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불교 ⑦ 完

1990년대와 2000년대는 세기말과 한 천년이 새천년으로 접어드는 소위 밀레니엄의 혼돈과 격변의 시대였다. 소비에트 공화국이 해체되고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이 잇달아 민주화되면서 1990년대 들어 한때 아연하기는 했으나, 우리 문학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까지 진보적인 참여, 저항문학이 의심의 여지 없이 주류를 이뤘다.

당시의 문학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신군부독재 전두환 정권의 표어와 같이 ‘사회정의실현’이란 목적하에 양심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1998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 민주화 결실을 거두고 나서부터 문학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현실적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함께 역효과를 내며 참여, 저항문학의 견실한 이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1997년에 불어 닥친 IMF 외환위기는 수없이 많은 실업자를 거리로 내모는 경제구조조정을 거쳐 우리 사회를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편입시켰다. 거기에 인터넷 공간의 생활화로 글로벌 사이버 신유목 시대로 대책 없이 접어들며 정체성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런 혼란과 격동의 시대를 우리 시는 다양하게 반영, 대처해나갔다. 리얼리즘 시, 소위 민중시에는 이념 대신 삶의 디테일한 세목을 서정적으로 펼쳐나가며 민중서정시 세계로 들어갔다. 자연에서 서정을 구하는 시들도 우주적 질서, 코스모스로서의 자연관이 아니라, 정체성을 잃고 해체돼가는 내면을 비추는 파토스로서 자연이 됐다.

특히 2000년대 접어들면서 사이버 신유목 시대의 신세대 시인들에겐 자아를 타자(他者)가 대신한 가상현실과 환상성이 대거 드러나며 새로운 흐름을 이루게 되었다. ‘미래파’로 불리기도 한 이들 신세대 시들엔 괴기성, 잔혹성, 비속성, 불온성, 서술성이 장황하게 드러났다. 또 독서체험이나 감상체험 등 대중문화 장르의 혼종적 상상력이 주를 이루고 있어 ‘시는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까지 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최동호 씨는 1990년대 세속성, 주관성, 정체성, 해체성 등 시의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 정신주의 시 운동을 제창하고 나섰다. 우리의 전통 정신, 특히 불교의 선을 접목해 시의 고갱이인 정신을 불어넣자는 것이었다. 2010년대 접어들며 최 씨는 그런 정신주의 일환으로 극도로 정제된 서정시인 극서정시를 제창한 바 있다. “간결하고 경쾌하며 독자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시들이 활성화되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 시인과 비평가가 해야 할 시대적 책무”라며.

새천년이 시작되던 2001년 봄 《유심(惟心)》의 시 전문지로서 복간도 2000년대 시단에서는 빼놓을 수 없다. 만해 한용운이 1918년 9월 창간해 3호까지 냈던 《유심》을 지난 5월 입적한 오현 대종사가 복간해, 경향과 파벌 가리지 않고 시인들은 지금 이곳의 오늘의 시에 불교를 접목하는 시심을 일굴 수 있었다.

 

면벽한 자세만
철로 남기고
그는 어디 가고 없다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
생각이므로
그는 그 안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겠다

한 자세로
녹이 슬었으므로
천 갈래 만 갈래로 흘러내린 생각이
이제, 어디 가닿는 데가 없어도 반짝이겠다

 

근래 중앙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작인 최찬상 시인의 〈반가사유상〉 전문이다. 신춘문예 당선 시 대부분이 30행 넘나드는 긴 시인 데 반해 이리 짧아 울림이 더 크다. “천 갈래 만 갈래로 흘러내린 생각”을 선적(禪的)으로 후려치며 끝 간 데 없이 도저한 생각, 정신의 깊이를 반짝, 잡아내고 있다.

이처럼 불교는 밀레니엄 격변기에도, 아니 격변과 혼돈 속에서 더욱더 인간의 정체성, 시의 항심을 잡아주며 오늘도 더 그윽하고 깊은 시를 낳게 하고 있다. 그래서 예전보다 더 많은 불교시들이 발표되고 있지만, 1990년대에 등단해 시단에서 평가받고 있는 몇몇 시인들의 시를 감상하며 불교가 어떻게 접목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이홍섭‐성(聖)과 속(俗) 사이에서 우러나는 간절한 서정

▲ 이홍섭(1965∼ )

나는 이제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었다

몸으로 밀고 간 산골짜기 끝에는 모난 돌이 하나
마음으로 밀고 간 언덕 너머에는 뭉게구름이 한 점

노래와 향기가 흐른다는 건달바성은 멀고

내 손바닥 위에는
구르는 돌멩이 하나와
흩어지는 뭉게구름이 한 점

내가 부른 노래는 구름과 함께 흘러가버렸고
내가 맡은 향기는 당신이 떠나면서 져버렸다

나는 이제 정녕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었으니
참으로 건달이나 되어야겠다
참으로 건달이나 되어야겠다

 

1990년 《현대시세계》를 통해 등단한 이홍섭(1965∼  ) 시인의 시 〈갈 데 없는 사내가 되어〉 전문이다. 갈 데 없는 사내가 이제 “참으로 건달이나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시다. 대학 재학 중 등단한 이 시인은 기자가 되어 취재하며 속세 곳곳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산중 절간에서 불목하니로 10여 년 보내다 하산했다고 밝히고 있다.

불교용어에서 온 ‘건달’은 원래 수미산 남쪽 금강굴에 살면서 제석천의 음악을 맡아보는 ‘건달바’ 신이었다. 산중에서 시인도 불법과 함께 신들과 중생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 시의 도를 트려 했을 것. 그러다 하산해 속세에서 이제 ‘참으로’ 건달이 되겠다 한다.

이 시인은 “건달은 신기루를 쫓으며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다”며 “시의 궁극은 자유를 얻는 것인데,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소한의 자유를 얻고, 누리기 위해서는 건달처럼 살아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면서 “불교 경전에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라는 말이 있다”며 “순수했던 그 초발심이 곧 정각이기 때문에, 수행이란 그 초발심을 끝까지 유지하는 행위이고 시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고 자신의 시관을 털어놓기도 했다.

토굴에서 수행이든, 속세에서 시 쓰기든 정각인 초발심을 지키는 것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인의 시편들은 순수하다. 성과 속 사이에서 우러난 간절한 서정이 심금을 울린다. 선(禪)처럼 이 시인은 “서정은 대상을 단박에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이라 하기에.

 

젊은 수좌들은 한소식 하기 위해 선방으로 들어가고
노보살은 정성스레 무청을 다듬어 요사채 처마에 매단다

첫눈은 그제서야 돌부처의 눈썹을 스친다

 

산중 절간에 살면서 목도한 것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겨울안거〉 전문이다. 아무것에도 물들지 않고 때 타지 않은 이 정경(情景)이 바로 첫 마음, 초발심 아닐 것인가. 선방에서의 한소식과 이 맑은 서정시편의 한소식이 무에 다를 게 있겠는가.

이 시인은 “경험상, 화두를 타파하기 위해 정진하는 모습은 시의 장르성을 타파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모습과 참으로 닮았다. 따뜻한 기운이 지속되어야 하고, 마음과 눈이 움직이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 간절해야 한다. 그래야 터진다.”며 시인과 선객(禪客)을 같이 보고 있다.

 

한여름인데
흥건하게 땀에 젖는데
갑자기
자선냄비가 보고 싶다

종을 흔들며
깊은 산속
절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처럼
맑게, 아주 맑게 머리를 박으며

찌그러진 냄비 속에/ 가진 것
다 털어 넣으며

죄 없이, 죄도 없이

 

한여름 산중 절간에서 풍경 소리를 들으며 연말 한겨울 혼잡한 도심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떠올리고 있는 시 〈자선냄비〉 전문이다. 초발심을 지키려는 시인에게 종교며 성 · 속에 무슨 구분이 있겠는가. 머리도 비우고 마음도 비우고 가진 것도 비우며 기독교의 원죄 같은 것도 털어버리라고 풍경 소리, 자선냄비 종소리는 울리고 있지 않은가.

 

멀리 와서 바다를 본다

아팠구나

저리도 많은 손 갈퀴가 몰려와
모래를 긁어대는 것은
아직도 못다 한 얘기가 남아 있기 때문

얘기를 안 하면 귀신도 모른다 했는데
귀신의 입과 귀도 막아버리고
검은 파도가 친다

내려놓자

내 것이 아니어서
슬펐던 것들

산도, 별도
골짜기를 떠돌던 반딧불도
반딧불 같았던 여인도
내려놓는다

미안하다

멀리 와서
비로소 바다에 닿았구나

 

휴전선 인근 동쪽 바다 끝 무렵에 있는 아야진 바닷가에서 쓴 시 〈아야진〉 전문이다. 해변 나루 이름 ‘아야진’의 음상(音像)처럼 참 아픈 시다. 불가에서는 내려놓아라, 버려라 하는데, 속세에서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끝끝내 버리지 못할 것들을 내려놓아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런데도 시인은 ‘미안하다’며 연민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도저한 연민, 간절한 마음으로 선과 서정을 이으며 귀신도 감읍할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이 이홍섭 시인이다.

 

박형준‐일상의 산보, 만행으로 가닿은 불교의 요체

▲ 박형준(1966~ )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나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는 오래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

 

박형준(1966∼ ) 시인의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가구(家具)의 힘〉 부분이다. 위 시에 잘 드러나듯 밀레니엄 혼란기 기존의 것들을 묵살하고 새롭고 신기한 것만 좇는 신세대 시인들 사이에서 원체험과 추억과 전통을 새로운 시법으로 풀어내 믿음을 주고 있는 시인이 박 시인이다.

 

나는 천변에서 밤산보를 하고 있었다
낮에는 흩어졌던 오리들이
물가에 서로 모여 깃털을 붙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앞에서 전동 휠체어를 타고 가는 중년 사내가
전기 대신 손으로 바퀴를 움직이며 지나가고 있었다
사내는 잠깐잠깐 휠체어를 멈추고선
천변의 꽃 쪽으로 허리를 숙이곤 하였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꽃들에게 얼굴을 내밀고선
꽃들이 잘 자는지 숨 냄새를 살피고 있었다
사내는 자전거도로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나아갈 것 같았다

나도 옆을 바라보며 느리게 걷는
밤산보길이었다
사내의 뒤에 한 걸음 떨어져서
밤오리처럼 가까워져서 옆에서 나는 밤길 냄새를 맡고 있었다

— 〈느리게 걷는 밤산보길〉 전문

 

박 시인에게 ‘언제 시가 나오느냐’ 물었더니 ‘걸으면서 시가 나온다’고 했다. 젊은 날 서울 변두리를 전전하며 산 시인은 그 변두리를 걸으며 주변의 가난하고 짠한 풍경에 자신의 어린 시절 농촌의 원체험에서 우러난 것들을 보탰다. 춥고 외로운 오리들이 서로 체온을 나누려 붙어 자는 정경처럼.

박 시인에게 이러한 산보와 시 쓰기는 서로의 연민으로 뭇 중생들, 우주 만물과 몸을 섞는 불가의 만행과도 같다. 코를 들이대고 꽃들의 숨 냄새를 맡는 휠체어 탄 병든 사내와 물가에 모여 깃을 붙이고 자는 밤오리와 시인과 밤길은 연민으로 한마음, 한 몸이 돼가고 있지 않은가.

 

학생 식당 창가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손대지 않은 광채가
남아 있습니다
꽃 속에 부리를 파묻고 있는 새처럼
눈을 감고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은/ 말 속에 손을 집어넣어봅니다
사물은 어느새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어머니
나를 감싸고 있는 애인
오래 신어 윤기 나는 신발
느지막이 혼자서 먹는
밥상이 됩니다
죽은 자와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와도
만나는 시간
이마에 언어의 꽃가루가 묻은 채
나무 꼭대기 저편으로
해가 지고 있습니다

— 〈서시(序詩)〉 전문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일상에서 아연 아득히 시공을 초월해 삼라만상과 하나가 되는 시다.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은 말’로 저편으로 해가 지는 풍경을 드러내고 있는 시다. 말이 끊기고 생각이 끊긴 이언절려(離言絶慮)의 순간, 해탈한 이미지들이 그리는 우리 본디의 내면 풍경으로 볼 수 있는 시다.

 

공중(空中)이란 말
참 좋지요
중심이 비어서
새들이
꽉 찬
저곳

그대와
그 안에서
방을 들이고
아이를 낳고
냄새를 피웠으면

공중이라는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새떼

— 〈저곳〉 전문

 

‘공중’을 화두로 삼은 이 짧은 시편을 보았을 때 나는 시로서도, 세속의 욕망으로서도 이렇게 해탈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불교 요체의 고단위 관념을 가지고 참 잘 놀고 있는 시로 보였다. 공중이 비었기에 새들은 꽉 차서 날 수 있다. 그런 공중에 시인은 신혼 방 차리고 애 낳고 살고 싶다는 욕망을 슬쩍 넣어본다.

그러나, 아서라. 뼛속까지 텅텅 비워야 날 수 있는 데가 공중인 것을. 그래 시인도 공중을 ‘이곳’이라 하지 않고 ‘저곳’이라 하지 않는가. 이렇듯 불교에 대한 표 나는 의식 없이도 혼돈의 시대, 시의 중심을 잡아가며 자연스레 불교의 요체에 닿고 있는 시인이 박형준 시인이다.

 

문태준‐말과 침묵 사이 숨골 같은 시어에 맺힌 화엄세상

▲ 문태준(1970∼ )

오늘은 어쩌자고 숨골 생각뿐이네

갈탄을 쌓아놓고 갈탄에 숨을 넣는 노인을 보았네
갈탄더미에 꼬막만 한 숨골을 내려고
꼬막만 한 숨을
푸후, 푸후,
불어 넣는 노인을 보았네
참게처럼 엎드려
참게처럼 엎드려
연기에 주름눈을 씻으며
사이를 두고
목주름이 출렁이는 것을 보았네
늙은 칠면조의 목주름처럼 헐렁했지

숨골, 그걸 얻기가 어려워
잎이 어긋나는 것도 숨골이지

마른 갈대 사이에 선 추레한 바람 같은 것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말의 아가미 같은 것
건널 다리 같은 것
가을이 오는 것
지느러미처럼 움직이는 것/ 겨우 알벌만 하고 예쁘기는 감꽃만 한 것

주름눈을 질끈 감고
칠순(七旬)에도
숨골, 그걸 얻기가 어렵지

 

1994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한 문태준(1970∼  ) 시인의 시 〈숨골 생각〉 전문이다. 제목에도 드러나듯 ‘숨골’, 생명의 원천이 되는 숨구멍에 대해 실생활에서 묘사하고 또 명상하고 있는 시다. 문 시인 시의 특장은 자연이나 삶의 묘사가 어느새 시인 내면으로 들어와 은밀히 교류하며 서로 같이 꿈꾸고 명상하는 데 있다.

위 시 또한 그 좋은 본보기이다. 어긋나든 맞든, 추레하든 예쁘든 ‘사이’가 삶을, 세상을 아기자기하게 살맛 나게 살아가게 하는 ‘숨골’이란 각성을 쉽고 정감 있게 적확한 이미지를 조밀조밀 운용하며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젊은 시인이면서도 칠순 노인의 삶의 깊이를 통해, 또 젊은 시인답게 젊고 싱싱한 이미지들로.

 

어느 날 어머니는 찬 염주를 돌리며 하염없이 앉아만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머리를 숙이고 해진 옷을 깁고 계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꽃, 우레, 풀벌레, 눈보라를 불러 모아서. 죽은 할머니, 아픈 나, 멀리 사는 외숙을 불러 모아서. 조용히 작은 천 조각들을 잇대시는 것이었습니다. 무서운 어둠, 계곡 안개, 타는 불, 높은 별을 불러 모아서. 나를 잠재울 적에 그러했듯이 어머니의 가슴께서 가늘고 기다란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사슴벌레, 작은 새, 여덟 살의 아이와 구순의 할머니, 마른 풀, 양떼와 초원, 사나운 이빨을 가진 짐승들이 모두 다 알아 온 가장 단순한 노래를 읊조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는 찬 염주 속에 갇혀 어머니가 불러 모은 것들을 차례로 돌고 돌다 명명(明明)한 겨울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를 회상하고 있는 시 〈어머니는 찬 염주를 돌리며〉 전문이다. 시인은 물론 뭇 생령을 불러 모아 편안히 잠재우는 어머니의 모습이 중생들의 아픔을 보고 듣고 구제해주는 관음보살과도 같다.

실제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니를 회상하는 글에서 시인은 “표정은 부드럽고 온화하며, 눈빛은 자비로우시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다 그럴 어머니를 통해 관세음 세상을 보고 있는 시다. 그런 어머니와 함께 절에 다니며 불법을 궁구했던 문 시인은 대학 졸업 후 불교방송국에 입사, 부처님과 불법과 승가에 귀의해 시를 쓰고 있다.

“한 편의 시를 통해 ‘변화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우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와 같은 말을 가만가만한 시의 음성으로 들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말도 큰 침묵보다 못하며 상(相)에 지나지 않으니 번거롭고 허황되긴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말과 침묵 사이의 말의 아가미, 언어의 숨골 같은 시로 서로서로 기대어 사는 우주 인드라망, 화엄세상을 가만가만 보여주고 있다.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 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어물전 개조개가 움막 같은 껍데기 밖으로 내미는 맨살을 보고 개펄 같은 이 세상 맨발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궁리하고 있는 시 〈맨발〉 전문이다. 열반에 든 부처님은 그를 슬퍼하는 가섭에게 관 밖으로 발을 내밀어 보였다. 그 발에는 천 개의 바큇살과 그것들을 한 개로 묶는 바퀴 축이 새겨져 있었다. 각기 다른 우리네 쓰린 삶도, 삶과 죽음도 한 축임을 보여준 것이다.

부처님의 그런 일화에 기대어 위 시도 우리네 궁핍한 삶을 위무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 부르튼 맨발로 돌아오는 이, 강아지 같은 자식들을 위해 뻘밭 같은 세상에서 살아내야 하는 우리네 아픈 삶을 부처님의 그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보듬고 깨쳐 주고 있다.

 

절 마당에 모란이 화사히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저 꽃의 문을 열고 있나

꽃이 꽃잎을 여는 것은 묵언

피어나는 꽃잎에 아침나절 내내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말하려는 순간 혀를 끊는

 

깊고도 한량없는 불법의 세계를 말로는 다 전할 수 없어 제자들에게 빙그레 웃으며 꽃 한 송이 들어 보였다는 부처님의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를 떠올리게도 하는 시 〈묵언(默言)〉 전문이다. 말하면 깨달음의 세계가 무너질까 묵언정진하는 선승(禪僧)의 자세를 시 쓰기로 보여주는 시로도 읽힌다. 이렇듯 언어와 침묵 사이 숨골 같은 시로써 불법의 오묘한 세계를 꽃피우고 있는 시인이 문태준 시인이다.

 

김선우‐우주만물과 어우러지는 인드라망의 에코페미니즘

▲ 김선우(1970~ )

누군가 갉아 먹었다
기름한 타원 모양
구멍 난 이파리
신기해 눈 가까이 대보는데
그 틈새로 빗방울이 툭, 떨어졌다

눈물 같다

누군가에게 자기를 덜어 먹인
기름한 눈동자
깜빡였다

깜-빡--, 이런 순간 있어 허공이 생기나 보다
허공이 있어 천지에
시력(視力)이 생기나 보다

저무는 서편 하늘
길게 눈 감은 먹구름
따던 깻잎 서둘러 마저 딴다

 

1996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등단한 김선우(1970∼  ) 시인의 시 〈허공의 내력〉 전문이다. 제목처럼 벌레가 파먹은 깻잎 구멍을 들여다보며 허공의 내력을 떠올리고 있는 시다. 일상의 행위, 깻잎 따는 노동을 밋밋하게 보여주면서 시인과 세계를 한순간 구체적으로 엮어, 천지간에 이어진 우리네 삶의 생생함을 들려주는 노동하는 몸으로서의 생산적 상상력이 김선우 시 세계의 특장이다.

위 시는 깻잎의 구멍, 구멍 속으로 보이는 허공을 빌려, 시의 핵인 서정, 서정의 요체인 동일성과 순간성의 시학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서정이 곧 우주 삼라만상에 미만한 그리움이며 연민의 인드라망임을 보여주고 있다.

‘구멍’이나 ‘틈새’는 너와 내가 만나는 동일성의 공간의 구체적 이미지고, ‘깜-빡--’은 순간성의 구체적 행위이고, ‘허공’은 동일성과 순간성이 합치된 시공간이다. 그래 이 우주는 너와 내가 서로 갉아 먹고 덜어 먹이며 유기체적으로 한 가족 한 몸이 되는 것이며, 이것이 김 시인의 서정적 유토피아다.


불영산 수도암에 갔다가
비로자나 부처님과 한바탕 엉겼네
신랏적 부처들은 왜 그리 섹시하냐고
슬쩍 농을 건넸더니 반개한 두 눈 스르르 뜨시네
‘실라’라는 발음은 로맨틱해요
허리춤을 간질였더니 예끼, 손을 저으시네
천년 예술의 균형미 따위
선화공주와 서동방은 아랑곳 않을걸요
아사달 아사녀의 달아오른 눈빛이
부럽지 않았나요 허허, 웃는 비로자나 부처님
아름다운 귓불이 벌게지셨네

색즉시공(色卽是空)을 설한 부처의 몸을 빌려
관능을 조각한 석공의 번뇌……

법당 앞 고즈넉이 서 있는 삼층석탑
금 간 탑신 아래 주먹만 한 벌집이 매달려 있었네
천년 세월 돌꽃은 피고 지고
벌집 속으로 무상하게 드나드는 달마들
선남선녀 옷자락이 하염없이 스쳐가네

이 뭣꼬!
부처를 범했더니 거기 내가 있네


신라시대에 조성된 고찰에 있는 비로자나불과 삼층석탑을 섹시하게 도발하고 있는 시 〈벌집 속의 달마〉 전문이다. 비로자나불은 불법, 진리의 빛이 온 누리에 비춰 사방을 제도하는 청정법신(淸淨法身)이다. 그런 불법, 사랑과 연민을 여성스럽게 전하고 있는 시다. 그런 사랑과 번민과 연민이 있기에 시공을 초월해 돌에도 꽃이 피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돌이 어떻게 부처가 되고 부처와 불법을 모시는 탑이 될 수 있겠는가. ‘색즉시공’ ‘이 뭣꼬’ 등 불교의 화두를 도발하며 그런 불교적 관념 세계에 피가 돌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많은 독자들이 애송하며 김 시인을 젊은 시단에 우뚝 서게 한 시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전문이다. 남성과 여성을 갈라 여성성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에서 한 걸음 나아가 불교에 잇닿으며 김 시인을 우주 삼라만상을 낳고 어우러지는 영원한 모성성, 여성성으로서 에코페미니즘 시인으로 만든 본보기 시다.

가만히 다시 한번 읽어보시라. 우리 모두는 서로서로를 꽃피우고 있는 그 간절함이 섹시한 촉감으로 느껴지지 않으신가. 그러면서도 우주는 한 생명체라는 불교 인드라망 세계를 간절하게 짜나가고 있지 않은가.
 

그 풍경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가녀린 떨림들이 서로의 요람이 되었다
구해야 할 것은 모두 안에 있었다

(중략) 

온갖 정교한 논리를 가졌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옛 파르티잔들의 도시가 무겁게 가라앉아 가는 동안
수만 개의 그물코를 가진 하나의 그물이 경쾌하게 띄워 올려졌다
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
무한 하늘 한 녘에서 하나의 그물코가 되는 그 순간
별들이 움직였다
창문이 조금 더 열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뾰족한 흰 싹을 공기 중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의 가녀린 입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처음과 같이
지금 마주 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혼돈과 전망 부재의 이 시대를 둘러보며 시인의 의지를 밝힌 시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부분이다. 이 사이버 신유목 시대의 새로운 전망으로 각자가 불성(佛性)인 참나와 불교적 인드라망 세계를 펼치는 대목이다.

이 물신주의 시대에 인간이 서로서로의 신이 돼 대자대비로 창생을 두루두루 살리는 화엄세상을 여는 것이 우리 시대의 혁명이란 것이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과 화쟁사상을 다룬 장편소설 《발원》을 펴내는 등 혼돈에 빠진 시대와 우리 문단에서 우주 만물을 감싸는 여성성과 불교적 세계관으로 융숭하고도 믿음직한 문학세계를 펼치고 있는 시인이 김선우 시인이다.

 

이덕규‐현실체험과 불교적 세계관에서 우러나는 뚝심의 시

▲ 이덕규(1961∼ )

공장 굴뚝 위로 솜사탕처럼 달콤한 이야기들이 피어오른다

한때 나는 그 달콤한 구름을 타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어떤 고도의 바람을 추진력으로 날아가는 그 허풍쟁이 근육질의 조종사는 핸들이나 브레이크가 없다는 이유로 방향과 속도를 무시하고 엉뚱한 곳으로 나를 데려가곤 했다

결국 지상으로 돌아온 나는 생의 반을 외곽도로 공사현장에서 보냈는데 날마다 삽을 쥐고 그 적자뿐인 손익계산서를 쓸 때

(중략)

그때 지상에서도 구름을 사칭한 대머리독수리가 갑자기 기수를 돌려 그 거대한 자본의 심장을 뚫고 들어간 이후, 현대의 신은 토마호크미사일처럼 저돌적으로 날아오는 생체의 제물을 즐겨 먹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한 세계에서 한 세계로 마음만 이사 가기 위해 제공된 천민자본의 출처는 역사기록 어디에도 없다.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이덕규(1961∼  ) 시인의 첫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표제작 부분이다. IMF 외환위기로 거덜 난 경제에 실업자가 길거리로 내몰리던 지난 세기말과 한 천년에서 다음 천년으로 넘어가던 밀레니엄 전환기의 시대상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다.

당시 젊은 시단은 위 시 제목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처럼 뿌리와 지향점 없이 여기저기 엿보고 흘끗거리며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시를 짜 맞춰내고 있었다. 바뀐 시대와 젊은 시단을 직시하면서도 공사판에서 흙도 파고 농사도 지으면서 뚝심 있는 시를 일궈오는 시인이 이덕규 시인이다.
 

조계산자락 선암사 입구
덩치 큰 굴참나무들이 툭툭 갈라터진 갑옷으로 중무장한 채
두어 명씩 조를 지어 서성대다가
느닷없이 나를 불러 세우고 검문검색을 한다

이것저것 마냥 쑤셔 넣은 식탐 많은 어린아이처럼
배가 불룩해진 배낭 속에 나도 모를 또 다른 무슨 꿍꿍이 속셈이?
피할 새도 없이
배낭 깊숙한 곳에 꽁꽁 묶어놓았던
마음자루 주둥일 풀어 보여주니, 일주문 옆 천석꾼 곳간보다 더 큰
해우소 가는 길부터 일러준다
 

며칠간 선암사에 묵으며 수행한 체험을 소재로 삼은 시 〈선암사 5박 6일〉 앞부분이다. 누구든 절로 가는 마음은 경건하고 청정해지게 마련이다. 사특해서 무거운 마음을 비우러 가니까. 그런 절로 가는 마음을 입구에 늘어선 굴참나무와 절 본채보다도 더 크게 보이는 해우소(解憂所)를 통해 실감 있게 전하고 있다. 똥 누듯 마음자루 풀고 근심 걱정 싸버리라고.


천년고도(千年古都), 면목 없다
염치없다
평생 죄인처럼 고개 떨구고 사느니
아예 머리통을 깨부숴버린
머리 없는 돌부처 몸뚱이 위에
기름기 잘잘 흐르는 낯짝을 올려놓고
그윽한 표정 짓는
어떤 인간에게
이 가짜야 손들엇, 했더니

경주 남산
등성이 너머에서 누가
일어서고 있다
산보다 큰 어떤 덩치가
손들고 천천히
뭉기적뭉기적 일어서고 있다


천년고도 경주에 가서 널려 있는 머리 없는 돌부처들을 보고 쓴 시 〈손들엇〉 전문이다. 어찌 보면 부유한 사찰과 승려들을 비판한 시로도 읽힐 수 있지만, 앞 시 선암사 일주문 앞에서 마음을 검문당하는 시인처럼 자신을 호되게 검문하는 시다.

‘손들엇’이란 불시의 명령은 얼굴 없는 부처에 자신의 얼굴, 마음을 올려놓아 봤을 때 터져 나온 단말마처럼 들린다. 그렇게 세속의 자신과 마음을 깨부숴버리고 부처님 마음으로 보니 세상이 다시 보이고 일어서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세속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자신의 체험과 불교적 세계에 토대를 두고 있어 이 시인의 시는 실감이 있고 근기가 있다.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내려 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이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밥그릇 경전》 표제작 전문이다. 절집 뜨락에 묶여 있는 개와 그 앞에 놓인 개밥그릇을 참 재밌고 꼼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 말미 각주에서 밝힌 대로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學人)과의 선문답을 떠올리게 하는 시다.

깨달음을 배우러 온 학인에게 ‘밥 먹었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고 한 조주선사의 말은 선가는 물론 세간에도 널리 알려진 화두다. 가족의 생계는 물론 삶 그 자체인 밥그릇을 위해 혼신을 다해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풀 수 없는 화두를 아주 리얼하게, 술술 풀어내고 있다.

해서 많은 사람에게 제각각의 경지로 의미 있게 읽히며 불교 대표시 반열에 오르고 있는 시다. 이렇게 삶의 체험과 불교세계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된 리얼하고도 뚝심 있는 시로 시단, 특히 불교시 세계에서 떠오르고 있는 시인이 이덕규 시인이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는 시대는 세기말, 밀레니엄적 혼돈기였다. 후기자본주의와 글로벌 사이버 신유목 시대의 정체를 찬찬히 들여다보기는커녕 변하는 시대의 속도도 따라잡기 힘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생활 속으로 날로 확산돼 들어오고 있는 인공지능이 이제 문학이나 미술 작품도 쓰고 그려 대가의 작품보다 더 높게 평가받으며 인간의 정체성을 다시 묻게 하는 시대다.

이런 격변과 혼돈의 시대 불교는 시의 항심을 다시 세우게 하면서 인간의 정체성, 그 끝 간 데 없는 정신과 혼을 지켜내고 있음을 1990년대 등단한 주요 시인들의 시편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격변의 시대를 직관하면서 각자 모두에게 내재된 대자대비한 불성에 기초해 이 신유목 시대 전 지구적, 우주적 사상으로 서로서로 도움이 되는 불교적 인드라망, 그 화엄세상을 내세우고 있음도 보았다.

근래 들어 신춘문예 당선작에도 불교의 오묘한 세계를 서정화한 시편들이 보이듯 21세기 들어 불교는 우리 시에 더욱 확산돼 들어오며 시의 품격과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

 

이경철  
문학평론가 · 시인. 동국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2010년 《시와시학》(시) 등단. 저서로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 《미당 서정주 평전》 등과 시집 《그리움 베리에이션》이 있다. 현대불교문학상(평론 부문), 질마재문학상 등 수상. 현재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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