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사상가적 독창성 고찰한 고전

붓다의 사유(思惟)를 좇다

깨달음을 얻은 각자(覺者)이자 불교의 개조(開祖)인 붓다는 2,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그 위대함이 주는 종교적 상징성 때문에 많은 사람은 붓다를 신비주의의 시선으로 바라보곤 한다.

초기불교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자 《곰브리치의 불교 강의》의 저자 리처드 곰브리치 박사는 먼저 독자들에게 이러한 태도에 주의를 환기한다. 붓다를 오로지 종교 지도자로만 보고 신비하게 여기는 것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큰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곰브리치 박사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붓다의 사상을 고찰해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종교라는 베일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았던 붓다의 위대한 사상가적 면모를 발견했다. 이 책은 그러한 과정의 결과물 중 하나로서 독자들에게 붓다를 종교가가 아닌 사상가로 보는 안목을 제시한다.

곰브리치 박사는 붓다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상의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논증하면서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붓다는 모든 시대를 망라해 가장 뛰어나고 독창적인 사상가이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붓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수 있었고, 그 해답을 찾아가면서 붓다의 위대한 철학에 주목할 수 있었다. 빨리어 경전을 바탕으로 오직 붓다의 사유만을 좇는 그의 학자적 시선은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사상가 붓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의 원제가 왜 What the Buddha Thought 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책은 런던대학교 동양 · 아프리카연구원(SOAS,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서 ‘붓다 사유의 기원과 위대함(The Origin and greatness of the Buddha’s ideas)’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던 열 번의 강의를 토대로 저술되었다. 그만큼 불교라는 종교가 아닌 붓다의 사유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의 중심 사상, 업(業)

그렇다면 저자가 붓다를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독창적인 사상가라고 결론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자신이 비록 불교도는 아니지만 붓다를 향한 존경심은 불교도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붓다가 ‘혁명’이라고 할 만한 사상적인 도약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과 특징을 몇 가지로 분류해 보면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업설(業說)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업설이야말로 붓다의 세계관에 입문하기 위한 가장 좋은 시작점이라고 말한다. 업은 붓다가 삶을 조망하는 근본 사상일 뿐만 아니라 기본 교리들을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인도에 국한해서 본다면 붓다는 기존 인도 브라만교의 업(業, karma)과 제의(祭儀)라는 뿌리 깊은 사유를 윤리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업과 윤회사상에 기반해서 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극도로 발달했는데, 이는 인도 내 계급사회를 공고히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간단히 말해 전생에 지은 행위의 결과로 현재의 계급이 정해졌기 때문에, 이 생에서는 그에 순응하여 브라만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맹목적인 믿음 속에서 철저한 계급사회인 인도가 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수천 년간 공고하게 유지되어 온 인도 정통 브라만 사상에 대항할 만한 새로운 근거를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해낸 인물이 붓다였다.

붓다는 브라만교에서 ‘제의를 거행하는 성스러운 작업’을 뜻하던 업(karma)의 의미를 일반인의 행동 범주 안에 포함시켰다. 다시 말해 브라만교만의 종교적 의미였던 ‘업’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 가능한 ‘행위’라는 보편적 의미로 재해석한 것이다. 붓다는 이와 같이 기존의 업과 윤회사상을 파기하기보다는 여기에 윤리성을 더함으로써 신에게 의지하는 대신 자신이 책임의 주체가 될 것을 강조했다. 행위에 대한 판단은 신이나 브라만들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해야 하고, 그 행위에 대한 결과로서의 과보는 개인의 몫이 된다는 뜻이다. 2,600여 년 전 계급사회였던 인도에서 이러한 사상이 태동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고, 이는 놀랍게도 19세기 유럽의 후기 계몽주의 사상과 유사할 만큼 혁신적이었다.

붓다는 이러한 생각을 자신에게도 엄격하게 적용했는데, 설령 스승이라도 부적절하거나 잘못된 발언을 했다면 제자들은 그것을 바로잡을 의무가 있다는 규칙을 세웠을 정도였다. 이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다. 이러한 붓다 사유의 근간에는 모든 개인이 각자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붓다의 윤리적인 업 사상은 이와 같이 개인의 판단과 책임을 강조한다. 윤리적인 행동과 책임은 각자에게 있고, 맹목적인 믿음이나 외부의 강요가 아닌 올바른 가르침에 기반해서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는 붓다의 업 사상은 인도뿐만 아니라 인류문명의 지적인 도약을 이루어냈다. 붓다의 위대한 개혁은 윤리적 가치가 외적 요소가 아닌 의지에 따라 판단되도록 만든 것이다.

 

브라만교 사상과의 유사성, 제자들조차 오해한 붓다의 생각

그런데 붓다의 새로운 업 사상과 가르침들은 종종 붓다의 제자들조차 오해하곤 했다. 붓다가 풍자와 비유를 통해 사람들을 가르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브라만교의 교리를 차용한 것이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붓다는 그의 사상을 이해시키기 위해 상대방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기존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곰브리치에 의하면 이로 인해 생기는 정통 브라만교와의 혼선은 현대 인도의 대학교육과 출판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붓다가 브라만교의 성전(聖典)인 우빠니샤드와 사실상 동일한 가르침을 전했을 뿐이며, 다른 점은 카스트 제도를 부정했다는 것뿐이라는 관점을 지속해서 선전하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붓다의 논쟁 상대가 우빠니샤드적인 관점을 지닌 브라만들이어서 그들을 비판하는 데 그들의 용어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붓다는 ‘제의’를 뜻하던 브라만교의 단어를 ‘윤리적인 의지’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의미의 변환은 인도 카스트에 기반한 브라만적 윤리를 전복시킨 사건이었다.

 

붓다가 말하는 무아의 의미

불교의 대표적인 용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불교도는 ‘무아’를 떠올릴 것이다. 무아는 인도 브라만교의 윤회사상에서 윤회의 주체인 ‘자기(아뜨만)’와 같은 영원불변의 존재, 서구적 표현으로 ‘영혼’과 같은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브라만교도들은 이러한 붓다의 주장에, ‘그렇다면 어떻게 한 존재의 연속성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며 반박했다. 그러나 붓다는 업 사상으로 무아를 말하면서도 존재의 연속적인 측면을 설명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자이나교에서는 ‘지바(jīva)’가 윤회의 주체이자 생명체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라고 말한다. 하지만 생명체를 의미하는 지바에는 먼지와 같은 업이 무겁게 달라붙어 있다. 수많은 죽음과 환생을 반복하면서 계속 달라붙는 업이 해탈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나 브라만교의 아뜨만은 경험적 자아와 철저히 구분되는 것이어서 업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는다. 업과 관련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자이나교도 브라만교도 윤회의 주체로서 ‘존재’를 설정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특히 브라만교의 전통에서 아뜨만은 브라만이고 브라만은 진리이며 진리는 동시에 존재이다. 이와 달리 붓다는 ‘존재’를 ‘변화’ 혹은 ‘생성’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붓다는 우리의 경험을 항상 변화하는 과정이나 의식의 흐름으로 보았던 것이다.

여기서 곰브리치는 붓다가 말한 무아의 의미를 ‘자아, 혹은 본질을 갖지 않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후대의 불교도들이 그렇게 이해하기도 하였으나 본래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빨리어 문법에 비추어 봐도 무아는 ‘아뜨만을 가지지 않는다’가 아닌 ‘아뜨만이 아니다’를 의미한다. 즉, 영원불변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지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붓다가 생각한 인식 · 언어 · 열반

문제는 불교와 달리 브라만교의 전통에서는 이 자아를 존재의 영역에서 해석하고 언어 또한 실재론과 연결 지어 해석한다는 데 있었다. 예를 들면 ‘소’를 의미하는 산스끄리뜨어는 실제로 소의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존재와 단어들은 함께 창조된 것이고 신들이 존재들의 명칭을 부르자 그들은 존재하게 되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한 비판은 붓다의 핵심적인 사상 중 하나였다. 곰브리치에 의하면 붓다는 실용적인 입장에서만 언어를 인정했다. 붓다는 언어는 관습일 뿐, 언어로 실재를 완전히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지시적인 언어로 파악되거나 인식되지 않은 경험을 전달하고자 할 때 은유를 활용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열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경지는 언어를 초월한 경험이고 언어가 열반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붓다는 은유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다. 예를 들면 우리를 괴롭게 하는 모든 욕망, 증오, 어리석음은 불에 비유되고, 열반은 그 뜨겁고 괴로운 불의 열기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열반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는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곰브리치가 말하는 위대한 사상가 붓다

곰브리치는 이와 같이 신앙인이 아닌 학자의 입장에서 기존 브라만교 사상과 붓다의 사유를 연결 지어 책의 내용을 이끌어 간다. 분명 붓다는 브라만교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자이나교에서 받은 영향도 적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붓다는 너무나 확고히 이 모든 영향으로부터 새로운 사상을 도출해냈다. 이 책을 통해 곰브리치가 그토록 붓다를 위대한 사상가라고 칭송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곰브리치의 불교 강의》에는 ‘업(業)은 작용이지 존재가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와 붓다가 브라만교와 자이나교의 교리를 훔쳤다는 오해, ‘무아(無我, No Soul)’의 정확한 의미, 언어의 세계를 초월한 ‘열반(涅槃)’의 정의 등을 설명하고 있다.

빨리어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철저한 문헌학적 연구를 병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브라만 사상과 붓다의 사상을 고찰함으로써 비불교도에게도 설득력 있는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책을 정독하면 업, 무아, 열반과 같은 불교의 핵심적인 용어 속에 담긴 붓다의 독창성이 더 분명하게 이해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붓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이 읽기에도 무리가 없지만, 불교도에게는 더욱 읽어볼 가치가 있다. ■

 

주성원 / 불교출판 기획편집자. 일본 류코쿠(龍谷)대학 불교학과 졸업(학사, 석사). 불광연구원 연구원을 거쳐 현재 불교전문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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