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조선독립의 횃불을 들다

- 백용성, 한용운, 백초월, 김성숙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하는 3 · 1운동은 그 자체가 종교계와 학생들의 전폭적인 협력 아래 이루어진 거사였기 때문에, 종교계에서의 3 · 1운동에 대한 평가 역시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3 · 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불교계 독립운동가에 대한 조명이 충분히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아직도 만족할 만하지는 않다고 할 것이다. 더불어 불교계에서 3 · 1운동이 그 이후 불교계의 향방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하는 점도 여전히 심화해야 할 과제로 남겨져 있다고 생각된다.

3 · 1운동은 주지하다시피, 민족대표 33인 중 태화관에 모인 29명이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하는 한편, 만해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촉발하게 되었다. 이 중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이 불교계 대표로서 서명한 33인 중의 2인인바, 이 두 분은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서 비교적 활발하게 조명된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의 독립운동을 한 불교계 인물들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백용성, 한용운과 거의 동시대에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것으로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자료의 부족, 해방 이후의 사상논쟁 등의 사정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경우로 백초월과 김성숙 등이 있다. 독립운동가로서 백초월과 김성숙에 관한 본격적인 조명은 최근 관련 사업회와 학계 일각의 노력으로 그나마 조금씩 그 면모가 밝혀지는 중이다. 

백용성과 한용운뿐만 아니라, 백초월과 김성숙 역시 3 · 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인물이고, 3 · 1운동을 계기로 그들의 삶의 방향이 독립운동과 민족의 자각이라는 한 방향에 일관하게 되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다만 그들이 투신한 민족독립 운동의 활동 방향은 제각각 다른 양상을 보여서 흥미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이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 3 · 1운동 과정에서 보여준 각각의 행보, 그리고 그들의 사상적 지반을 살펴보는 것은 불교계 독립운동 양상은 물론 그 저변을 확인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일제 강점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였다고 생각되는 이들 네 분의 활동과 사상적 기반에 대해서 검토할 예정이다. 이분들 외에도 수없이 많은 불교계 독립운동가가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이들 네 분의 독립운동과 그 사상적 지반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들 4인의 독립운동 방향과 방식은 물론 각자의 이력이 불교계의 독립운동의 다층적인 면모를 살펴보는 데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네 분의 행적은 3 · 1운동을 기점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으며, 그 후의 독립운동은 각각 다른 방면에서 진행되었기도 해서 그들의 사상적 면모 역시 다채롭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들의 행적과 사상적 지반을 비교하고 검토하는 것은, 불교계 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양상을 추적하는 데도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지면의 제약이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 그들 네 분의 행적과 사상적 지반을 자세하게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또 이미 선행연구에서 상세하게 논급되고 있기 때문에 필요성도 크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하여 이 글에서는 선행연구들을 참고하여, 네 분의 활동과 그 사상적 지반에 보이는 뚜렷한 특징을 중심으로 같고 다른 점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두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계 독립운동의 다층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일제 강점기 불교계 지식인들이 독립을 위해 몸을 던졌던 사상적 지반의 일면이라도 드러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생애와 독립운동의 내용 비교

1) 3 · 1운동 이전의 수학과 활동

한용운(韓龍雲, 1879~1944), 백용성(白龍城, 1864~1940), 백초월(白初月, 1878~1944),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의 4인은 기본적으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3 · 1운동의 이전과 이후의 삶에서는 닮은 듯 닮지 않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중에서 김성숙을 제외한 세 분의 삶과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서는 이미 김광식의 선행연구에서 간략한 비교검토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김광식의 선행연구에 의지하여 네 분의 생애와 독립운동 관련 활동을 간단하게 〈표-1〉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김광식은 수행, 3 · 1운동에 투신하기 전의 행적, 독립운동의 내용, 이후의 추모와 계승 및 연구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세 스님의 활동 양상을 검토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김광식이 정리 비교한 표에 김성숙의 생애와 독립활동을 더하여 제시하는 것으로 간략한 사항들을 먼저 제시하였다. 

먼저 언급해두어야 할 것은 백용성, 한용운, 백초월과 비교하여 김성숙은 한 세대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앞의 세 스님이 기본적으로 조선불교 혹은 더 넓게는 조선의 전통교육이라는 테두리를 통해서 승려로서 첫걸음과 초기 수행이력을 거친 것과는 달리, 김성숙은 신식교육을 먼저 접하고 난 뒤에 전통교육을 거쳐서 불교에 입문하는 차이가 존재한다. 

또 3 · 1운동 당시의 김성숙은 앞의 세 스님과는 한 세대 정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3 · 1운동의 현장에 참여하는 측면과 자세에서도 상당히 다른 위치였을 것이라는 점을 기본적인 사항으로 지적해두고자 한다. 3 · 1운동 시기를 초점으로 해서 말한다면, 앞의 세 스님이 이미 3 · 1운동 당시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할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김성숙은 그다음 세대 격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의 세 스님과 김성숙의 활동을 비교함에서는 그러한 차이를 일정 부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또한 출가 이전의 수학 및 출가 이후의 수학 및 활동을 살펴보면, 백용성과 한용운 그리고 백초월에게는 일정한 공통점이 있다. 세 스님 모두 출가 이전에는 한학을 공부하고, 출가 이후에는 내전 및 불교의 전통교육과정을 거치고 있기 때문이다. 백초월의 경우, 출가 이전의 수학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강원의 강백으로 주로 활동하여 20대 후반에 이미 영원사의 조실로 불렸고, 40대에 막 접어든 무렵인 1915년에 중앙학림의 초대강사로 내정되었다는 점에서 경학 방면의 실력이 탁월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점은 한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더불어 강원에서 참선하고 간경(看經)하고 강경(講經)하였다는 점 역시 공통되는 부분이다.

이것은 이들 세 스님이 모두 조선불교 후기의 강원교육 전통에 익숙하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다만 그 수학과 수행 및 실천의 세세한 내용에서는 차이가 존재한다. 백용성의 경우는 3 · 1운동 이전의 활동 내용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선(禪)을 본령으로 추구하는 모습이고, 한용운의 경우는 일본유학의 영향 때문인지 전통적인 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보다 자유로운 사고가 많이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들과 달리, 백초월의 경우는 전형적인 강백의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활동의 방식 및 활동의 영역에서 세 스님 사이에는 공통성 못지않게 다른 부분이 드러난다. 가장 큰 이유는 각자가 겪었던 수학 과정의 차이가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대 차이가 있는 김성숙의 경우, 3 · 1운동 이전의 삶을 살펴보면 수학 과정에 그 초점을 두어서 특징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되는 가장 큰 특징은 전통 한학으로부터 불전의 수학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신식학문을 먼저 배운 다음 서당을 다니고 그 후에 출가하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김광식은 봉선사 시절에 불교와 철학 그리고 사회과학 서적을 익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다고 정리하는데, 특히 사회주의 사상을 일정 부분 수용한 것은 앞의 세 스님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수학 경력이라고 할 것이다. 다만 이 시기에 과연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시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그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얻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2) 3 · 1운동 및 이후 독립운동 관련 활동의 특징적 경향 

여기에서는 3 · 1운동 이후에 보이는 스님들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들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들이 워낙 다양하고 방대하기 때문에, 역시 김광식의 정리에 김성숙 부분을 덧붙인 표를 먼저 제시하여 이해에 편의를 구하고자 한다.

〈표-2〉에서 보듯이, 불교계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네 분 스님의 가장 큰 특징으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한 번의 변절도 없이 초지일관하여 독립에 대한 의지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고 하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은 물론 일제시기를 대표하는 수많은 민족 지식인들이 일제의 탄압에 따른 변절과 좌절을 되풀이하고 있었음에도, 독립에 대한 의지로 그 생애를 일관하였다는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그 의지를 각각이 추구하는 방면에서 표출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데 서슴지 않았다는 점 역시 충분히 상기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네 스님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에서 뚜렷한 각자의 개성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백용성의 활동은 3 · 1운동 이후 불교경전의 한글 번역 및 한국의 선 전통을 계승하고 현대화하는 데 초점이 모이고 있다. 또 한용운의 활동은 불교인으로서 자신의 본령을 놓지 않되, 조선의 불교전통에 굳이 제약되지 않는 한편, 불교를 매개로 삼아 민족과 당시의 사회대중에 대하여 민족정신과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형태의 대사회활동에 초점이 모이고 있다. 이들 두 분의 활동은 3 · 1운동 이후 문화정치로 전환한 일제의 통치정책을 적절히 활용하면서도 대중과 맞닿아 있는 부분에서 불교 그리고 민족의 독립정신을 어떻게 확산하고 조직화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중점을 둔 활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3 · 1운동 이전에는 강백으로서 활동이 두드러졌던 백초월의 3 · 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들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김광식은 “초월은 3 · 1운동 직후인 4월 초순에 해인사에서 상경하여 용성 · 만해가 수감으로 인하여 공백이 된 불교독립운동 책임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앙학림에 민단본부(전국불교도 독립운동본부)를 만들고 자신이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는 학인들을 전국 주요 사찰에 보내어 군자금을 받게 하여, 그것을 상해임정 및 만주 독립군에게 전달하였다. 나아가서는 불교청년들을 임정 및 만주 독립운동 단체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초월은 1919~1921년 불교계 독립운동의 총수였다. 이런 연고로 그는 상해임정을 배경으로 전개된 다양한 독립운동에 불교 대표로 인식되었다.”고 지적한다. 요지는 3 · 1운동 직후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수감된 한용운 등을 대신하여 불교계 독립운동의 수장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초월의 독립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격은 이 같은 수장의 역할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에 보이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김광식이 지적하는 것처럼 직접적인 투쟁, 비밀결사를 통한 투쟁, 최일선의 항쟁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독립운동이 투쟁과 직접적인 저항으로 일관하는 방향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이상 세 스님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은 국내를 무대로 한 것이다. 대체로 국내의 항일투쟁이 국외의 항일투쟁보다 위험하고 또 더욱 힘겨운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백용성과 한용운 그리고 백초월이 분담하고 있는 영역은 국내의 적극적인 항일투쟁의 모든 면을 아우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체적으로 일제시기 국내 불교계 지도자들의 동향은 크게 항일과 친일의 두 부류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중에 항일에 나선 불교계 지도자들을 굳이 다시 나눈다면, 소극적 항일과 적극적 항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세 스님은 모두 적극적인 항일노선에 속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이들의 항일 독립운동 관련 활동들은 대부분 적극적인 노선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힘겨운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자구책과 대중에 대한 적극적인 접근을 요할 수밖에 없었기에 더욱 힘겨운 노정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김성숙의 경우는 이들 세 스님과는 활동의 영역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과 적극적으로 접촉하고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존재한다. 3 · 1운동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나온 김성숙은 봉선사에서 다시 불전 공부에 매진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 역시 견고해져 갔던 것으로 보인다. 출옥 후의 첫 번째 활동으로 기록되는 것이 불교유신회 참여이다. 불교유신회에 참여한 항일독립운동의 의지를 견고히 한 봉선사의 승려로서 일견 당연해 보이는 활동이다.

그런데 김성숙은 1922년에 출범한 무산자동맹 및 조선노동공제회 등의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고, 이때 조선노동공제회에서 활동하던 김한 · 조봉암 · 유자명 등과 교류하였다고 한다.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한 직접적인 계기는 옥중동지였던 김사국과의 교류가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부분 때문에 김성숙이 북경 유학을 떠나기 이전에 이미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는데, 김성숙의 회고담에 의하면 이 당시에는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국내에서 사회주의 단체 참여가 사회주의를 수용하거나 혹은 그것에 경도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으로 읽힌다. 이 점은 이후 그의 재중(在中) 독립운동의 성격을 판단함에도 중요한 단서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성숙의 북경 유학 재중 당시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을 보면, 불교 관련 활동과 독립 관련 활동은 일견 당연한 것이지만 유독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 관련 단체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혹은 주도적인 참여 사례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그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이 좌편향적이었으며, 사회주의자였다고 평가하는 단서로 제시되곤 한다. 그러나 많은 사회주의 단체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각각의 단체가 지닌 성격과 김성숙이 늘 불교 관련 활동을 한 축으로 삼고 있었다는 점 등에서 불교계 민족주의자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반론 역시 활발하다. 

그의 재중 독립운동은 북경불교유학생회 조직에서부터 시작되어 의열단, 사회주의 독립운동 단체 그리고 중경 임시정부 참여로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점은 국내에서 3 · 1운동 후 수감되었다 출옥한 후에 국내 사회주의 단체에 참여한 이력 등을 함께 고려할 때, 어떤 관점에서든 사회주의 단체와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사회주의자로서 김성숙이라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데, 그 점에 대해서는 다음 부분에서 서술할 것이다. 어쨌든 국내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을 기준으로 보면, 김성숙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은 적극적인 투쟁에 방점이 찍힌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3. 불교계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지반 및 지향

이상에서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 독립운동가 4인의 3 · 1운동 및 그 이후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의 내용과 특징적 경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소개되고 개략적인 분석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들의 사상적 지반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사상적 지향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 되도록 간략하게 지적하기로 한다. 다만 언급해두어야 할 것은, 세세한 논거를 들기보다는 앞에서 언급한 그들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에서 보이는 뚜렷한 특징을 염두에 두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을 서술하는 데 그친다는 점이다. 

이들 불교계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지반과 지향을 논함에 분명하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이들이 한국의 불교전통에 대해 강렬한 뿌리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만 소극적이었던 불교계 항일지도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적극적으로 그 뿌리를 계승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꽃피워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감 역시 지니고 있었다. 

또 고려해야 할 것은, 이들 4인의 승려가 3 · 1운동 이전에 일제의 무단통치를 통한 민족정신 말살 정책으로 인하여, 그 첨병에 있던 일본불교의 조선 진출 및 총독부의 사찰령에 따른 조선불교전통의 심각한 상실위기를 경험하였다는 점이다. 백용성과 한용운은 1910년대라는 일제 무단통치 10년 동안의 이러한 종교정책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던 인물인 동시에, 일본불교에 대응하여 조선불교의 전통을 새롭게 재정립해야 한다는 점에도 일찍 눈뜬 선구자였다는 점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백초월 역시 그러한 두 사람을 대신해서 3 · 1운동 직후의 공백기를 책임졌던 인물이며, 막 20대 초반에 접어들던 젊은 승려 김성숙은 이들의 깊은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백초월과 김성숙 역시 동일한 맥락을 전제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같은 점을 전제로 여기에서는 이들의 사상적 지향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점에 초점을 두고 서술하고자 한다.

 

1) 백용성의 사상적 지향점

백용성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을 꼽자면 필자는 세 가지 측면에서 압축하여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대각교 운동인데, 이는 한국불교 전통 선맥의 계승 및 혁신운동이자 일제 사찰령에 구속받지 않는 항일민족불교 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둘째는 불교의 대중화 및 사회화인데, 삼장역회(三藏譯會) 설립을 통한 한문 경전의 한글 번역사업 및 한글 포교서 간행, 한글 의식집 간행 등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를 기반으로 도심포교, 문서포교, 어린이포교, 참선포교, 해외포교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셋째 그의 다양한 불교 활동이 구세주의(救世主義) 불교라는 입장에 서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교학을 겸비한 대선사이면서도 세속과 단절한 수행승의 길을 거부하였고,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참여주의 불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것을 한용운이 언급한 바 있는 구세주의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다. 

대부분의 연구는 백용성의 대각교 운동이 전통불교 수호와 불교의 대중화 및 활성화에 초점을 둔 개혁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백용성의 사상적 지반과 지향이 가지는 성격에 대하여 이덕진은 김광식의 논의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곧 “백용성이 선학원 설립에 큰 역할을 하였으면서도 대각교 운동을 독립적으로 전개한 것에 대해 ‘백용성은 전통불교 수호라는 면에서 선학원 측과 동질적인 인식을 가지지만 그 대안에서 서로 달랐으’며, ‘대각교운동에 나타난 개혁론은 전통불교 수호와 함께 불교의 대중화 및 활성화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광식의 지적은 백용성의 불교개혁론이 가지는 성격을 명료하게 지적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희는 백용성의 불교개혁론에 대해 “일본불교화를 통해 전통불교의 폐단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반민족적 종교의 멍에를 둘러쓰는 꼴”이기에 “불타의 근본 가르침의 회복을 통해, 전통불교가 안고 있는 폐단을 극복과 불교의 근대화”를 지향함으로써, “불교가 전통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근대사회에서도 의미 있는 보편적 종교임을 주장”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전통불교의 수호 및 불교의 개혁이 백용성에게는 두 가지 측면의 동시적 지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한 가지는 전통불교의 수호와 계승을 강조함으로써 일본불교화에 대한 근본적인 차단을 의도하고 있고, 동시에 전통불교의 근대화를 의도하고 있다. 전통불교 근대화의 주요한 사업 중 하나가 바로 삼장역회를 통한 불교의 한글화이고, 이것은 정법의 대중화라는 명제와 관련이 있다. 그는 정법의 대중화가 직접적으로는 조선 민족의 구제, 나아가서는 하화중생의 구세(救世)를 지향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직접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이라는 당면목표와 직결되는 것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 한용운의 사상적 지향점

한용운의 독립정신은 그가 계승하고 개혁하려고 했던 한국 불교전통의 근본적 관점과 맞닿은 데서 출발하는 것인데, 그러한 관점은 《조선불교유신론》 〈불교의 주의〉에서 “불교의 주의 같은 것은 크게 나누어 둘로 잡을 수 있으니, 하나는 평등주의요, 하나는 구세주의(救世主義)가 그것”이라고 언급하는 점에서, 불교적 평등주의와 구세주의가 그의 불교정신의 중요한 지반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용운은 근세 서구의 자유주의와 세계주의가 불교의 평등주의에 기반할 때라야 올바르게 발현하는 것임을 주장하고, 불교의 평등주의를 “경에 ‘몸과 마음이 필경 평등하여 여러 중생과 같고 다름이 없음을 알라.’ 하셨고, 또 ‘유성(有性) · 무성(無性)이 한가지로 불도(佛道)를 이룬다.’”는 것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의 관점에 의거한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 불성 혹은 여래장은 가능성 혹은 원인이 아니라, ‘모양이 없고, 걸림이 없고, 구족한 여래의 지혜가 중생들 몸 안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자각(自覺)했느냐 자각하지 못했느냐에 의해 여래와 중생으로 구분된다. 비록 부처의 가르침에 의해 설시되는 것이지만, 그러한 관점의 수용에 의해서 일체중생 그리고 나아가 여래에 이르기까지 평등하다는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다. 한용운의 평등주의는 이 같은 관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용운이 주장하는 구세주의는 단적으로 “불교가 출세간의 도가 아닌 것은 아니나, 세간을 버리고 세간에 나는 것이 아니라 세간에 들어서 세간에 나는 것이니, 비유컨대 연(蓮)이 비습오니(卑濕汚泥)에 나되 비습오니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염세적으로 고립독행하는 것이 아니요, 구세적(救世的)으로 입니입수(入泥入水)하는 것”이라는 언설에 압축되어 있다. 

한용운의 독립운동 관련 활동에 그 사상적 지반이 되었던 것은 한용운의 이와 같은 평등주의와 구세주의로서의 불교이다. 이것은 자신이 인식하고 있었고 계승하여 바르게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조선불교의 올바른 전통이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통의 회복과 개혁만이 조선의 독립을 이루는 필연적인 조건이라고 한용운은 확신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1931년에 발표한 〈조선불교의 개혁안〉에서 “천오백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불교는 조선화(朝鮮化)에 대하여 어떠한 공헌이 있었는가. 한 말로 말하자면 불교를 떠나서 조선의 문화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조선과 조선인의 전적 생활에 대하여 능히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민족의 정신적 동향과 생활의 형태를 개량 혹은 혁신하려면 그에 대한 역사적 영도권을 가지고 있는 불교의 개혁이 먼저 그 충(衝)에 당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인의 정신과 생활의 형이상적 산파업(産婆業)을 파지하고 있는 불교가 먼저 혁신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용운은 ‘조선 민족의 정신적 동향과 생활의 형태를 개량 혹은 혁신하려면 그에 대한 역사적 영도권을 가지고 있는 불교의 개혁이 먼저 그 충(衝)에 당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한용운의 불교개혁론은 단순히 불교개혁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한용운에게 불교 개혁은 조선의 독립과 조선 민족의 혁신을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점에서 한용운 독립운동의 사상적 지반과 지향은 대단히 명료하게 파악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백초월의 사상적 지반과 지향점

백초월의 사상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정할 만한 기록은 많지 않다. 다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백초월 자신이 일찍부터 강백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한용운이 민족대표 중 불교계 대표로 참여할 1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 등으로부터 그 일단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곧 한국의 전통적인 불교사상에 능통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조선불교의 개혁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는지는 추정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한용운이 민족대표로 영입할 생각을 가질 만큼 민족정신과 불교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일정 부분의 공통점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 등은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최근 몇몇 연구 성과에 의하면, 3 · 1운동 직후인 1919년 11월 15일 중국의 상해에서 제작, 배포되었던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의 필자가 백초월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유력해지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하여 백초월이 이 선언서의 필자라는 전제하에 그 사상적 지향의 일면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 선언서의 내용과 사상을 분석한 연구로는 김광식과 김소진 그리고 김순석이 있다.

김광식은 선언서를 일곱 가지로 대별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7천 승려의 이름으로 일본의 통치를 배척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천명하는 첫째 부분, 불교의 근본이념을 평등과 자비로 전제하고, 일제는 불법에 어긋난 적으로 규정하는 둘째 부분, 불교계 독립운동을 계승하는 것임을 밝힌 셋째 부분,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통치를 중단케 하는 것이 역대 조사들의 유풍을 자각하는 것임을 밝힌 넷째 부분, 불교가 국가불교 곧 호국불교 전통의 계승자임을 밝힌 다섯째 부분, 일본이 불교를 포함한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일본화 정책 및 법령으로 한국 민족을 말살하려 했음을 밝힌 여섯째 부분,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완성하고, 동시에 불교의 일본화와 및 멸절의 구렁텅이에서 구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여 나라에 보답하겠다고 선언하는 일곱째 부분으로 나눈다.

김소진은 선언서의 내용을 일본의 통치를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한 부분, 일본의 악행을 지적하여 승려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음을 천명한 부분, 호국불교의 연원을 설명하여 승려들의 분기(奮起)를 정당화하는 부분,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 부분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김순석은 이상과 같은 내용을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분하고, 마지막 부분의 날짜와 주체 부분을 별도의 단락으로 구분하는 것이 다르다. 

어느 연구자든 이 선언서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거론하는 것은 국가불교 이른바 호국불교 의식의 표출에 대한 부분으로 판단된다. 이 같은 의식은 적어도 앞서 살펴본 백용성이나 한용운에게서는 강하게 표출되지 않는 부분에 해당한다. 백용성이나 한용운이 민족정신, 민족문화의 근간으로서 불교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국가불교 의식의 표출로는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선언서의 국가불교 의식 표출과는 명백히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 같은 차이는 백용성이나 한용운이 자신들이 익히고 수행하고 실천한 불교사상을 근대적 보편성 위에 재구성하려는 입장, 곧 전통을 수호하되 혁신이라는 지평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반면 이 선언서에는 ‘독립선언’이라는 그 자체에 충실한 의도에 의해 제한된 부분은 존재한다는 한계를 고려해야겠지만, 불교의 개혁 혹은 근대적 보편성의 획득이라는 의식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역시 주요한 특징으로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선언서의 내용을 백초월의 불교사상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백초월의 불교전통을 바라보는 관점에 국가불교 의식이 면면부절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김성숙의 경우

김성숙의 경우 그의 사상적 경향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논란이 있는 부분은 사회주의의 적극적인 수용 여부일 것이다. 한편으로 최근까지의 연구를 보면, 그의 사상에서 불교적 지반의 문제는 의외로 논의가 많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막 수학기에서 벗어난 청년 승려의 주변에 당시의 불교계를 대표하던 독립운동가들이 포진해 있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불교전통의 수호와 동시에 전통불교의 개혁에 의한 재정립이라는 불교의 시대적 사명을 강렬하게 자각하고 있던 불교계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경향은 한 세대 아래인 김성숙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불교를 수학하던 시기에 그가 봉선사라는 독특한 위치에 있던 사찰의 승려였다는 점, 그리고 당시 봉선사에 주석하던 홍월초와 자주 왕래하였던 손병희 · 한용운 · 김법린 등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홍월초 역시 당시의 불교계 독립운동을 대표하던 인물 중의 1인이었고, 김성숙의 활동에 대한 직간접적인 지원이 재중 시절에도 지속되었다는 점은 지적되어 있다.

김성숙이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있었고 적극적으로 수용했을 것이라는 일련의 주장에 대해, 신운용은 “김성숙은 결코 공산주의자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결론은 무엇보다 한 사람으로서 정신세계가 형성될 시기에 강렬한 민족의식을 바탕을 승려 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에 따른 것이다. 3 · 1운동 참여도 한용운 등 불교계 인사들과 교류의 결과였다. 이러한 김성숙이었기에 1923년 북경에 도착하여 불교 승려들과 가장 먼저 만든 단체가 재연경조선불교유학생회였다. 더욱이 이들 승려와 학생구락부 · 반역사 · 창일당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이는 승려들이 1920년대 중반의 북경 한인학생들의 민족운동을 이끌었다는 반증이라는 데서 불교사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운동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는 그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사상임이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신운용의 이 지적은 김성숙의 사상 지반에 불교가 지대한 기저로서 작동하는 것임을 언명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성숙이 1920년대 초반의 국내에서 그리고 재중(在中) 활동기에 적지 않은 사회주의 단체에 참여하고 때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 역시 부정하기는 힘든 부분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김성숙에게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는 일면 친숙한 어떤 것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성숙이 발행 책임을 맡고 있던 창일당 기관지 〈혁명〉이 ‘공산주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계급혁명보다 민족혁명을 우선해야 한다는 노선을 추구하고, 목표달성을 위한 방안으로 볼셰비키 운동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 운동도 필요하다’는 논지를 전개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의 독립운동 본령이 민족주의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의 불교사상적 지반과 관련하여 신운용은, 김성숙이 조장으로 참여한 조선의용대 및 김성숙의 건의로 이루어졌다고 추정되는 광복군 창설 등을, 호국불교 전통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곧 봉선사에서 김성숙을 이끌었던 홍월초가 연백문도였고, 연백문도는 서산대사 휴정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휴정의 불교관은 호국불교로 집약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호국불교는 연백문도의 기본적 지향점이었고, 이는 홍월초를 통해 김성숙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호국불교 혹은 국가불교의 문제를 휴정의 집약된 불교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 그리고 임란 시 의승병의 문제 역시 국가불교라는 측면에 우선하여 ‘구세적(救世的) 입니입수(入泥入水)’의 입장이 선행되는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는 것으로 평을 대신한다.

 

4. 맺는말

이상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4인의 관련 활동에 나타나는 특징과 그 사상적 지향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하고 검토하였다. 진행해온 정리와 검토를 다시 한번 요약하는 것은 사족에 불과하므로, 여기에서는 향후 좀 더 심층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항들에 대해서 몇 가지 언급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우선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독립운동사에서 불교계 독립운동이 가지는 위상에 대한 전체적인 조명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이번의 기획이 의도하는 것 역시 동일한 맥락에 있다고 생각된다. 불교 승려뿐만 아니라, 불교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혹은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불교 및 불교사상을 자신의 사상적 지반으로 직간접적으로 수용하였던 이들에 대해서도 좀 더 체계적이고 전면적인 조사와 정리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다음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한국의 불교사상 전통이 일제시기를 전후한 근대화 시기에 일본불교 그리고 서구의 근대사상과 접촉하면서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에 대한 더욱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특히 한용운 연구의 경우에 빈번하게 보이는 것 중의 하나가, 불교전통의 재해석이라는 시각보다는 서구 근대사상의 수용이라는 측면의 연구들이다. 하지만 전통강원의 이력을 거치고 선사로서 그리고 강사로서 활약하였던 일제시기 전후의 불교 승려나 사상가들이, 새로운 사상의 수용에 급급하였다고만 간주하는 것은 대단히 성급한 판단일 것이다. 오히려 그들 대부분은 새롭게 받아들인 문물을 자신들의 전통에 입각하여 재해석하는 시각 역시 강렬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 사상적 지반과 지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여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불교계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에서 사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활동의 물적 토대에 대한 부분이다. 본론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백용성의 경우 독립운동 및 불교전통의 수호와 혁신 부문에 투여하는 만큼이나 그 물적 토대의 확보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부분의 역사 활동은 지향을 이끌어내는 사상성 못지않게 그것을 지탱하게 하는 물적 토대가 안정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계 독립운동가의 활동 역시 그 물적 토대의 변화 역시 고려할 수 있는 자료적 측면의 정리와 축적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

 

석길암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제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화엄경의 편집은 호탄(Khotan)에서 이루어졌는가〉 〈동아시아 불교사상사 연구의 한 반성〉 〈중국불교 대승화에 대한 이해의 한 측면〉 등과 《지론사상의 형성과 변용》(공저)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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