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조선독립의 횃불을 들다

1. 서언

3 · 1운동은 한국 근대민족운동사의 정점이라는 역사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 즉 근대민족운동의 분수령이자 상징이었기에, 3 · 1운동에 관한 연구와 계승 등의 작업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특히 3 · 1운동 100주년에 즈음한 3 · 1운동의 이해와 평가는 특별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불교계의 3 · 1운동 참가, 전개, 성격, 성과, 계승 등에 대한 제반 개요를 서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지난 100년간 불교계의 3 · 1운동에 대한 자료수집이나 연구 작업이 매우 일천하였기에 이 글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불교 3 · 1운동의 역사를 성찰적으로 인식한다면 3 · 1운동에 참가한 불교 정신의 정립, 재인식, 계승을 기할 수 있는 근간은 찾을 수 있다. 이 글을 집필하면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측면이다.

첫째, 기존의 불교 3 · 1운동 연구는 미시적, 개별적이었다는 것이다. 지금껏 불교 3 · 1운동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가 일부 발표되었으나 한용운, 백용성, 김법린, 백성욱, 최범술, 신상완, 김구하, 김성숙, 박영희 등 명망가 위주의 접근에 그쳤을 뿐, 종합적인 연구 및 본격적인 학술행사는 희소하였다. 불교 독립운동가는 100여 명에 달하지만 대상자의 일부만 연구된 것이다. 또한 많은 사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지만 범어사, 통도사, 표충사 등 일부 사찰의 사례만 연구되었다. 

둘째, 불교 3 · 1운동 및 민족운동에 대한 자료집을 찾아볼 수 없다.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제대로 된 불교 독립운동 자료집은 없었다. 최근(2017~2018)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가 호국불교 사업 일환으로 독립운동 관련 내용이 실린 3권의 자료집을 펴냈을 뿐이다. 연구의 기반이 이러하였기에, 연구 성과는 질적, 양적으로 미미하였다. 

셋째, 불교 3 · 1운동에 대한 계승의식이 희박하였다. 한용운, 백용성, 백초월의 기일 행사(다례재 등)는 거행되었으나 종단적, 교단적 차원의 기념 법회나 의식은 없었다. 최근 선학원, 죽림정사, 범어사, 해인사에서 3 · 1운동 행사를 열었으나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넷째, 불교는 이처럼 3 · 1운동의 연구나 정신의 계승은 미진하였지만, 3 · 1운동 당시에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 · 1운동 중앙본부에서 한용운이 활약하였고, 중앙학림(동국대 전신) 및 각처 사찰 지방 학림의 스님들이 3 · 1운동의 전국적인 파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지방학림의 청년 승려들은 지역주민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만세운동을 최일선에서 이끌었다. 이는 지금까지 불교의 삼일운동 참여가 소극적이었다는 일부의 지적과는 달리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와 같은 측면에 중점을 두어 이 글에서는 불교 3 · 1운동의 배경, 전개, 성과, 성격 등의 개요와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한된 지면으로 관련 내용을 모두 다룰 수 없기에 핵심적인 사항만을 요약하고 정리할 것이다. 

 

2. 불교계 3 · 1운동의 전개

1) 참여 배경

불교가 거족적 민족운동인 3 · 1운동에 참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불교 3 · 1운동의 전개에는 호국불교, 대승불교, 민족불교의 이념이 바탕이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는 3 · 1운동 참가의 배경으로 볼 수 있는 요인과 사례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항일의병에 불교가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원인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의병진에 승려들이 참여한 사례를 찾을 수 있는데, 의병 전쟁 와중에서 사찰과 승려들은 적지 않은 피해(방화, 침탈)를 입었다. 그래서 승려들은 일제의 침략상, 잔학상, 반인류적인 행태를 직접 목격하였거니와 이것이 3 · 1운동의 동참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둘째, 한말 국채보상운동(1907~1908)에 불교계가 적극 동참하게 된 현실 인식을 3 · 1운동 참가 요인으로 들 수 있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47개 사찰에서 1,184명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의연금을 냈다. 이런 참가는 자발적 민족의식의 발로라 하겠다. 

셋째, 한국불교의 전통을 고수하고 민족불교를 지향한 임제종 운동(1911~1912)의 정신이 3 · 1운동 참여 정신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자, 각지의 불교청년들은 한국불교의 보존, 정체성 수호의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런 움직임 자체가 바로 민족불교의 지향이었는데, 임제종 운동에서 고양된 민족의식이 3 · 1운동의 참여로 이어졌다.

넷째, 불교 근대화의 일환으로 설립된 각종의 불교 학교에서 배운 불교청년들의 성장이 3 · 1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1906년 서울 명진학교를 시작으로, 지방 사찰에는 보통학교가 20여 곳 설립되었다. 그리고 1915년 전통 강원은 지방학림으로 전환되었고, 중앙에는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이 설립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학교에서 배운 불교청년층은 근대화를 지향하면서 민족적 자각을 하였다. 이들은 박한영, 권상로, 한용운 등이 펴낸 불교 잡지를 읽으면서 그들의 이상을 키워 갔다.

다섯째, 1912년부터 시행된 사찰령의 모순을 인식한 불교 대중이 증가하였다. 사찰령은 일제가 한국불교를 통제, 관리하기 위한 악법이었다. 사찰령 체제에서 담보 받은 권력을 친일 주지층이 사찰 운영에 독점적으로 활용하면서 많은 문제가 생겨났다. 그러자 이를 비판, 저항하는 청년층이 사찰 밖으로 구축되는 현상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현상은 일제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불교 대중이 나타났음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3 · 1운동의 기반이 견고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지금껏 살핀 바와 같이 3 · 1운동 이전의 불교계 구성원들은 기회만 오면 민족운동, 독립운동에 나설 정신적 자양분이 충분하였다. 

2) 중앙 차원의 참가

불교계 3 · 1운동의 중앙 차원 참가는 한용운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한용운은 3 · 1운동 이전 10년간 불교의 민족의식 계몽을 선도해 왔던바, 불교계를 대표하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피선되었다. 

한용운은 일본 문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하여 국망(경술국치) 이전인 1908년 6개월간 일본 유학을 하였다. 그의 일본행은 일본불교, 근대문화에 대한 이해를 촉진시켰다. 한용운의 일본유학은 3 · 1운동 참가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천도교 대표로 활동한 최린을 일본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1918년 후반, 한용운은 《유심》을 발간하면서 세계정세의 변화를 기민하게 인식하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파리강화회의 개최, 민족자결주의 등장 등 국제사회가 요동치는 현실을 직시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이 독립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민족운동을 모색하였다. 그래서 한용운은 일본에서 만나 귀국 후에도 알고 지내던 최린을 1919년 1월경에 찾아갔다. 이 기회를 독립의 기회로 활용할 것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당시 천도교는 민족자결주의라는 변수를 활용하여 자체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일 유학생을 통한 국내 학생층과의 연계, 상해 지역 망명 독립운동가 및 국내 개신교와 연계를 시도하던 중이었다. 이럴 즈음에 최린은 공동으로 독립운동에 나서자는 제안을 불교의 한용운에게서 받자, 천도교에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즉시 종교 연합의 형태로 3 · 1운동이 조직화되었다. 한용운은 최린과 함께 3 · 1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다음은 한용운의 증언이다.

내가 崔(최린, 필자 주)와 吳(오세창, 필자 주)를 다시 만났을 때 양인에게 천도교인만 말고 야소교회와 불교신도를 차차 동지로 하고 그 사람의 명단을 국민의 대표로 하여 공공연한 독립운동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서로 비밀을 지키는 열렬한 인물을 동시에 가입시키려 하였다.

한용운이 3 · 1운동을 기획 추진하였다는 정황은 중앙학림 학인이었던 박영희 증언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는 그 시절 중앙학림(中央學林)에 다녔는데 三 · 一운동이 일어나기 얼마 전 만해(萬海) 선생이 비밀리에 나를 인사동 포교당으로 밤에 불러 3 · 1운동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서울 지역에 연락책을 맡아 달라는 지령(指令)을 받고 최린, 백용성, 이승훈 씨 등에게 수차에 걸쳐 기밀문서(機密文書)를 가지고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때 보니 만해(萬海) 선생과 최린(崔麟) 선생 두 분이 완전히 영도(領導)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편 3 · 1운동의 지도부였던 한용운은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를 추가로 교섭하여 민족대표 진영에 포함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우선 그와 함께 임제종 포교당에서 활동한 백용성(해인사)을 민족대표에 포함시켰다. 당시 백용성은 서울 종로의 대각사에서 독자적인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즉시 교섭하여 동의를 받아냈다. 그러나 송만공, 백초월, 박한영, 오성월, 진진응 등은 민족의식이 투철했지만 지방 사찰에 머물고 있었던 까닭에, 여러 문제(통신, 연락 등)가 걸림돌이 되어 민족대표로 추가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한용운은 유교 대표를 민족대표 진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한국사회의 이념과 사상을 몇백 년간 대변해온 유교를 포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고 유림의 거목인 곽종석을 만나기 위해 거창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운동의 긴박성으로 인해 곽종석의 민족대표 가담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더불어, 한용운은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 추가를 주도했다. 문장력이 특별하였던 한용운은 최린에게 선언서는 자신이 집필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최린은 이미 최남선에게 선언서 작성을 의뢰한 상태였다. 그러자 한용운은 자신은 선언서를 수정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전하는 문헌 기록과 증언을 종합해보면 한용운이 공약삼장을 추서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한용운이 추서한 공약삼장은 3 · 1 독립정신의 핵심이고, 한용운의 독립사상을 대변한다.

거사 준비가 끝나자 한용운은 3월 1일 전날 밤, 그를 따르던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의 학인 승려들을 그의 거처인 유심사(종로, 계동)로 불렀다. 한용운은 그의 집에 모인 10여 명에게 그간 비밀리에 추진한 3 · 1운동의 준비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면서 민족적 거사에 쾌히 참가하여 서산대사, 사명대사의 법손임을 기억하고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김법린은 한용운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여러 달을 두고 궁금히 여기던 제군들에게 쾌 소식을 전하겠다. 유구한 역사 찬란한 문화를 가진 우리 민족이 자주 독립을 중외에 선언함은 당연한 일이다.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결연히 나선 우리는 아무 장애도 없고 포외(怖畏)도 없다. 군 등은 우리 뜻을 동포 제위에게 널리 알려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 특히 군 등은 서산, 사명의 법손임을 굳게 기억하여 불교청년의 역량을 잘 발휘하라.

이같이 당부하며 한용운은 자신이 천도교 측으로부터 가져온 선언서 3천 매를 학생들에게 주고, 각 처(서울 시내, 전국 사찰 등)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한용운으로부터 3월 1일의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라는 당부를 받은 중앙학림의 청년 승려들은 유심사를 나와 인사동의 범어사 포교당에서 후속의 일을 모의하였다. 그들이 결정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불교계 운동 조직체 결성: 운동의 지도, 연락 기능 담당. 책임자는 신상완, 참모는 백성욱 · 박민오

선언서 배포: 한용운에게 선언서 3천 매 인수. 서울 시내에 배포하고 지방 사찰에 제공

시위운동 참가: 3월 1일 탑골 공원 집합, 선언식 참가 후 시가행진

지방특파원 파견: 사찰을 중심으로 거족적 독립 만세운동 전개, 추진

전라도(호남)-정병헌, 경북-김대용, 동화사-윤학조, 김용사-전장헌, 통도사 · 경남-오택언, 범어사-김법린, 김상헌, 해인사-김봉신 경기, 충청, 강원, 평안-중앙 3인이 여타 학인 중에서 파견

운동의 정보 수집: 해외 운동까지 포함

동지 규합: 지방특파원은 각 사찰을 순방, 동지 규합

운동자금 모집: 중앙과 지방 연락 강화, 해외운동 후원(장기적 차원)

해외 대표 파견: 불교 대표

지방 운동 방략: 특파원은 각 사찰을 순방하여 독립선언식 거행, 만세시위를 촉구. 선언서를 다수 등사, 배포(촌락, 도시 등)

이렇듯이 중앙학림의 학인들은 3 · 1운동의 참가, 방략, 지속적인 운동 확대 등 대강의 원칙을 정하였다. 

드디어 3 · 1운동의 그 날이 왔다. 한용운과 백용성은 종로의 태화관으로 가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다. 민족대표들은 선언서를 간단히 보았고, 한용운이 개식을 선언하며, 신명을 바쳐 한국이 자주 독립국이 되도록 모인 것이니 정정당당하게 최후의 1인까지 독립쟁취를 위해 분투할 것을 제안했다. 짤막한 기념사를 한 한용운은 민족의 독립을 기원하는 의미의 축배를 제의하고, 만세 삼창을 선도하였다. 이때 한용운은 일제에 피체되면 지켜야 할 옥중 투쟁 3대 원칙인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을 제안하였다. 한편 한용운의 당부를 받았던 중앙학림의 승려들은 오후 2시 탑골공원의 선언식에 참가하고, 곧이어 전개된 서울 시내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저녁에는 서울 시내에 선언서를 배포하여 민족불교의 봉화를 높이 들었다.

3) 지방 차원의 참가

지방에서 불교의 3 · 1운동은 지방 사찰을 거점으로, 청년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한용운에게 운동의 적극 참여를 당부받은 중앙학림 승려들이 연고 사찰에 내려가 만세운동을 촉구했고, 지방 사찰에서 수학한 학인 승려들이 긴밀하게 호응하여 성공적으로 확산되었다. 지방 사찰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해인사: 3월 31일, 해인사 홍하문 만세시위, 200여 명의 승려와 주민 200여 명 참가. 도진호, 김봉신, 김용기, 최원형이 해인사 학승에게 선언서 우송. 강재호와 송봉우는 서울에 가서 선언서 입수, 귀사. 김봉신(중앙학림) 시위 권유. 지방학림 승려 30여 명이 시위 준비, 선언서 수천 매 인쇄 

△ 지방 시위 권유 3대(隊)의 조직체 가동-1그룹(강재호, 김봉율, 기상섭): 경주, 양산, 부산, 김해, 2그룹(송복만, 송복율, 최범술): 합천, 초계, 의령, 진주, 사천, 곤양, 하동, 3그룹(박달준, 박덕윤, 이덕진, 김장윤): 거창, 함양, 안의, 산청, 남원. 

△ 개별적 활동(출신 사찰을 고려, 시위 권유 등)-우경조 · 나경화: 공주, 부여, 마곡사, 박계성: 법주사 본말사, 김경환: 선산, 상주, 김도윤 · 이봉정 · 남성엽: 김천, 성주, 신철휴: 고령, 영천, 신광옥 · 신경재 · 김명수: 거창, 권청학: 대구, 달성, 영천, 동화사, 은해사, 용문사, 안동, 박근섭 · 박응천 · 신문수 · 정봉윤: 쌍계사, 화엄사, 송광사, 선암사, 강진, 보성, 담양, 홍태현: 해주, 황주, 사리원 등 황해도와 평안도, 신철휴 · 신난휴 · 이도직: 고령, 현풍, 대구, 박창두: 함남

● 범어사: 동래 장날인 3월 18일 학승 40여 명 시위 주도, 주민과 만세운동. 중앙학림의 김법린, 김상헌이 내려와 시위 권유. 3월 19일 동래 시위, 학인 수십 명 주도. 학승 및 지방학림 · 명정학교 학생, 30여 명 결사대를 조직. 허영호, 차상명, 김봉환, 김상기, 김영규, 이근우, 김상호, 김한기 등 주도. 태극기 수백여 개 준비, 40여 명 학인 선언서 · 격문 배포. 100여 명의 학인 체포됨. 학인 34명 재판에서 실형 언도.

● 통도사: 3월 13일, 학인 · 승려 80여 명과 주민, 신평시장(통도사 입구) 시위. 오택언(중앙학림) 선언서 우송, 만세운동 촉구. 김상문, 양대응, 박세문, 이기주 등 학인 10여 명이 주도하여 선언서 배포 및 낭독.

● 표충사: 4월 4일, 승려 50여 명과 주민 1,500여 명, 표충사 입구 단장면 장날 시위. 통도사 학승 5명, 3월 20일 표충사로 가서 시위 권유. 이장옥, 구연운, 오학성, 손영식, 김성흡, 이찰수 등 표충사 승려가 주도. 표충학원 학생, 태극기와 격문(宣書) 수백 장 준비. 단장 장터에서 선언서 배포하고 시위, 주재소 습격. 364명 검거되어, 71명 검찰 송치됨

● 봉선사: 3월 29일, 승려와 주민 600여 명, 광릉천 시위. 김성숙, 이순재(지월), 현일성, 강완수, 김석로, 김석호 등 시위 주도. 조선독립 임시사무소 명의로 사하촌에 격문 배포

● 신륵사: 4월 3일, 승려와 주민 200여 명, 신륵사 인근 백사장 시위. 영봉(신륵사 주지), 권중만, 조석영(면장) 등 만세시위 주도

● 동화사: 3월 30일, 대구 남문시장(덕산정시장, 현 염매시장) 시위, 주민 3,000여 명 참가. 김문옥, 이기윤, 권창학 등의 동화사 지방학림 학인 승려 9명 주도. 동화사 포교당(보현사)에서 시위 준비.대형 종이 태극기 준비. 윤학조(중앙학림), 권청학(해인사 지방학림) 시위 권유. 학인 10명 실형 언도 받음

● 김룡사: 4월 13일 시위 추진, 무산. 전장헌(중앙학림) 선언서 전달. 지방 학림 승려 10명이 시위 기획. 태극기, 선언서, 격문 준비. 학승 80여 명 장터로 출발, 주지의 시위 중단 권유로 중지. 주도 학인 27명 피체, 주민들은 만세시위. 주도 승려 3인은 기소(1년 집행유예)

● 쌍계사: 4월 6일, 화개장터에서 시위, 승려와 주민 300여 명 주민 참가. 쌍계사 승려, 쌍계사가 운영하는 보명학교 학생, 지역 청년 등이 상의하여 준비. 김주석(승려), 양봉원, 정상근, 이정수, 이강률, 임만규 등 주도. 4월 11일 2차 시위(면직원 사직 권고문 배포) 준비, 무산.

● 대흥사: 불교전문강원 학인 승려 30명 주도. 박영희(중앙학림) 만세운동 추동, 해남 장날에 거사케 권유.

● 화엄사: 정병헌(중앙학림) 만세운동 권유, 구례 장날. 박영희(중앙학림) 만세운동 추동.

● 석왕사: 부락민과 공동으로 시위 준비. 일제 억압으로 좌절

 

이상과 같은 지방 사찰과 학인 승려가 주도한 만세운동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중앙학림 승려들의 시위 촉구 영향이 컸다는 것이다. 둘째, 지방 학림의 청년 승려들의 자생적인 결단이 작용하였다. 셋째, 지역주민들과 공동으로 시위를 전개하였다. 넷째, 중견 승려, 학림의 교사도 동참하였다. 다섯째, 시위에는 선언서, 격문, 태극기 등이 제작 배포되었다. 여섯째, 주지층의 참가는 미약하였다. 이 같은 지방 사찰의 만세시위는 불교의 만세운동에 그치지 않고, 지역 만세운동으로도 파급되었다. 

4) 민족대표의 옥중 저항

불교 민족대표인 한용운과 백용성은 3 · 1운동으로 3년간 수감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이들은 옥중에서도 민족의 독립을 위한 항쟁을 전개하였기에 그 자체를 3 · 1운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한용운은 선언식 당일 민족대표들에게 옥중투쟁 3대 원칙(변호 · 사식 · 보석 금지)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수감된 감옥에서는 좌절하는 민족대표들에게 경각심을 늦추지 말도록 일깨웠다. 일제의 위협에 겁을 먹은 지도자에게 인분을 퍼부은 것이 그 실례이다. 또한 그는 일제가 주관하는 재판정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이런 민족의식은 그의 옥중 한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용운의 옥중항쟁 상징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 판사에게 1919년 7월 10일에 제출한 〈조선독립의 서〉이다. 그는 한국이 독립해야 하는 이유, 독립운동의 당위성,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논설로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그는 이 문건을 일본인 판사에 제출하고, 또 1부를 비밀리에 작성해 상좌(춘성)를 통해 유출했다. 한용운의 이 글은 항일운동에 투신한 김상호(범어사)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에 전달되었다. 그래서 선언서의 전문이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25호(1919.11.4)에 〈조선독립 감상의 대요〉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개론

2. 조선 독립선언의 동기

  (1) 조선 민족의 실력
  (2) 세계 대세의 변천
  (3) 민족자결 조건

3. 조선 독립선언의 이유

  (1) 민족 자존성
  (2) 조국 사상
  (3) 자유주의

4. 대세계의 의무

5. 조선독립의 자신

 

이와 같은 그의 선언서는 〈독립신문〉의 서두에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게재되었다.

차서(此書)는 옥중에 계신 아(我) 대표자가 일인(日人) 검사총장의 요구에 응하여 저술한 자(者) 중(中)의 일(一)인데 비밀리에 옥외(屋外)로 송출한 단편(斷片)을 집합(集合)한 자(者)라.

이 선언서는 한용운의 독립사상과 나아가서는 불교의 독립사상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니. 고(故)로 자유가 무(無)한 인(人)은 사해(死骸)와 같고 평화가 무(無)한 자(者)는 최고통(最苦痛)의 자(者)라. 압박을 피(被)하는 자의 주위의 공기는 분묘(墳墓)로 화(化)하고 쟁탈을 사(事)하는 자의 경애(境涯)는 지옥이 되나니, 우주 만유(萬有)의 이상적인 최(最) 행복의 실재는 곧 자유와 평화라. (중략) 고로 위압적 평화는 굴욕이 될 뿐이니 진(眞)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보(保)하고, 진(眞)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반(伴)할지라 자유여 평화여 전 인류의 요구(要求)일지로다.

한용운은 위의 서문에서 자유가 인간과 만물의 생명임을 갈파하고, 자유가 유지되는 것이 평화임을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독립사상의 명분을 구축하였다. 자유,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명과 희생을 버리면서까지 싸우는 것이 인간의 권리이며, 의무라고 갈파하였다. 한용운은 그 글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국가의 흥망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오. 어떠한 나라든지 제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수백 년 동안 부패한 정치와 조선 민중이 현대 문명에 뒤떨어진 것이 합하여 망국의 원인이 된 것이요. 원래 이 세상의 개인과 국가를 막론하고 개인은 개인의 자존심이 있고 국가는 국가로서의 자존심이 있나니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나라의 간섭을 절대로 받지 아니하오. 금번의 독립운동이 총독정치의 압박으로 생긴 것인 줄 알지 말라.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압박만 받지 아니하고자 할 뿐 아니라 행복의 증진도 받지 않고자 하느니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라. 4천 년이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언제까지든지 남의 노예가 될 것은 아니라. 그 말을 다하자면 심히 장황하므로 이곳에서 다 말할 수 없으나 그것을 자세히 알려면 내가 지방법원 검사장의 부탁으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라는 글을 감옥에서 지은 것이 있으니 그것을 갖다가 보면 다 알 듯하오.

이렇게 한용운은 민족의 자존심을 위해서도 한국의 독립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한국의 역사에 비추어 보아서도 한국의 독립은 증명되고도 남는다는 확신에 찬 소신을 재판정에서 개진하였다. 한국 민족의 의지에 의해서 독립이 되는 것이지, 일제의 탄압 여부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음을 강조한 것에서 한용운의 3 · 1운동은 확고한 민족사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 민족이 독립할 수 있는 역사와 전통이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이렇듯 한용운은 옥중의 〈조선독립의 서(조선독립에 대한 감상)〉 집필과 재판정의 소신 발언을 통하여 독립운동 및 독립사상의 논리와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한편 불교 민족대표로 수감된 백용성도 옥중에서 뜻깊은 결단을 하였다. 그는 3 · 1운동 기획 단계에서 한용운의 민족대표 동참에 즉각적인 찬성 의사를 피력한 인물이다. 

먼저 말한 것과 같이 한용운 제의에 찬성하고 같이 일을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 때든지 통지만 하면 어느 곳으로 가기로 약정하고 한용운은 돌아갔다.

백용성의 위의 회고에서 독립선언에 대한 의식이 확고했음을 알 수 있다. 주저 없이 찬성하고,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가겠다는 그의 민족의식은 1919년 8월 27일 고등법원 판사가 독립선언을 한 목적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확인된다.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독립은 필요하다. 일본에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며 또 불교사상으로 보더라도 조선의 독립은 마땅한 것이므로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하여튼 조선의 독립은 용이하게 될 것으로 믿고 있는 터이다.

불교사상의 입장에서도 독립은 마땅하다는 그의 견해는 주목할 만한 논리이다. 백용성의 3 · 1운동 참여가 민족의식과 불교사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특기할 것은 그의 수감생활이 출옥 후 불교의 혁신 및 대중화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대각응세 이천구백삼십육년 삼월일일에 독립선언서 발표의 대표 일인으로 경성 서대문 감옥에서 삼년간 철창생활의 신산한 맛을 체험하게 되였다. 각 종교 신자로써 동일한 국사범으로 들어온 자의 수효는 모를만치 많았다. 각각 자기들의 신앙하는 종교서적을 청구하야 공부하며 기도하더라. 그 때에 내가 열람하야 보니 모두 조선글로 번역된 것이오 한문으로 그저 있는 서적은 별로 없더라. 그것을 보고 즉시 통탄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야 이렇게 크고 큰 원력을 세운 것이다. (중략) “이에 내가 만일 출옥하면 즉시 동지를 모아서 경 번역하는 사업에 전력하여 이것으로 진리 연구의 한 나침반을 지으리라” 이렇게 결심하고 세월을 지내다가 신유년 삼월에 출옥하여 모모인과 협의하였으나 한 사람도 찬동하는 사람은 없고 도리어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 

위의 글에서 보듯 백용성은 수감생활에서 다른 종교의 서적이 한글로 번역된 것에 충격을 받아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1921년 3월경, 출옥 후 한문으로 된 경전을 민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역경을 추진하겠다는 결단으로 단체를 결성하였거니와, 이것이 곧 삼장역회(三藏譯會)였다. 그 후 백용성은 10종의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다수의 불교사상서를 집필하였다. 이는 3 · 1정신의 발로이자 민중에 다가가려는 불교 대중화의 행보였다. 

 

3. 3 · 1운동의 성과

1) 즉각적 성과

불교계 3 · 1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2개월 후까지 전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후에는 국내, 상해, 만주 등에서 추진된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불교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불교계 독립운동의 개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19년 3~4월 인천 만국공원과 서울에서 열린 국민대표자대회에 승려가 참가하였다. 전북 대표로 박한영(구암사), 강원 대표로 이종욱(월정사)이 참가하였는데, 여기에서 한성임시정부의 출범이 결정되었다. 한성 임정은 대한민국 임정(상해) 법통의 연원이었는데, 이런 결정에 승려가 동참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역사적 의의가 크다.

둘째, 1919년 4월, 서울의 중앙학림(동국대)을 거점으로 전국 불교도 독립운동 본부의 역할을 한 민단본부가 출범하였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백초월(영원사)인데 그는 진관사를 근거지로 하여 중앙학림 학인들을 이끌고 독립운동을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민단본부는 임시정부 후원, 전국 사찰에 학인을 파견하여 군자금 모금, 만주 독립군에 청년 승려 파견, 비밀 신문인 〈혁신공보〉 제작 · 배포 활동을 하였다.

셋째, 상해임시정부에 승려들이 망명하여, 임정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신상완, 이종욱, 송세호, 김법린, 백성욱, 박민오 등 임정에서 활동한 승려들은 국내 불교계와 임정의 연결, 사찰에서 모금한 후원금을 임정에 제공, 특파원 활동, 의용승군제 기획, 승려선언서 배포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했다. 

넷째,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에 승려들이 가담하였다. 3 · 1운동 직후 해인사, 범어사, 대흥사, 직지사 출신 학인 10여 명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관학교에 입교 혹은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였다. 이들은 일제와의 전투에 참여하거나 국내 사찰에서 모금한 자금을 전달하였다.

2) 거시적 성과(1920~30년대)

불교계 3 · 1운동은 불교의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3 · 1운동의 참가로 인하여 불교인들은 불교 내부의 제반 문제를 직시할 수 있는 의식이 생겨났다. 즉 불교의 자주화 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현실 인식, 대안 제시 등의 역량을 갖추게 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성과들을 구체적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첫째, 불교 청년운동이 조직화되었다. 3 · 1운동 이전부터 성장한 청년층은 불교 3 · 1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런 기반하에서 그들은 조선불교청년회, 조선불교유신회를 출범시켜, 전국적인 조직을 가동하고, 불교의 제반 문제를 민족의식 차원에서 인식, 해결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둘째, 종단건설 운동을 추진하였다. 일제 사찰령 체제로 인해 자주적, 자생적인 종단이 부재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사찰령철폐 운동, 재단법인 교무원, 조계종 출범 등이다.

셋째, 한국불교의 근원을 선(禪)으로 이해하고, 수좌들의 거점인 선학원이 창건되었다. 선학원에서는 수좌들의 조직체인 선우공제회가 등장하여, 불교의 진로와 정체성을 모색하였다. 한국불교를 일본불교화하려는 식민지 불교 정책에 반발, 민족불교 노선을 지향한 것이다.

넷째, 불교계 3 · 1운동은 불교의 문화적 능력을 고양하였다. 3 · 1운동 참가로 인한 자부심, 자각심은 불교의 포교, 역경 및 출판, 잡지 발간 등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로 인해 외국 유학이 늘어나고, 다양한 불교단체가 창설되었으며, 심층적인 내용을 실은 불서와 잡지가 발간되어 불교문화의 수준을 진작하였다.

3) 이념적 성과

불교 3 · 1운동의 이념적 성과에서는 다음과 같은 한국불교의 이념을 재확인하고, 그 이념을 추구할 당위적 과제를 만났다.

첫째, 호국불교가 한국불교의 역사적 전통에 서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둘째, 불교의 독립운동은 중생, 공동체, 민족 등을 구원하는 대승불교임을 알게 하였다. 셋째, 일제하 한국불교의 지향은 민족불교임을 자각게 하였다. 호국불교, 대승불교의 근대적 변용이 민족불교였다. 국가는 없어졌지만 민족은 생존하고 있었기에, 국권 회복을 꾀하고 민족독립에 기여하는 불교가 되어야 함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4. 결어

맺는말은 앞에서 설명한 내용에 드러난 성격을 집약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이런 점은 추후 보완, 재해석을 해야 하겠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불교계 3 · 1운동의 성격이다.

첫째, 불교계 3 · 1운동의 배경은 승려들의 의병 참여, 국채보상운동, 임제종 운동, 불교 교육기관에서의 수학, 사찰령 체제 비판 등이 이어지며 고양된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이다. 항일과 관련된 여러 사건을 거치며 현실 인식을 높인 불교 성원들은 기회만 오면 어떤 민족운동에도 참가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둘째, 불교 3 · 1운동의 중앙 활동은 민족대표인 한용운, 백용성이 주도하였다. 특히 한용운은 천도교 측에 독립운동을 제안하였고, 선언서의 공약삼장을 추서하는 등 불교계 대표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중앙학림 학인들에게 선언서를 제공하고 시위 참가, 시위의 전국화를 당부하여 불교 3 · 1운동의 전국화에 기여하였다.

셋째, 불교 3 · 1운동의 지방화는 전국 주요 사찰의 만세운동으로 나타났다. 만세시위는 중앙학림 학인들의 영향으로 지방 학인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지역주민의 참여를 이끌어냈으며, 독립선언서, 태극기, 격문 등이 배포되어 활용되었다.

넷째, 불교의 3 · 1운동에서 특기할 측면은 민족대표의 옥중 저항활동이다. 한용운은 재판정과 옥중에서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지속하였고,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의기를 북돋웠다. 백용성은 수감 중 역경 및 불교 대중화 추진에 대한 원력을 세웠다.

다섯째, 불교 3 · 1운동의 성과는 미시적으로는 1920년대 불교 독립운동(불교 독립운동본부, 상해임정 · 만주독립군 참가)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거시적으로는 1920 · 1930년대 청년운동 등장, 불교 자주화, 종단건설, 문화적 능력 고양 등의 성과를 이룩했다. 이와 함께 호국불교, 대승불교, 민족불교의 이념 형성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개괄적으로나마 불교계 3 · 1운동의 전개와 성과, 성격 등에 대하여 정리해 보았다. 앞으로도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자료수집, 연구로 보완해 가고자 한다. ■

 

김광식
동국대학교 특임교수. 건국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만해사상실천선양회 학술부장, 부천대 초빙교수 등 역임. 주요 저서로 《한국 근대불교사연구》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불교 근대화의 이상과 현실》 등 40여 권. 유심작품상(학술부문), 불교평론학술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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