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 스님이 가시고 가을바람이 부니 가신 분이 더욱 그리워진다. 설악산은 색색으로 물들어 가도 가슴속에 그분의 체취가 감도는 것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산 스님이 가셨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어느 분이 나에게 말했다. ‘최 선생은 이제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했다. 무심코 지나가는 말이지만 우연한 말은 아니다. 무산 스님을 처음 만나 뵌 것은 1990년 초 여름이었던 것 같다. 낙산사에서 뵙고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다. 그 세월 동안 무산 스님께 많은 법문을 듣고 깨우침을 얻어 어려웠던 인생의 길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숙세의 인연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선 스님이 주신 첫 가르침은 바보 법문이다. 198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평문을 발표하면서 애초에 가지고 있던 시에 대한 열정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던 시기였다. 2000년 나뭇잎이 물들기 시작하던 어느 가을날, 백담사에서 스님께 당호를 받아 성속의 인연을 이었다. 그런데 그 당호가 ‘치인(痴人)’이었다. 멋진 당호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바보라는 당호를 받고 보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내려친 죽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필자의 마음을 꿰뚫어 본 스님이 《벽암록》의 일 절을 소개하시면서 이 당호는 아무나 가질 수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비평에 너무 전념하지 말고 앞으로 시에 용맹정진하라고 말씀하셨다. 비평과 창작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상황에서 이 또한 놀라운 일갈이었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가고 있을 때 다시 스님은 졸시 〈어린아이와 산을 오르다〉를 제1회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셨다고 전했다. 더 이상의 채찍은 없었다. 시의 길을 버리고 다른 어느 길을 갈 수 있다는 말인가. 비평에서 시로 적극 전환한 것은 스님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보 법문으로 바보를 깨우치신 것이다.

비평에서 시로 전환하기 시작 후 10여 년이 지난 다음 스님께서 하신 법문은 명검 법문이다.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서는 말씀을 많이 하시지 않지만, 일상의 자리에서는 당신이 생각하시는 바를 자유로이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명검이라는 것은 칼집 속에 있어야 한다고 무심코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아니 왜 그렇지요?” 말씀의 진의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고 반문했다. 칼이 칼집에서 나오면 피를 부르고 사람을 상하게 하여 세상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칼은 녹아 문드러지도록 칼집 속에 있어야 진정한 명검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나는 퍼뜩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렇다. 명검의 가치는 칼집 속에 있을 때 빛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당시 사회가 혼란스러운 때였다는 것은 후일 깨닫게 되었지만, 스님의 이 법문은 필자의 시 〈명검〉으로 표현되었다.

세 번째는 명인명산 법문이다. 설악산이 명산이 되기 위해서는 산세의 빼어남도 중요한 요인이겠지만 그 산에 누가 기거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래로 설악산에 대한 많은 예찬이 있다. 누가 보아도 설악산은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내세울 만한 산이다. 금강산 줄기를 타고나서 그러할 것이다. 무산 스님을 모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명산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문득 고서 《고문관지》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났다. 무심코 말씀을 올렸다. 천하의 산이 명산이 되는 것은 명인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명인이 살지 않으면 산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명산이 될 수 없다는 옛 구절에 대해 모두 한동안 침묵했다. 무산 스님이 가시고 나니 그동안 설악산이 명산이 되었던 것은 무산 스님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산 스님의 다비식은 찾아보기 힘든 하나의 장관이었다. 입적 후 생시에 스님을 만나기 위해 모여들었던 그 많은 사람이 설악산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설악산이 텅 빈 것 같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무산 스님이 바로 명인이었던 것이다.

네 번째 이야기는 ‘파수상고산(把手上高山)’이다. 2013년 8월 정년을 기념하여 자그마한 문집을 간행했다. 어렵지만 감히 결례를 무릅쓰고 서문을 스님께 부탁드렸다. 처음에는 쓰시기 어렵다는 전갈이 왔다. 그러나 출간 직전에 짤막한 글을 보내주셨다. 그 글에서 잊을 수 없는 어구가 ‘파수상고산’이었다. ‘두 손을 맞잡고 높은 산에 올라간다.’는 뜻으로 풀이되는 구절은 상대방을 신뢰하는 깊이를 말해준다. 이 구절을 읽고 못내 감당하기 어려워 한동안 송구한 마음으로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필자는 이 구절을 ‘파수상고산’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깨우침으로 해석했다. 스님의 생전에는 물론이고 가신 이후에도 가끔 이 명구를 음미해 보고는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감자 하나의 이야기이다. 노년에 무산 스님은 당신이 살아 있는 이유가 전생에 얻어먹은 감자 하나를 갚기 위해서라고 하신 적이 있다. 이는 감자 하나의 빚이라도 갚지 못하는 한 살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이 이야기는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서술한 양파 한 뿌리와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지옥에 빠진 인색한 노파를 구하기 위해 천사는 평생 그녀가 한 일 중에서 착한 일을 찾다가 겨우 한 가지 천국에 갈 수 있는 선행을 찾아냈는데, 결국 혼자만 구제받으려는 이기심으로 인해 노파가 다시 지옥에 빠지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무산 스님이 전생에 감자 하나를 얻어먹어 이를 갚기 위해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승의 빚을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는 결연한 실천적 의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윤회의 고리를 끊겠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무산 스님이 많은 선행을 하신 것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다른 사람 모르게 사하촌의 사람들을 비롯해 평소 터럭만큼이라도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신 모든 분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그것을 다 갚고 떠나셨다는 후문을 들었다. 감자 하나의 이야기는 깊은 깨우침을 주는 이야기이다.

무산 스님 가시고 설악산이 다시 물들고 있다. 단풍의 빛은 아름답지만, 전처럼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 산을 아름답게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명인이 살지 않는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산이라도 명산이 될 수는 없다. 무산 스님은 인재가 드문 한국불교계에 커다란 울림을 전한 걸출한 인물이다. 오늘날 한국불교계가 세속을 향해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적막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 설악산을 울리던 무산 스님의 목소리가 그립다. 세상이 혼탁할수록 그러하고 세상을 살아가기 어려울수록 그러할 것이다. 어린아이같이 천진한 무산 스님의 미소가 안개 걷힌 설악산 산봉우리의 가을을 환하게 빛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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