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고암대종사 열반30주년 추모 학술세미나 ‘한국불교의 역사적 전통과 미래’(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10월 12일)에서 발표된 논문을 축약 정리한 것이다.

 

1. 전법의 종교와 해외전법

흔히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성철 스님은 깨달음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불교가 아니라고까지 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범부의 삶을 버리고 출가하고, 깨달음으로부터 다르마(法)의 종교로서 불교가 탄생했다는 점에서 맞는 말이다. 깨달음에서 법이 탄생하고, 깨달음으로부터 붓다가 존재함으로 깨달음은 곧 불모(佛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음 이후 붓다의 행적을 살펴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깨달음은 내면적 인식의 전환이므로 깨달음에 안주해 있으면 개인적 체험에 갇히고 만다. 그런 체험은 영속성과 확장성이 없기에 개인 사멸과 함께 소멸하고 만다. 따라서 깨달음은 개인의 체험에서 실천의 영역으로 역사화 되어야만 비로소 여래의 삶을 따라가는 불도(佛道)가 열리고 불교라는 종교가 성립된다. 그래서 붓다는 깨달음이라는 내면적 체험에 안주하지 않고 깨달음을 역사화하고, 깨달음이 중생의 보편적 체험이 되고, 수행자의 삶이 되도록 하고자 일생을 바쳤다.

붓다는 녹야원으로 달려가 5비구에게 초전법륜을 설했고, 그중 한 명이 깨달음을 성취했을 때 붓다는 뛸 듯이 기뻐했다. 야사의 깨달음을 통해 붓다의 개인적 깨달음은 보편적 역사로 전환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붓다는 비구들의 숫자가 60명이 되었을 때 “비구들아, 자,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라는 전도선언을 선포했다. 이로써 불교의 핵심가치는 전법이 되었고, 불교는 세계종교로 성장했다.

이처럼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전법(傳法)이었다. 그리고 비구들에게 제시한 첫 번째 사명도 전법이었다. 따라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를 넘어 전법의 종교임을 알 수 있다. 전법은 단지 승단의 발전이나 제도적 교단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다. 붓다는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전도를 떠나라’고 했다. 전법은 중생을 행복하게 하는 실천이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길이자 세상을 완성하는 실천임을 알 수 있다.

전법의 종교로서 불교의 특징은 현재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으며, 전법의 영역이 해외로 확장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민족과 국경, 인종과 문화를 넘어 정법을 널리 펴는 것이 불자의 핵심적인 사명인 것은 변함이 없다.

 

2. 해외전법 반세기의 전개 양상

1) 한국불교 해외전법의 두 시기

해외전법은 대한민국 국경 밖의 영토에 불법을 전하는 일이다. 지역적으로 보면 첫째 북미와 유럽 등 서구 선진국을 대상으로 하는 전법을 들 수 있다. 한국의 해외전법 제1기는 1970년대부터 미국과 캐나다 등 주로 북미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둘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경제적으로 여건이 어려운 지역에 불법을 전하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한국불교 해외전법 제2기는 1990년대부터 시작된 흐름으로 주로 저개발국을 대상으로 한 개발 NGO 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신 중심의 종교문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탈종교화의 성향이 뚜렷하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서는 자연히 좌선과 같은 명상이 힘을 발휘했다. 반면 제2기에 해당하는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지는 복지와 교육 등 물질적 나눔을 필요로 하는 지역이다. 따라서 1기와 2기의 접근 방향은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1기가 숭산 스님과 삼우 스님을 중심으로 수행문화를 주로 전하는 것이었다면 제2기는 법륜 스님과 월주 스님으로 대변되는 경제적 원조에 초점이 이동하는 차별성을 띤다.

 

2) 한국불교 해외전법의 효시는 누구인가

불교는 전법승과 구법승의 목숨을 건 전법행에 의해 확장되었다. 그러나 실크로드 지역의 동굴사원들을 보면 불교의 확산에는 상인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광활한 사막과 설산을 가로지르는 대상의 여정은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상인들에게 안전은 최대의 관심사였고, 여행의 안전을 빌기 위해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나 중간에 엄청난 규모의 석굴사원들이 조성되었다. 더불어 여행 중에 기도하거나 안전을 기원하는 불감(佛龕) 같은 불구도 함께 등장했다. 이를테면 상인들은 자신들의 봇짐 속에 불교도 함께 챙긴 것이다. 이렇게 불교는 대상들의 봇짐 속에서 인도에서 서역으로, 서역에서 중국으로 확장되었다. 이처럼 봇짐을 타고 전파된 불교를 ‘수화물 불교(Baggage Buddhism)’라고 부른다.

현대불교가 서양으로 전파되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중국인들의 서구 이주,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인들의 프랑스 이주, 일본과 한국 등 아시아인들이 서양으로 이주하면서 이들의 보따리 속에는 그들이 믿던 불교도 함께 들어 있었다. 한국인의 이민 역사는 1900년대 초 하와이 농장 이민으로 거슬러간다. 이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고 가족끼리 혹은 이웃과 더불어 신앙을 지켜 왔고, 더러는 일본 사찰, 중국 사찰에 적을 두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불교를 서구에 전하는 데에 이민자들의 역할이 가장 앞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차원이며 공식적 전법으로 평가받지는 못한다. 공식적인 전법은 전법사의 등장과 같은 승가의 주도적 역할, 사원의 건립과 신행조직의 결성 등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외전법은 이민의 역사보다 짧은 50여 년으로 줄어든다. 그렇다면 해외전법의 효시는 누구일까? 미 동부 해외특별교구는 지난 2014년 미주포교 50주년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누구를 효시로 볼 것이냐에 대한 이견 때문에 행사가 취소된 바 있다.

2014년이 미주포교 50년이라는 것은 1964년을 시초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1964년은 서경보 스님이 유학생으로 도미한 때였고, 스님은 1966년 필라델피아에 조계선원이란 간판을 붙이고 활동했다. 이로부터 한국불교가 한인사회에 알려지고, 한국문화를 알리게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보 스님의 영향으로 삼우 스님과 고성 스님, 박성배 교수 등이 활동했기 때문에 미주 불교계는 경보 스님의 도미를 기점으로 기념행사를 열어왔다.

하지만 경보 스님은 지속적으로 활동하거나 어떤 체계를 수립하지 못했다는 반론에 직면한다. 이런 관점에서 숭산 스님을 미주한국불교의 창건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숭산 스님을 효시로 보는 첫째 근거는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다. 숭산 스님이 LA에 달마사를 창건한 것은 경보 스님보다 8년이나 늦은 1972년이었다. 하지만 스님은 달마사 창건 이후 뉴욕 원각사와 조계사, 시카고 불타사 등을 잇달아 설립했는데, 이들 사찰은 미국의 3대 도시에서 개원한 최초의 한국사찰이자 해당 지역 최대사찰이기도 하다.

둘째는 현지인에 대한 포교 여부이다. 숭산 스님은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의 선맥을 잇고,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간화선을 전파하여 5만 명에 달하는 제자를 배출했고, 관음스쿨이라는 교단 조직을 정착시켰다. 이런 상황을 종합할 때 미주 한국불교의 창건주는 숭산 스님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아무튼 해외전법의 역사는 2018년 현재 경보 스님을 기준으로 하면 54년이 되고, 숭산 스님을 기준으로 하면 46년이 된다. 누가 효시냐의 문제는 합의가 필요하지만, 한국불교가 서구에 전래된 것은 반세기가 되었다.

 

3. 한국불교 해외전법을 개척한 선구자들

1) 숭산 스님과 관음선종

한국불교 해외전법사에서 북미 지역은 숭산 스님과 삼우 스님의 역할이 컸고, 동유럽은 원명 스님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중 북미에서는 숭산 스님의 위상과 역할이 단연 절대적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종교학과 교수팀이 세계의 불교전통에 관해 출간한 《부처의 비전》이라는 책에서 숭산 스님은 달라이 라마, 틱낫한, 마하 거사난다와 함께 세계 4대 생불로 평가받기도 했다. 서구에서 숭산 스님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1927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한 숭산 스님은 동국대 재학 시절 《금강경》을 읽고 1947년 마곡사로 출가했다. 수덕사에서 고봉 선사를 법사로 비구계를 받고 경허-만공-고봉으로 이어지는 덕숭선맥을 계승했다. 스님은 1958년 화계사 주지를 시작으로 1960년에는 〈불교신문〉 창간에도 참여하며 3대 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2년에는 불교정화운동에 가담하고, 통합종단 비상종회의장으로도 활약하며 불교 발전에 헌신했다. 그러나 종단의 총무부장과 재무부장 등 여러 소임을 맡아 전환기 종단발전을 위해 진력했지만, 정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이 서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66년 종단의 요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홍법원을 개설하고 초대 원장을 맡으면서 해외전법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정화 이후 혼란에 빠진 한국불교의 돌파구와 비전을 해외전법에서 찾았음을 엿볼 수 있다.

1969년 홍콩 홍법원을 개원하고 1972년에는 미국 프로비던스에도 홍법원을 설립했다. 이런 여세를 몰아 1974년 캐나다 토론토 선원, 78년 폴란드 홍법원 등 8개 선원, 1980년 영국 런던선원, 81년 스페인 팔마선원, 83년 브라질 상파울로 선원, 85년 프랑스 파리선원, 1993년 싱가포르 국제선원, 2000년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를 개원하는 과정을 걸어왔다.

숭산 스님의 이와 같은 해외전법 활동은 ‘세계일화(世界一花)’를 정신적 모토로 한다. 스님은 “만공 스님의 뜻을 받들어 세계일화운동을 전개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국가나 민족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하는 중생제도’에 나선 것이다. 스님이 지향했던 세계일화 정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절대평화의 연꽃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십우도의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의 길로 나아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중생의 세계는 분별의 세계이고 갈등과 대립의 세계이다. 세계일화는 그와 같은 분별과 대립을 넘어 연기적 전체성을 실현하는 운동이자 중도의 진리를 실현하는 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선을 전파한 숭산 스님의 성공 요인

서구사회에 선을 처음 전한 것은 일본이다. 일본은 19세기 말 시카고세계박람회와 함께 열렸던 세계종교의회에 불교 대표를 파송했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에는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가 본격적으로 선을 전파했다. 당시 스즈키는 미국의 TV 《뉴요커(The New Yorker)》와 《보그(Vogue)》 같은 잡지에도 소개될 만큼 명사로 활동했다.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는 스즈키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구분할 정도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은 활동은 일본의 선불교를 서양에 각인시키는 역할로 나타났다. 이후 1950년대 후반 스즈키 슌류라는 조동종 선승에 의해 묵조선풍도 전해졌다. 이들은 1958년 샌프란시스코 선원을 건립하고, 농장과 수행처를 함께 갖추어 초기 선종처럼 선농일치의 수행문화를 일구었다.

이렇게 전해진 선은 20세 중반 히피문화와 반문화운동과 접목되면서 미국에 소위 젠붐(Zen Boom)을 일으켰다. 숭산 스님은 그와 같은 문화적 변동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1972년 도미한 숭산 스님은 일본 선승이 뉴욕에서 50여 명의 서양인을 앉혀 놓고 수행을 지도하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도 선을 전파하기로 결심했다. 스님의 이런 원력을 파악한 김종선 교수는 하버드대와 예일대 등의 대학생을 연결해 주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참선을 가르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72년 11월 8일 미국에 온 지 불과 6개월 만에 수계식을 갖고 미국인 제자를 배출하며 한국불교 해외전법의 기수가 됐다. 스님이 시카고 불타사에서 지도할 때는 미국인 신부(神父)가 출가하고, 인도인 제자, 수피 출신 제자까지 거느릴 정도로 반향이 컸다.

숭산 스님은 주말마다 각 도시를 돌며 법문을 했고, 1년에 지구를 세 바퀴 돌 정도로 전 세계를 도는 전법행에 몰두했다. 피부색과 인종, 지역을 넘어 법을 펼친 결과 35년 만에 전 세계 32개국에 120여 개의 선원을 거느린 관음선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숭산 스님의 성공 요인을 살펴보면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초월적 종교가 퇴조할 시기에 자성자도(自性自度)의 전통을 지닌 선을 전파한 것이다.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은 전쟁과 이념대립에 지쳐 있었고, 한국전쟁에 이어 베트남전이 연이어 발발하면서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소위 비트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으로 불리는 반문화운동이 일면서 비트문화가 풍미하고, 히피문화가 꽃을 피웠다. 이런 사회풍조 속에서 일본의 선불교, 인도의 요가, 티베트의 밀교 등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때 숭산 스님도 참선이라는 길을 제시했고, 그 처방은 당시 미국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왔다.

둘째,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곳곳에 선원을 설립하는 적극성이다. 숭산 스님의 전법행은 세계를 무대로 했다. 1972년 최초의 제자를 배출한 이후 1973년 LA 달마사, 1974년 캐나다 토론토와 보스턴 케임브리지선원, 1976년 LA 달마선원, 1977년 뉴욕 조계사 등을 개원했다. 이런 추세는 미국을 넘어 유럽, 남미, 아시아로 퍼져갔고, 1989년에는 남아공으로 확장되었다.

셋째, 현지 사정에 맞추어 과감한 제도개혁을 단행했다. 한국의 선법을 전파했지만, 한국의 전통만을 고집하지 않고 현지에 맞는 변용을 허용했다. 무량 스님은 “숭산 스님은 대단히 융통성 있는 스승이다. 미국과 미국인의 현실에 맞게 다양한 가르침의 방편을 쓰시는 분”이라고 평했다. ‘중생제도라는 불교의 본질적인 가치를 위해 시대의 문화적 여건에 따른 변용’을 허용한 것이다. 남녀차별, 출가와 재가의 구분 등을 없애고 모두가 평등한 승가공동체를 만들고, 화합과 협력을 바탕으로 세계평화를 지향했다.

스님은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공부의 내용에 따라 재가자들에게도 깨달음을 인가하고, 관음선종을 결성하여 효율성을 높이고, 결혼한 사람에게도 보살승이라는 계를 주었다. 직제에서도 출가자 중심에서 벗어나 법사, 선도법사, 지도법사, 선사, 대선사의 직제를 도입하고, 법에 대한 안목에 따라 중용하는 파격성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넷째, 대학가에 젠 센터를 설립하고 지식인을 대상으로 선법을 펼쳤다. 스님은 한국교포들이 주로 사는 LA나 뉴욕 대신 하버드를 비롯해 대학가와 젊은이들이 많은 보스턴에 선원을 개원했다. 이는 불교를 모르는 현지인에게 불교를 전하기 위함이었고, 한편으로는 지성인들에게 불법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의도는 적중하여 걸출한 지식인 제자들을 배출했다. 프로비던스 홍법원 조실 대광, 무상사 조실 대봉, 시자 무심, 《만행》의 저자 현각, 태고사를 창건한 무량 등 50여 명의 지식인과 1천여 명의 외국인 제자를 배출했다. 이들의 공통적 특징은 명문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문명사적 전환기에서 기독교적 전통에 흥미를 잃은 젊은이들에게 선의 가르침은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 미국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예일대와 하버드 대학원에서 공부한 현각 스님도 “모든 것을 버렸지만 진정한 스승을 만났다.”고 회고했다. 숭산 스님은 합리성과 이성에 목매달고 있는 지식인들을 향해 “오직 할 뿐(Only Do)”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알음알이와 지식인의 아상(我相)을 깨버렸다. 그렇게 배출된 제자들은 세계 각지에 선원을 설립하고 한국불교 세계화에 앞장서는 주역이 되었다.

다섯째, 반농반선(半農半禪)을 통한 경제적 자립전통을 확립한 것이다. 초창기 전법을 위해 해외로 건너간 스님들은 스스로 수행환경을 조성해야 했다. 숭산 스님은 1972년 프로비던스에 방 두 개짜리 낡은 아파트를 얻어 시작했다. 50~60명에 달하는 제자들에게 공양도 제공하고, 좌복도 만들고, 방세까지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세탁소 수리공으로 일하며 그런 비용을 충당해야 했다.

이처럼 수행과 노동을 병행하는 반농반선의 전통은 세계 곳곳에 세운 선 센터의 기본적인 운영 기조가 되었다. 미국인 제자 무량 스님도 7년간 트레일러에서 숙식하며 캘리포니아 사막에 태고사를 창건했다. 뙤약볕과 모래바람을 맞으며 포클레인으로 땅도 파고, 기둥도 세우며 손수 도량을 일군 것은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이었다.

 

2) 삼우 스님의 북미 전법과 자혜불교회

한국불교의 해외전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삼우 스님이다. 숭산 스님이 미국 프로비던스에 홍법원을 설립한 것은 1972년이었지만 삼우 스님은 1967년에 뉴욕에 도착했다. 이런 이유로 미국의 한국불교사를 논할 때 삼우 스님이 뉴욕에 선련사를 건립했던 1967년 4월을 시발로 보는 사람도 있다. 시기적으로 보면 경보-삼우-숭산 순으로 도미한 셈이다.

삼우 스님 역시 맨해튼에 방 1개짜리 아파트를 얻어 전법을 시작했다. 보시자가 없었기 때문에 UPS에서 일도 하고 탁발도 했다. 비자 문제로 캐나다로 건너갔지만 경제적 문제로 우체국에서 일해야 했고, 곤궁한 형편 때문에 7년이나 지하생활을 하면서 병을 얻기도 했다. 1973년 마침내 토론토의 지하실로 참선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때가 왔음을 직감한 스님은 1976년 헌 집 한 채를 매입해 제자들과 수리하여 1979년 마침내 캐나다에 선원을 개원했다.

삼우 스님의 전법은 밤에는 정진하고 낮에는 택배회사나 우체국에서 일하는 주경야선(晝耕夜禪)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12년 동안 노력한 결과 캐나다 토론토에 선련사 창건이라는 결실을 보았다. 이후 미시간 앤아버(1981), 멕시코시티(1984), 시카고(1995) 등에도 선련사를 개원했다. 선련사를 찾는 신도들은 대부분 미국인이었고, 때로는 미국인 목사까지 있었다.

스님은 전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1990년 종교재단법인 ‘자혜불교회’를 창립했다. 아울러 1981년부터 초심자들에게 불교를 소개하는 영문 계간지 《스프링 윈드(Spring Wind)》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1986년 시카고에 미륵승가대학을 설립하여 인재양성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스님은 인쇄기를 사놓고 뉴스레터를 발행하는 한편 계간지 《교차로의 불교》 같은 잡지를 발행하는 등 다각도의 시도를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90년 당시 벽안의 서양인 출가자 12명, 재가 제자 350명을 배출하는 성과를 냈다. 해외전법에 투신한 지 25년 만에 이룩한 성과였다. 삼우 스님 밑으로 출가한 스님들 중에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도 있다.

게리 라킨(Geri Larkin)이라는 기업자문가는 삼우 스님과의 인연으로 출가하여 ‘파랑’이라는 비구니가 되었다. 파랑 스님이 발간한 《깨달음과의 우연한 조우》 《선의 탭댄스》 같은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서양에 불교를 알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파랑 스님은 기업자문가로 활동한 경험과 불교사상을 접목하여 불교적 기업윤리를 정립하기도 했다. 팔정도의 정명(正命)의 원리를 기업경영에 적용하여 1998년 미시건대 MBA에서 ‘정명기업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불교의 가르침을 철학적 사유에 국한하지 않고 현실적인 가르침으로 적용한 것이다.

 

3) 원명 스님의 동유럽 전법과 연등국제불교회

동유럽 전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원명 스님이다. 성철 스님 상좌 중에 유일하게 해외전법에 투신했던 원명 스님은, 고등학교 시절 불교와 인연을 맺고 해인사에서 성철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다. 이후 성철 스님의 가풍에 따라 강원교육도 마다하고 10년 동안 해인사, 봉암사, 상원사 등 전국의 선방을 두루 돌며 수행에 몰두했다.

그렇게 정진하던 중 1980년대 초 외국 스님들과 교류하면서 남방불교를 알게 되었고, 1982년 스리랑카에서 3년간 머물면서 세계불교에도 눈뜨기 시작했다. 나아가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영국에는 250개나 되는 불교단체가 있고 각국의 불교가 전법하고 있지만, 한국불교는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도서관에도 한국불교에 관한 내용은 중국 편에 몇 줄 부가된 설명이 고작이었다.

반면 일본불교는 이미 오래전에 유럽으로 진출해 경전을 번역하고 전법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의 아류 정도로 여겨지는 현실을 체험하면서 국제포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스님은 1985년 서울 소격동에 작은 건물을 임대해 연등국제불교회관을 개원하고 외국인을 위한 수행공간을 마련했다.

이후 스님은 1년 중 절반은 유럽을 비롯해 구소련 지역인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지로 나가 포교당을 건립하고 불교발전을 위해 진력했다. 1994년에는 싱가포르 불자 모임 결성,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해인사 포교원, 모스크바 달마사, 우크라이나 불심사, 키르기스스탄 보리사, 방글라데시 원명사를 잇따라 개원하며 전법의 성과를 올렸다.

원명 스님이 특별히 공을 들인 지역은 소련 지역이다. 공산당 치하의 옛 소련은 종교의 자유가 없었던 탓에 러시아불교는 몽골 스님 몇 명이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고, 포교활동이랄 것이 없었다. 원명 스님은 교포 3세 이고르 리의 도움을 받아 법회를 열고 수계식을 하는 등 이 지역에 불심을 심는 데 심혈을 쏟았다.

강화도에 연등국제선원을 설립하여 외국인 전법을 위한 터전을 마련한 것도 성과로 꼽을 수 있다. 여타의 불교국가에서는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출가하고 공부나 수행할 수 있는 곳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렇게 배출된 승려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포교활동에 종사하는 선순환 체계를 갖고 있었다. 한국에도 매년 수백만 명의 외국인들이 찾고 많은 이들이 사찰을 찾기 때문에, 이를 전법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연등국제선원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4) 구산 스님과 송광사의 벽안 납자들

해외로 나가지 않았지만 국내에서 외국인들에게 불법을 전한 것도 해외전법의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송광사의 구산 스님이 여기에 해당한다. 구산 스님은 1970년대에 여러 명의 푸른 눈의 납자를 훌륭한 수행자로 키워냈고, 이들은 한국불교를 해외로 전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해외에서 활동했던 삼우 스님조차도 “구산 스님의 제자들은 각 분야에서 그 활동이 두드러져 서양에 한국불교를 알리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구산 스님이 송광사에서 14년간 배출한 외국인 제자는 50명에 달한다. 해외로 나가서 고군분투한 스님들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성공에 힘입어 스님은 1976년 불일국제선원을 설립하여 외국인 수행자들을 따로 지도했다. 그리고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LA, 카멜, 제네바 등지에 송광사 분원을 설립하며 전법활동의 영역을 넓혔다.

구산 스님 문하의 대표적인 외국인으로는 스티븐 배철러와 마르티네 배철러 부부 그리고 로버트 버스웰을 꼽을 수 있다. 마르틴 배철러는 구산 스님 문하로 출가하여 성일이란 법명을 받고 10년 동안 수행했다. 스티븐 배철러는 다람살라에서 티베트불교를 수행한 뒤 구산 스님 문하로 재출가하여 법천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티베트불교와 위빠사나 수행을 모두 체험한 스티븐은 존재론적 질문을 안고 1981년 한국으로 들어와 3년 동안 구산 스님의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구산 스님이 입적하자 영국으로 돌아가 가이아 하우스의 수석교사로 활동하며 불법을 전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마르티네 배철러는 학생운동을 하던 18세 때 《법구경》을 읽고 삶의 전환을 맞이했다. 그녀는 태국을 거쳐 1974년 한국으로 들어와 구산 스님께 출가했다. 마르티네는 《선의 원리》라는 책을 통해 선에 대한 이론은 물론 한국선, 일본선, 중국선에 대해 소개했다. 이 책에는 자신이 체험한 한국선과 구산 스님에 대한 내용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녀의 또 다른 저서인 《연꽃을 밟고 걷기》에서는 전 세계 비구니 18명의 삶과 수행을 다루고 있다.

나아가 《여성의 불교, 불교의 여성》이라는 책에서도 한국 비구니 스님들에 대해 다루었다. 이는 한국불교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던 시절 한국불교를 세계에 소개하는 중요한 활동이었다. 이처럼 스티븐과 마르티네는 명상과 강연 등의 활동으로 서구에 불교를 전파하며 구산 스님과의 인연을 해외전법으로 꽃피웠다.

구산 스님 문하에 또 한 명의 푸른 눈의 납자는 로버트 버스웰이다. 버스웰은 대학생이던 1972년 태국에서 비구계를 받고 1년간 출가 생활을 했다. 그곳의 기후가 맞지 않아 고민하던 차에 한국에 수행전통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왔다. 1974년 구산 스님 문하에서 혜명이라는 법명을 받고 출가하여 5년간 수행했다. 1976년 송광사에 있을 당시 도반들과 함께 구산 스님의 법문을 영역하여 《구산(Nine Mountains)》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고, 보조지눌의 법어를 영역하는 작업에도 기여했다.

구산 스님 문하에서 불교를 체험한 버스웰은 UCLA를 한국학의 메카로 키운 인물이다. 미국으로 돌아간 버스웰은 UC버클리에서 원효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1994년 UCLA에 한국학연구소를 설립했다. 2001년에는 UCLA 내에 불교학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으로 활동했으며, 한국학연구소와 불교학연구소가 속해 있는 국제학연구소의 부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학연구소는 미국 내에서 한국학 전임교수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으며, 불교를 포함한 한국학 강의에는 2천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수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눌과 한국선에 대한 내용을 담은 《빛의 연원을 찾아서》, 한국과 중국불교의 선사상을 다룬 《중국과 한국에서의 선불교 사상 형성》, 송광사의 수행 경험을 담은 《선불교 승원 체험》 등을 발간하여 한국불교와 한국의 수행문화를 알리는 데 기여했다.

 

5) 고암 스님과 해외전법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불교의 해외전법은 몇몇 선지식들의 고군분투에 의해 개척되어 온 측면이 강하다. 이와는 다소 궤를 달리하지만 분주히 해외로 다니며 전법에 힘쓴 분들도 빼놓을 수 없다. 대표적인 스님이 조계종 종정을 지낸 고암 스님이다. 고암 스님은 범어사 조실, 해인총림 방장, 신흥사 조실, 대각사 조실 등을 두루 거치며 후진 양성과 한국불교 발전에 기여한 큰 스님으로 평가받고 있다.

불교 발전을 위한 스님의 노력은 국내에 머물지 않고 해외로까지 확장되었다. 스님은 1975년 하와이 무량사를 창건했고, 하와이 대원사 조실을 지냈다. 대원사는 하와이에서 가장 큰 종교 시설이자 미주 전역에서 가장 큰 한국식 전통사찰로 손꼽힌다. 스님은 1976년 고려사, 대원사, 청광사 등 일본의 한국사찰, 1978년 하와이의 대원사와 로스앤젤레스 관음사, 1985년 호주 시드니 불광사, 홍법사, 반야사 등지에서 보살계를 설하며 해외전법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특히 스님은 1988년 미국 캘리포니아 정원사 개원식에 증명법사로 참석차 가던 길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입적하게 되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전법에 열정을 쏟았고, 전법의 행로 중에 입적에 든 것이다. 그래서 일타 스님은 고암 스님의 비문에서 “80세 고령이 되어서도 더욱 건강하시어 동서 세계를 일주하시면서 감로의 법문을 내려 세계를 마치 한 송이 연꽃과 같게 하는 상서를 나투셨다.”고 기록했다. 한국불교의 해외전법사에서 보나 고암 스님의 일생에서 보나 해외전법은 승가와 교단에서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해외전법을 고민하는 것은 스님께서 마지막까지 추구했던 전법정신을 계승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4. 한국불교 해외전법 성과와 과제

상술한 바와 같이 한국불교는 반세기에 이르는 해외전법의 역사가 있고, 그동안 일정 정도의 성과도 거두었다. 현재 조계종에 등록된 해외사찰은 27개국에 걸쳐 138개 사찰이 분포해 있다. 문제는 세계 곳곳에 골고루 분포되지 못하고 무려 절반에 해당하는 71개 사찰이 미국에 편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중국에 10개, 캐나다에 9개의 사찰이 분포해 있다. 뉴질랜드와 호주에 각 4개가 분포해 있고, 단 하나의 사찰만 있는 국가도 13개국이나 된다. 대륙별로 보면 북미가 80개로 압도적이고, 아시아가 32개로 그 뒤를 잇고 있다. 유럽과 남미에는 각각 9개의 사찰이 분포해 있다.

하지만 2009년 조계종에서 발간한 《해외사찰 편람》에 등재된 해외사찰은 이보다 많은 145개의 사찰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2011년 제정된 해외특별교구법에 따라 사찰 등록요건이 복잡해지면서 미처 종단에 등록하지 못한 사찰들이 발생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조계종에 등록하지 않거나 파악되지 못한 사찰들까지 포함하면 현재 조계종의 해외사찰은 대략 160~170여 개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상과 같은 통계를 바탕으로 해외포교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극소수의 국가에만 한국불교가 진출해 있다는 점이다. 유엔 회원국은 193개국에 달하지만, 이들 나라 중에 한국 사찰이 진출한 곳은 27개국에 불과한 것은 남겨진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지역적 편중이 심하다는 점이다. 138개 사찰 중 무려 80개의 사찰이 북미에 집중되어 있다. 숭산 스님이 설립한 관음선종 역시 미국에 37개 분원이 집중되어 있다. 이런 결과는 이들 국가에 교민들이 많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셋째, 유럽 지역에는 단 9개의 사찰뿐이라는 점이다. EU 회원국이 27개국인 것을 감안하면 3분의 1에 불과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은 기독교의 쇠락 추세가 뚜렷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종교에 대한 욕구가 상대적으로 크다. 실제로 영국에는 250여 개의 불교단체가 있지만 대부분이 티베트불교와 남방불교, 일본불교가 주류를 이루는 반면, 조계종 사찰은 한 곳에 불과하다. 유럽에서 활동했던 원명 스님은 교민들이 많은 유럽에 한국 포교당이 절대 부족함을 지적했다. 호주나 남미로부터도 스님을 보내달라는 요청도 받지만 갈 스님이 없어 대응하지 못한다고 애석해했다. 유럽 지역에서 불교에 대한 수요가 있지만 그것에 부응할 역량이 부족해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제한된 인력과 재원으로 북미에 치우친 것은 해외전법 50년이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이미 불교신도들이 있는 아시아에 32개의 사찰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불교와 세계불교와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한국불교라는 민족적 특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불교국가에 다시 전법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교민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불교의 해외전법은 주로 교민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해외사찰의 숫자가 138개나 되지만 현지인 포교는 매우 미미한 상황이다. 교민을 대상으로 한 사찰은 한국이라는 영토 밖에 있으므로 해외불교에 해당하지만,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법과는 맥락이 다르다.

한국불교의 해외전법은 지난 반세기 동안 몇몇 선지식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개척되어 왔다. 그분들의 원력과 헌신으로 현재 138개에 달하는 해외사찰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살펴본 바와 같이 극복해야 할 과제 역시 산적해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룩한 성과와 성공 요인을 잘 분석하여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

 

서재영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한국선학회 집행위원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간화선 수행의 성찰과 과제》 《아침바다 붉은 해 솟아오르네》 등이 있으며 40여 편의 연구논문이 있다. 현재 조계종 환경위원,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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