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탁 한림대 생사학연구소장

웰빙과 웰다잉

우리 사회에 웰빙(Well-Being)이란 말이 최근 유행되고 있다. 웰빙이란 한 마디로 ‘행복’ 혹은 ‘잘 산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웰빙을 단지 잘 먹고 잘 산다는 뜻으로만 이해하는데, ‘잘 산다’라는 말에서 ‘잘’에 부여되는 의미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웰빙과 관련해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문제,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문제가 바로 죽음이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잘(?) 살았다한들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지 못했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웰빙을 웰다잉(Well-Dying)과 관련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흔히 행복한 삶, 건강한 삶만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행복한 죽음, 건강한 죽음이란 말도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가 세속적으로 아무리 행복하게 살았을지라도, 그가 진정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참된 의미에서 행복이란 바로 죽음에 있기 때문이다. 웰빙의 참뜻은 웰다잉에 있으므로, 이제 우리는 웰빙을 삶의 문제에만 한정시킬 게 아니라 웰다잉에까지 확대해야 한다.

예전에는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얼마 전부터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일이 증가하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50대, 60대에 자연사했을 사람들이 암, 당뇨병, 뇌졸증, 치매 등의 병을 지니고서 의료기계에 둘러싸인 채 여러 가지 튜브를 몸에 꽂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머지않아 죽을 것을 알면서도 작별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심장마사지 등 응급조치를 취하기 위해 가족들은 병실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라 할지라도, 오직 육체적 연명만을 생각해 응급실에서 ABC 조치(Air-Way: 기도 확보, Breathing: 산소인공호흡, Circulation: 혈액순환)를 취하면 몇 년간 생명을 붙들어 놓을 수 있다고 한다.

환자가 죽어 가는 순간 병원은 극도로 흥분된 광란에 휩싸인다. 환자를 소생시키려는 마지막 수단을 취하기 위해 일단의 사람들이 침대 곁으로 달려든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환자에게 무수하게 약을 투여하고 바늘을 찔러대고 전기 충격을 가한다. 그가 죽어 가는 순간 심전도, 피 속의 산소량, 뇌파 움직임 등등이 면밀하게 기록된다. 의사가 이제 그만 이라고 선언할 때에야 비로소 이런 히스테리는 막을 내린다.

보다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하려는 환자의 가족으로서는, 이것이 과연 인간다운 죽음의 방식일까라는 의문이 자주 제기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어야 할지, 아니면 연명치료를 계속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붙들어 놓아야 할지 가족들은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다. 만일 회복의 희망이 조금도 없는 경우라면, 이런 식으로 난리를 피우면서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도록 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최후의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위암 말기 환자가 입원하고 있던 대학 병원 입원실은, 환자가 의식을 잃은 뒤 숨질 때까지 48시간 내내 초상집 분위기였다. 환자는 이따끔씩 괴성을 질렀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몸을 벌떡벌떡 일으켜 세웠다. 가족들은 이를 저지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같은 병실에 있던 다른 환자의 가족은 “우리에게 곧 닥칠 일이라 생각하니 너무 힘들다. 어머니가 저 소리에 놀라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고 괴로워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는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이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눈을 감을 수 있는 임종실이 거의 없어 환자와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다. 임종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당사자와 가족을 보살펴주는 임종문화도 없고, 근본적으로 죽음과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죽음 준비의 참뜻

노인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한 적이 있는 유경씨가 얼마 전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죽음 준비’와 관련된 강의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건강할 때 죽음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고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하고 삶을 되돌아보도록 하기 위해 준비한 자리였다. 그러나 어르신들의 반응이 냉담해서 그는 당황했다. 어렵게 준비해 강사까지 모셨건만 끝내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이젠 다 살았지, 뭐.” “칠십이 넘었으니 덤으로 사는 거야.” “이만큼 산 것도 고맙지.” 아무리 이렇게 말씀하셔도 죽음은 피하고 싶은 금기의 영역이었다. 젊은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루하루 살기 바쁜 세상인데,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죽음까지 미리 생각해야 하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죽음준비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잘못 이해하는 사례가 많다. 또 죽음 준비는 노인만 해야 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죽음은 나이순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 따라서 죽음은 노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 모두에게 관계된다. 죽음준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암이나 자동차 사고에 대비해 보험을 들거나 노후를 대비해 연금을 매달 붓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준비는 마치 남의 일이기라도 한 듯 전혀 하지 않는다.

죽음 준비는 삶과 죽음 각각에 관련해 말할 수 있다. 첫째, 죽음 준비는 삶과 관련해 삶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에 유념하면서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돌아보고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라는 뜻이다. 둘째, 죽음 준비는 죽음과 관련해 평소에 죽음을 미리 준비해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해 두라는 의미이다.

죽음 준비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는 죽음에 대비해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살라는 뜻이다. 죽음준비는 삶을 이치에 맞게 살아보기 위해 임박해 있는 죽음을 생각해보라는 뜻이다. 따라서 죽음준비는 죽을 준비가 아니라 바로 삶의 준비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 준비를 하지 않고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죽음준비교육은 이 땅에서 제대로 살도록 하기 위한 삶의 교육이다.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될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라고 달라이라마도 말했다. 삶을 이치에 맞게 살지 않고서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사는 법을 익혀야 죽음을 평온하게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도 우리는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생활을 보다 단순하게 이끌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찮은 활동과 사소한 관심거리로 삶의 시간을 가득 채우게 되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죽음의 임박성에 대면하지 않게 된다. 죽음의 임박성을 의식하면서 살게 될 때 ‘만일 내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 자기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시점

이 세상에서의 삶에 한정시켜 생각해 볼 때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시점이 있다. 하나는 생명의 잉태에서부터 탄생으로 이어지는 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현대 의학에서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생명의 잉태가 단지 정자와 난자의 결합만으로 이루어지고, 죽음 역시 똑같이 이런 식으로 육체의 죽음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한다. 새로 태어난 신생아는 2002년 48만4625명, 2003년 49만 3400명, 2004년 47만 6052명이지만, 낙태당한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정확하게 모른다. 만일 매년 2백만 명 이상 낙태된다고 가정하면, 1년에 잉태되는 생명 가운데 약 80%인 200만 명은 폭력(낙태 수술)에 의해 희생되고 겨우 20%(47만여 명)만 태어날 뿐이다.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에 이처럼 폭력이 개입되어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요즈음 따뜻한 보살핌과 간병을 받지 못하고 병실 한 구석에서 차가운 의료 기계에 둘러싸인 채 여러 가지 튜브를 몸에 꽂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더구나 환자의 임종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의료관계자가 죽음에 대한 적절한 교육을 받았는지, 또 스스로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방식이라든가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 보았는지 궁금하다. 또한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사망률 1위라는 통계가 발표된 일이 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어가는 방식은 정말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과연 우리 사회가 웰빙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와 같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시점, 생명이 잉태되어 태어나는 과정과 죽어가는 과정은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허술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생명의 탄생은 이 세상에서 삶이 시작됨을 뜻하고, 죽음은 삶의 종결을 의미한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이치에 맞게 시작되고 존엄하게 끝을 맺을 수 없다면, 생명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 걸쳐 있는 우리의 삶마저도 제대로 인간답게 산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태어나지도 못하고, 인간답게 살지도 못하고, 품위있게 죽지도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죽음 앞의 인간 : 4가지 평등과 9가지 차별

우리가 죽음과 관련해 분명하게 아는 사실은 4가지이다. 첫째 사람의 평등, 누구나 죽는다. 둘째 시간의 평등, 우리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셋째 장소의 평등, 우리는 어디서든지 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넷째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 이와 같이 인간은 4가지 이유로 죽음 앞에서 평등한 존재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와 같이 4가지로 똑같은 조건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사람마다 죽어가는 마지막 모습이 똑같지 않다.

지금까지 우리는 죽어 가는 사람이 어떤 심리상태를 거치면서 죽어 가는지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서양에서 생사학을 창시한 큐블러로스 박사는 죽어 가는 사람이 겪게 되는 심리적 반응은 5가지 과정이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바 있다. 이와 같은 5가지 반응 이외에,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불행한 모습, 그리고 바람직한 인간다운 존엄한 죽음을 고려해 두려움 혹은 절망, 희망, 유머 혹은 여유, 그리고 밝은 죽음 4가지 반응을 덧붙이고자 한다.

1 절망, 두려움 :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절망, 혹은 두렵다고 생각한다.
2 부정 :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순간까지 부정하면서 죽는다.
3 분노 : ‘왜 죽어야하는지’ 주위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4 타협 혹은 삶의 마무리 : 운명이나 의사와 타협해 삶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고자 한다.
5 슬픔 :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슬픔에 잠긴다.
6 수용 : 죽음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7 희망 : 사후세계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지니고 죽는다.
8 유머, 여유 : 여유있는 모습으로 죽음에 임한다.
9 밝은 죽음 : 죽음에 임해 밝은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다.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은 또한 동물의 죽음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동물은 육체적으로 쇠약해지다가 죽게 되지만, 인간의 경우 육체적으로는 쇠약해져가도 정신적으로 성장을 계속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육체적으로 노쇠해져 갈수록 정신마저도 나약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육체의 기능은 점점 쇠약해지기는 하겠지만, 정신력마저도 함께 늙어갈 이유는 없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인간은 정신적, 인격적으로 성숙을 거듭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성장의 마지막 단계’라고 말한다.

죽어 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절망(첫 번째 반응), 부정(두 번째 반응), 분노(세 번째 반응)의 감정을 품는다. 아홉 가지 반응 중 첫 번째 두려움의 단계에서 다섯 번째 슬픔의 단계까지는 인간적으로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반응이지만, 여섯 번째 순응 이후의 반응은 인격적으로 성숙했음을 시사해주는 반응. 죽음을 지나칠 정도로 두려워하거나 혹은 죽음을 무조건 부정하는 식으로 죽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화를 낼지라도 답답한 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일 뿐이다.

순응, 희망, 여유, 밝은 죽음의 단계로 올라가야만 죽음을 편안히 맞이할 수 있다. 어떤 생사관 혹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이 크게 차이가 난다. 따라서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서 함께 삶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는 죽음 앞에서 기본적으로 평등한 존재이지만, 실제에 있어서 평등한 존재는 아니다. 이제,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죽음을 실제로 맞이하기 이전에,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지 물어 보았을 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죽음, 인식전환이 시급하다.

죽음만큼 오해를 자주 받는 현상도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죽는 모습이 천차만별인 것은 결국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은 곧 인간으로서 존엄함을 지니고서 죽는 사람이 드물다는 뜻이기도 하다. 죽음은 삶과 둘이 아니므로, 죽음을 이치에 맞게 이해하지 못하면, 삶 역시 바르게 살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 삶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 보다 시급한 일이 있을까. 인간답게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라도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중요한 과제이다.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오해가 있다.

* 죽음에 무관심? 죽음은 타부? :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가까운 사람의 부음에 수시로 직면하게 되지만, 죽음을 자기 자신의 문제, 자기 자신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로 심사숙고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인들은 자동차 사고라든가 불치병 등에 대해 대비하기 위해 보험을 든다든가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기는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음의 준비가 전혀 없는 상태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자기 자신의 죽음에 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 사이에 죽음은 알게 모르게 타부, 금기가 되어있다. 우리는 죽음을 일상 대화의 주제로 올리기를 꺼린다. 죽음을 입에 올리면,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죽음을 타부시하여 아무 생각 없이 죽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을 금기시하여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쫓아내 버린다면, 죽음과 표리일체를 이루는 삶을 바람직하게 영위할 수 없게 된다. 죽음을 타부시하면 죽음뿐만 아니라 자기의 삶 역시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죽음을 부정? :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죽음에 무관심한 척하거나, 죽음을 타부시하는 것은 곧 죽음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부정해 함께 나누었던 삶의 시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인간적인 대화가 가능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겠는가. 누구든지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므로, 죽음을 자기 삶의 일부로 수용해 주위사람들과 함께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어야겠다.

* 죽음은 절망? 죽음이 두렵다? :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은 절망 그 자체라고 단정적으로 생각한다. 죽음에 대해 사려깊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반응할 수 있을까. 사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충분히 아는 것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백지상태를 가정했을 때, 우리는 죽음을 부정적 시각으로 볼 수도 있고 긍정적 시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절망 혹은 희망, 어느 쪽으로 바라보는 편이 현명하겠는가. 삶을 절망 또는 희망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현명하겠는가.

또한 사람들은 두려움이 죽음 자체로부터 연유되기라도 하는 듯이 죽음은 두려운 현상이라고 섣부르게 단정한다. 만일 누구나 죽음을 두렵게 생각한다면, 죽음은 응당 두려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두렵게 여기는 것일 뿐이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두려움은 죽음 자체로부터 연유한다기보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 죽음을 생각하면 허무해진다? : 죽음을 생각하기만 하면 허무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허무한 이 세상에 대해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살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이와는 반대로, 죽음을 생각하면 삶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알게 되므로, 주어진 삶의 시간을 더욱 의미있게 살고자 애쓰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죽음체험이나 임사체험을 겪은 사람 모두는 이전 보다 자기 삶을 보다 충실하게, 삶과 죽음을 한층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 죽으면 다 끝나는 것인가? 삶과 죽음은 단절? : 사람들이 자주 범하는 오해가 바로 “죽으면 다 끝나는 게 아니냐” 는 생각이다. “죽어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 는 생각에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달라이라마에 따르면, “죽음이란 옷을 갈아입는 과정”일 뿐이므로, 영혼이 육신의 옷만 벗는 것이다. 육신의 옷만 벗는 것일 뿐 영혼은 새로운 세상으로 떠난다. 퀴블러로스 박사는 죽음에 직면한 어린아이를 향해 다음같이 말했다.

“우리 몸은 번데기와 마찬가지이다. 죽으면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나비처럼 예쁘게 날아서 천국으로 날아간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다.” 죽으면 끝이라는 오해에는 죽음으로써 삶과 단절하겠다는 기대도 깔려있다. 우리의 삶, 죽어가는 과정, 그리고 죽음 이후 세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어제의 삶은 사라졌지만, 어제의 삶은 오늘의 삶에로 연결되고 있다. 어제의 삶과 오늘의 삶의 연결을 전제로 해서 우리 존재는 성립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연결되어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그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조금의 가감도 없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그의 삶과 죽음 이후까지 추론해볼 수 있다.

* 죽음수용은 삶의 포기? :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 허무하니까 삶에 소홀하게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죽음을 수용하는 것은 결코 삶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삶을 보다 의미있게 영위함으로써 죽음을 한층 편안하게 맞이하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표현이다. 죽음을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삶을 보다 충실하게 살게 된다. 따라서 죽음수용은 결코 삶의 포기일 수 없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므로, 죽음수용은 삶의 포기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수용이다. 죽음이란 말이 오해를 많이 받듯이, 죽음준비란 말 역시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 죽음준비란 말을 사람들은 마치 죽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듯싶다. 그러나 죽음준비는 주어진 삶의 시간을 보다 의미있게 영위함으로써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이자는 의미이므로, 죽음준비는 죽을 각오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삶의 준비이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늦게, 실제로 자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죽음을 생각하므로, 지나간 삶을 후회하면서 죽는 사례가 많다.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례가 많고, 자살 사망률이 최근 들어 급증하는 상황인데다가, 또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밝은 미소 속에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감안해볼 때, 죽음에 대한 인식전환이 시급한 상황이다.

죽음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켜 삶을 바르게 영위하도록 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 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죽음준비교육은 죽음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삶을 보다 의미있게 살도록 하고 죽음을 한층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삶의 준비교육이고, 자살예방교육이기도 하다.

죽음준비교육의 효과

대학에서 10여 년간 죽음을 주제로 강좌를 개설해 20대 대학생들에게 죽음준비교육이나 자살예방교육을 가르치고 있다. 수강 신청한 학생들의 첫 반응은 20대가 왜 죽음준비를 해야 되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죽음은 나이에 관계없이 찾아오고, 죽음준비란 곧 삶의 준비를 뜻한다는 설명에 한 학기 동안 열심히 수업에 임한다. 필자가 강단에서 철학을 15년 정도 가르쳐 보았지만, 골치 아픈 철학 강의 보다 죽음과 관련된 강좌에 학생들은 훨씬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2004년 1학기에는 전국의 대학생 60명을 상대로 직접 강의실에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채 인터넷을 통해 강의를 했는데, 죽음준비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크게 바뀌었다.

“사형수의 마지막 증언을 들어보면,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막가파의 최정수, 김인제를 비롯하여 사형수들의 마지막 모습을 수업과 동영상 자료를 통해서 살펴본 것에 따르면, 정말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과연 저 사람일까 라는 생각이들 정도로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형수들의 이런 변화된 모습을 보았을 때,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뒤에 후회한다 해도 이미 늦은 일이다.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죽음에 대해서 미리 생각해 보았다면, 아마 그런 잔혹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음준비라는 것은 단순히 죽음에 대해 준비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보다 가치있게 살라는 의미이다. 가능하면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자신의 삶을 보다 의미있게 사는 것은 건강한 삶과 건강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사형수의 마지막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준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광운대 일본학과 4학년 이선경)

“자살사례를 살펴보면 경제적, 사회적인 원인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살행위를 전적으로 사회에 그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자살로 인해 잃은 것은 결국 자신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친구가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말한다면 나는 우선 말보다 꼭 한 번 안아줄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버릴 정도로 힘든 일이 있니?’ 물어보고 친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겠다. 대부분의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친구도 자살을 초래하는 상황이나 죽음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이 지금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충동적으로 자살을 생각해 자살하면 모든 일이 해결되고 자신은 편안해 질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을 강행함으로써 불행한 삶과의 단절을 바라겠지만, 삶과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이력과 자살행위로부터 무관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인간답게 살 권리, 인간답게 죽을 권리가 있다. 자살한다고 해서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친구가 심적으로 안정되고 정서적으로 편안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힘이 들 때는 언제나 내가 옆에 있음을 기억해.’ 라는 말도 덧붙여 줄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삶에 의지와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은 존엄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스스로를 사랑한다면 자기 자신을 버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대구대 유아교육과 4학년 조선영)

어떻게 죽을 것인가

우리는 죽음 앞에서 평등한 존재이지만, 죽음을 실제로 맞이할 때에는 대략 9가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죽어간다. 우리가 함께 삶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똑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고 죽음을 똑같은 모습으로 맞이하지도 않는다. 어느 날 불현듯 죽음이 찾아오면 자연스럽게, 평온하게 수용하는 그런 죽음이 아니라, 자살과 같이 인위적인 방식으로 삶을 마감하는 죽음은 바로 건강하지 못한 죽음이다. 또 죽어가는 사람의 9 가지 반응 가운데 죽음을 두려워하는 첫 번째 반응,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두 번째 반응, 왜 자신이 죽어야 하는지 분노하는 세 번째 반응도 건강하지 못한 죽음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건강한 삶을 원하듯이, 마찬가지로 누구나 건강한 죽음을 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사람들은 마치 불행한 죽음을 바라기도 하는 것처럼 죽음 앞에서 크게 흔들린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만 생각했을 뿐, 어떻게 죽을 것인 지 거의 생각해본 일이 없다.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르지 않으므로,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물음은 이제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은 너무 세속적인 틀에만 얽매이게 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보다 포괄적이고도 심층적인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그의 삶을 비추어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죽어 가는 방식을 통해, 우리는 그의 삶을 되새겨볼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삶을 마감했을 경우, 그의 삶 역시 건강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는 바로 그 순간 좋든 싫든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우리 삶에는 거짓이 통용되지만, 죽음의 순간 자신 존재의 값어치는 남김없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죽는 시간을 우리가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이 갑자기 찾아올 때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 어떤 식으로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정할 수 있다. 죽음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적절하게 노력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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