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고암대종사 열반30주년 추모 학술세미나 ‘한국불교의 역사적 전통과 미래’(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10월 12일)에서 발표된 논문을 축약 정리한 것이다.

 

1. 시작하는 말

수계는 불교도의 생활 규범인 계율을 수지하며 불교교단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약속하는 의식이다. 특히 비구 · 비구니를 배출하는 구족계(具足戒) 의식은 승가의 주요 구성원을 탄생시키는 과정이므로 다른 5중(衆)에 비해 엄격한 절차를 거쳐 진행된다. 《사분율》 등의 율장에 따르면, 승가가 형성된 초기에는 ‘잘 왔구나. 비구야(ehi bhikkhu)’라는 붓다의 한마디 혹은 불법승 삼보에 대한 귀의의 표명이 입단 허가로 기능했다. 하지만, 점차 제도가 정비되면서 3사7증(三師七證)이라 불리는 승려 10명의 입회하에 백사갈마(白四羯磨)로 진행되는 구족계 의식이 정착하게 되었다. 즉, 구족계 희망자를 포함한 최소 총 11명의 비구가 결계(結界)를 통해 하나의 현전(現前) 승가를 형성하고 이를 기준으로 구족계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계맥 혹은 율맥은 전수되어 갔으며, 인도는 물론이거니와 불교가 전래된 타지에서도 이는 비구 · 비구니를 배출해내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의식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경우에도 불교 전래 후 구족계 의식의 정비는 중요한 과제였다. 중국의 경우 3세기 중반에 수계의식에 필수불가결한 계본(戒本)과 갈마문(羯磨文)이 번역되면서 이후 일부 사람들을 중심으로 미비하나마 수계의식이 실행되다가, 5세기 초에 4대 광율(廣律)의 번역이 완성되면서 비구는 물론이거니와 비구니의 수계의식까지 율장에 부합하는 형태로 정비되었다. 그런데 거의 동 시기에 중국불교계에는 《보살지지경》을 비롯한 유가 계통의 삼취정계(三聚淨戒)와 10중 48경계의 범망계가 등장했다. 이들이 기존의 구족계와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지 않은 점이 많지만, 보살계는 비구 · 비구니로서 계체를 얻게 되는 구족계 수계 후(혹은 앞서 사미일 때 받는 경우도 있음)에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비구 · 비구니가 되기 위해서는 《사분율》 등 전통 부파의 율장에서 설하는 구족계 의식을 거쳐야 했다는 점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한다.

한편, 6세기 중반경에 불교가 전래된 일본의 경우에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8세기 중반경에 중국에서 감진(鑑眞, 688~763) 일행이 오면서 비로소 수계의식의 정비를 맞이하게 된 일본에서는 이후 도다이지(東大寺)와 간제온지(觀世音寺), 야쿠시지(藥師寺)의 세 계단을 중심으로 율장에 근거한 구족계 의식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9세기 초에 사이초(最澄, 767~822)는 도다이지 등에서 받는 구족계를 소승계라 부정하고 범망 10중 48경계를 비구 · 비구니로서 계체를 얻는, 이른바 구족계로서 인정하는 원돈계(円頓戒)를 주장하였다. 이는 감진 이래 《사분율》 등에 근거하여 수계해 온 남도(南都)의 승려들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았지만, 사이초의 사후에 히에이잔(比叡山)에 대승계단이 설립되면서 이후 일본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에는 어떠할까. 수계와 관련하여 명확하게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아 한국불교의 계맥과 계단 상황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 보건대 중국과 유사한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즉, 범망보살계 단수(單受)만으로 비구 · 비구니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등장하여 큰 영향을 미쳤던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보살계는 대승의 출가보살이 되기 위해 추가로 받는 계이며, 비구 · 비구니로서 계체를 얻는 수계는 전통 부파의 율장에서 설하는 구족계가 대세였다. 물론 《범망경》이 미친 영향을 고려할 때 범망보살계 단수 주장이 등장하거나 실행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우며, 그런 사례로서 세심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일본처럼 명확한 하나의 흐름으로 그 모습을 확인하게 해주는 자료는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한국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계맥의 전지는 《사분율》 등에 따른 구족계 수계가 중심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보살계의 수계는 대승의 출가보살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행위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비구 · 비구니로서 계체 여부를 좌우하는 우선적인 조건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의 계맥과 계단 개설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이 점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요컨대 비구 · 비구니를 배출하는 수계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정비되며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2. 불교 전래와 수계의식의 정비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후 언제 어디서 어떤 형식으로 출가자의 수계식이 처음 이루어졌는지 명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아쉽게도 관련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 중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의 경우, 수계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백제의 경우에도 385년(침류왕 1) 2월에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짓고 10명을 승려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때의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다. 그런데 《일본서기》 등의 일본 자료에 의하면, 6세기 후반경에 백제로부터 온 손님에게 일본 대신이 백제의 수계법에 대해 물었을 때 “비구니들의 수계법이란 먼저 비구니 절 안에서 10명의 비구니 스승을 청하여 비구니 본계(本戒)를 받은 후 곧 법사사(法師寺)로 가서 10명의 법사를 청하여 앞서 말한 비구니 스승 10명과 합쳐 20명의 스님으로부터 본계를 받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백제에서는 587년 이전의 어느 시기부터 《사분율》 등 율장에 규정된 대로 ‘이부승수계(二部僧授戒)’를 통해 비구니가 탄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부승수계란 비구니가 될 때 적용되는 수계법이다. 2년간의 육법(六法) 수행을 마친 식차마나(式叉摩那)는 3사7증으로 구성된 비구니 승가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3사7증으로 구성된 비구 승가에서 재차 구족계를 받아야 비구니가 될 수 있다. 만약 당시에 이부승수계가 이루어졌다면 당연히 비구 승가도 성립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비구 역시 율장의 규정에 따라 3사7증으로 구성된 비구 승가에서 수계갈마를 통해 배출되었을 것이다.

신라의 경우에도 삼국통일(676년) 이전에 실행되었을 수계의식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몇 가지 일들을 통해 당시의 수계 상황을 추정해 볼 수는 있다. 먼저 신라승에 의해 찬술된 계율 관련 저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평왕 대에 지명(智明)이 《사분율갈마기》를 저술한 것을 시작으로 선덕왕 대에는 자장(慈藏)이 《사분율갈마사기》와 《십송률목차기》를, 원승(圓勝)은 《사분율갈마기》 《사분율목차기》 《범망경기》를, 7세기 전반에는 지인(智仁)이 《사분율초기(四分律抄記)》를 저술했다. 한눈에 보아도 《사분율》에 관한 저술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 저술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제목으로 볼 때 《사분율》 계통의 계본과 갈마본에 대한 주석임을 알 수 있다. 수계의식을 비롯하여 승가 주요 의식의 실행에 필수불가결한 것들이다. 특히 지명은 신라에서 《사분율》에 주석을 베푼 최초의 승려로, 당시 수계작법의 필요성에 따라 《사분율갈마기》를 저술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한편, 수계와 관련하여 좀 더 명확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것은 자장이다. 당 유학 후 643년에 귀국한 자장은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교단 정비에 나서는가 하면, 일반인을 위한 교화 활동에도 매진하였다. 이로 인해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든 이가 열 집에 여덟아홉이나 되고, 머리를 깎고 승려 되기를 청하는 이가 해마다 달마다 늘어가자, 자장은 통도사를 세우고 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는 한국불교사에서 계단(戒壇), 즉 수계의식이 이루어지는 일정한 공간을 언급한 최초의 기록이다. 당시 이 계단에서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수계의식이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대국통이 된 후 교단 정비를 위해 자장이 실행했던 제도 등으로 보아 《사분율》에 근거한 구족계 의식을 통해 승려를 배출했을 가능성이 크다. 《속고승전》 〈자장전〉에 의하면, 불교가 전래된 지 100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불교계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자장은 승니 5부(비구 · 비구니 · 사미 · 사미니 · 식차마나)로 하여금 각각 예전부터 익힌 것을 더욱 힘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다시 강관(綱管)을 두어 감찰 유지하게 하였으며, 보름마다 계를 설하고 율에 의거해 죄를 참회하여 없애게 하고, 봄과 겨울에 시험하여 계율을 지키고 범하는 것을 알게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보름마다 계를 설하고 율에 의거해 죄를 참회하여 없애도록 하였다’는 기술이다. 이는 승가의 주요 의식 중 하나인 포살(布薩, uposatha)에 관한 것이다. 포살이란 보름마다 한 번씩 비구 혹은 비구니가 각각 한자리에 모여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戒經)를 들으며 자신의 죄를 고백 · 참회하는 의식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장은 《사분율갈마사기》를 찬술했다. 갈마는 포살이나 수계의식 등 승가에서 실행되는 모든 의식을 가리키는 말로, 자장은 그 구체적인 실행법을 파악하기 위해 이 문헌을 연구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자장이 《사분율》 등의 계본과 갈마본에 근거하여 통도사 계단에서 출가자 배출을 위한 수계의식을 실행했을 것이라는 추정 역시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장 이전에는 신라불교계에서 어떻게 출가자를 배출하고 있었을까? 앞서 언급한 《속고승전》의 내용으로 보아 자장이 교단 정비를 시작할 무렵 신라불교계에는 승가 운영과 관련하여 명확한 규범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이미 백제에서는 비구니의 이부승수계가 실시될 정도로 율장에 근거한 수계의식이 실행되고 있었다고 보이는 점, 또한 지명이 《사분율갈마기》를 찬술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체계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자장 이전에도 신라불교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출가자의 수계의식은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울주천전리서석(蔚州川前里書石)’을 들 수 있다. 535년(법흥 22)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문에서는 ‘법흥대왕’이라는 기록과 함께 도인(道人, 출가승)을 비구승과 사미승이라는 두 지위로 명확히 구분하여 표기하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은 구족계 수지 여부에 근거한 구별이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시기에 어떤 형식으로든 사미계와 구족계 수계가 개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는데,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견해라고 생각한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나중에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불교 공인 20여 년 후인 진흥왕 대에 이미 승직을 설치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한다면, 출가자 배출을 위한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수계 관련 의식이 일찌감치 도입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따라서 신라의 경우 계단을 마련하여 《사분율》 등의 율장에 근거한 체계적인 구족계 의식이 이루어진 것은 자장의 통도사 계단 마련이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이전부터 미비하나마 《사분율》 등에 근거한 일정한 의식을 통해 비구를 배출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나말여초의 관단수계

아쉽게도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무렵까지 신라에서 실행된 수계의식이나 계단에 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적어 자장 이후의 상세한 상황은 알기 어렵다. 하지만, 9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성된 고승비(高僧碑)에 남아 있는 다수의 수계 관련 기록은 그 전후의 상황을 유추하는 데 유용하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나말여초에는 주로 관에서 운영하는 계단인 ‘관단(官壇)’에서 3사7증의 입회하에 구족계 의식이 실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9세기 이후부터 고려 초까지의 수계 관련 기록에 대해서는 이미 상세한 연구가 발표되어 있으므로, 이하 이에 근거하여 나말여초의 수계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806년에 22세의 나이로 부석사(浮石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혜철(慧徹)을 비롯하여 9세기에 등단 수계한 인물로 기록에 전하는 것만 30여 명 이상을 헤아린다. 물론 그 이후에도 12세기 무렵까지 많은 승려가 구족계를 받고 비구가 되었다. 수구(受具), 수대계(受大戒), 수구계(受具戒), 수구족계(受具足戒) 등으로 명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구족계 수계 사례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대안사적인선사비(大安寺寂忍禪師碑)에 보이는 혜철의 구족계 수계 당시의 상황을 보면, 22세에 대계를 받았고, 10사(師)의 입회하에 구족계 수계의식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단(壇)에서 내려오자”라는 표현으로 보아 등단수계(登壇受戒), 즉 일정한 형태를 갖춘 계단 위에서 수계식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827년에 화산(花山)에서 구족계를 받은 체징(體澄)에 관한 기록에서도 “계단장(戒壇場)에 들어가”라는 표현이 나오며, 882년(中和 2)에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편광(遍光)의 경우에도 “계단에 올라”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 외에도 구족계 수계의식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계단이나 계단장이라는 표현을 언급하는 것이 많다. 이런 점에서 이미 9세기 이전부터 수계식은 계단 등 특정 공간에서 3사7증의 입회하에 실행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계단은 대부분 관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9세기경부터 고승비 등 금석문 자료에 보이는 이들 수계 사례를 분석해 보면, 이들은 출가 사원이 아닌 관단이 있는 특정 사원에서 수계하고 있다. 예를 들어 행적(行寂, 832~816)은 해인사에서 출가했지만 855년(文聖 17) 23세 때에 복천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며, 개청(開淸, 854~930)은 화엄산사에서 출가해 화엄을 공부하다가 877년(憲康 3)에 엄천사(嚴川寺)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다시 본사로 돌아가 경전 공부를 했다고 한다. 또한 형미(逈微, 864~917)는 보림사(寶林寺)에서 출가했으나 화엄사에서 수계하였고, 찬유(璨幽, 869~958)는 삼랑사(三郞寺)에서 출가하였으나 장의사(莊義寺)에서 수계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출가한 사원과 다른 특정 사원에서 수계한 사례는 상당히 많다. 이들 사례를 통해 계단은 특정 사원에서 관단 계단으로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계의식은 율사가 집행한 것으로 보인다. 율사라 불리는 것으로 보아 계율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승려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

이들 관단 사원은 9주(州), 즉 명주 복천사 · 강주 엄천사 · 전주 화엄사 · 무주 영신사 · 한주 장의사 · 한주 장곡사 · 웅주 보원사 · 삭주 법천사 · 양주 통도사 · 금성 영묘사 등으로 전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국가에서 9주에 관단을 설치하여 구족계 희망자에게 수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말여초 동안의 계단과 수계 사례를 고승비 등에 근거하여 정리한 자료를 보면, 855년(문성 17)에 복천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은 행적의 경우가 금석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관단 명시 사례이다. 한편, 관단이라는 명시는 없지만 이보다 앞서 수철이 834년(흥덕 9)에 복천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사례가 보인다. 지방에 분포한 관립계단사원의 창건 연대가 확인되는 것은 755년(景德 14)의 화엄사이므로, 이에 834년과 855년에 복천사 관단에서 이루어진 수계 사례를 종합해 보면, 계단사원이 지방에 소재하면서 수계 기능을 한 것은 755년에서 830년 사이로 추정된다. 자장에 의해 통도사 계단이 마련된 후 점차 확대되어갔을 가능성도 있으며, 국가의 개혁 정치 등과 관련하여 승가 통제의 개혁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9주에 관단을 설치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신라 이래의 관단수계를 계승하였는데, 초에는 개경과 그 주변을 중심으로 계단을 설치하였다. 대표적으로 924년(태조 7)에 창건된 흥국사에 관단이 설치되어 945년(혜종 2)에 영준(英俊)이 여기서 수계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 919년(태조 2)에 창건된 영통사(靈通寺)에도 관단 사원이 있어 지종(智宗, 930~1018)이 946년(定宗 1)에 수계하였다. 또한 개경 주위의 구룡산 복흥사(福興寺)에 설치된 관단에서는 975년(광종 26)에 결응(決凝, 964~1053)이 수계했으며, 소현(韶顯, 1038~1096)도 1059년(문종 13)에 이 관단에서 수계하였다. 또한 개경 동쪽에 있는 불일사(佛日寺)에서는 화엄 · 선종 · 유가종 등 다양한 출가승이 이 사원에서 수계하였다. 1018년(현종 9)에는 개경의 개국사(開國寺)에서도 개국사탑을 수리하고, 사리를 안치하고, 계단을 설치하여 3천2백여 명을 도승하였다고 한다. 또한 1036년(靖宗 2)에는 영통사(靈通寺) · 숭법사(崇法寺) · 보원사(普願寺) · 동화사(桐華寺) 등의 계단에서 소업경률(所業經律)로 시험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역시 관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중 보원사와 동화사는 각각 가야산과 팔공산에 있는 지방소재 사원이라는 점에서 정종 이후에는 지방에도 특정 계단사원이 설치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종파별로 사원을 분리하여 각 종파 소속의 승려들이 개별적으로 수계하도록 하지 않고 종파 상관없이 일정한 사원에서 수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사원은 국가의 공공사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출가 이후 구족계의 수지는 필수적이었으며, 고려 시기 고승의 수행상의 행적을 보면 출가 체발, 구족계 수계, 승과 응시의 단계를 거치는 등 구족계 수계가 정식 승려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구족계를 받지 않고 승과에 응시한 예는 없으며, 승과 합격자에게는 법계(法階) 및 토지 지급의 경제적 급부가 주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관단수계 체계는 13세기에 들어서면서 무너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출가 후 구족계를 받기까지의 햇수를 보면, 신라 말에는 11년에서 2년까지 차이가 나지만, 고려 전기에는 1~2년, 고려 후기에는 아예 출가와 동시에 구족계를 받고 계랍이 계산된다. 또한 구족계 수계 나이도 신라 말에는 33세부터 26세, 24세, 19세 등 비교적 20세에 가까운 분포를 보이지만, 고려시대로 접어들면 15세 전후로 낮아지고 고려 후기가 되면 좀 더 낮은 나이에 받는다. 즉, 13세기 이후의 승려 수계 기록을 보면 체발과 동시에 구족계 수계가 이루어지고 수계 연령도 낮아지며, 수계를 위해 특정 계단사원을 찾는 일도 사라지게 된다. 심지어 구족계를 받지 않고 승과에 합격하는 사례도 보이는 등 구족계가 갖는 의미나 역할이 쇠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대은 · 만하계맥과 서상수계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고난의 시기를 보냈던 조선시대에는 공식적인 계단산림은 개설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국가적 차원에서 계단을 세우고 승려를 득도시켰던 고려시대와는 달리 국가 공인의 승려가 되는 길은 끊겼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금석문이나 비문 등의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비구계 수계와 관련하여 적지 않은 기록이 보이며, 조선 전기(1392~1592)나 중기(1592~1637)에 비해 후기(1637~1897)로 갈수록 비구계 수계 사례는 많아진다.

따라서 관단이 기능하지 못했을 뿐 조선시대에도 개인 사찰 단위로 승려는 배출되고 있었으며, 미비하나마 수계식도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7세기 중반경에 편찬 · 간행된 3종의 불교 상례집(喪禮集), 즉 벽암각성(碧巖覺性)의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나암진일(懶庵眞一)의 《석문가례초(釋門家礼抄)》 허백명조(虛白明照)의 《승가예의문(僧家礼儀文)》에 계사(戒師), 양육사(養育師, 得度師), 수계사(授戒師), 갈마사(羯磨師), 교수사(教授師) 등 수계와 관련하여 역할을 했을 승려를 가리키는 명칭이 다수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또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후반에 걸쳐 지리산 등을 중심으로 구족계 · 보살계 관련 계율서들이 다수 편찬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여법한 수계의식에 대한 관심이 높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들 문제는 앞으로 좀 더 상세한 검토를 기대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이 글에서는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두 계맥을 중심으로 근현대기의 계맥 내지 수계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 사찰에 전해지는 ‘호계첩문(護戒牒文)’에서는 19세기 초에 끊겼던 계맥을 영광 도갑사의 대은낭오(大隱朗旿, 1780~1841)가 서상수계(瑞祥受戒)를 통해 되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은은 당시 계학이 실전(失傳) 상태에 놓여 있는 실정을 개탄하며, 1826년(순조 26)에 지리산 칠불암에서 스승 금담보명(金潭普明, 1765~1848) 장로와 함께 기도 끝에 서상수계를 실현했다고 한다. 대은이 서상수계를 받자 스승인 금담은 “나는 오직 법을 위함이요, 사자(師資)의 서열에는 구애받지 않는다.”라며 상좌인 대은을 전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이후 이 대은계맥은 해남 대흥사의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에서 범해각안(梵海覺岸, 1820~1896)을 거쳐 호암문성(虎岩文性, 1850~1919)→제산정원(霽山淨願, 1862~1930)→용성진종(龍城震鐘, 1864~1940) 등으로 전해지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이러한 서상수계에 대해 일각에서 의문이 제기되자, 그 논란을 의식하여 1892년에 만하승림(萬下勝林) 율사는 청으로 건너가 법원사(法源寺) 계단의 창도한파(昌濤漢波) 율사로부터 대 · 소승계를 받고 계맥을 전수해 왔다. 중국에서 돌아온 만하는 1897년 7월 15일에 양산 통도사에 계단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수계법회를 가졌다고 한다.

이후 이 두 계맥을 중심으로 현재까지 한국불교의 계맥은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 후기에 출가자를 배출하는 수계식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리하여 계맥이 완전히 끊겼다는 일반적인 이해는 이 두 계맥에 관한 기록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후기에도 구족계 의식이 실행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는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 두 계맥이 갖는 특징을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은과 만하, 이 두 계맥은 양자 모두 서상수계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만하는 대은 등에 의한 서상수계 계맥에 의구심을 갖고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정통 계맥을 이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만하가 중국에서 받아온 창도한파의 율맥은 고심여형(古心如馨, 1541~1615)으로부터 전승된 것으로, 고심은 오대산을 참배하며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던 중 문수보살로부터 득계(得戒)의 감응을 얻은 뒤 강남으로 돌아가 각지 30여 곳에서 전계(傳戒)의 법회를 중흥시켰다고 한다. 따라서 만하가 받아온 율맥 역시 서상수계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대은이나 고심이 받았다고 하는 서상수계란 무엇일까? 서상수계란 보살계 경전에서 설하는 특수한 수계법으로 ‘자서수계(自誓受戒)’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통적으로 수계는 ‘종타수(從他受)’라고 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 원칙이다. 구족계의 경우 3사7증이라고 하여 10명 승려의 입회하에 구족계가 주어진다. 그런데 자서수계란 불보살 앞에서 스스로 계를 받고자 맹세함으로써 계를 받는 형태를 말한다. 경전에 따라 자서수계만을 언급하는 것도 있지만, 호상(好相)의 감득을 필수 조건으로 추가하는 것도 있다. 호상이란 부처님이 정수리를 어루만진다거나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등의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을 말한다. 자서수계로 호상까지 본 것을 서상수계라고 한다. 자서수계와 서상수계를 함께 설하는 대표적인 경전은 《범망경》이다. 《범망경》 하권에서는 보살이 지켜야 할 10중 48경계를 설하는데, 그중 제23경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자가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 좋은 마음으로 보살계를 받고자 할 때 불보살의 형상 앞에서 스스로 서원하여 계를 받되, 7일 동안 불전에서 참회해야 한다. 호상을 보면 바로 계를 얻을 수 있다. 만약 호상을 얻지 못하면 2 · 7일, 3 · 7일 내지 1년 동안이라도 호상을 얻을 필요가 있다. 호상을 얻고 나서야 부처님과 보살의 성상 앞에서 계를 받을 수 있다. 만약 호상을 얻지 못하면 비록 불상 앞에서 계를 받았더라도 계를 받았다고 할 수 없다. 만약 눈앞에 먼저 보살계를 받은 법사 앞에서 계를 받을 때는 호상을 볼 필요가 없다. 무슨 이유인가 하면, 이 법사는 법사와 법사가 서로 전수한 것이기 때문에 호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법사 앞에서 계를 받으면 계를 얻는 것이니, 존중하는 마음을 내기 때문에 계를 얻는다. 천 리 안에 계를 줄 만한 법사가 없으면 부처님과 보살의 성상 앞에서 계를 받을 수는 있지만, 이때는 호상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의하면, 보살계를 받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법사 앞에서 받을 경우이다. 이때는 호상을 볼 필요가 없다. 또 하나는 천 리 안에 계를 줄 법사가 없는 경우이다. 이때는 불보살 앞에서 스스로 서원하여 계를 받을 수 있지만, 7일 동안 참회한 후 호상을 보아야 한다. 즉, 자서수계의 경우에는 반드시 호상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국 각 계단의 ‘호계첩문’에 묘사된 대은 율사의 수계 상황을 보면, 《범망경》에서 설하는 자서수계의 내용에 그대로 부합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해인사 금강계단 호계첩문〉에서는 “1826년(순조 26) 7월 15일 해제 후 하동 칠불암 아자방에서 서상수계를 서원하고 7일간의 기도를 봉행하던 중, 7일 만에 한 줄기 빛이 대은의 정수리 위에 관주(灌注)하므로……”라고 기술되어 있다. 7일 동안의 기도, 정수리에 비친 한 줄기 빛, 이는 《범망경》에서 말하는 자서수계와 서상수계의 특징 그대로이다. 범망계가 한국불교에 미쳐온 영향 등을 고려해도 대은의 서상수계가 《범망경》 제23경계에 근거한 수계의식이었을 가능성은 크다.

그런데 제23경계는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 좋은 마음으로 보살계를 받고자 할 때”라고 시작하고 있다. 이를 보면 여기서 말하는 자서수계의 내용은 보살계, 즉 범망보살계이다. 그렇다면 대은은 범망계를 받고 금담 장로에게 비구계와 보살계를 전해 준 것이 된다. 만약 이 시기에 완전히 계맥이 끊겼고 대은이 서상수계를 통해 이를 회복시켰다면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즉, 대은은 범망계를 받고 비구가 되고 출가보살이 된 것이다. 서상수계로 범망계를 받고 비구로서의 계체를 얻었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후 만하를 비롯한 여러 승려가 대은의 서상수계가 갖는 정통성에 의문을 갖고 중국으로 계를 받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도 필시 이 점에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이나 한국의 수계전통에서 범망계를 받고 비구의 계체를 얻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명확한 사례는 확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완전히 끊겼던 계맥, 다시 말해 승려를 배출하는 율맥이 대은을 기점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특수한 예가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입장에서 볼 때 보살계는 구족계를 받은 후에 추가로 받는 것이지 보살계 수계 그 자체가 구족계의 기능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수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제대로 된 수계의식을 통해 계맥을 이어가기 어려웠던 열악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대은이 기존의 전통을 무시하고 범망계로 비구의 계체를 얻으려 했다고 보아야 할까? 그렇다면 이는 일본 사이초의 경우처럼 한국불교의 계율 전통에서 큰 획을 그을 만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후 대은계맥의 흐름으로 볼 때 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추정이다. 그보다는 통도사 율원장 덕문이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중수계(重受戒)’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이 장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 후기에도 승려가 배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적지 않다. 따라서 대은과 그의 스승 금담은 이미 비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상황으로 인해 미비한 구족계 수계의식을 거치고 비구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지계 의식이 매우 높은 승려들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대은의 서상수계는 승려로서 좀 더 명확하게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매우 피폐해 있던 당시의 상황을 굳건한 지계의식의 회복으로 극복하고자 자서수계를 통해 보살계를 중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만하가 중국에서 받아온 고심율맥 역시 중수계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 같은데, 이 점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글을 통해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문제 제기의 선에서 그치지만, 앞으로 대은의 서상수계와 고심의 서상수계도 구족계와 보살계의 상호 연관성을 고려하며 많은 검토가 필요할 것 같다.

 

5. 단일계단의 정비

대은계맥과 만하계맥은 이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계맥으로 전수되어 왔다. 만하파 계맥은 통도사, 범어사, 월정사, 선학원 등의 계단을 중심으로, 대은파 계맥은 해인사, 송광사, 망월사, 화엄사 등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두 계맥에 의거하여 이후 많은 승려가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으며, 수계의식의 정비를 위한 노력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육식대처의 허용을 인정하자는 주장이 등장하고, 또한 일본이 ‘본말사법’의 주지 자격 조항 가운데 ‘비구계를 구족하고 갱히 보살계를 수지한 자’라는 내용을 삭제하여 비구계 수지 전통 자체를 뒤흔드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1954년 5월부터 1962년 4월 통합종단의 성립 때까지 식민지 불교의 잔재인 대처승을 척결하기 위해 불교 정화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승려의 출가와 교육 문제는 심각한 상황을 드러냈다. 무관이 “정화 초기 이후 1980년대까지 해인사, 범어사, 통도사를 중심으로 한 구족계 수계의식은 연 1회 내지 수년에 한 번씩 부정기적으로, 또는 각 본사에서도 몇 시간 안에 이루어지면서 미래의 한국불교를 짊어질 새로운 도제의 탄생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수계의식도 그나마 일반 신도를 중심으로 한 보살계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비구계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율장에 근거한 수계의식이기는 했으나……”라고 〈단일계단 20년사〉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와 정화 등을 거치는 동안 수계의식은 지방 사찰의 사단(寺壇)에서 두 계맥을 계승한 율사 위주로 개별 사찰 단위 혹은 율사 중심으로 비정기적으로 실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언제 어디서 어떤 과정을 거쳐 출가자가 배출되고 있는지 종단은 새로운 출가자에 대한 일관된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그 결과 이들에 대한 관리나 교육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는 출가자의 자질을 떨어뜨렸고, 나아가 승가의 위상 추락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1981년에 실행된 ‘단일계단(單一戒壇)’이다. 단일계단이란 이전 각 본사나 사찰별로 율사들의 자의로 시행되었던 수계산림을 단일화하여 종단이 지정한 계단에서 한날한시에 수계식을 거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1980년 10 · 27법난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 외부 권력의 압력에서 의식 · 의례의 통일화를 통하여 조계종도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교육의 단계적 모색 과정에서 시행되었다.

사실 단일계단은 한날한시에 한 장소에서 수계를 실행한다는 점에서 결계(結界), 즉 일정한 공간의 확보가 이루어지면 어디서나 구족계 의식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한 율장의 규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정화 등을 거치며 큰 혼란에 빠져 있던 조계종은 일관된 수계 원칙을 구성원들이 공유하며 질서 있게 승가를 이끌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출가자의 탄생에 종단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조계종 전체를 하나로 묶는 거대한 계단을 설립한 자운은 수계의식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사분율》 등의 율장에 근거하여 개선해갔다. 특히 비구니 이부승수계가 1982년에 부활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구족계와 사미계단을 총무원에서 지정하는 계단으로 한다.”라는 종헌 제5장 제16조에 의거하여 1981년 2월 17일 양산 통도사에서 제1회 사미 · 사미니계 수계산림 법회가 거행되었다. 한편, 제1회 구족계산림은 1981년 10월 30일부터 11월 6일까지 해인사에서 열린 제2회 단일계단에서 실현되었다. 즉, 제2회 때는 제1회 구족계와 제2회 사미 · 사미니계 수계산림이 열린 것이다. 이때부터 전계대화상도 정식으로 모시고 3사7증도 정하여 여법하게 실행되었다. 비구니계의 수계는 1982년에 열린 제3회 단일계단 수계산림 때부터 이루어졌다. 제1회 단일계단 사미 · 사미니계 수계산림의 전계대화상은 자운이 맡았으며, 제2회는 고암이 맡았다. 즉, 고암은 제1회 구족계 수계산림의 전계대화상이었다.

1,70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계맥은 올해(2018년) 4월 4일부터 12일까지 8박 9일간 제8교구 본사 직지사에서 제38회 단일계단 구족계가 실행되면서 변함없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사미 124명, 식차마나니 65명 등 총 189명의 승려가 구족계를 수지하고 승가의 정식 구성원인 비구 · 비구니가 되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사문석자(沙門釋子)로서 고수해야 할 원칙을 상실하지 않았던 고승들, 이들의 판단력과 실천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계의식이 중요한 이유는 계단이라 불리는 일정한 장소에서 3사7증으로 대표되는 승가의 인증하에 비구 혹은 비구니로서 계체(戒體)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 계체야말로 그 혹은 그녀가 불도 수행을 하는 수행자로서 청정하게 살아갈 근원적인 힘이 된다. 수계의식 때 계사와 구족계 희망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세웠을 서원과 결의, 이것이 없다면 승가는 존속할 수 없다. 수계의식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잊지 않고, 여법한 수계의식을 통해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한 무게를 기억하며, 수행자들이 청정 승가를 형성하여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기를 기원한다. ■

 

 이자랑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동국대 인도철학과 졸업, 일본 도쿄대학 인도철학 · 불교학 전공 석사, 박사. 〈초기불교교단의 연구-승단의 분열과 부파의 성립〉으로 박사학위 취득. 초기불교 교단사 및 율장에 관한 논문 50여 편을 비롯하여 《나를 일깨우는 계율이야기》 《붓다와 39인의 제자》 《도표로 읽는 불교입문》(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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