하는 당시의 표현 방식이었던 것이다.

비교종교학적 차원에서 보면, 이것은 초기 불교에서 고타마 붓다의 육신에 매이던 분위기와 비슷하다. 붓다 사후 시간이 흐르면서 붓다의 모습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지자, 붓다의 육체적 흔적, 즉 유골(sarira)과 같은 구체적 사물을 숭배하던 탑돌이 신앙인들의 사고 방식과 유사하다.

법신 자체보다는 법신을 알려준 고타마 붓다를 그 법신의 구체화(化身, nirmanakaya)로 알고 숭배했던 것처럼, 예수의 육체적 부활은 몸의 구체성에 매이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을 잘 반영해준다. 물론 <반야경>과 같은 초기 대승경전에서 역사적 존재가 아닌, 반야바라밀이 참된 부처의 몸(佛身)이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도 예수의 진정한 모습은 육체가 아니라 초월적인 측면에 있다고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앙상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진정한 붓다는 그 역사적 존재 혹은 그 생물학적인 몸이 아니라 붓다의 ‘지혜’(반야)라고 하듯이, 예수의 진정한 본성은 초월적인 그리스도라고 보게 된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基督)라고 불리게 된 것도 그래서이다. 이 초월적인 그리스도가 허망한 죽음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죽지 않고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계신다는 확신이 ‘부활’ 신앙이며, 더 나아가 그 신앙적 내용이 하느님이 의도한 세계 계획의 핵심인 만큼 피조물된 전 인류도 그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간인 것이다.

부활과 윤회, 열반

현재와도 연결되지만, 결국 미래에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될 사건인 부활을 불교의 윤회 내지는 열반 체험과 어떤 관계 안에 두어야 할까. 동서양의 대표적 종교들의 핵심 개념인 부활과 윤회를 저마다의 신앙적 특징을 살리면서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인 듯 하다. 주지하다시피, 윤회란 살면서 행한 업(業)에 따라 생사의 과정을 여러 형태로 되풀이한다는 인과(因果) 원리의 다른 표현이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부활이 일회적 인생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다리와 같다면, 윤회는 이미 셀 수 없이 반복되어 온 인생 자체에 대한 현상 보고이다.

또 부활 신앙은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로서 나의 믿음과 행위에 따라 내가 나의 모습으로 - 비록 후자의 ‘나’가 기존의 내 모습을 넘어서는 초형상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 , 다시 사는 것이지, 내가 다른 사물의 모습을 입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윤회적 사고 방식은 내가 뿌린 씨에 따라 여러 형태의 삶을 결과로 얻을 수 있다는, 사물과의 근원적 관계성을 전제한다. ‘일회적 인생’이냐 ‘반복적 인생’이냐, ‘개체적’이냐 ‘관계적’이냐에서 부활의 세계관과 윤회의 세계관은 일단 갈라진다.

물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앞서 논의한 부활이 단순히 일회적이라는 것에도 논의의 여지가 있고, 윤회가 반복적이라는 것도 그리스도교인이라 할지라도 그다지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앞에서 본대로 특히 자연의 순환 법칙을 중시하며 사는 이들에게는 나의 삶과 다른 사물과의 연결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깊숙한 부분까지 성찰하고 보면, 부활과 윤회는 그렇게 단순하게 분리될 수 있는 별개의 현상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부활이 인생의 궁극적인 상태 내지 상황인데 비해 윤회 자체는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도리어 무수한 윤회의 연결 고리를 끊고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인류 최대의 과제이다. 주지하다시피 열반(nirvana)이란 타오르던 번뇌의 불꽃이 꺼져버린 상태로서, 인과 관계의 고통스런 순환 고리를 끊어버린 데서 오는 고요한 안식과 같다. 부활과 열반을 단순 비교하기는 쉽지 않아도, 분명히 하느님에 의한 부활 이후의 영생과 열반의 경험이 그리스도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 최후의 경험이자 소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에 그래도 분명한 차이가 보인다면, 만물의 궁극적 원인이자 창조자인 인격적 신을 전제하느냐, 그보다는 다소 비인격적듯한 원리를 그대로 따르느냐에 있다. 인간 이전에 선재하면서 세상의 원리를 주관하는 그 어떤 것을 인격적 차원에서 긍정하느냐, 아니면 인간 이전에 선재하는 세상의 원리 자체를 중시하느냐가 부활과 윤회의 결정적인 갈림길인 셈이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하느님은 그 원리마저도 창조하시고 당신 섭리 하에 두신다고 강조할 테고, 불자는 불자대로 그 신마저 애당초 그렇게 되어있는 불교적 원리에 따르는 한 존재하고 규정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보면, 인격적 신과 불성 및 여래장 같은 불교적 깨달음의 근거가 그렇게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다른 논의의 장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이 글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부활이든 열반이든, 모두 인간 존재의 근원이나 궁극적 목적과 관련한 물음에 대한 저마다의 답이자 해석 체계들이지, ‘정오’(正誤)나 ‘우열’(優劣)의 차원에서 보편적으로 판단되기 힘든 고유한 것들이라는 점이다. 모두 유구한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온 일종의 세계 해석이라는 점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나를 결국 품에 안아줄 그 신에 대한 희망 속에서 성실히 살아가고, 불자라면 괴로움을 넘어 본래부터 구현되어 있던 깨달음의 세계를 온 몸으로 구현해내고자 노력해야 할 도리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이찬수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거쳐(1986),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으로 석사학위를(1989), 종교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1997). 지은 책으로 《인간은 신의 암호》 《종교신학의 이해》 《한국종교문화연구 100년》(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화엄철학》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다》 《지옥의 역사》 등이 있으며, 〈니시다 기타로의 장소적 논리’ 소고〉 〈니시타니 케이지의 불교적 허무주의〉 〈卽非의 논리·回互的 관계·禪問答〉 〈요한복음의 불교적 해석〉 등의 논문을 썼다. 현재 강남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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