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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과 성과
특집 | 불교, 조선독립의 횃불을 들다
[77호] 2019년 03월 01일 (금) 한금순 sanhana@hanmail.net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1918년 10월 7일 제주도 서귀포시 도순리 법정사 승려들이 서귀포 일대의 마을 주민 7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인을 축출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불교를 포교하겠다며 일으켰던 제주도 내 최대 규모의 무장 항일운동이다. 

3 · 1운동보다 한 해 먼저 일어난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김연일 등 법정사 승려들이 주도하였다. 법정사 승려들은 1914년경부터 활동을 시작, 일본의 국권 침탈의 부당함을 신도들에게 설명하여 항일의식을 심었다. 거사 실행 6개월여 전부터는 군대조직과 같은 거사 조직을 사전에 구성하였다. 격문을 작성하고 곤봉, 깃발 등을 제작했으며 화승총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계획적인 사전 준비 끝에 1918년 10월 7일 법정사에서 새벽 기도를 마치고 거사를 실행하였다. 거사 당일 법정사 새벽 예불에 참석하였던 34명이 선봉대가 되어 법정사를 출발하여, 하원리, 월평리 등을 거쳐 중문리에 이르렀을 때는 인근 마을에서 동조하여 참여한 주민이 700여 명에 달했다. 거사 현장의 선봉대장인 승려 강창규의 지휘 아래 항일운동 참여자들은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였고, 지나가던 일본인 일행을 몽둥이와 돌멩이로 공격했으며 중문 경찰관주재소를 불태웠다. 그러나 총으로 무장한 서귀포 경찰관주재소 기마순사대의 공격으로 참여자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참여자 중 66명이 검거되고 법정사는 불태워졌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주도자들은 3 · 1운동 참여자들보다 무거운 형을 받고 수형 생활을 하였다. 법정사 주지인 김연일에게는 징역 10년형을 언도하는 등 참여자 46명에게 중형을 선고하여 일제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을 엄중히 인식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법정사가 불에 타고 주도자들이 무거운 형벌을 받아 수형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2000년대에 들어서야 항일운동으로 규정되었다. 일제의 왜곡과, 지방의 항일운동이라는 점에서 전국적으로 조명되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교계 항일운동의 하나인 1919년 4월 15일의 제암리 학살사건을 조명하고 기념하는 것과 비교하여 보면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관심과 평가가 얼마나 소홀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1. 법정사 항일운동의 목적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 조선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격문을 통해 분명히 표명한 항일 독립운동이다. 항일운동 주도자들인 법정사 승려들은 거사를 준비하고 조직해나가면서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을 선언하였고, 지역주민들 역시 거사가 항일운동임을 인식하고 참여하였음을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정구용 판결문》 《강창규 가출옥 관계 서류》 《폭도사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 등에 국권회복을 위한 거사였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모두 일제 당국에 의해 만들어진 문서들로 일제가 독립운동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3년 대구복심법원 생산 자료인 《정구용 판결문》에서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거사 목적을 찾아낼 수 있다. 

법정사의 주지 김연일은 전부터 제국정부의 조선 통치에 대해 불평을 품어, 대정 7년 음력 6, 7월경 이래 여러 명의 동지와 의논하여 불교도 및 농민을 모아 도당을 만들고, 폭행 협박으로써 도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관리를 도외로 쫓아냄으로써 제국정부의 통치에 반대하는 기세를 보여주고자 법정사에 모여든 많은 신도들에게 그 뜻을 전하여 가담을 강요하고 있었던바 ……(중략)…… 조선불교를 널리 포교하고 또한 조선을 잘 통치해서 원래의 독립국으로 만드는 데 진력하기로 했음으로 ……(중략)…… 지금부터 조선정치를 바꾸려고 하는데, 우선 그 수단으로 일본인 관리를 이 섬에서 추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법정사 항일운동의 목적은 국권회복과 불교의 포교였다. 《강창규 가출옥 관계 서류와 일제 고등경찰의 극비문서인 《폭도사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에도 국권회복이 목적이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2.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도세력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도세력은 법정사의 주지 김연일을 비롯한 승려 강창규, 방동화, 정구용, 강민수, 김인수, 김용충 등이다. 이들 승려는 1914년부터 법정사에 거주하면서 항일운동을 준비하였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은 경주 기림사 승려였다. 승려 박만하의 영향하에 있던 김연일은 제주도 출신 승려이며 박만하의 제자인 승려 강창규, 김석윤, 방동화 등과 인연이 되어 제주도에 내려왔다. 박만하는 제주도 관음사 초창기 활동을 도운 승려이기도 하다. 박만하의 제주도 제자인 강창규와 김석윤, 방동화는 항일 활동을 함께한 동료들이었다. 강창규는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에서 선봉대장을 맡아 앞장섰고, 제주의병항쟁의 주역인 김석윤은 법정사 창건에 기여하였으며 박만하를 중심으로 한 인적 토대를 바탕으로 법정사가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도록 하는 데 힘을 보탰다. 강창규와 김석윤은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전북 임실군 위봉사 등의 사찰에서 활동한 바 있다. 이들의 항일의식은 바로 이 시기에 이 지역의 동학혁명의 사회적 흐름을 체험한 자각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석윤과 강창규는 방동화를 기림사의 박만하에게 보내 출가시켰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김연일은 강민수, 정구용, 김인수, 김용충, 장임호 등과 함께 제주도로 내려와 법정사에서 활동했다. 김연일의 손자의 증언에 의하면, 김연일은 제주도가 우리나라의 닻에 해당하는 형국이라고 하였다. 이에 제주도에서부터 독립운동의 닻을 들어올려야 전국으로 독립운동의 기운이 올라간다고 생각하여 제주도로 왔다고 한다. 또한 제주도로 들어오면서 필요한 자금을 관 속에 숨겨 들여오기 위해 조상의 묘를 제주도 조천 미밋동산으로 옮기기까지 하였다. 

제주도에서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한다는 의지를 품고 제주도에 들어온 김연일은 법정사에서 신도들에게 항일의식을 심어주려고 노력하였고, 마침내 700여 지역주민의 참여를 이끌어낼 정도로 영향력을 키웠다. 법정사의 김연일을 비롯한 승려들은 평소 법정사 예불일을 통하여 일제의 국권침탈의 부당함을 신도들에게 역설했다. 지역의 불교도와 농민들을 모아 조직을 만드는 등, 거사 6개월 전부터 구체적인 조직을 결성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노출되지 않고 예불일을 기하여 항일운동을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거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당시 제주도민들의 외세에 대한 인식도 큰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간 제주도민은 방성칠의 난, 이재수의 난 등, 외세 침탈의 폐해로 인한 저항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었다. 이러한 저항정신을 자각한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의 정치, 사회, 경제적 수탈에 저항하여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법정사 승려들의 국권회복 활동 계획에 지지를 보냈다고 볼 수 있다.

승려 강창규는 선봉대장으로, 승려 방동화는 좌대장으로 현장의 참여자들을 이끌었고, 승려 정구용은 격문을 작성하여 항일운동의 목적을 알리며 참여자를 모집하는 데에 힘을 썼다. 박주석은 모사(謀士)로 거사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지역주민들은 화승총과 화약을 준비해 오기도 하였다.

거사 후 검거된 법정사 주지 김연일은 주도자였기 때문에 가장 높은 형인 징역 10년형을, 거사 현장에서 700여 대중을 지휘한 선봉대장 강창규는 징역 8년형을 받는 등, 법정사의 승려들은 무거운 형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였다. 

형기를 마친 법정사 승려들은 출옥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김연일은 경상북도 포항으로 돌아가 관음사를 창건하여 승려 생활을 지속하면서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정구용은 경상북도 포항시 보경사 일주문 앞에 있는 ‘기미 3 · 1 독립의거 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어 법정사 항일운동 이후에는 경상도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승려 강창규는 출옥 이후 1943년에야 제주도로 돌아와 서산사를 창건하였다. 사찰을 창건하면 사찰령에 의해 총독부에 설립 신고를 하고 허가를 받게 되어 있었음에도 서산사는 신고 절차를 밟지 않아, 일제 당국과 관련된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그의 항일의지를 드러냈다.

 

3. 법정사 항일운동의 사전 계획

법정사 주지 김연일은 1914년경부터 신도들에게 항일의식을 심으며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1918년 4월경 주도세력의 거사 합의에서부터 일반 참여 세력의 구성과 무기 준비 등 거사할 때까지 6개월여의 사전 준비 기간을 거쳤다. 

경상북도 경찰부의 극비문서인 《폭도사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에는 “수괴 김연일은 경북 영일군 출신으로 4년 전 승려로서 제주도 좌면 법정사에 거주하며, 언제나 교도에 대하여 반일 사상을 계속 고취시키고자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법정사에 거주하며 평소 신도들에게 반일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정구용 판결문》에는 “제주도 내에 거주하는 일본인 관리를 도외로 쫓아냄으로써 제국정부의 통치에 반대하는 기세를 보여주고자 법정사에 모여든 많은 신도에게 그 뜻을 전하여 가담을 강요하고 있었다.”라고 하여 이들의 거사가 일본인 관리를 제주도 밖으로 쫓아내고자 했다는 것과 일본의 통치에 반대하는 뜻을 참여자들에게 분명하게 인식시키는 준비과정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문서에는 또 “전라남도 제주도 도순리 한라산 서남록 법정사의 주지 김연일은 전부터 일본 정부의 조선 통치에 대해 불평을 품어, 1918년 음력 6, 7월경 이래 여러 명의 동지와 의논하여 불교도 및 농민을 모아 도당을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몇 달 전부터 법정사의 불교도와 인근 주민들을 모아 도당을 만들었다는 이러한 기록은 법정사 항일운동을 왜곡하여 일시적이고 우발적으로 일으킨 혹세무민의 폭동이라는 시각을 바로잡는 기록이기도 하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도세력은 평소 예불일을 이용하여 법정사 신도들에게 거사의 뜻을 전하여 참여하도록 권하고 이들 신도와 지역 농민을 모아 조직을 구성해두고 있었다. 1918년 9월부터 거사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이루어졌다. 마을에 배포할 격문과 곤봉, 깃발을 제작하였고 화승총 3정을 준비하였다. 

1918년 9월 말 정구용은 격문을 미리 작성하여 거사를 마을에 알렸다. 정구용은 재판에서 “각 구장 앞으로 격문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서면은 3, 4통을 내가 만들었다. 그 내용은 일본의 강제에 의해 조선을 탈취당한 조국의 백성은 이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각 면 각 이장은 바로 이민 장정을 모아 솔군하고 음력 9월 3일 오전 4시 하원리 지내에 집합하라는 문구를 내가 기재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더불어 “김연일은 스스로 불무황제라고 칭하고 그 즉위식을 행하였고, 모사 이하 선봉, 중군, 후군, 각 장사의 부서를 정하고 기, 곤봉, 총기 등을 준비해 놓았다.”고 한다. 사전에 조직을 정비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기록이다. 책임자를 미리 지정하여 조직을 구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참여자를 이끌 깃발을 미리 만들어 놓고 곤봉과 총기 등도 갖추어 놓고 있었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이렇게 사전에 참여자를 확보하고 대오를 이끌 조직을 구성하는 등, 구체적인 준비를 통해 거행한 계획적인 무장 항일투쟁이다.

 

   
 

4. 법정사 항일운동의 조직

지금까지 살펴본 것 바와 같이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무장 항일투쟁이었다. 항일운동을 위한 조직구성을 살펴보면 잘 짜인 군대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수개월의 사전 준비와 조직 구성으로 군대 조직의 틀 안에 인력을 배치하고 역할을 분담하여 다수의 참여자를 어떻게 이끌 것인지를 미리 구성해 놓은 조직적인 무장투쟁이었던 것이다.

법정사 항일운동 주도자들은 역할을 분담하여 수행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하고 거사 현장을 지휘할 부서와 각 부서의 책임자를 정하였다. 조직구성을 살펴보면 주도세력들이 군대 조직의 경험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연일을 비롯한 주도세력은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의병활동 혹은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세대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법정사 항일운동의 조직 또한 이러한 경험이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표-1〉의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조직도를 살펴보면 조직은 지휘부와 행동부로 나뉘어 있다. 지휘부는 주지 김연일 중심의 법정사 승려들이 거사 구심점으로 구성되었고, 행동부는 선봉대장 승려 강창규를 중심으로 하여 거사 현장에서 참여자를 이끌기 위한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지휘부 김연일은 조직체의 구심점을 담당하며 거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총지휘하였다. 좌대장 방동화와 우대장 강민수가 김연일을 보좌하는 지휘부로 거사의 준비에서부터 김연일과 함께 거사 전체를 기획하고 준비하였다. 

행동부에는 거사 현장의 지휘자인 선봉대장과 선봉대장을 도와 거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모사 그리고 선봉집사와 선봉좌익장, 선봉우익장을 두었으며, 이들 밑에서 법정사 신도들이 선봉대로 지역주민의 참여를 유도하면서 앞장서 나가는 역할을 하였다. 지역주민을 중간에서 지휘할 중군대장과 후군대장을 두어 선봉대장의 역할을 군중 사이에서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거사 현장 행동부의 지휘자는 선봉대장 승려 강창규였다. 강창규는 중문 경찰관주재소를 불태웠으며 길 가던 일본인을 구타하도록 지시하였고, 전선과 전주 절단을 지시하는 등 거사 현장에서 700여 참여자들을 직접 지휘한 거사 현장의 우두머리였다. 방동화가 초빙해 온 박주석은 모사 역할을 했고, 당시 최고 연장자인 장임호도 모사로서 거사 현장에 있었다. 박주석은 선봉대장 강창규와 사태의 추이를 살펴 서로 의논하면서 거사의 방향을 결정하였다. 또한 강창규를 도와 선봉집사로 최태유와 김봉화가 그리고 선봉좌익장 이종창과 선봉우익장이 참여자를 이끌었다. 여기에 김명돈 등의 법정사 신도가 선봉대로 나서 마을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격문을 썼던 정구용은 박주석을 도와 사람들을 모집하여 참여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700여 명의 참여자는 중군과 후군으로 조직되었다. 중군대장 양남구는 총기를 가지고 참여자들을 이끌었고 법정사 소속이었던 김삼만이 후군대장으로 참여자의 후미에서 활약했다.

거사의 사전 준비부터 부서 조직에 이르기까지 짜임새 있게 구성된 활동 모습에서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을 주도한 승려들의 역량을 가늠해 볼 수 있다.

 

5. 법정사 항일운동의 전개

1918년 10월 5일과 6일은 법정사에서 정기적으로 온종일 예불하는 날이었다. 이날 법회를 위해 모인 신도 34명과 주지 김연일은 사전에 준비한 대로 7일 새벽에 출정식을 가졌다. 김연일은 “이번에 제주도 내에서 일본인을 쫓아내어 원래의 한국 시대로 회복할 것이니 조력하라”며 오늘의 거사가 항일운동임을 천명하였다. 선봉대장 강창규의 지휘하에 사전에 조직해 놓은 부서에 따라 큰 깃발로 기세를 드러내며 법정사를 내려갔다. 양남구와 문남규 그리고 고용석은 총기와 함께 몽둥이 수십 개를 가지고 행렬을 따라 나아갔다. 법정사 신도 34명이 선봉대로 산을 내려가 각 마을에서 민적부를 토대로 하여 장정 참여자를 모집하는 데에 앞장섰다. 

   
 

일행은 도순리 상동에서 사람들을 가입시키고 영남리로 내려가 구장에게 민적부를 받아 주민들을 참여시켰다. 영남리에서 서호리와 호근리, 강정리, 하원리를 거쳐 중문리로 향하였다. 여러 마을을 지나며 참여자가 700여 명에 이르렀다. 마을에는 법정사 신도들에게 사전에 연락받고 준비하던 참여자들이 있었고, 정구용은 격문을 미리 배포하여 이날의 거사를 주민들에게 알려 놓고 있었다. 

강정리를 거쳐 도순리로 가는 길에 선봉대장 강창규는 전선 및 전주 2개를 절단하라고 지시하였다. 김상언이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여 서귀포와 제주 읍내 간의 통신을 불통으로 만들었다. 또한 강창규는 하원리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小泉淸身) 일행을 구타하고 결박하도록 지시하였다. 양남구, 김상언, 문남규, 최태유, 고용석 등이 앞장서고 백여 명의 선봉자가 이들을 몽둥이와 돌멩이로 구타하고 길가에 내던져 두었다. 

중문리에 도착한 선봉대장 강창규와 김상언은 중문 경찰관주재소의 물건들을 몽둥이로 부수었고 참여자들이 따라서 경찰관주재소의 기구와 문서 등을 불태웠다. 강창규는 중문 경찰관주재소 건물에 불을 질렀다. 

1918년 10월 7일 오전 11시경 서귀포 경찰관주재소 기마순사대가 총으로 무장하고 공격해오자 참여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들이 있었고 이후로도 조사에 의해 참여자들이 검거되었고 법정사는 불태워졌다. 

 

6. 법정사 항일운동의 결과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66명이 검거되었다. 사건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분국에서 ‘직수(直受)와 인지(認知)’ 사건으로 처리하였다. 이는 경찰의 수사단계를 건너뛰고 목포지청 검사분국이 직접 검찰 단계의 수사를 하였다는 뜻이다. 당시 제주도에는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검사분국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목포지청 검사분국은 제주지청 검사분국과 동급기관이다. 그런데도 굳이 목포까지 사건을 옮겨간 것은 일제의 특별한 의도가 있음을 말해준다. 44명이 현행범으로 목포지청 검사분국에 접수되었다. 조사하면서 계속하여 검거가 이루어졌다. 검거된 66명은 단 1회의 재판만으로 판결을 종료하였으며 46명이 판결을 받았다. 죄명은 소요 및 보안법 위반, 총포화약 취급령 위반, 방화죄와 상해죄 등이었다. 판결은 징역 10년형 1명, 8년형 1명, 7년형 1명, 6년형 2명, 4년형 4명, 3년형 4명, 2년형 4명, 1년 6월형 2명, 1년형 11명, 6월형 1명, 벌금 30원 15명 등이다. 형을 받지 않은 사람은 불기소자 18명과 기소되었으나 구속 중에 사망한 2명을 포함한 20명이다. 

   
 

가장 오래 수감생활을 한 사람은 거사 현장의 선봉대장으로 참여자를 이끌었던 승려 강창규였다. 5년 11개월 15일 수감되어 6년 가까이 수형 생활을 하였다. 박주석, 강수오, 강춘근, 김두삼, 김봉화는 옥사하였다. 강수오와 강춘근은 재판도 열리기 전에 수감 상태에서 옥사하였다. 강수오는 아직 체포하지 못한 선봉대장 강창규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강춘근은 강창규와 같은 동네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재판 전 조사과정에서 사망할 정도의 심한 가혹 행위를 당했음을 알 수 있다. 박주석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2년 9개월여 복역하던 중 목포감옥에서 사망하였다. 모사로서 거사 현장을 이끈 박주석은 역할의 중대성에 비추어 김연일 등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제의 가혹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두삼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수형 생활을 하던 중 광주감옥 목포분감에서 옥사하였다. 김봉화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수형 생활을 하다 대전감옥에서 옥사하였다. 

 

7.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 주민의 항일의식

법정사 항일운동에는 서귀포 지역주민 7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제주도의 항일운동 중 가장 많은 주민이 참여한 항일운동이며 그에 따라 많은 지역민이 수감되는 등 일제로부터 고초를 당하였다.

이렇게 서귀포 지역의 마을에서 많은 수가 참여하게 된 이유를 찾아보면, 법정사의 역할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제주불교는 관음사가 창건되어 활동하고 있었고, 서귀포 지역의 포교를 위해 법정사가 창건되어 활동하는 정도였다. 1914년 창건 이래 1918년까지 법정사의 주지 김연일은 법정사 예불을 통해 일본의 국권침탈이 부당하며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쫓아내야 한다며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 이에 법정사 신도들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에 동의한 서귀포 지역주민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다.

제주도민의 외세의 횡포에 대한 인식의 정도는 1898년 방성칠의 난과 1901년 이재수의 난 그리고 1909년 제주의병항쟁 등에서 이미 증명된 바이다. 1909년 제주의병항쟁은 호남의진과 연합을 계획하며 일본에 대한 저항을 표현한 것이었다. 여기에 승려 김석윤이 의병장으로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고, 풀려난 이후에는 법정사 창건에 기여하기도 했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항일의식이 높았던 법정사 승려들을 중심으로 하여 결집된 것이다.

시대적 상황 또한 제주도민들은 이미 일본의 경제적 수탈 등에 대한 저항의식을 품고 있었던 것이 법정사 항일운동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일본인의 수탈로 인한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은 상태였다. 일본이 제주도의 자원을 수탈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부터이다. 그중 어업자원의 수탈이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1883년 일본은 조선과 ‘조선국에서의 일본인민 무역규칙’을 체결하고 일본 어민의 조선에서의 어업을 인정받았다. 이에 따라 1884년부터 제주도 근해에 일본 어민이 진출하였고 제주도민들과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잠수기를 가진 일본 어민들은 제주도에서 수산물을 남획하였고, 이로 인해 나잠업(裸潛業)을 하는 해녀들이 타격을 입었다. 일본 어민들은 제주도에 상륙하여 가축을 약탈하고 제주도민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하는 등의 행패도 일삼았다. 1890년대에 들어서서는 상륙하여 마을을 약탈하고 살상하는 사건이 제주도 곳곳에서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는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를 착취 수탈해 가기 시작하였다. 제주도의 토지조사 사업은 1913년부터 1917년경까지 실시되었다. 일제는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 지세 수입만이 아니라 많은 국유지를 만들어냈고, 일본은 이를 일본인들에게 불하해줌으로써 많은 이득을 얻게 해주었다. 제주도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제주 성내와 서귀포, 한림 등지에 집단 거주하며 토지조사 사업으로 일본 국유지로 된 경작지를 불하받고 막대한 부를 형성하였다. 자작농이 많았던 제주도의 농민들은 토지조사 사업으로 어려움이 커졌다. 

게다가 1912년부터 1917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 일주도로 건설을 위해 토지를 강제로 몰수하고 제주도민에게 부역을 강제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는 제주도의 행정 장악을 통해 경제적 수탈을 강화해 나갔기 때문에 1918년경 제주도민들은 일제의 국권 침탈과 각종 횡포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들은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 일행을 돌멩이 등으로 구타하였고 중문 경찰관주재소에 불을 질렀다. 이러한 행동은 일본의 통치로 인한 행정적인 피해는 물론 상인들로부터도 수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관리와 상인을 내쫓겠다는 법정사 항일운동 거사 취지에 동조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700여 명 주민의 참여는 바로 제주도 내의 외세로 인한 폐해를 바탕으로 한 결과였다 할 수 있다. 

 

8. 법정사 항일운동의 왜곡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을 분명히 선언한 항일운동이었음에도 일제는 혹세무민의 난리로 왜곡하였다. 법정사 항일운동 관련 일제의 자료를 연대순으로 비교 검토하면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일제의 왜곡이 의도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물론 항일운동의 기세를 꺾어야만 하는 일제의 정책에 의한 것임은 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일제에 의해 점점 왜곡되어 가는 기록을 시대순으로 살펴보겠다. 우선 참여자의 숫자가 왜곡되며 다음은 거사 목적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왜곡되어 가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 

1) 참여자 숫자의 왜곡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을 보도한 기사는 〈매일신보〉의 기사 3건이다. 1918년 10월 7일에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은 1년 6개월이 지난 1920년 4월 12일 〈매일신보〉에 처음 기사화되었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이다.

(1) 1920년 〈매일신보〉의 기사 ‘700명’

1920년의 〈매일신보〉의 기사는 제주에서 김연일이 ‘700명’을 거느리고 소요를 일으켰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김연일, 700명, 목포지청 결석 재판, 징역 십 년, 목포분감 복죄’ 등이 들어간 기록이라는 특징이 있다. 

제주에서 불무황제라 하고 부하 7백 명을 거느리고 소요한 김연일(51)은 목포지청에서 결석 재판을 받고 징역 십 년 죄로 종적이 없었던바 3월 중에 제주도로 돌아간 것을 체포하였다는데 이번에 목포분감에서 복죄하였다더라. (광주)

기사에서 ‘징역 십 년 형’과 ‘목포지청’ ‘결석 재판’을 했다는 기록 등은 《형사사건부》와 《수형인명부》를 통해서 검증할 수 있다. 《형사사건부》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분국 생산 문서이다. 《형사사건부》에 의하면 김연일은 ‘궐석 재판’을 받았고 죄명은 ‘소요 및 보안법 위반’이고 형량은 ‘징역 10년’이다.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생산문서인 《수형인명부》에도 ‘궐석 재판’을 받았고 죄명은 ‘소요 및 보안법 위반’이고 형량은 ‘징역 10년’이라고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판결청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다른 자료와 교차 비교해 보면 1920년의 〈매일신보〉 기사의 정확성을 알 수 있다. 기사는 김연일의 재판 상황과 형량 등에 대해 정확히 보도하였음이 검증된다. 

   

법정사가 자리했던 터는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로 보존되고 있다.

(2) 1923년 〈매일신보〉의 기사 ‘400명’

1923년 〈매일신보〉 2월 20일 자는 참여자들을 ‘400명’의 대폭동단이라고 표현하였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5년 후의 기사이다.

제주도 중면 사계리 강창규(41)라는 자는 자칭 불무황제 이백 대장 겸 치민 황제 김연일이라는 자와 공모하고 선위선봉대장(先衛先鋒大將)이라고 한 후 대정 8년 3월 6일 밤에 좌면 도순리에 있는 승려 수명과 부근의 주민 수십 명과 단결한 후 각 리 구장에게 편지로 이번 옥황상제 성덕주인이 출세하여 조선 백성을 구할 터인즉 동월 3일 오전 4시에 리 구민을 인솔하여 좌면 하원리에 집합하라. 그러한 후 우리들은 먼저 관청으로 가서 관리를 체포한 후 독립을 계획할 터인데 만일 이 명령에 쫓지 아니하는 때에는 군법에 처하겠다는 격문을 보낸 후 그들의 일단은 총과 몽둥이를 휴대하고 각 곳으로 돌아다니며 장정군을 뽑아 4백 명의 대폭동단을 조직하여 일본인의 집과 동리 주재소에 침입하여 기구를 파괴하고 공문서와 건축물을 살라버리었는데 범인 김연일은 즉시 체포되었으나 강창규는 어디로 도망하였는바 4년 만에 작년 12월 28일 제주도 우면 상효리 화전동에 잠복한 것을 동리 주재소의 요코야마(橫山) 무장과 김 순사가 탐지한 바가 이루어져 즉시 체포되었다더라.

1923년에는 참여자를 700명에서 400명으로 줄여 보도하면서도, 1920년의 기사보다 더 자세하게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해 묘사하였다. 강창규가 ‘선위선봉대장’이었다는 점, ‘좌면 도순리’ ‘하원리 집합’과 ‘군법에 처하겠다는 격문’ ‘총과 몽둥이를 휴대’ ‘주재소에 침입하여 기구를 파괴하고 공문서와 건축물을 살라버리었다’는 점 등은 《정구용 판결문》 기록과 비교하여 검증이 가능한 사실이다. 

그러나 거사 후 5년이 지난 시점의 이 기사에는 ‘대정 8년 3월 6일 밤’이라든지 ‘김연일 즉시 체포’라든지 하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싣고 있음도 찾을 수 있다. 대정 8년은 1919년이다. 거기다가 ‘3월 6일 밤’에 단결했다면서 ‘동월 3일 오전 4시에 집합’하라고 하여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정구용 판결문》 《형사사건부》 등을 비롯한 일제의 법정 생산 문서를 통해 오류임을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대정 7년 10월 7일이 맞는 날짜이며 김연일은 즉시 체포되지 않았고 1년 6개월여 뒤에 체포되었다. 참여자의 숫자가 축소되는 점과 함께 다수의 오류가 기사화되어 있는 점을 찾을 수 있다.

(3) 1938년 〈매일신보〉의 기사 ‘약 300명’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이 일어나고 20년 후 1938년 8월 13일 자 〈매일신보〉에는 참여자가 ‘약 300명’으로 축소 표현되었다. 20년 후에 왜 이 기사가 쓰였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38년 당시 대거 검거된 무극대도교의 항일활동을 설명하며 그 기원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당시부터 미신사파가 불경죄 보안법위반죄 등에 해당하는 저항을 주도하였다며 쓴 기사이다.

일제에 저항하는 활동을 한 무극대도교를 조사해보니, 제주도는 무극대도교처럼 미신사파가 많은 곳이라며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도 미신사파의 불온한 행위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원래 제주도는 미신사파의 신도가 많은 곳으로 대정 2년경부터 강증산을 교조로 한 보천교, 미륵교, 동학교, 대세교와 최제우를 교조로 하는 동학계의 수운교 등이 들어와서 대정 8년에 김연일이란 자가 그 사교도를 규합하여 가지고 자칭 불무○○라 하는 제주도 대정면 산방산에서 ○○식을 거행한 후 약 3백 명의 민중을 선동하여 중문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고 불을 질러 태워버린 사건이 발생하는 등 그 사교도는 여전히 불온한 행위를 반복하고 있음으로 명랑성이 없고 음험한 공기가 떠도는 것은 반드시 민중의 배후에 어떠한 사교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이 기사는 김연일이 ‘중문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고 불을 질러 태워버린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대정 8년’은 서기 1919년이고 ‘대정면 산방산’이라는 장소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과는 상관이 없는 장소이다. ‘보천교, 대세교’ 등을 언급하였으나 보천교는 1921년에 명칭이 만들어졌고 1936년 해체되었다. 

대세교는 1926년 창립되었다가 1930년에 해체된 신종교이다. 그런데도 기사는 김연일을 보천교, 대세교 등의 사교도와 연관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20년 후의 이 기사는 김연일이 항일운동을 했다는 것 말고는 사실과 부합하는 점을 찾기 어려운 기사이다.

(4) 1923년 《정구용 판결문》의 ‘300~400명’

1923년 6월 29일 일제 법정 문서인 《정구용 판결문》에서는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에 ‘300~400명’이 참여하였다 하였다.

하원리에서 고이즈미 키요미(小泉淸身) 및 2명의 조선인에게 폭행을 가하였다. 동 세력이 점점 증대되어 약 300여 명이 되었다. ……(중략)…… 하원리에 이르렀을 때는 총 세력이 삼사백 명이 되었는데, 하원리로부터 중문리 주재소를 습격할 목적으로 중문리로 향하는 도중 하원리의 인가에서 떨어진 도로에서 3인의 일본인이 오자, 백여 명의 선봉자가 몽둥이 또는 돌로 때렸다. 

(5) 1934년 《폭도사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의 ‘약 400명’

1934년 일본 경찰이 펴낸 《폭도사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에는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가 ‘약 400명’으로 표현되었다. 이 자료는 1934년에 경상북도 경찰부에서 관리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동향을 정리하여 만들어낸 자료이다. 김연일이 경상북도 출신이라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제주도 소요 사건

수괴 김연일은 경북 영일군 출신이면서, 4년 전 승려로서 제주도 좌면 법정사에 거주하며, 언제나 교도에 대하여 반일 사상을 계속 고취시키고자 했다. 대정 7년 9월 19일 구 우란분(舊 盂蘭盆) 때 법정사에 모이게 한 교도 30명에 대해, ……(중략)…… 우선 제일로 제주도에 살고 있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상인을 도외로 내쫓아야 한다고 말하고, ……(중략)…… 2일간에 걸쳐 리민 약 400명을 억지로 징집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이상 살펴본 시기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 숫자의 변화를 다음 페이지 〈표-4〉로 정리해 보았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의 숫자가 1920년 기록에서는 700명이었다가 400명으로 축소되고 20년이 지난 1938년에는 300명으로 축소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었다.

   
 

2) 법정사 항일운동 목적의 왜곡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목적은 일제의 법정 문서인 《정구용 판결문》 《강창규 가출옥 관계 서류》 〈매일신보〉 《폭도사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 등을 통해 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문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문서가 아니다. 재판과 수형 생활을 관리하는 문서이며 경찰이 항일 이력이 있는 인물을 관리하기 위해 극비문서로 작성한 것들이다. 이들 문서에는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목적이 국권회복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이 볼 수 있는 신문에는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목적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1920년 〈매일신보〉에는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을 보도하지 않았다. 김연일이 ‘소요사건’으로 수형생활을 하였다고만 보도했지 그 소요가 무슨 목적이었는지는 보도하지 않았다.

1923년 〈매일신보〉에는 “승려 여러 명과 부근의 주민 수십 명이 단결한 후에 일본인 관리를 체포한 후 독립을 계획할 터인데”라고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이 독립운동임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1938년에 가서는 혹세무민하는 사교도의 행위로 표현된다. 1938년 8월 13일 〈매일신보〉는 무극대도교 사건을 보도하면서 김연일이 무극대도교처럼 사교라서 불온한 행위를 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물론 여기서 불온한 행위라 하는 것은 일제에 저항하는 활동을 하여 불경죄와 보안법위반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일컫는 것이었다.

일제는 1936년 유사종교 해체령으로 종교 활동을 관리 통제하였다. 1938년 〈매일신보〉 기사는 이 유사종교 해체령의 실천과 관련하여 작성한 것으로 무극대도교의 항일활동 의미를 축소함은 물론 법정사 항일운동의 의미도 왜곡하려는 시각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이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서 멀어질수록 일제는 독립운동의 의미를 희석시키려 노력하였음을 포착할 수 있다. 또한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일제는 제주지청 검사분국이 제주도에 설치되어 있었음에도 동급기관인 목포지청 검사분국으로 이송하여 수사하였다. 이는 모두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지 않도록 차단하는 효과를 노렸을 것으로 짐작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제의 왜곡은 이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이 보천교의 난이라고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왜곡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항일운동으로 조명되는 굴레로 작용하였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이 항일운동으로 평가된 이후 현재, 승려 김연일 등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 32명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는 제주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6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의열사(義烈祠)를 건립하여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를 추모하고 있다. 

   

법정사 항일운동 상징탑

제암리학살사건은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교회 청년들이 1919년 3 · 1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 시기에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사건이다.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3 · 1만세운동은 제주도에서도 조천만세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제암리학살사건은 즉시 스코필드와 언더우드에 의해 국제적으로 여론화되어 알려졌다. 교회 터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어 기념하고 있기도 하다. 

이와 비교해 보면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거사의 사전 계획성과 조직 구성이 독자적이었고, 여러 마을을 규합하는 등 거사 규모 면에서도 의의가 매우 큰 항일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치와 중요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한금순
제주대학교 사학과 외래교수. 숙명여자대학교, 제주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 문학박사(한국사). 주요 논문으로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석사논문)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 근대 제주불교사》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제주불교사》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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