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조선독립의 횃불을 들다

1. 들어가는 말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한 이래 100년의 시간이 지났다. 불교계는 이 민족 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불교의 민족적 특성과 함께 그 종교적 토대를 되돌아볼 계기를 맞게 되었다. 문화의 본질적 요소로서 종교와 철학은 그 현재를 살아가는 민중의 역사적이며 실존적인 경험 지평에 자리한다. 종교가 이 경험지평을 초월적으로 성찰하고 이를 개인의 삶에 존재론적으로 체화한다면, 철학은 이 지평을 사유와 지성적 성찰을 통해 존재론적으로 언어화한다. 

종교와 철학의 범주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실존적 지평은 동일하며, 인간이 지닌 의미론적 층위에서는 동근원적이다. 3 · 1독립운동의 민족주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일본제국주의를 통해 우리를 침탈한 서구 근대에 대한 대결이 자리하고 있다. 이로 인해 촉발된 불교 개혁의 요구는 종교를 통해 우리의 전 근대성과 근대성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게 된다. 여기서는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탈근대적 종교성을 성찰함으로써 불교의 새로움을 위한 사유 동인을 모색해 볼 것이다.

영국 종교학자 암스트롱(K. Amstrong)은 종교와 철학은 공동의 기원을 지녔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류가 그들의 근원적 문제와 마주하면서 스스로의 지성을 통해, 또는 존재에 대해 자각함으로써 이 문제를 넘어서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다. 종교와 철학은 같은 문제 지평에서 시작되었으며, 인간 내면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펼쳐진다. 이들은 범주적 차이를 지니며 재현의 양식에서 구별된다. 그럼에도 종교와 철학은 인간의 존재적 지평에서 동일한 근원을 지닌다. 서구 근대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분리된 종교와 철학은 이제 그 근대를 넘어서면서 새롭게 만남으로써 그 이전과는 다른 특성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종교와 철학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죽음과 욕망, 인간 사이의 관계와 폭력 등의 문제와 마주한다. 암스트롱은 철학이란 죽음을 깊이 받아들이는 수련 행위라고 말하는 플라톤을 원용하면서 이 문제를 해명하려 한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자신을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으로 규정했으며, 그 본질적 특성에서 오늘날 종교라 이름하는 현상과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비트만(F. Wiedmann)은 ‘종교가 철학보다 훨씬 더 철학적’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종교와 철학의 관계를 규정하기도 한다. 종교가 인간의 유한성과 초월성을 존재적 지평에서 받아들여 지양하려 했다면, 철학은 이를 존재론적 사유로 해명하려 했다. 인간의 근원적 체험에 대한 전 존재론적 대답이기에 철학과 종교는 동근원적이면서 그 실존적 차이는 현상적이다. 다만 서구의 근대는 이 같음과 다름을 분리시키고 분열시킴으로써 종교를 탈지성화했으며, 철학을 삶의 현재와 분리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종교와 철학의 동일성과 차이를 거론하는 까닭은 우리가 가진 종교에 대한 관념이 유일신 개념을 지닌 서구 종교철학의 영향에 따라 심각하게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비트만은 이런 측면에서 삶의 실존적 현재를 벗어난 철학과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보지 못하는 현대 종교의 한계를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려 한다. 이 한계와 변형을 넘어서는 새로운 이해는 종교와 철학의 만남에서 비롯되며, 그 실존적 계기는 지난 백 년 이후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존재론적 종교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근원적 생명의 감수성과 삶의 지성에 바탕하며, 인간이 지닌 본질적 특성인 유한성과 초월성을 사유하는 데 자리한다. 

 

2. 3 · 1운동과 불교의 민족성 논의

1) 3 · 1운동과 불교

3 · 1독립 운동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폭압적이며 야만적이었던 일본제국주의의 무단통치로부터 독립을 요구한 전 민중적 저항에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그 근원은 제국을 넘어 민국으로 나아가려는 해방운동이었으며, 인간의 권리와 자주, 인격과 불성을 지닌 인간에 대한 존중,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혁명적 외침이었다. 이 운동이 단순히 식민지적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민족 독립에 그치지 않기에, 여기에서 우리는 근대를 벗어나는 새로운 사유의 단초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3 · 1운동은 당시의 종교적 언어로는 개벽의 실천이었으며, 100년이 지난 지금의 언어로는 근대의 폭력과 모순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유 운동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100년 전의 새로움이었다.

기미년 〈독립선언서〉를 근대적 민족주의의 산물로만 이해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다. 이 선언서는 무엇보다 먼저 “조선의 독립국임”을 선언하지만, 그와 함께 같은 무게로 “조선인의 자주민”임도 함께 말하고 있다. 이 선언서는 명확히 “인류적 양심”에 따라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를 거부”한다. 그 선언은 “각개 인격의 정당한 발전”과 “인류 통성(通性)과 시대 양심”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한다. 공약을 실천할 세 가지 강령에서도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의 원칙에 따라 행동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 어디에서도 계급 이데올로기로 해석된 편협하고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표명하고 있지 않다. 설사 당시의 민족적 상황에 따라 민족주의적 주장을 표방하더라도 이후 100년 동안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이 시대가 지향하는 종교성에 미루어볼 때, 이 선언을 보편적 인류성과 인간 본성에 따라 해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재적 작업이다.

3 · 1 독립선언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한 한용운은 조선독립 선언은 민족자존성과 조국사상, 자유주의와 세계에 대한 의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조선독립의 서〉에 나타난 조선독립의 당위성은 명백히 인류의 보편적 규범이며 가치인 자유와 평화에 있다. 그것은 침략과 약탈의 제국주의에 맞선 평화주의의 일환이다. 그는 이 책 제3장에서 조선독립 선언의 이유를 “민족자존성, 조국사상, 자유주의, 세계에 대한 의무”로 나누어 상세히 개진한다. 민족자존 및 민족자결은 명확히 동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위한 것이다. 한 민족 공동체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란 애당초 모순되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근대의 물결이 몰아치는 시대와 마주하면서 불교의 주된 가르침을 평등주의와 구세주의(救世主義)에서 찾는다. 그것은 자유주의와 세계주의에 종사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불교를 대중화함으로써 모든 국가와 인류가 평등하게 공존하도록 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후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근대의 충격에 마주해 조선불교를 어떻게 개혁해야 할지를 논의한다. 이 주장이 얼마나 한국불교를 개혁했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그럼에도 다가올 100년을 향한 불교의 지향성을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불교개혁을 위해 가장 절실한 점은 교육에 있다. 한용운이 보기에 불교교육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자본)와 사상의 자유(법칙), 진리(목적)의 세 요소”이다. 조선불교가 낙후하고 사회의식이 낙후한 현실은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불교계가 “노후하고, 부패하고, 완고하고, 비열한 무리가 새로운 교육을 저지하고, 구습을 고수할 뿐 새로운 진전이 없”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한용운이 제시한 외적 개혁과는 별개로 시대와 사회의 변화된 지형에서 불교 교의를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교육의 필요성은 절실하다 하겠다.

3 · 1운동과 관련하여 불교를 민족주의적 종교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이런 해석은 위의 논의를 살펴보아도 지나치게 일면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강돈구는 오히려 근대 불교의 민족주의적 특성을 “개별성이나 당대 인식의 측면”에서 이해하지 않고, “호국과 호법을 분리하지 않음으로써 민족의 통합성 확립에 기여”했다는 데서 찾는다. 불교를 민족주의 종교라고 말하거나 또는 민족종교 운운하는 분류는 명백히 서구 종교학의 범주에 따른 것이다. 이는 결코 동아시아적 개념일 수가 없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종교를 논의할 때 저지르는 당면한 오류는 이 범주적 분류가 우리의 종교적 경험과는 상응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2) 종교와 민족주의

민족/국민국가(nation) 개념은 명백히 근대 서구의 발명품이다. 앤더슨(B. Anderson)은 줄기차게 민족주의를 상상의 공동체라고 주장한다. 그 개념은 분명히 유럽 근대의 역사적 경험에서 유래했다. 그 경험지평은 동아시아의 그것과 같지 않다. 이런 역사해석학적 지평(hermeneutical horizon)을 무시한 채 일면적이며 학문 제국주의적 편견에 가득 찬 탈민족주의 담론이 되풀이되고 있다. 혈연에 의한 민족 개념을 상상하고 이를 배타적 민족주의로 몰아가는 천박한 민족 개념은 분명 거부해야 한다. 이는 추악한 인종주의의 변형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고유한 역사적 경험지평을 성찰함으로써 공동체적 문화정체성을 담보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성찰 없이 이론적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은 이론적 근본주의로 흐를 위험이 다분하다. 이런 근본주의는 오히려 전체주의를 조장할 계기가 되기도 한다. 자신의 고유함을 인식하지 못할 때 보편을 가장한 전체주의가 우리를 위협하게 된다.

유전학적으로 인류는 동일한 기원을 지니고 있으며, 고유한 혈연 공동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혈연 공동체로서 민족 개념은 분명 이데올로기적이다. 중세적 질서를 벗어나려던 움직임이 유럽에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 이후 근대적 ‘nation’을 탄생시켰다. ‘nation’ 개념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도출된 것이다. 영국 역사학자 홉스봄(E. Hobsbawm) 역시 민족 개념은 근대의 산물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개념은 계급 구조와 대립되면서 근대 유럽이 정치적 공동체를 새롭게 인식하고 언어화함으로써 생겨났다. 그러나 이는 동아시아 고유의 역사적 경험지평과 같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현실에도 상응하지 않는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역사적 경험에 의한 민족국가 개념 비판을 일면적으로 수용하여 고유한 역사와 언어, 문화공동체의 실재를 무시하는 일면적 비판은 반쪽의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반(半)진리는 반(反)진리일 따름이다. 민족 개념은 물론, 특정 종교가 민족주의적이란 언명은 역사적 맥락에 따라 구조화하고 새롭게 언어화함으로써 재개념화해야 한다. 언어와 문화 공동체로서, 역사 경험을 공유하는 집단으로서 민족이나 국가는 실제적이면서 또한 개념적으로 엄연히 실재한다. 이 실재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배타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거나 혹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공동체적 정체성을 재현하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종교는 민족이란 좁은 단위에 묶이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가 인간이 지닌 근원적 문제와의 대결에서 생겨난 본질적이며 보편적 본성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도불교가 중국에 수용되어 선불교(禪佛敎)로 정립된 과정을 생각해보라. 형이상학적 특성을 결여했던 당시 중국의 철학적 토대 위에서 격의(格義)불교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제외한 채 어떻게 원시불교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불교를 말할 수 있을까. 격의불교는 동진 시대 유입된 인도불교와 그 경전을 중국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장(老莊) 철학을 원용하려 해명한 데서 시작된다. 격(格)이란 ‘불교 이외의 자료를 취하여 불교 교리를 통하게 하는 것’이니, 이 역시 해석학적 관점에서는 언어와 문화 공동체 안으로 뿌리내린 종교의 현재화란 맥락을 지닌다. 이런 뿌리 내림은 다시금 그 공동체의 철학에도 배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니, 성리학으로 불리는 송명 유학은 이 격의불교와 대결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이 점에서 철학과 종교의 동일성과 차이는 다시금 중요한 논의 주제가 된다. 흔히 중국불교의 삼종이라 부르는 천태종(天台宗), 화엄종(華嚴宗), 선종(禪宗)은 격의의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또한 격의불교의 완성임에는 틀림이 없다. 중국불교가 지닌 고유함을 다만 중국 민족주의와 연결해 설명할 수 없듯이 종교를 민족주의와 결부시키는 것 역시 매우 부당한 주장이다. 한국불교의 민족적 성격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불교의 민족주의를 말하기 위해 한국의 근대적 역사 경험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이 경험은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이 초래한 것이며, 그들의 야만적 폭력은 민족이란 이름으로 행한 것이다. 비록 민족주의가 근대적 발명품이라 해도 동아시아 세계는 국가(나라) 개념이 실재했으며, 여기에 근대적 외피를 입힌 것은 분명 서구의 경험인 것도 사실이다. 그때의 한국인이 경험한 반인륜적 고통과 야만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문화와 언어, 역사공동체로서 민족이었다. 불교의 친일행위가 비난받는 것은 그것이 반민족적이어서가 아니라 반인륜적이며 세계 평화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종교는 세계종교와 대비되는 개념이지만 배타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종교를 민족주의와 연결지어 ‘민족을 위한 종교’로 이해하는 것 역시 매우 위험하다. 민족 개념을 언어와 역사, 문화 공동체로 이해한다면, 그러한 공동체적 지평에서 성립된 종교를 세계시민적 민족종교 내지 세계 평화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재개념화 작업이 필요하다.

민족적 색채를 띠면서 단일한 민족의 종교를 강조하는 종교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인류의 종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잘못된 견해일 뿐이다. 이런 종교를 보편적 종교성에 상응하는 종교라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정 종교를 민족적 관심사에 따라 편협하게 해석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 종교성과 초월성에의 갈망을 특별한 시대적 이데올로기로 해석하는 오류다. 이는 종교 자체에 대한 배반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종교성에 대한 편협된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근대적 민족 개념을 산출한 유럽의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리스도교를 민족주의와 연결지어 한국기독교라고 말할 때 여기에는 분명 종교적 본성보다는 이러한 명칭에서 오는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배타적 이익을 노리는 종교는 종교의 이름을 빌린 사이비일 뿐이다. 

 

3. 새로운 종교성 성찰

1) 종교성 담론

인간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내적 특성의 인간화에 따라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 내적 특성을 서구 철학적 전통에서처럼 인격(personality)으로, 또는 그와는 별개로 불성(佛性)이라 말하든 그 고유한 본성의 실재는 분명하다. 이 본성을 영혼이란 말로 정의한다면, 그에 대한 감수성을 영성(spirituality)이라 명명할 수 있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이 영성에 대한 것이며, 이를 깨치고 찾아가는 과정이다. 개념으로서 종교는 서구의 정신적 전통에서 언어화되었다. 이 말이 근대 서구문화가 우리를 침입하면서 종교(宗敎)란 말로 번역되었다. 서구어 종교(religion)는 다양한 이론이 있지만 라틴어 ‘religio’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말은 먼저 ‘다시-읽는다’는 의미의 ‘re-legere’에서 왔다. 

그것은 서구 사상의 본질적 특성인 신에 대한 태도에서 신에 대한 이야기를 의례를 통해 반복해 읽었다는 뜻을 지닌다. 또는 이 말을 ‘다시 묶는다’는 뜻’의 ‘re-ligare’에서 찾을 때 그 뜻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재설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나아가 ‘다시 선출하다’는 뜻을 지닌 ‘re-eligere’에서 찾을 때 이 말은 신과의 관계에서 신에게 나아갈 대표를 새롭게 선출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 말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지닌 근원적 경건성을 표현하는 말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두려움과 떨림을 드러내는 누멘(numen)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며, 사랑과 경외, 희망과 두려움의 종교적 감정, 숭배의 마음, 보다 높은 실재와 가치에의 헌신을 담고 있다. 이것을 독일 종교학자 오토(R. Otto)는 종교를 초월적 실재에 대한 경외와 매혹(tremendum et fascinans)이란 두 개의 신비(mysterium)로 표현한다.

현대의 종교학과 종교 이론은 서구 유럽의 종교 경험을 개념화한 것이다. 서구의 문화 세계가 그리스 철학을 기반으로 한 헬레니즘(hellenism)과 유대 그리스도교의 터전인 헤브라이즘(hebraism)의 결합에 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이러한 종교적 체험은 불교를 비롯한 동아시아적 종교 체험과는 같지 않다. 유일신 사상과 그에 대한 인격적 관계를 터전으로 하는 헤브라이즘의 종교 전통은 인간의 실존적 체험에 바탕 하여 불성을 통한 깨달음을 지향하는 종교와 다를 수밖에 없다. 역사에서 보듯이 종교는 언제나 개별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경험에서 시작된다. 학문으로서 종교학은 다양한 종교현상을 접하게 된 유럽의 학문적 관심에 의해 근대에서 태동한, 철저히 근대적인 종교현상학이다. 

비교종교학자 뮐러는 종교란 언어적 분류와 함께하며, 종교가 기원한 현상을 살펴볼 때 “언어와 종교 및 민족성 사이의 가장 친밀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종교는 그를 수용하는 민중의 요청에 부응할 때 존속하지만, 그 요청과 시대정신을 벗어날 때 소멸하게 된다. 특정 종교 신봉자의 주장과는 달리 모든 종교는 탄생과 소멸, 흥망성쇠의 과정을 밟는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듯이 보이는 모든 종교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시대의 요청과 실존적 필요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어 왔음을 알게 된다. 그 본질적 요소는 인간이 지닌 존재론적 본성에 상응하지만, 그 차이는 시대와 실존적 변화에 따라 거듭 새롭게 해석되는 과정을 재현하고 있다. 본질과 실존, 동일성과 차이야말로 모든 종교의 형상적 특성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christianity)가 유럽의 종교로 보편성을 띨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교가 전파될 당시의 유럽 철학과 만났기 때문이다. 1~2세기 그리스도교는 ‘예수 사건’이라 부를 수 있는 종교적 체험과 계시 사건을 당시의 헬레니즘을 통해 유럽적 보편성의 철학적 토대를 확립하게 된다. 이런 철학적, 신학적 사유 작업에 기여했던 이들이 이른바 교부(church fathers)라 부르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에 기반하여 그리스도(Christus)라 불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학적으로 근거 지었으며, 지금과 같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가능하게 했던 학자들이었다. 교부는 그들의 경전인 ‘성서와 전 교회의 신앙 규범’에 대한 증인이다. 교부의 학설은 하느님 나라와 인류의 구원을 선포한 예수의 가르침을 신학화한 전거이면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정통성의 기준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애초에 현재와 같은 그리스도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때의 헬레니즘 철학은 좁은 도시국가(polis)를 벗어나는 세계 시민(cosmo-polis)을 지향하는 보편철학이었다. 그리스도교가 유럽을 넘어 세계종교로 보편화될 수 있었던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세계시민적 보편철학과 만남에 기인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이런 흔적은 신약성서에서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른바 로고스-그리스도론(logos-christology)은 이에 대한 분명한 학술적 증거다. 신약성서 《요한복음》은 그리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로고스’를 그들의 신 그리스도와 동일시하였다.  

유럽의 문화적 전통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결합이란 역사적 경험 지평을 벗어나 성립될 수 없기에, 그들의 종교 이해 역시 그러한 특성을 벗어나 자리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절대적 존재자인 신에 대한 신앙에서 이해된다는 생각은 지극히 서구적인 전통에 따른 것이다. 그 중요한 특징이 계시종교 및 인격신에 대한 믿음과 결단에 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근대 종교학을 정립한 뮐러 역시 이런 관점에서 히브리적 기원을 둔 유럽종교를 계시종교로, 그 외 다른 세계의 종교를 자연종교로 구분한다. 그는 불교를 자연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자리 잡은 대표적인 경우로 꼽는다. 이런 분류는 자연종교를 “비록 허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은 진리의 감각을 초월한 어떤 재가의 결핍 혹은 우리의 내면에 깃든 양심의 목소리가 결핍되어 있음을 분명히 내포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종교 이해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는 명백히 초월적 실재를 상정하는 서구의 종교 경험에 따른 것이지 동아시아적 종교 전통과 상응하는 보편종교 이해는 아니다. 뮐러는 심지어 종교 역사를 그리스도교를 향한 무의식적인 전진이라고까지 기술한다. 이런 맥락에서 유교를 철학적 교의로, 불교를 내면적 성찰 행위 내지 인격 도야의 종교 정도로 폄하하는 오류가 가능해진다. 심지어 불교를 신에 대한 신앙을 결여하고 있기에 장기적으로 생존 가능한 본질적 조건도 갖추지 못했다는 어리석은 판단까지도 볼 수 있다. 자연종교와 계시종교로 구분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종교 이해에 근거한 일면적 이해이며, 자연종교를 신앙 없는 종교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종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심각한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2) 탈근대의 종교성

(1) 생물학적 존재에 지나지 않던 인간이 인간성을 지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 특성은 무엇일까. 이는 철학의 가장 오래된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서구철학은 이 전통을 ‘로고스(logos)’에서 찾거나 또는 근대 이후 ‘이성’에서 찾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랜 정의처럼 인간은 “로고스를 지닌 존재(zoon logon exon)”이다. 이 로고스에 대한 해석에 따라 인간에 대한 정의 역시 변화했으며, 근대 이후 이를 이성으로 규정한 것은 계몽주의에서 보듯이 서구의 근대를 가능하게 했던 철학적 개념이다. 

그럼에도 이성과 구별되는 감성은 물론, 인간 내면의 특성을 규정하는 존재성을 제외한 채 인간을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러한 존재성에는 인간의 내적 층위를 성찰하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성이 포함된다. 이 존재성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영혼과 연결지어 영성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존재성을 여기서는 초월성으로 규정하려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조건성 위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감각적 영역을 넘어 그 이상의 지평에 대한 감수성과 그에 대한 추구 없이 존재할 수도 없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초월성으로 정의한다. 다만 철학은 이를 자신의 지성적 작업으로 해명하고 추구한다. 이에 비해 이를 지성을 넘어서는 내적 본성 전체에서, 그 전 존재적 관점에서 추가할 때 흔히 종교라 말할 수 있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죽음을 향한 존재”란 개념으로 언어화한다. 인간은 미래의 사건인 죽음을 현재화함으로써 지금의 삶을 새롭게 지향하며, 지난 시간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과정은 죽음의 현재화를 통한 인간의 존재론적 결단에서 이뤄진다. 인간은 매 순간 죽음을 현재화하는 가운데 존재론적으로 결단하는 삶을 살아간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이런 존재론적 결단을 언어화하는 데서 이뤄진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본래적 삶이라고 말한다. 철학이 이런 결단을 자신의 지성적 성찰로 만들어간다면, 종교는 이 결단을 자신의 종교성과 믿음이라는 전적인 신뢰를 통해 가능하게 한다. 

새로운 100년은 이러한 종교적 결단의 의미를 새롭게 정초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굳이 이상적 종교의 모습을 말한다면 그것은 이런 결단의 과정, 이를 통해 거듭 우리의 종교성을 언어화하고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가능할 것이다. 종교적 삶은 근본적으로 종교성을 현재화하고 실천하는 과정이다. 불교인의 삶은 불교의 근본 교의를 실천하는 가운데 달성된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그와 함께 종교적 삶을 지성적으로 성찰하고 나아가야 할 종교성을 새롭게 정초하는 작업은 이 삶을 언어화하는 종교적 지성의 과제이다. 

비트만은 이런 관점에서 종교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실존주의적 방법을 고려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는 종교를 통해 우리의 존재와 실존성 전체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스스로 어떤 하나의 종교를 선택하여 (자신의) 인생결단에 대해 해명”하며, 이를 통해 종교에 대한 실존적인 통찰을 얻어간다. 물론 이 방법이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방법을 통해 모색하는 종교 이해는 종교적인 내용으로부터 철학적 사유가 유래했음을 보여준다. 또 이를 통해 종교와 철학 사이의 연결고리를 이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유럽 근대 역사를 통해 흐려졌던 종교에 대한 통찰을 넘어 종교의 현실성을 직시함으로써 인간의 유한성과 초월성을 우리 존재 전체를 통해 올바르게 받아들일 길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 길은 한편으로 인간이 지닌 성(聖)스러움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근본적인 자유와 구원을 얻는 길로 이어질 것이다. 여기에 같은 뿌리에서 시작한 종교와 철학이 역사를 통해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망정, 궁극적인 지향점에서 상응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2) 종교학자 스미스(Wilfred C. Smith)는 종교의 특성을 무엇보다 먼저 초월적 영역이나 가치에 대한 개인적 믿음이나 헌신에서 찾는다. 종교는 인간이 본질적 특성인 초월성의 형상이며, 이를 제도화한 교의 체계나 종교 의례를 의미한다. 종교적 신앙은 개인이 지닌 신적인 초월성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종교는 이른바 축적적 전통을 안고 있으니 그것은 실천적 맥락에서 역사적이며 문화적 토대 위에서 나타나는 구체적 전통과 체제 및 그 현상을 포함한다. 

종교는 명확히 종교성이란 보편성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이며 사회적, 문화적인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그러기에 종교는 그 형태와 체계가 시대에 따라 달리 드러나며 변화하게 된다. 비록 외적 형태는 지속될지라도 인간의 내면적 요구에 따라 내적 형태가 불가피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스미스 역시 종교는 인간의 보편적 품성에서 비롯되었지만 시대적 필요에 따라 변화하며, 또 그렇게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인간이 당면하는 근본 문제에 대한 물음과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전 존재적 투신이야말로 종교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이 특성을 초월성, 또는 영성이란 이름으로 개념화한다. 탈근대의 시간, 새로운 ‘이후의 시대’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종교라면 오히려 이런 특성을 성찰하는 데 있지 않을까. 

현대 유럽 세계에서는 지금 체계화되고 제도화되어 그들의 일상적 삶과 문화적 현재를 구성하던 본래적 요소 가운데 하나였던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체제가 허물어지는 현상이 일반화되고 있다. 성찰적 근대성을 주장하는 벡(U. Beck)은 유럽 종교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래 개인적 신앙에 대한 요구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개인(in-dividual)을 발견하고 개인의 존재론적 주장에 충실해 온 근대적 특성의 종교적 현상이며, 그에 따라 유럽 현대 사회는 마침내 교회체제를 벗어나는 개인적 신앙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펼쳐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자기만의 신은 얼마나 더 지속적으로 교회를 이탈할 것인가? 아니면 유연해진 교회가 이런 추세를 반영하고 좀 더 고차원적으로 주관적 신앙심을 제도화하여 신앙심과 제도의 통일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벡은 유럽이 책임져야 할 오류는 유일신 신앙과 아리스토텔레스적 동일률/모순율에 있다고까지 말한다. “자기만의 신”에 대한 신앙은 현대 문화의 특성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종교는 분명 그 시대 인간의 실존적 상황과 별개로 성립되지 않으며, 인간의 근본적 특성인 초월성이 문화적으로 재현되는 데서 그 실천적 형태가 달라지게 된다. 

그런 관점에서 벡은 현대 종교는 “자기만의 신”을 추종하는 동시에 내면의 자유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현상은 유럽 근대성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또한 근대성의 전환과 위기에 따른 현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럽 사회는 전통적 그리스도교회적 신앙을 벗어나 “자기만의 신을 발명”한다. 그 현상을 벡은 한마디로 탈근대적 종교성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신앙은 개인의 내면적 자유와 영성에 치중하는 종교이며, 세계시민적 정신에 따른 새로운 종교적 형태이다. 스미스 역시 현대 세계에서 종교의 근본 문제는 사회적 측면에서 세계화된 사회에서 어떻게 세계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할 개인적 차원의 의미문제라고 말한다. 분명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초월성에 대한 이해의 전환과 그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 이해’를 요구한다. 

 

맺음말

새로운 종교성에 대한 이해는 근대성의 인간 이해에 토대를 둔 교계적이며 절대적 존재자에 의존하는 종교는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영성과 실존성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세계시민적 정신에 바탕을 둔 관용과 공존의 종교일 것이다. 어쩌면 그 신앙은 신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함으로써 인간이 그 초월성을 향한 본성을 이 시대의 특성에 따라 형상화하는 종교성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존재론적인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것은 물론, 타자와 생명체를 다시금 수용하고, 세계와 자연에 책임을 지는 본질적 종교성을 재현하는 종교임에는 틀림이 없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은 민족주의를 넘어 반인륜적이며 반인간적인 야만과 반생명적 폭력을 거부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때의 저항을 적극적으로 이런 특성에 따라 새롭게 조명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작업에 성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종교성의 희미한 모습을 감지할 수 있지 않을까.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면서 그 식민성에 대한 분명한 거부를 표현한 것이 3 · 1 독립선언이었다면, ‘이후의 100년’은 그 저항을 넘어 시대의 새로움을 요구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시대적 관점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통해 표현되었던 서구 근대의 모순과 한계를 넘어서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를 탈근대라고 명명한다면, 이제 다가올 100년을 탈근대의 종교를 상상하는 때로 만드는 것은 종교인의 과제일 것이다. 

탈근대성의 민족주의와 종교성에 대한 재개념화의 과정이 포함된다. 철학을 말하는 까닭은 결코 종교가 철학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거나, 종교와 철학의 동일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철학을 정의하는 수많은 철학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본성은 인간이 당면한 근본 문제에서 그 유한성과 초월성을 사유하는 데 있다. 이러한 철학의 본성을 인간의 종교성에 대한 이상적이며 새로운 이해를 위한 해석학적 작업의 토대로 삼으려는 것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종교와 그 새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성적 사유 작업과 성찰 과정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여기에 종교와 동근원적으로 형성된 철학이 기여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를 종교의 철학화로 이해한다면 이는 심각한 오해일 뿐이다.41) 비트만은 철학에 담긴 근본적인 종교성을 배제함으로써 철학이 얼마나 협소화되고 자신의 본성적 힘을 상실했는지 비판한다. 이로써 “초자연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고, “종교의 공동화, 세계의 탈신화, 자연의 착취, 결국 철학의 무의미성, 이 모두에 기여한 치명적인” 결함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종교를 “고통, 불의, 죄악,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기도, 신에 대한 경배, 신에 대한 공포, 신에 대한 사랑 안에서 나타나는 인간이 신과 맺는 공동체적, 인격적 결합”이라는 오랜 정의는 극복되어야 한다. 이런 편협함이 “인격적인 신 개념을 사용하는 정의는 고대 불교와 오늘날 수적으로 아마 가장 광범위하게 분포된 종교형태를 배제”하는 것이다.42) 종교는 민족적이거나 그리스도교적 신 이해 없이도 정당하게 제시될 수 있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포스트 휴머니즘을 거론하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전 존재론적 해명과 실존적 대답을 위한 사유의 새로움이다. 이 새로움의 지평에서 종교는 근대적 모습을 벗어나는 탈근대성의 종교를 지향한다. 그것을 새로운 영성의 시도로 이해한다면, 그 길은 초월성에 대한 감수성을 지성과 감성의 지평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결단과 성찰의 통합성에서 찾을 때 시작된다. 그 과정은 거듭 우리의 유한성과 초월성을 분리하는 한계를 넘어 존재의 통합을 이룩하는 길임에는 틀림이 없다. 새로운 종교성은 여기에 자리한다. ■


신승환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독일 뮌헨 대학과 레겐스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철학박사). 주요 저서로 《지금, 여기의 인문학》 《철학, 인간을 답하다》 《해석학-새로운 사유의 철학》 《형이상학과 탈형이상학》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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