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운주사를 다녀왔다. 입구에서부터 석탑이며 석불들과 보낸 새삼 행복한 시간이었다. 운주사는 이 나라 전체가 인정하는 별종 사찰 중의 하나이다. 와불을 비롯하여 웬만한 볼거리가 하나둘이 아니어서, 들어서는 순간부터 풀어낼 수 없는 질문들로 일견 즐거운 핑퐁게임을 벌이곤 한다. 어느 때 사람들이 세웠을까. 무슨 목적으로 저리 많은 부처와 탑신을 다듬고 배치했을까. 산처럼 커지는 궁금증이 또 다른 천불 천탑이 될 지경이다.

필자에게 운주사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단골 소풍 코스였다. 십여 리가 넘는 거리이니 요즘 같았으면 멀다는 핑계를 댈 법도 하겠건만, 막무가내로 다녀왔던 걸 생각하면 그 시대이니 가능했겠다 싶기도 하다. 그 시절부터 가서 보면 뭉게구름 같은 수수께끼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당시로는 다랑논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탑신이나 부처들은 어린 맘에도 참 희한한 곳도 있다 싶던 곳이었다.

그러던 곳이 시간이 가면서 예술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문학작품이나 회화작품으로도 앞다투어 빚어지면서 운주사는 신문이나 방송을 요란하게 오르내렸고, 찾아오는 사람들 또한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는 유명 사찰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외방의 친구들은 운주사를 보러 갈 때는 필자를 앞세우는 일이 많아졌고, 그리한 것이 지금까지만 줄잡아도 100여 차례는 들고난 일종의 산책코스인 셈이다.

그러나 찾아가기로 하자면 어찌 운주사뿐이겠는가. 특별한 신심 없이도 시간만 나면 들르는 곳이 우리네 사찰이 아니던가. 그런데 사찰은 어디를 가도 예외 없이 표를 사고 검표대를 통과해야 한다. 사찰은 어느 곳이든 나름 눈여겨볼 만한 것들이 천지이다. 종교적인 것에서부터 풍경이나 문화재적인 것들까지 대목대목 짚어가다 보면 심신(心身)에는 맑은 피가 돌고 흡사 여의봉 돌리는 손오공이라도 된 듯 휘파람을 불며 구름 타고 너른 하늘을 마구 나는 기분이다. 대웅전에 들어서면 부처님의 자애로움이 봄 햇살처럼 비쳐들고 요사채며 종각의 동종이며 주련의 불법 명구며 사찰의 역사까지 참 많은 것들을 살피고 생각하게 한다.

우리네 사찰 관광은 신심 가진 이들의 종교적인 목적 빼고도 많은 문화재와 역사, 사상 등 공부할 것들이 널려 있는 참 좋은 학습 기회이다. 사찰 측으로서도 제 발로 찾아와서 돈 내고 매표한 입장객들을 무한정 맞아들일 수 있다는 것, 이 어찌 타고난 분복이 아니랴.

그런데도 불교 쪽 후손들은 조상님이 물려주신 이리 넘치는 분복의 품목들을 운용도 제대로 못한 채 손 놓고 있는 형국이다. 더 멀리 생각할 것 없이 하나만 예로 들겠다. 찾아온 입장객을 강의할 전담강사 한 사람만 배치하면 만사 오케이일 일이 그냥 지나치고 있다. 물론 요즘은 지자체의 ‘문화해설사’가 관광 소개에는 많은 도움을 주지만, 짧고 소박하더라도 불교에 대한 전문성을 갖춘 사찰 측의 전담강사가 필요하겠다 싶다.

표를 사서 입장한 관광객 중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선교적인 견지에서도 대단한 자원일 터인데 아무런 생각 없이 흘려버리고 있는 것 같다. 입장객 중에는 종교가 달라 불교에는 관심이 없는 이도 있을 것이고, 아예 백지상태의 무종교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관광코스에다 사찰에서 보낸, 전문성을 지닌 강사의 짤막하면서도 밀도 있는 강의를 곁들인다면 경내에서 떠 마신 약수 한 사발처럼 온몸이 시원해지는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가르침이 갈급한 사람부터 식견이 넘치는 사람까지 사찰에서 기획한 제대로 된 관광코스와 강의 시간은 그것이 비록 5분이나 10분에 그치더라도, 후일 어떤 모습으로 결과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설사 이 같은 일이 사찰 측이 겨냥한 신심의 포교에 당장은 무관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거쳐 가는 코스에서 사찰 측의 친절한 안내와 무심코 경청한 강의는 제공하는 측이나 제공받는 측이나 두루 따뜻하면서도 호기심 넘치는 학습 교류가 이루어질 터이다.

물이 흘러오면 물레방아는 돌아가야 한다. 다른 종교들은 자신들 신앙의 포교에는 굴속의 쥐도 파낼 만큼 적극적인데, 불교 쪽의 선교 현실은 손에 쥐여준 밥그릇도 제 것으로 끌어들일 줄 모르는, 갱내의 막장처럼 답답한 게 현실이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이 같은 생각들을 관계요로에 전달한 바도 있다. 그들도 처음에는 반색하며 실천을 약속하였는데, 그 자리만 떠나면 도대체가 꿩 꿔 먹은 자리가 돼버렸었다. 이래서 불교는 늙었다느니 잘못 터득한 허무주의나 되새김질한다느니, 할 일은 손 놓고 잿밥 타령만 늘어놓는다느니 하는 볼멘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지도자를 선출하고 경영권을 다투는 등 세속적인 사안에는 사회적으로 걱정스러운 일들도 서슴지 않는 오늘의 불교계가 정작 포교에 필요한 사안에는 모르는 건지 알고도 못 하는 건지 수수방관 일색으로 팔짱이나 끼고 있다. 불교에 대해 문외한인 필자 같은 사람의 눈에도 보이는 이 같은 일들을 불교종단의 내부에서만 모르는 건 아니라고 본다. 입장객을 상대로 둘러볼 코스를 만들고 그 한 대목쯤에서 ‘불교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나 사찰의 역사, 문화재의 이해 등등을 5분 내지 10분이라도 할애한다면 충분할 것을, 그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입장객들에게 베푼 오늘의 5분 강의는 후일에는 불교계의 운명을 바꿀 미증유의 자원이 될 수도 있다. ‘인연법’을 교리의 제일의로 삼는 불교계가 어찌하여 이리 좋은 포교 자원에는 무대책으로 일관하는 것인지. 인연이란 묘한 것이어서 예전에 들었던 소박한 강의 한 번으로도 뒷날엔 더 큰 인연으로 발전하고 아예 불교를 중흥하는 지도자를 배출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우리는 어느 구름에서 비 올지 모른다고 한다. 문득 “사과 속의 씨앗은 셀 수 있어도 씨앗 속의 사과는 셀 수 없다.”는 아포리즘 하나가 전광석화처럼 지나간다.

kj4848@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