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회복지학 기초 다진 학승

1. 인연을 돌아보며

송산 스님
송산 스님

아시다시피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불교와 사회복지의 상관성을 주목한 연구물이 그리 많이 발표되지 않았다. 당시 필자도 그런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참고할 만한 선행연구물을 찾느라 고군분투하던 중에, 송산 스님이 번역한 책과 글들을 접하게 되었다. 목마른 사람이 감로수를 발견한 심정으로, 너무나 반갑고 감사해서 서울의 세곡동 법수선원으로 직접 스님을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햇수를 까마득히 잊었는데 이번에 글을 쓰기 위하여 법수선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스님이 주지로 재임하던 1983년 전후였을 것 같다. 필자는 계속해서 불교와 사회복지를 연구주제로 삼아왔으나, 애석하게도 그 후로 송산 스님을 다시 만나는 기회를 만들지 못하였다.

오늘날 한국에 불교사회복지학이라는 분야가 있다면, 당연히 송산 스님에 의해서 그 첫걸음이 시작되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또 스님은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1984년부터 중앙승가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재직하였는데 전공 분야 후학(後學)들의 관계가 잘 알려지지는 않은 것 같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송산 스님을 기리는 이번의 평전을 써줄 필자를 수소문하였지만, 선뜻 나서는 인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송산 스님의 열반 10주기 즈음에 추모를 위하여 법문들과 행장의 자료를 모으고 있다던 상좌, 인천 보각선원의 주지 보광 스님이 2017년 2월에 입적한 뒤, 후속 작업이 어찌 되었을까 궁금하여 보각선원의 현 주지 스님에게 우회하여 문의했으나 답을 듣지 못하였다.

송산 스님과의 인연이 각별한 후학을 이번에 발견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불교평론》의 편집위원들이 송산 스님의 학문적 관계망을 크게 벗어난 인연(因緣)들이었던 탓일 수도 있다. 하여간에 송산 스님은 ‘불교사회복지학’이라는 분야의 선구적인 학자이면서 동시에 행정가로서 중앙승가대학장 역할을 했고, 또 한편으로 조계종단의 제도개혁을 위한 실행위원직은 물론,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와 같은 시민사회단체에서 공동대표직을 맡기도 했다. 불교학이든 사회복지학이든, 그것은 실천수행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이론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현장 경험을 필수로 한다는 판단에서 볼 때, 송산 스님의 생애는 지식과 행동 사이에서 상당한 균형감이 느껴진다고, 필자로서 감히 평하고 싶다.

스님의 생애와 이력은 여러 가지 문헌에서 얻은 정보를 종합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서 혹시 어느 부분에 착오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헌자료라도 좀 더 많이 남았으면 이참에 빠짐없이 살펴보았을 텐데, 필자로서는 아쉬움이 크다. 2004년 7월 12일 너무나 아쉬운 62세로 세연(世緣)을 다한 송산당 무근 스님은 문도와 대중들의 추모로 2005년 3월 부산 범어사 부도탑전에 안치되었다. 모쪼록 송산 스님의 행장에 누가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스럽게 이 글을 쓰고자 한다.

 

2. 송산 스님의 생애

송산 스님은 1942년에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고, 1955년 범어사에서 동산(東山)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1969년에 범어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하였다. 1972년에 동국대학교 승가학과에 입학해서 1976년에 졸업을 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1980년에 교토(京都)불교대학 불교학과에서 수사(修士,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92년에 동 대학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소위 동진(童眞)출가를 하였을 스님의 청소년기 생활도 궁금하지만, 얕은 인연의 필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동국대학교 재학 시절은 다소 늦은 나이에 입학했기 때문인지 크게 드러나지 않도록 학업에만 전념하면서 장래 학문의 길을 탐색했던 것 같다.

필자가 송산 스님을 가까이 접하면서 얻은 소회가 아니기는 하지만, 송산 스님은 어른 스님을 잘 모시면서도 후배들에게는 소탈하고 자상한 성품이었던 것 같다. 스님의 저술 중에서도 역작이라고 해야 할 《재난구제사(災難救濟史)》의 서문을 보면, “법사이신 이성수(李性壽) 스님의 따뜻한 배려로 아늑한 방에서 원고를 쓸 수 있었으며…… 물심양면으로 보살펴주신 노법사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는 헌사를 잊지 않았다. 일본 유학을 다녀와 불교사회복지 관련의 번역서를 출판할 때도 스님은 책의 역자 후기와 같은 지면에서 해당 출판을 후원해준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말을 상세히 적고 있다. 예를 들자면, “서울에 계신 김무상화 보살님은 6 · 25 동란 때 불교에 귀의하여 피난민 구제에 헌신하였으며, 콩나물을 팔면서까지 고학생을 길러 지금은 훌륭한 사회의 중진 인물로 길러낸 분으로 불교도의 표본이며…… 이 책을 내는 동기도 동참자를 얻기 위함”이라고 명기한 것이다.

송산 스님의 상좌로서 서울 법수선원과 인천 보각선원에서 스님을 직접 보필했던 보광 스님의 회고담을 통해서 우리도 송산 스님의 성품을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래에 간략히 인용한다.

송산 스님은 恩師이신 東山 스님의 교훈을 받들어 평소 소탈하셨고 정이 많았고 믿음을 주는 인자한 분이셨다. 病苦 끝에 入寂을 앞두고 계시던 무렵에도 다비장이 여러 대중에게 수고로움이 될 것을 염려하셔서 장의는 일반적인 火葬으로 충분하다는 말씀을 강조하셨다. 그래도 스님이 선학원 이사로 계셨기 때문에 선학원장을 치른 것이 오히려 스님께 누가 되었을까, 상좌로서는 염려가 된다. 송산 스님이 1986~87년경에 보각선원으로 거주처를 옮긴 뒤, 이웃에 새로 생긴 교회의 형편이 어렵다는 소문에 스님이 나서서 도움을 주었으며, 동지에는 팥죽을 보내고 부활절에는 달걀이 오는 사이로 지냈다. 송산 스님이 장차 노인복지사업을 하고자 부지도 마련했으나 결실은 맺지 못하였다. “어려운 때일수록 검소하고 소탈하게 배려하며 살아라. 정은 배려심에서 나온다. 그렇게 기본적인 마음을 갖고 있으면 하심이 생기고 존경심도 생길 것이다. 너와 내가 하나고, 우리 사는 사바세계가 곧 정토가 된다는 마음으로 살라.”고 스님은 말씀하셨다.

이 같은 송산 스님의 인간적이고 따뜻한 성품과 함께, 사회적 · 조직적 행동가로서 면모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잘 알다시피, 1980년대는 우리나라가 정치적 · 사회적으로 격변기였고 조계종을 포함한 불교계에도 역사적인 사건 사고들이 자주 발생하여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다. 크고 작은 승려대회들을 거치고, 대립하는 주장들이 나타나면서 조계종단 자체가 진통을 겪는 시기에 송산 스님은 총무원의 사회부장, 교무부장, 제도개혁 실행위원이라는 중책들을 맡기도 하였다. 당시 스님의 고학력이 종단조직 내의 입지를 좀 더 높여주었을 것도 같지만, 그보다는 실질적으로 송산 스님에게 갖춰진 조직 차원의 활동역량에 의해서 맡게 된 책무였을 것이다.

한편, 조계종 중앙승가대학이 학력 인정 학교가 된 후, 1994년에 제4대 학장으로 취임한 송산 스님은 협소한 개운사 캠퍼스를 벗어나 김포에 새 부지를 마련하고, 1995년 9월에 김포학사 기공식을 갖는 등 정규대학 승격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다. 바로 그렇게 동분서주 학장직을 수행하느라 송산 스님이 건강을 잃게 되었다고, 상좌 보광 스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추정하였던 것 같다. 1996년 12월에 정규대학으로 승격되고 비록 학장직은 다른 스님에게 넘겨지고 김포학사는 2000년에 가서야 완공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학인 스님들의 면학 환경을 개선하고 교원들에게 연구공간을 확충하여 정규대학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단연 송산 스님의 공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특히, 스님은 당시 출가자 교수에게만 한정되던 중앙승가대학의 보직을 재가자도 맡을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개정하였는가 하면, 학인 스님들이 종단 문제에 대한 견해를 세우고 어떤 식으로 관여하는 경우가 생길 때 종단이 부정적으로 여기지 말고 이해해주기 바라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열망이 나름의 결실을 맺어가려는 시대에 학인이거나 재가자이거나, 조계종단 산하조직의 구성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평등하게 나눠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데 송산 스님이 솔선하여 모범을 보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른바 행동하는 지식인의 면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에 ‘통일’ ‘실업 극복’ 등 여러 가지 민간단체 활동에 동참하신 일도 사회적 체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평소 스님의 실천불교 정신과 민주사회 가치를 구현하려는 의지의 산물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대한민국과 조계종단의 격동하던 1980년대와 90년대를 어느 면에서 책임지고 최선을 다했던 송산 스님의 생애를 학술 부분과 사회활동 부분으로 나누어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3. 학술분야에서의 업적

2) 학술적 기여

1980년도 일본 교토불교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침과 동시에, 스님이 수강했던 모리야 시게루(守屋 茂) 교수의 저서 《불교사회사업의 연구》를 번역 출판하면서 한국불교사회복지 진흥에 조촐한 초석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그 책에는 동국대 승가학과 은사였던 운학 스님의 서문이 실려 있는데, “불교의 주인공인 승려들 자신이 주기보다는 받는 위치에서 안일하게 지내온 타성 때문에 사회에 대한 적극성과 책임이 없는 경향에서, 불교사회사업의 이론과 인식이 아직 황무지적인 경향이 있어서…… 한국불교에서 절실한 사회사업운동에 대한 뒷받침이 약한 때문”이라고 개탄하면서, 송산 스님의 이 분야 전공에 대한 간곡한 격려를 보냈다.

이어서 1981년 미치바타 료슈(道端良秀)의 저서를 《중국불교와 사회사업》으로 번역 출판할 때, 스님은 역자의 입장으로 “불교가 해탈의 종교, 자비의 종교라 하는데 궁극에 가서는 중생구제의 종교이다. 불교가 인간구제의 종교일진대 한국불교는 현시점에서 과연 종교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가를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오로지 자기만의 이익추구를 위한 기복만을 일삼는 자리적(自利的)인 불교에서 동계동업(同界同業) 중생이며 무시이래의 부모 · 형제자매인 이웃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라는 이타적(利他的) 자선으로 안목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본서의 출판 동기이자 한국불교의 지표이기도 하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1983년에 출판한 단행본 《불교복지 Ⅰ-사상과 사례》의 서문에서 스님은 “1,300만 불교신자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자비를 여래와 보살에 일치시키고 그 실천 면인 복전사상이 기저가 되어 당연히 철저하게 실행되었어야 할 사회복지사업에 종사하는 승니(僧尼)와 신도가 매우 희소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승니와 신도가 거의 없으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라고 강하게 반문한다. 그래서 “불교계와 사회복지계에 일부러 하나의 충격을 주고, 한국불교 사회복지사업 진흥의 실마리를 만드는 계기로 삼고, 올바른 사회복지사업의 건전한 발전에 파급효과를 주고자 하는 염원에서” 출판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한다.

스님의 첫 저술인 그 책의 내용 구성을 보자면, 1장은 현대사회복지의 개요 및 발달과정을 소개하면서 불교사회복지의 사상적 측면을 대조적으로 규명하고, 2장은 우리나라 불교사회복지의 사례들을 개괄적으로 설명하고 특히 고승들의 사회복지 관련 행적을 시대별로 일일이 소개한다. 3장은 한국 불교복지 역사에서 독특하고도 의미가 큰 보(寶)에 대해서 분석적 연구를 보여준다. 즉, ‘보’의 개념과 그 기원 및 변천, 보의 종류, 해외의 유사한 사례, 보가 생겨난 사회경제적 배경과 그 의미에 대한 분석 등이 그것이다. 일종의 금융장치라고 볼 수 있는 ‘보’ 연구는 송산 스님이 일본에서 석사학위를 받게 한 주제였다.

그 무렵에도 한국사회복지의 역사를 가르치고 전공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겠지만, 사찰에서 흔히 제공되어 오던, 지역민에 대한 구호활동들을 주의 깊게 혹은 의미 있게 포착한 연구자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초 역시 불교학과 대학원생이던 필자의 수준에서 생각했을 때도, 한국의 사회복지학이 지나치게 서구사회를 지향하고 기독교의 활동에만 주목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느껴졌고 불만스러웠었다. 그런 면에서도 선구적인 송산 스님의 문제의식은 계속해서 불교계가 한국 역사상 얼마나 다양하게 재난구제 활동을 해왔는지 탐구하도록 이끌었고, 그 결과 1984년에 《불교복지 Ⅱ-재난구제사(災難救濟史)》를 출판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역작이라고 평가해야 할 《재난구제사》는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방대한 사료(史料)를 통틀어서 각종 재난이 발생한 사례를 찾아내고, 재난의 내용에 따라 75개로 분류 · 범주화하였다. 그리고 유사한 재난이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서 100년을 주기로 얼마나 자주 발생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비교해 보여주는 통계처리 방법을 쓰고 있다. 더불어, 그러한 전국적 지역적 재난들에 대응한 구제활동의 내용을 116개 항목으로 분류하여 같은 방법으로 비교 분석한 통계치를 제시하고 있다. 책 한 권의 분량만 보더라도 1,770쪽에 달하여 방대하고, 서기전 57년을 시작으로 100년마다 재난 및 구제의 각 회수를 통계로 보여주는 접근방법이 매우 돋보이는 저술이다. 필자의 과문 탓인지 몰라도, 1천 년이 넘는 역사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범주화하고 시대별로 비교 · 분석하는 저작이라면, 우리나라 사회복지학에서는 송산 스님의 연구가 전무후무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저서는 자료의 방대함이나 창의적인 연구방법 외에도 주목할 만한 논지를 담고 있다. 물론, 중국의 역사를 분석한 선행연구들을 인용하는 점에서 제한적인 것이 되겠지만, 유교와 불교의 전통적인 구제사업이 서로 차이점을 갖고 있는데, 시대를 흘러 공통점이 있다면, 구제의 근본정신이 ‘정략 · 공리· 이기사상’에 의해서 타락한 모습을 보여 왔다는 것이다. 빈민구제가 타산적(打算的)이고 구보주의(求報主義)로 타락한 경향이 있었다고 연구자로서 송산 스님은 지적하였다. 요컨대, 내세의 복을 받기 위하여 보시를 한다거나, 자손대대 가문번창을 기대하면서 불우이웃돕기를 한다면, 그런 봉사는 오히려 이기적인 것이고 구제의 근본정신에 어긋난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동안 필자가 종교인의 사회복지활동에 관하여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부분과 통하는 맥락이라서 깊이 공감이 된다. 심지어 오늘날 종교계는 정부의 지원금 없는 사회복지사업은 아예 상상도 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종교기관의 순수한 자기자본이 아니라 국민의 세금을 지원받아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면서도, 그 외형을 가지고 종교 간에 은근히 세(勢) 싸움을 하는 경향도 있다.

위 두 저서는 스님이 중앙승가대학 사회복지학과에서 교재로 쓰려고 출판한 것이었는데, 10년쯤 뒤에 그대로 사회복지 전문 출판사에서 재발행되었다. 한편, “불교를 새롭게, 중생을 새롭게, 세계를 새롭게, 역사를 새롭게”라는 표어로 1984년에 발행된 저널 《실천불교》의 〈불교와 사회복지〉라는 글에서 송산 스님은 한국불교가 사회복지를 추진하는 방안으로서 아래와 같이 일곱 가지를 제안하였다. 그때로부터 30여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제안이 아직까지 유효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있으므로 여기에 소개한다.

첫째, 불교계 각 종단에 불교사회복지를 연구하고, 기획하고, 실천하는 부서를 두어야 한다. 둘째, 종단의 자문기관으로서 사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불교사회복지연구소를 설치해야 한다. 셋째, 전국의 대 · 중 · 소 도시와 읍 ·면 ·부 등 지역적인 조건에 맞추어서 적어도 1개소의 사회복지시설을 설치하고 운영토록 해야 한다. 넷째, 종단들은 불교인으로 하여금 현대사회에 적합한 불교복지의 실천역량을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승려와 신자들에게 현대적인 사회복지사업의 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재교육 제도와 그 계획의 수립이 시급하다. 다섯째, 대학 수준의 불교교육기관에 사회복지학과 혹은 사회사업학과를 개설하고, 학생이 실습할 시설들의 설치가 시급하다. 여섯째, 동국대학교에 의과대학을 신설하고 병원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 일곱째, 불교인은 모두 자비를 실천하는 사회복지사업에 일익을 담당해야 하며, 사회복지 전문기관의 조직력과 협조하여 자원봉사라도 열심히 실천해야 한다.

30여 년 전에 제시된 불교계 사회복지사업의 방안 가운데서 오늘날 확실히 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정도, 불교종립대학에 사회복지학과가 개설된 것과 동국대 병원과 의과대학이 개설된 것인 듯하다. 또, 1980년대에 비해서 불교계의 사회복지 시설이 현저하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지역마다 최소한 1개소의 불교계 사회복지시설’이 있는지 없는지 그 판단을 하려면 전국의 불교사회복지 시설에 대한 조사를 하고 그에 기초해서 불교복지 지도(map)라도 만들어봐야 할 것이므로, 이번에는 필자의 판단을 유보한다.

앞서 송산 스님이 제안한 여러 방안은 대개 종단 차원의 결단과 자원 마련이 필요한 사업들이었지만, 마지막 제안은 불자 개개인의 결정만으로도 실행이 즉시 가능한 자원봉사에 관한 것이다. 불자들의 자원봉사 참여율은, 다른 종교인이나 일반 국민과 비교해 볼 때, 더 높은가, 낮은가? 참고로,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답한 불자가 54.5%로 나타났고, 가톨릭 신자의 경우는 37.2%, 개신교 신자의 경우는 34.2%라고 하였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서 ‘봉사활동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경우가 44.0%로 나타난 것과 비교하면, 불자들은 전체 국민의 봉사활동 불참자 비율보다 훨씬 더 높은 불참자 비율을 보인다. 왜 그럴까?

굳이 그 답을 구할 필요도 없다. 앞에서 소개했던 송산 스님의 생생한 주장을 여기에 다시 옮겨서, 불자라면 언제든지 누구라도 반성해볼 만한 일이다. “불교가 해탈의 종교, 자비의 종교라 하는데…… 불교가 인간구제의 종교일진대…… 오로지 자기만의 이익추구를 위한 기복을 일삼는 자리적인 불교에서 동계 동업 중생이며 무시이래의 부모 · 형제자매인 이웃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라는 이타적 자선으로 안목을 돌려야 할 것이다.”

송산 스님은 1980년에 전문서적을 출판하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교수와 학문의 길에 들어섰지만, 사실상 학술논문의 발표가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히 한국불교학회나 사회복지학회와 같은 정규학회에서 활동한 자취를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왜 그럴까? 아마도 짐작건대, 1980년대에는 조계종단과 불교계의 변화를 위해서 스님에게 맡겨진 역할이 많았던 탓일 것 같다. 또 1990년대에는 중앙승가대학의 격상(格上)을 위한 행정업무에 전념했던 데다가 외부 사회가 요청하는 시대적 행동에 동참하는 일이 많았던 탓일 것 같다. 그리고는 너무 일찍 열반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4. 사회활동에서의 지향점

송산 스님이 대학생 청년이던 시기인 1970년대 이후 불교계는 어디서부터인가 변화의 바람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적 흐름에 맞물려서 ‘민중 운운’ 하는 집단행동들이 나타났는가 하면, 조계종 내부에서도 반성과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스님이 유학차 일본에 머무르다 돌아온 뒤 1980년대 초반부터 불교계가 훨씬 복잡한 사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러 차례의 승려대회가 조계종이라는 조직의 복잡성을 단적으로 입증한 셈이었고, 분규로 인한 폭력 사태들이 잇따랐다. 아마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 조계종은 1983년 9월에 송산 스님을 포함한 8인의 ‘비상종단 제도개혁 실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비상종단’이라는 표현과도 같이, 비상한 종단사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의 일부가 송산 스님에게 주어진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종단 내에서 스님의 입지를 보여주는 역할이었다고 생각된다.

1990년 6월에는 ‘범불교도시국회의’가 열렸고, 1993년 4월에는 실천불교 전국승가회 · 대한불교청년회 · 불교인권위원회 등 불교단체 관계자들이 ‘범불교도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송산 스님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대책위는 당시 ‘육군 제17사단 군법당 폐쇄 및 훼불’ 사건에 대하여, 진상공개 및 당사자 구속, 사단장 파면, 국방부장관의 대국민 사과, 공평한 군종 정책 수립 등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채택했다. 1980년대에 종단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스님이 중책을 맡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 위의 역할들도 불교를 수호하는 불사(佛事) 차원으로 기꺼이 사회적 관계의 선봉에 선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선학원의 이사가 된 송산 스님은 1985년에 인천 보각선원에 분원장으로 임명이 되었고,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하면서 선원의 사격을 높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보각선원이 어떻게 해서 송산 스님에게 맡겨졌는지 그 배경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스님과 보각선원 사이에 묘한 인연이 있었지 않나 짐작된다. 보각선원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 4월 8일에 창건되었고, 1929년에는 선원 한쪽에 《관서학원》이라는 간판까지 달고 민족교육을 실시하도록 공간을 허락해 주었고, 그것은 인천지역 최초의 야학이었다고 한다.

일제의 감찰이 있었음에도 민족교육의 장(場)을 제공했던 보각선원의 격을 더욱 높여주는 중창불사를 스님이 대대적으로 단행했다는 점에 우선 주목하고 싶다. 뿐만 아니라, 보각선원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려고 할 때, 많은 불자가 강하게 반대하는 분위기였음에도 송산 스님은 오히려 불자들을 설득하여 교회를 후원하기도 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스님의 국가와 여러 사회적 관계에서의 지향점을 짐작게 한다. 스님을 ‘민족주의자’라고까지 평할 수는 없겠으나, 한국적 사회복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려 했던 연구 성향과 주체적 민족의식을 무관하게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1992년에 인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공동대표를 맡은 송산 스님은 경실련 총서를 만들 때 기고한 글에서 ‘통일과 민족’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밝히고 있다. 즉, “국토의 통일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생각, 우리의 자주정신이 필요하다. 앞으로는 강대국에 의해 지배받는 생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우리 민족도 반성해볼 점이 많다. 우리가 강대국에 의해서 분단되고 지배를 받는 원인제공을 하지는 않았는지, 우리 민족사상으로 자주독립을 해야 하고 더 나아가 세계를 우리가 계도하고 계몽하는 때가 와야 하지 않는가(p.347). 북미협상이 타결되었다는데 우리가 주도하지 못하고 엉뚱한 미국 사람하고 협상하는 걸 보면서…… 아쉬움과 굴욕감을 느꼈다. 핵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협상 자체를 미국과 하고 우리는 우산 밑에서 비만 피하고 있는 꼴을 보고 몹시 굴욕감을 느꼈다. 우리가 독립국가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다(p.349) …… 시민단체가 커나가지 못하는 것은 정부의 제약도 있지만, 거기에 관심을 가지는 국민의 숫자가 적은 탓도 있다. 시민단체가 국민과 정부의 가교역할을 해야 한다(p.348).” 스님이 평소에 품고 있던 자주독립 국가와 민족의 주체성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글인 것 같다.

민족과 우리 고유문화에 대한 스님의 염려는, 인천 지역 계간지 《황해문화》의 창간을 축하하며 기고한 글에도 나타난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외래문화가 여과의 과정도 없이 무질서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우리의 고유문화가 오염되고 파괴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우리들의 의식은 물질만 추구하고 내면의 세계는 자기상실이라는 엄청난 현대병을 앓고 있는 현실…… 선조들이 남긴 정신문화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스님의 생각이 실리는 지면이 다르거나 발표하는 시기를 달리하더라도, 그 내용에서 어느 정도 일관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우리 문화와 민족에 대한 송산 스님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아닌가 싶다.

1998년 11월 IMF의 한파가 심각할 때, 인천에서는 여러 종교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1만 세대 실직가정 겨울나기 사랑의 쌀 모으기 추진본부’를 결성하였다. 송산 스님은 역시 상임대표단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였고 나중에는 ‘실업극복 국민운동’ 인천본부의 상임대표직을 맡게 되었다. 종교계 대표자이기도 하고 사회복지 전공자이기도 한 스님은, 학교에서 이론으로 불교와 사회복지를 가르치는 일 외에도 이처럼 다양하게 종교 간 협력 관계, 민관의 협력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5. 글을 마무리하며

그리 많지 않은 자료를 통해서나마 송산 스님의 자취를 아주 오랜만에 그려볼 수 있어서 반가움이 컸다. 1980년대 초 필자의 얄팍한 공부 수준에서 보더라도, 불교는 사회복지와 함께 갈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불교계 현실이 전혀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겨우 발견한 일본 서적들을 제외하면, 송산 스님의 책과 글이 내게는 거의 유일한 길잡이가 된 셈이었다. 스님이 우리 곁에 있을 그때, 부지런히 찾아가서 좀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인연을 맺지 못한 것은 나의 박복함 탓이었던 것 같다.

학위논문을 제외하고 나면 사실상 스님이 발표한 논문들은 대개 불교사회복지의 필요성을 계몽하고 강조하는 수준에 머물렀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 불교사회복지의 이론적 개념화를 시도하는 초창기라서, 여기저기에서 요청을 받고 집필한 글들이 비슷하게 반복되는 경향이 있음을 필자도 잘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스님이 더 오래 건강을 유지하여 정규의 학회 활동을 활발히 하고, 바라던 대로 사회복지시설도 직접 운영하였다면, 현장의 경험을 풍부하게 담은 한국적 사회복지 이론이 되고, 실질적인 불교사회복지학의 토대가 두텁게 되었을 텐데, 오직 아쉽고 또 아쉬울 뿐이다.

학술적인 영역에서는 그나마 남겨진 글들로 설명을 하겠지만, 스님이 절반 이상의 생애를 바친 사회활동 부분에서는 그 자취를 찾는 일이 훨씬 더 어려웠다.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찰에서 수많은 법문을 하였을 것이고, 총무원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에도 여러 가지 언행이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10년 넘게 재직했던 중앙승가대학교의 수업에서는 스님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났을 것이다.

이제 그런 흔적을 누가 어디서부터 추적해야 할까. 비록 입적한 지 14년이 지났지만,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사회관계 활동을 한 스님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마다 함께하였던 사람들을 추적해서, 더 많이 잊히기 전에, 스님에 대한 회고담이라도 모아서 책을 꾸미면 좋지 않을까. 아쉬운 마음에 제안해 본다. ■

 

이혜숙
금강대 응용불교학과 객원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철학박사.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사회복지사협회 국제교류위원 등 역임. 저서로 《종교사회복지(편저)》 《아시아의 종교분쟁과 평화운동(공저)》 역서로 《불교사회복지학》 등 다수. 본지 편집위원.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