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에 흔들려 땅 위에 수북이 쌓여가는 은행잎과 플라타너스 잎들이 초췌하다. 떨어져 누운 낙엽을 보자 아버지 생각이 났다. 몇 달 전부터 갑자기 몸이 많이 야위고 거동이 불편해진 아버지가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 가슴 한편이 먹먹해진다. 담양 어느 시골에서 차남으로 태어나신 아버지는 아주 총명한 분이었다. 광주에서 명문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큰아들의 그늘에 가려 대학입시를 치를 기회마저 얻지 못한 분이 아버지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큰누님이 할아버지 몰래 삶아준 달걀 꾸러미를 안고 상경해서 대입시험까지 치렀지만, 당시 가정 형편과 큰아들에 대한 집안 어른들의 기대치에 밀려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버지는 목숨을 버리려고 어느 날 무등산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를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천운이라고 해야 할지, 계곡의 으슥한 지점에서 숨이 넘어가는 낯선 이를 발견하고는 정신없이 그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더란다. 그 덕에 한 사람의 생명도 구하고 당신도 지금까지 우리 곁에 계실 수 있게 되었으니, 이름 모를 그분이 아버지 생명의 은인이 된 셈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삶은 이후에도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30대 후반 공직생활을 하던 중 위암 선고를 받고 생사의 기로에 서야 했다. 천만다행으로 수술이 잘되어 겨우 회복은 되셨지만,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옆구리 통증을 호소하며 응급실로 실려 가서는 몇 개월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아버지의 병명은 담석증이었는데 제거한 작은 돌멩이가 무려 26개나 되었다. 나는 그 무렵부터 조금씩 아버지의 삶에 조금이나마 공생하는 딸이 되어갔다.

어렸을 때의 기억인데, 조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자 도시에 사는 형님댁에 모셔다드리고는 소주병을 옆에 두고 속절없이 흐느끼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몇 해 전 늦은 가을 어느 새벽의 일도 잊을 수가 없다. 가족들이 모여 담소도 하고 술도 한 잔씩 하고 잠이 들었을 때였다. 거실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나가는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들어오는 기척이 없었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밖으로 나가보았더니 아버지는 혼자 몸을 움츠리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가족들이 깰까 봐 조용히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식구들을 깨워 담요 한 장을 덮어드리고 병원으로 달렸다. 고통스러워하시는 아버지를 안고 읍내로 가는 길이 얼마나 멀게 느껴지던지. 나는 심장이 쿵쾅거려 꼭 내가 죽을 것만 같았다. 읍내 병원에서는 응급처치만 하고 아무래도 이상하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 했다. 광주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갔더니 급성심근경색이라며 시술동의서에 사인을 하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심장혈관의 80%가 막혀 스텐트 시술을 해야 했다. 시술 일정을 잡은 날, 젊은 남자환자가 부정맥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걸 목격하고 시술실로 들어갔다. 엄마는 마치 이런 날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태연했다. 그런 씩씩한 엄마가 더 애처롭게 보였다. 그때 나는 보았다. 아버지 뺨에 가늘게 그려진 눈물 자국을. 수술실 방문을 한두 번 드나든 것은 아니지만 ‘내가 다시 살아서 이 문을 나올 수 있을까, 이 얼굴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심정인 것 같았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 순간 그동안 걸어온 삶의 뒤안길을 돌아보셨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금속스텐트를 세 개나 삽입하는 시술을 하고 며칠을 병원에 계셨다. 응급실의 하루는 우리가 느끼는 일상과는 달랐다. 면회도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고개를 돌려 살펴보면 저승의 문턱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절박했다. 어젯밤에는 옆 침대 할머니가 세상을 버리셨다고 하고, 오늘 아침에는 뒤쪽 젊은 남자 환자가 마지막 숨을 쉬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런 모습이 너무 힘들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또 내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자꾸 이상한 말씀을 한다는 것이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봤더니 ‘섬망증상’이라 했다. 노령의 환자 중 몸 상태가 안 좋은 경우 종종 나타나는 증상인데, 누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며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총기도 좋고 정신력도 강한 분인데 죽음 앞에서는 저렇게 약해질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응급실에서 벌어지는 아수라 같은 일상은 어떤 사람도 온전하게 지탱해주기 힘든 조건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병실도 일반병실로 옮기고 얼마 뒤에는 퇴원도 할 수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그런 분이다. 자식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지만, 어느 순간 무너질 수도 있는 그저 그렇고 그런 보통 아버지다. 명절에 손주들에게 용돈을 주면서도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올해가 명절의 끄트머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사는 분이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서는 늘 당당한 모습이고 싶어 한다. 가끔은 “죽는 게 뭐가 무서우냐. 그냥 오늘을 잘 살다가 때가 되면 가면 되지.” 하는 말씀도 곧잘 한다. 죽으면 어느 공기 좋은 산골짜기에서 바람으로 날아다녀도 좋다는 말씀도 한다. 그럴 때면 마치 오랫동안 수행을 한 어느 큰스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큰스님처럼 생사를 초탈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우리 곁에 오래오래 머물기만을 바랄 뿐이다. 자식에게 부모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손을 잡으면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아버지, 그 따뜻한 온기보다 더 큰 자비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버지는 연꽃의 군자와 같은 성품을 닮은 분이다. 늘 여여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며 살아왔다. 그런 아버지가 좀 더 오래 우리 곁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번 휴일에 다시 아버지를 찾아뵈면 꼭 “아버지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의 딸이라서 너무 행복합니다.”라는 말씀을 전해드리리라.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기뻐한다면, 그리하여 그 기쁨의 공기가 친정집 뜨락에 있는 상사화며 동백이며 채송화며 꽃잔디를 피운다면, 그 모습을 평상에 걸터앉은 아버지가 햇살을 쬐며 바라본다면, 그리하여 《아미타경》에 나오는 정토의 한 장면이 더 그려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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