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1967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황혼 무렵, 나는 내 담당 필자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직장에서 나와 명동 동방살롱 근처 목로에서 일을 마치고 혼자 총총히 을지로입구 쪽으로 귀갓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누가 목을 감아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얼핏 손으로 잡아 보니 나무지팡이였다.

“어, 누구얏?”

나는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야, 이놈아, 따라와.”

훤칠한 키의 멋쟁이 사나이, 조지훈 시인이었다.

“아, 선생님, 웬 일이십니까?”

“따라와. 왜 선생을 보고 모르는 체 그냥 가?”

“미처 못 뵈었습니다.”

그래서 끌려간 갈채 다방 근처 목로 드럼통집에서 조 선생과 마주 앉아 막걸리를 마시게 되었다.

“그래 요즘은 어떻게 지내냐?” 조 선생은 이미 반쯤은 취해 계셨다.

“예, 잡지 편집에 좀 바쁩니다.”

“그건 알고…… 글은 쓰냐?”

“예 그게……”

우물쭈물하는 내게 건너편에서 지팡이가 날아와 내 어깨를 내리쳤다.

“이놈아, 강의 시간에 성실하라고 네가 나보고 그랬지? 그때 내가 말했지. ‘너희는 내 얼굴만 봐도 이미 강의보다 나은 공부를 하는 거라’고. 지금 그 강의를 하는 거야.”

내가 학교를 그만둔 지가 언제인데 이 양반이 이러시나 싶어, 나는 반격에 나섰다.

“선생님은 왜 모교를 외면하고 고대에서 강의를 하십니까?”

그러자 또 지팡이가 내 어깻죽지를 내리쳤다. 꽤 아팠다.

“야, 내가 싫어서 그런 줄 아냐? 그들이 내게 강좌를 줘야지.”

아마 늘 대꼬챙이처럼 바른말만 하시는 조 선생이 불교종단이나 재단에서는 눈엣가시처럼 달갑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취중에도 평소 품고 계셨을 법한 여러 가지 소회를 말씀하셨다.

“동국대학의 문학사는 한국문학사의 측면사야. 그걸 쓸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런데 기회를 줘야지.”

그러고 보니 조 선생은 나를 나름대로 문단에 이끌고 싶으셨던 모양이었다. 언젠가 《동국시집》의 서문을 부탁했더니, “나라가 흥하려면 시인이 많아지고, 또한 나라가 망하려면 시인이 많아진다. 지금 이 나라에 시인이 많아지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말씀을 남겨 주셨다.

영양의 뼈대 있는 집안의 자손답게 늘 올바르고 지사다운 조 선생을 나는 은근히 좋아하며 흠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분의 어쩔 수 없는 보수적 성향과 약간은 급진적인 내 성향이 맞지 않아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여러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이산 김광섭 선생의 배려로 《자유문학》을 통해 문단이라는 데에 얼굴을 내밀었다.

1966년은 내가 대학 후배인 이국자와 결혼한 해였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성북동으로 조 선생을 찾아가 주례를 부탁드렸다. 그때 이국자는 동대 졸업반 학생이었고, 나는 《주부생활》의 편집차장이었다. 그러자 “이 사람아, 나를 좀 봐. 이 지팡이를 좀 보라구.” 하셨다.

그때 아직 50도 안 되신 그분은 무슨 병을 안고 계시는지 늘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다.

“내가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기운이 없어 비틀거리니 어쩌나. 누구 다른 이에게 맡겨 봐.”

그래서 나와 이국자 여사는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스승인 미당 선생에게 주례를 부탁해 신문회관에서 결혼식을 했다. 그리고 조 선생은 결국 50도 채우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지조론》의 저자이시고, 4 · 19혁명 교수데모대의 선봉이셨고, 한국전쟁 당시 종군작가로서 전쟁의 비참함을 고발하며 남북 병사들의 죽음을 슬퍼하던 명시 〈다부원에서〉의 시인…… 항상 정의의 편에서 앞장서셨던 선생님이 그립다.

km3303@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