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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불교의 반전론(反戰論)
특집 | 불교, 거듭 평화를 말하다
[76호] 2018년 12월 01일 (토) 원영상 wonyosa@naver.com

1. 근대 일본의 반전사상

일본의 근대를 관통하는 핵심어의 하나는 전쟁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의해 탄생한 신정부는 유럽 문명을 추종하여 부국강병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당시의 유럽이 그랬듯이 약육강식의 근대는 대외침략을 통해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의 국가적 사명이었다. 국가를 확대하는 것, 힘없는 나라를 통째로 삼키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존재 이유라도 되기나 하는 것처럼 국가는 절대적 신이기도 했다. 근대 이전까지 종교는 국가의 정당성을 보증해주었지만, 국가가 종교가 된 상황에서 종교는 자신의 존재 가치마저 소멸되어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 일본은 국가와 천황제를 옹호하기 위해 전통적인 신도를 국교로 삼고,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교파신도(敎派神道)를 비롯한 여타 신종교들을 그 하위구조에 놓음으로써 종교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일으킨 청일전쟁(1895)과 러일전쟁(1904)을 시작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일전쟁(1937),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종교는 국가와 단일한 체제를 이루어 존속했다.

최근 메이지유신에 대한 새로운 평가는 이를 잘 보여준다. 하라다 이오리(原田伊織)의 《메이지 유신이라는 과오: 일본을 멸망시킨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조슈(長州) 테러리스트》(2017)는 근대 일본의 잘못을 비판하고 있다. 근대 국가를 설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스승 요시다 쇼인이 일본을 대동아전쟁으로 몰아넣은 패착과 삿초도히(薩長土肥, 薩摩 · 長州 · 土佐 · 肥前藩, 오늘날 대체로 가고시마 · 야마구치 · 고치 · 사가현)의 암살자 집단으로서 무사들이 일으킨 메이지 유신을 미화한 역사의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역사의식의 부재로 인해 일본의 군대가 지나간 아시아 각 나라의 민중이 겪은 고통에 대해 당시 일본의 어떤 종교도 공식적으로 이를 거론하거나 위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의 종교는 피로 얼룩진 전리품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전쟁으로 발생한 목불인견의 고통은 인도주의적인 역할을 내건 일본의 종교와는 무관한 시대였다.

또한 국가신도는 물론 여타의 일본불교, 교파신도, 신종교 등 근대 일본 종교계의 어떤 교단도 공식적으로 전쟁을 반대한 교단은 없었다. 불교의 경우, 한마디로 전쟁 중에 살생해도 좋다는 ‘전시교학’을 생산해서 자신의 신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교조 또는 종조들의 생명존엄주의의 가르침을 배반한 것이다. 이러한 암흑의 시대에 다행히도 기독교와 불교계 쪽에서는 가르침에 충실한 신앙심 깊은 이들이 전쟁에 대한 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이들의 양심적인 행위는 국가는 물론 교단으로부터도 탄압을 받았다. 그 자신들은 물론이고, 가족과 친지들조차 비국민적인 행위라고 지탄받고 사회로부터 고립되기까지 했다. 오늘날 이들의 반전행위에 대한 용감한 행동은 새롭게 조명되고 있지만, 당사자들을 직접 치유하지는 못했다. 세월이 너무 흘렀기 때문이다.

일본의 반전사상과 활동은 어떤 시대와 지역보다도 의미가 있다. 한반도와 관련도 그렇지만 근대라는 시공간 속에서 오직 대외팽창을 위해 자신의 백성을 전쟁터로 몰아넣는 참혹한 상황에서 비인간적이고 비문명적인 역사를 과감하게 부정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재평가되고 있는 이 반전사상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당시의 야만적 사태에 대하여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세상을 향해 고발했다. 인류사적으로 볼 때도 희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반전사상은 서양사상의 영향을 받아 근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그 대표적인 주자가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1871~1911)이다. 고토쿠가 주장한 것은 비전론(非戰論)이다. 당시 인기 있던 잡지 《만조보(萬朝報)》에 〈비전쟁주의(非戰爭主義)〉(1900.8.7)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이 글은 중국에서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고, 진압을 위한 8개 국가의 연합군 속에 일본군도 출병하게 된 것에 대해 반대의사를 나타낸 것이다. 다음 해에는 그 글을 기반으로 한 《제국주의》(1901)에서 본격적으로 전쟁반대를 주장했다.

그는 영토 확장을 꾀하는 제국주의는 민중이 원하는 세계의 평화, 도덕의 흥륭, 자유와 평등, 생산 분배의 공평을 어지럽히고 파괴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회개혁의 건아로서 국가의 양의(良醫)에 임하는 지사 의인은 이 제국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사회국가를 향하여 대청결법을 시행하라. 환언하면 세계적 대혁명의 운동을 개시하라.”고 외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수의 국가를 바꾸어 다수의 국가가 되게 하라. 육해군인의 국가를 바꾸어 사농공상의 국가가 되게 하라. 자본가 횡폭의 사회를 바꾸어 노동자 공유의 사회가 되게 하라. 그러고 나서 정의 박애의 마음은 편벽한 애국심을 눌러야 한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즉 야만적 군국주의를 망하게 해야 한다. 형제애의 세계주의는, 즉 침략적 제국주의를 소탕 제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幸徳秋水 《帝国主義》 1901)라고 하여 국가주의를 대세계주의로 전환시킬 것을 또한 대중에게 주장했다. 그는 군비 확장을 촉진하는 이유는 실제로 다른 곳에 있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일종의 광열(狂熱), 허과(虛誇), 호전적 애국심이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고토쿠는 후에 사회주의 신문 〈평민신문〉을 발간하였으며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마침내 천황을 해치고자 했다는 대역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1911년 사형되었다. 고토쿠의 비전론의 뒤를 이어 〈만조보〉를 창간한 구로이와 르이코(黒岩涙香), 정치인 시마다 사부로(島田三郎), 사회주의자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사회운동가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尚江), 목사이자 기독교 사상가 가시와기 기엔(柏木義円),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칸조(内村鑑三), 작가 요사노 아키코(与謝野晶子) 등 언론계, 정계, 종교계, 예술계 등 다양한 방면에서 비전사상을 전개했다.

비전론은 오늘날 목격하는 인명 살상과 자연 파괴를 일으키는 무력이나 위협에 의한 전쟁을 반대하고, 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는 사상이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우치무라 칸조가 “나는 러일 비전론자만이 아니라 전쟁 절대폐지론자”이며, “전쟁의 이익은 강도의 이익이며, 이것은 도둑의 일시적 이익이다”(〈만조보〉 1093년 6월 30일 자)라고 주장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근대 일본에서는 앞에서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전쟁이 가져오는 맹목주의, 비인간주의, 비경제성 등을 설파했다. 비전론은 당시 제국주의의 폐해가 가져오는 전쟁의 무모함을 역설한 것이다. 이 점에서 반전론의 근본적인 뜻과는 큰 차이가 없다. 단지 반전론은 전쟁 그 자체의 무의미함과 회복 불가능한 것으로서 모든 존재 고유의 생명 약탈에 대한 경고를 담아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양자를 같은 의미로 쓰고자 한다.

이 점에서 불교야말로 비전이든 반전이든 전쟁을 부정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재론의 여지 없이 제1계율인 불살생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 근대는 이 핵심 계율의 가르침 그대로 실천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

 

2. 근대 일본불교의 반전론

1) 반전운동과 탄압

그렇다면 근대 일본에서 불교의 반전론 또는 반전운동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대표적인 인물과 단체를 통해 그 일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물로는 1930년대 불교운동가 세노오 기로(妹尾義郎, 1889~1961), 1911년 대역사건에 연루된 조동종 승려 우치야마 구도(内山愚童, 1874~1911), 정토진종의 승려 다카기 켄묘(高木顕明, 1864~1914), 그 외에도 전쟁반대를 외치다가 치안유지법에 따라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정토진종의 우에키 테츠조(植木徹誠, 1895~1978)와 다케나카 쇼겐(竹中彰元, 1867~1945) 등이 있다. 또한 단체로는 세노오가 1930년대 이끌었던 신흥불교청년동맹(이하 신불청)이 있다.

이 외에도 불교인으로서 곳곳에서 전쟁반대를 외치거나, 군국주의 또는 천황제의 모순에 항거한 많은 사람이 있었다. 이에 관련된 자료는 1928년 설치되어 1945년에 해체된 특별고등경찰(특고)의 수사기록과 이와 관련된 재판기록에 잘 나타난다. 이 특고는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자본주의나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 노동 및 농민운동과 같은 소위 좌익 활동가들을 감시하고 체포하여 재판에 넘기는 일이 주요 업무였다. 당연히 전쟁을 반대하는 민중들을 체포한 것도 이 특고의 역할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 기록들이 당시의 의로운 사람들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 ‘불온한 사상가 및 운동가들’ 가운데에는 상당수 불교인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야말로 풀뿌리 단계의 평화운동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조직화되지 못한 그저 양심적인 평화주의자들이었다. 일본의 근대는 식민지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국가 안에서도 평범한 ‘양심’마저 강제했던 철권의 시대였다.

세노오는 뒤에서 신불청과 함께 이야기하기로 하고, 먼저 우치야마와 다카기, 그리고 다케나카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치야마와 다카기는 소위 대역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대역사건은 당시 ‘대일본제국헌법’에 의해 천황이나 천황 직계가족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모욕을 할 경우, 중형에 처하는 처벌이었다. 1910년 천황암살을 위해 폭탄을 제조했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 미야시타 타키치(宮下太吉, 1875~1911)와 사회주의자 고토쿠를 필두로 무정부주의자를 포함한 26인이 체포되었다. 다음 해 이들은 당시의 최고재판소인 대심원 1심만을 통해 24명은 사형, 2명은 유기징역의 판결을 받았다. 사형판결을 받은 24명 가운데 12명은 당시 메이지 일왕의 은사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며, 그 가운데 다카기도 속해 있었다. 나머지 12명은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가운데는 우치아먀와 다카기 외에도 승려로는 임제종 묘심사파 미네오 세츠도(峰尾節堂, 1885~1919)도 있었다. 이들 승려 모두는 당시 자신의 종단에서 승적이 박탈되었다. 80여 년이 지나 우치야마는 1993년에 처분철회, 다카기는 1996년에 처분취소, 미네오는 1996년에 복권되었다.

이들 승려는 정부가 고의적으로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섬멸하고자 했던 대역사건의 그물망에 걸려든 것이었다. 우치야마와 다카기의 행적은 최근 연구를 통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사회주의자로서 대역사건에 연루된 우치야마는 복역 중에 취조를 당했다. 그 와중에 《무정부공산(無政府共産)》이라는 제목의 저서가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또한 일왕 암살을 계획한 미야시타를 취조하던 중, 그 동기를 촉발시킨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우치야마의 이 저술이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여러 지역에서 행한 발언을 근거로 태자 암살의 모의를 뒤집어씌웠다.

그는 다시 체포되고, 비공개의 대심원에서 우치야마는 혁명적인 수단으로서 폭력적인 것이 아닌 총동맹파업을 생각했고, 태자에 관한 발언은 없었으며, 미야시타의 계획에도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그가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회합하거나 농촌 아이들에게 교육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평민신문〉에 러일전쟁에 징병된 병사의 어머니에게 동정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오늘날 그가 대역죄에 관련되었다는 검사 측의 논고는 거의 날조되거나 확대 해석된 것이다. 종단에서는 이러한 그의 무고죄를 확인하고 사죄하는 의미에서 2005년에 그가 주지였던 임천사(林泉寺,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에 현창비를 세웠다.

다카기는 정토진종 오오타니파(大谷派)의 정천사(淨泉寺, 와카야마현 신구시)의 주지였다. 그의 신도들 가운데 대다수가 피차별 지역의 가난한 가족들이었다. 다카기 또한 사회운동가로서 해방부락운동을 전개하며,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서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현실을 개혁하는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했으며, 《나의 사회주의》라는 저술을 출판했다. 그러나 그 또한 1910년 대역사건의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그가 지목된 이유는 대역사건의 사형수 가운데 한 사람인 오오이시 세이노스케(大石誠之助, 1867~1911)와 교류했기 때문이었다. 의사로서 기독교인이자 사회주의자인 오오이시는 고토쿠를 비롯한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과도 친분이 두터웠으며, 다카기의 집에서 자주 회합을 갖기도 했다. 이를 빌미로 다카기를 대역죄로 구속한 것이다.

우에키 또한 다카기와 같은 진종 오오타니파의 승려로서 반전운동 및 부락해방운동에 참여한 죄목으로 치안유지법에 의해 여러 번 체포되었다. 당시 상념사(常念寺, 아이치현 나고야시)의 젊은 주지였던 그는 출병하는 자신의 단가(檀家, 대대로 같은 신앙을 물려받는 집안 또는 그 사람)들에게 전쟁은 집단살인이라고 말하고, “비겁하더라도 살아서 돌아올 것” “사람에게 맞지 않도록 철포를 쏠 것”을 설파했다. 그는 평소에도 차별받는 부락민들의 해방을 위해 1922년 결성된 전국 수평사(水平社)에 가입하여 투쟁 활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4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다케나카 또한 명천사(明泉寺, 기후현 다르이정) 주지로서 전쟁에 반대한다는 언설로 체포되었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된 후 재향군인은 물론, 승려들에게 전쟁 비판을 설파했다. 그의 죄목은 ‘전쟁은 최고의 죄악이다’라는 언설이었다. 전쟁반대의 언설은 당시 육군형법 제99조 ‘조어비어죄(造言飛語罪)’에 해당하였다. 유언비어죄인 셈이다. 다음 해에 금고 4개월의 형을 받았지만 후에 집행유예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다른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종문에서는 그를 승려의 최하위 직위로 격하시키고, 포교사 자격마저 박탈했다.

이처럼 사회운동가로서 혹은 종교인의 개인적인 양심에 따라 승려들은 군국주의나 파시즘적인 통치하에서 자신의 고통을 불고하고 대중에게 전쟁반대를 외쳤다. 더구나 말과 행동과 글을 통제하는 감시 사회에서의 활동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 전체의 운명을 건 용기 있는 행동일 수밖에 없었다. 반전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사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과 불법에 대한 강한 믿음이 배경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을 개인 차원을 넘어 집단적으로 표출하며 대사회적인 운동을 벌인 단체로는 신불청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통제가 더욱 심해지는 1930년대 초반 세노오를 중심으로 결성된 신불청은 불법의 평등주의에 입각한 정의와 평화의 사회구현과 구제의 길을 걸은 담대한 결기의 불교인들의 사회적 결사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본부와 함께 13개의 지부를 둘 정도로 전국적인 조직체를 구성했다. 그들은 만주침략 반대, 군국주의 반대, 불교사회주의 건설을 외치며, 노동자 · 농민 등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민중의 구제를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세노오와 신불청에 대해서는 《불교평론》 47호에 〈불교는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가-일본: 사회개혁 운동가 세노오 기로〉(2011.6)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다. 상세한 내용은 그것으로 대신한다.

중일전쟁을 1년 앞두고, 반전과 반국가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36년 12월 세노오를 필두로 본부와 전국의 핵심 간부들이 체포되었다. 여기에 소속된 불교인들 또한 재판을 받았다. 일련종의 재가자로서 세노오는 징역 3년, 정토종 승려 하야시 레이호(林霊法)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서산정토종 승려 다니모토 세이류(谷本清隆)는 집행유예, 천태종 승려 미부 쇼준(壬生照順)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일련종 승려 오오쿠마 지츠잔(大隈実山)과 호소이 유지(細井宥司)는 집행유예, 진언종 지산파 승려 야아모토 슈준(山本秀順)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로써 신불청은 더 이상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2) 불교인들의 반전사상

먼저 잘 알려진 우치야마의 반전사상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고토쿠와 사카이가 1903년 사회주의 결사단체인 평민사(平民社)를 결성하고 창간한 기관지 〈평민신문〉에 이듬해에 ‘나는 어떻게 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라는 난에 기고하였다. 우치야마는 “나는 불교의 전도자로서 ‘가로되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仏性), 가로되 차법평등무고하(此法平等無高下), 가로되 일체중생시오자(一切衆生是吾子)’가 나의 신앙의 입각지가 되는 금언이지만, 사회주의가 말하는 바도 이 금언과 온통 일치함을 발견하고, 마침내 사회주의의 신자가 되었던 것이다.”라고 투고하였다.

이 내용은 《열반경》 《종경록》 《법화경》 등에 나오는 핵심 사상들이다. 대승불교와 선사상, 그 위에 방편을 통해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불타의 적극적인 구제사상에 입각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대승불교 정신의 핵심인 깨달음과 자비행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그는 그가 사회주의자가 된 이유에 대한 경찰의 취조에 대해, 승려들의 공동생활 모습을 경험하고, 촌에서부터 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생활을 제도로 실행한다면 좋은 제도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평민신문〉을 읽으면서 그 내용이 자신의 이상과 같다고 보고, 사회주의 가운데에서도 ‘무정부공산주의자’가 되었다(《불종을 심는 사람》 15쪽)고 한다.

우치야마가 자랐던 곳이나 그가 살던 곳은 가난한 지역이었다. 그는 특히 소작농으로 평생 노동을 착취당하고도 모든 인간의 권리를 빼앗긴 농촌 사람들을 연민하며, 사회혁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인간적인 평등사상이 바로 구제의 원리였다. 물론 그가 유럽 수준의 사회주의적 사상이나 아나키즘에 깊이 빠져들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무정부공산》에서는 내발적인 사회주의 및 아나키즘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무소불위의 권력이자 모든 사회적 모순의 집합체인 국가와 그 책임자인 일왕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는 《무정부공산》에서 “전쟁은 정부와 정부의 싸움이 아닌가. 즉 도둑과 도둑의 친구다. 그들이 싸워서 백성들이 고통과 혼란에 빠지기 때문에 정부라고 하는 도둑을 없애버리면 전쟁이라는 것은 없어진다. 자식들을 병사로 내보내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 바로 알 것이다.”라고 하여 국가와 전쟁을 부정하고 있다. 이는 아나키즘과도 통하는 내용이다. 그는 《무정부공산》의 비밀 출판 이후에 출판한 《도덕부인론(道德否認論)》과 《제국군인 좌우지명》에서 납세, 지주제, 징병제, 정부, 천황제, 전쟁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당시 민중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모든 사회구조에 대해 반대하고 저항했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맹목적인 것으로써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부조리한 것이었다. 시대는 달라도 지금의 세계 또한 이러한 근본 모순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의 고통이 극에 달한 것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군국주의의 길로 접어들면서였다. 다른 종파와 마찬가지로 정토진종 또한 정부로부터 여러 형태로 압력을 받았다. 정부는 정토진종 2대 세력 중의 하나인 오오타니파 제3대 법주인 가쿠뇨(覺如)가 종조 신란(親鸞, 1173~1263)의 일생을 쓴 성전 《어전초(御伝鈔)》의 일부분을 삭제할 것을 명령했다. 이러한 굴욕에도 오오타니파는 자발적으로 교주를 필두로 전시교학을 펼침으로써 교단 또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심지어는 정토진종의 신기불배(神祇不拝)의 전통을 허물고, 제24대 법주 센뇨(闡如)는 1936~1937년에 걸쳐 메이지신궁, 야스쿠니신사, 이세신궁을 참배했다. 이는 근대 일본이 국가의 정체성과 일왕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확립한 신도의 국교화를 인정하는 행위에 다름이 없었다. 아울러 1937년 중일전쟁 개시를 선언한 정부에 대해 자발적으로 중국 주둔군에 대한 종군포교를 교단적으로 승인했다.

다케나카가 전쟁반대를 외친 시기는 바로 이처럼 중국과의 전쟁터에 자신들의 단가이자 민초들이 대량으로 끌려들어 가던 때였다. 그리고 체포된 시기도 바로 같은 해 10월이었다. 기후지방재판소 예심종결결정문에 의하면, 그는 중일전쟁에 출정하는 병사들을 환송하는 사람들 앞에서 “어제 천 명, 오늘 3천 명이라는 많은 사상자가 나와 비참하다. 모든 전쟁은 죄악이다. 국가는 막대한 비용을 공출하여 손해를 본다. 전쟁은 이제 이쯤에서 중지하는 것이 국가로서는 현명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승려들 앞에서는 “이번 사변은 각자의 결심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나는 전쟁은 많은 피아의 인명을 빼앗고, 비참함의 궁극이며,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전쟁은 이제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다. 이 이상의 전쟁은 침략이다.”라고 설했다고 한다.

《특별고등경찰 외사월보》(1937)에 의하면 그는 전쟁 비용으로 책정된 2억4천만 원은 “출정군인 다수가 불려 나가 후방의 산업에 타격을 가하고, 그 위에 인마를 살상한다는 의미에 있어 살인적인 예산이다.”라고까지 지적하고 있다. 전쟁과 국가경제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판단한다는 측면은 물론, 비인도적인 입장까지 가세하여 전쟁이 불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정의의 전쟁은 없다’는 논리로까지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조가 가능했던 것은 불교사상적 기반은 물론, 우치야마와 마찬가지로 그가 교화활동을 벌이던 지역의 민중의 피폐함을 가슴으로 목격하고,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한 양심적인 방책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개인의 이러한 민중 차원의 구제활동을 구체적이며 조직적으로 실천한 집단이 신불청이다. 신불청은 1931년 만주사변으로부터 패전에 이르기까지 소위 15년 전쟁을 일으킨 침략적 군국주의와 이를 추동하는 전시체제 및 총력전으로 대혼란으로 돌입하는 시기에 결성되었다. 청일 ·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종교계, 특히 불교계는 대외침략의 국가전략과 일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다 본격적인 전쟁협력체제로 탈바꿈되어 갔다.

세노오는 이러한 군국주의 및 파시즘과 더불어 그 힘의 배경인 자본주의 체제를 정면 비판했다. 그는 초기에는 국가주의와 군국주의를 찬동한 근대 일련주의의 주창자 다나카 치가쿠(田中智學)의 국주회(国柱会)에 속해 있었다. 또한 필굉일우(八紘一宇)라는 말을 만든 우익 이시하라 칸지(石原莞爾)와 함께 ‘대일본일련주의청년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과 결별한 세노오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 경험에서 일왕마저도 상대화하는 니치렌(日蓮)의 법화중심주의의 사상적 수혈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련주의의 확산을 위해 농촌을 다니면서 파괴되어 가는 농민의 삶을 목격하고, 불법에 기반한 사회적 정의 즉 불법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신불청의 선언서에서 “현대는 고뇌한다. 동포는 신애를 원하나 어쩔 수 없이 투쟁으로 몰린다. 대중은 빵을 구하나 탄압에 먹힌다. 도피인가 투쟁인가. 지금 세상은 혼돈과 궁핍으로 방황한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대중불교 혁명을 외쳤다. 그는 신흥불교는 불교의 과학성에 기반하고, 사랑과 평등과 자유를 위한 불타를 향한 신앙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와 함께 인격평등의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한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 개조, 문화투쟁, 정치투쟁과도 협력한다고 했다.

신불청은 매년 초에 전국대회를 개최하여 운동노선을 정했는데, 구성원들이 체포되어 수감되고 조직이 와해되기까지 국가주의 및 군국주의 반대, 전쟁반대, 자본주의 개조 등을 정면으로 내걸거나 보다 구체화된 형태로 집약했다. 세노오는 반나치 · 반파쇼운동과 평화운동에도 참가했다. 세노오의 사상은 오늘날 정의되고 있는 참여불교의 전형을 보여준다. 신흥불교청년회의 지도원리는 그가 내건 자귀의불(自歸依佛), 자귀의법(自歸依法), 자귀의승(自歸依僧)이다. 자귀의불은 인간 불타에 대한 신앙, 자귀의법은 실천적 무아주의, 자귀의승은 공화정체에 바탕한 공동체 건설이다.

감옥에서 사지를 헤매는 병으로 풀려나 전후에도 살아남은 세노오는 죽기 전에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를 보면, 그는 불법에 기반한 참된 의미의 공산사회 건설을 목표로 했으며, 전쟁 또한 이러한 불법사회주의 건설에서는 당연히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파악했던 것 같다. 그와 생사를 같이한 출 · 재가 동료들 또한 이 점에서는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일본불교계의 반성과 반전운동

일본의 패망 후 일본 종교의 전쟁책임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전쟁책임 표명은 1967년 일본기독교 교단이었다. 불교계는 1990년대 중반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불교권에서는 최초로 1992년 조동종의 참회 성명이 나왔다. 정치권에서는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의 종군위안부에 대한 사죄, 1995년 무라야마 토미이치(村山富市) 총리의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사죄가 이어졌다. 1995년 가톨릭, 1995년 정토진종 본원사파와 오오타니파, 2001년 임제종 묘심사파, 2008년 정토종의 과거에 대한 참회가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살펴보자면, 종무총장 명의의 조동종 참사문(懺謝文, 참회와 반성의 글)은 매우 구체적인 역사를 제시하면서도 군국주의와 식민지 건설, 전쟁참여에 대한 참회와 반성, 그리고 사죄를 표명하고 있다. 그 내용은 먼저 “우리 조동종은 메이지 이후 태평양전쟁 종결까지의 기간,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에서 해외 개교의 미명 아래 당시 정치권력의 아시아 지배의 야망에 가담 영합하여 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시작하여 특히 한국의 식민지 시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조선 · 한반도에서 일본은 왕비 암살이라고 하는 폭거를 범하고, 이조조선을 속국화하였으며, 마침내는 일한합병에 의해 한 국가와 민족을 말살해 버렸지만, 우리 종문은 그 선병(先兵)이 되어 조선 민족이 우리나라에 동화되기를 꾀하고 황민화 정책의 담당자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고 참회하면서 “두 번 다시 이러한 일을 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한반도에서 조동종의 역사적 잘못을 직시하면서 국가의 침략노선에는 결코 서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군산 동국사(식민지기 일본 조동종이 세운 금강사가 전신)에는 이 참사문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다음으로 진종 오오타니파는 공식적으로 1995년에는 ‘부전결의(不戰決意)’를, 2015년에는 ‘비전결의(非戰決意)’를 했다. 먼저 ‘부전결의’에서는 “우리는 과거에 대일본제국의 이름하에 세계인들,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언어를 절하는 참화를 가져왔으며, 불법의 이름을 빌려 장래가 있는 청년들을 사지에 보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강요한 것을 참회하는 바입니다. 이 참회의 사념을 취지로 하여 우리는 인간의 목숨을 가볍게 보고 타인을 말살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모든 전쟁행위를 부정하고, 나아가 신심의 지혜로써 종문이 범한 죄책을 검증하고, 이들의 참사를 미연에 방지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결의하고, 여기에 ‘부전의 맹세’를 표명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여 전쟁 부정과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하고 있다.

10년 뒤에 발표된 ‘비전결의’는 앞의 ‘부전결의’를 다시 확인하면서 “오랜 인류의 역사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서로 상처 주는 슬픔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미타) 여래의 서원 마음은 자아애(自我愛)를 정당화하여 ‘내려받은 목숨’을 서로 빼앗는 것을 슬퍼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라’고 호소하고 계십니다. 이 호소에 응하여 ‘죽여서는 안 된다. 죽이도록 해서는 안 된다’라는 불타의 말을 (아미타) 여래의 비원(悲願)으로 취하여 다시 한번 여기에 ‘비전의 서원’을 표명합니다.”라고 하여 아미타여래의 서원과 이에 대한 믿음에 바탕하여 불살생과 전쟁반대에 대한 결의를 재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교단의 군국주의 추종 또는 대외전쟁 참여에 대해 참회와 반성을 이끌어낸 것은 아래로부터 노력한 승려들과 학자들의 공이었다. 예를 들어 정토진종의 승려 다이토 사토시(大東仁)는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의 원광사(円光寺) 주지로서 다케나카의 명예회복을 위해 저술을 하는 한편, 1990년 나고야시에서, 2004년 기후시에서 ‘평화전’을 개최하여 마침내 다케나카와 다카기 등의 반전승려들을 중심으로 총본산인 동본원사에서 ‘비전 · 평화전: 전쟁과 승려-비전을 살아온 승려들’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007년 오오타니파의 주최로 ‘복권현창대회’가 명천사에서 이루어지고 종무총장이 사죄, 처분에 대한 취소 등의 성명이 나오는 등의 명예회복을 이룰 수 있었다. 군국주의 시기, 이름 없던 무명의 승려들이 반전운동에 나선 것처럼 명예회복 또한 교단 지도부 스스로가 아닌 평범한 구성원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그렇듯 반전과 평화에 대한 염원과 실질적인 행동 또한 이처럼 낮은 곳에서부터 발화됨을 알 수 있다.

전후에 일본 사회, 특히 불교계는 패전 후에 확립된 헌법의 종교의 자유 조항에 의해 평화운동을 보증받았다. 그중에서도 불교계 신종교들의 활동은 전쟁에 협력한 기성종단에 비해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였다. 일본산묘법사, 창가학회, 입정교성회의 반전활동, 반핵운동 등은 대표적이다. 공교롭게도 이 세 교단은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재가 교단이다. 1924년에 설립(만주에는 1918년)된 일본산묘법사는, 창립자 후지이 닛타츠(藤井日達, 1885~1985) 스스로 비폭력을 주장하였으며, 전후에는 불살생, 비무장, 핵 폐기를 설파하며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세계평화회의 또는 세계종교자평화회의 개최에도 협력했다. 오늘날 이들의 신자들은 북을 두드리며 평화행진을 하거나 평화의 탑을 건립하는 활동 등을 하고 있다.

1930년에 마키구치 츠네사부로(牧口常三郎, 1871~1944)에 의해 창립된 창가학회는 초기부터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마키구치는 왕법위본을 주장한 모체인 일련정종을 비판하고, 불법위본의 입장에서 국가에서 내린 신찰(神札, 일종의 부적과 같음) 봉대를 거부하는 바람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했다. 전후에 제2대 회장인 도다 조세이(戸田城聖)는 원 · 수폭 금지선언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평화활동에 나섰다.

제3대 회장 이케다 타이사쿠(池田大作) 시대에 이르러 청년부, 부인회에 의한 피폭체험 · 전쟁체험을 계승하는 반전 출판과 평화 전시회, 난민지원 활동, 평화의 문화포럼 또는 강연회, 전 세계 전몰자 추선법요(追善法要)를 개최하고 있다. 특히 지구민족주의를 주창한 도다 회장을 평화주의의 원점으로 보고 도다기념국제평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창가학회가 만든 공명당이 자민당과 연립하여 최근 이라크에 대한 자위대 파견을 지지하고 있어 현실적으로는 이상적인 평화주의를 내걸기에는 난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니와노 닛쿄(庭野日敬, 1906~1999)에 의해 1938년에 창립된 입정교성회는 세계종교자평화회의를 이끄는 주요 교단에 속한다. 아시아평화회의의 창립에도 관여했다. 매주 1회의 단식을 통해 아프리카의 빈곤국에게 건네는 운동, 종교 간 대화를 통한 평화운동, 전쟁반대 및 비폭력 운동, 핵무기 폐기 운동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 법화계 신종교 교단은 일본의 전쟁참여에 대한 반성과 그 반동으로 국내외적으로는 평화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시민사회에 기성 교단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힘은 《법화경》에 의한 다양한 방편에 의한 구제사상과 군국주의와 파시즘을 경험한 종조들의 평화에 대한 신념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창가학회의 이케다는 불법민주주의를 내세워 현실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만큼 향후 평화를 통한 불교의 사회화운동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로 인해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헌법 9조 지키기 운동이 불교계 내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대해서도 약 60종파가 가입된 전일본불교협회에서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사장 사이토 아키사토(斎藤明聖)는 2014년 7월 자위권 행사에 대한 각의 결정에 대해 즉각 반응하여 담화문을 발표, “이것이 실행되면 일본인이 외국에서 사람을 죽이는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며, 일본 헌법에 제시된 전쟁포기를 잘라내 버릴 수 있습니다. 전쟁은 최대의 폭력이며, 무고한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어리석은 행위 그 자체입니다. 어떠한 이유로든 자신을 정당화하고, 돌이킬 수 없는 ‘목숨’을 무력으로 빼앗는 것은 어떠한 사람에게도 절대로 허락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근대 일본불교계의 반전운동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로소 이들 반전론자 종교인들의 피의 대가가 오늘날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일본의 보수 정권은 이러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을 비롯, 2003년의 자위대 이라크 파견, 2007년부터 헌법개정 시도 등 다시 무력을 사용하는 국가로의 이행에 몰두하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에 과거에 대한 상흔을 환기시키며 불안 요인을 제공하고 있는 지금, 이들 근대의 반전사상가 또는 운동가들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도 전 세계는 국지전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 인간과 인간끼리의 혐극은 끝을 볼 줄 모른다. 어둠으로 치닫는 절망의 세계 속에서도 반전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선각자들, 이들의 아름답고 고귀한 영성을 세계 모든 민중이 계승하여 이 지구에 전쟁의 피비린내가 마침내 사라지고, 참된 정토낙원이 이루어지길 마음 깊이 소망한다.

 

일본의 연구 동향

일본 불교계의 반전운동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불교계의 전쟁책임 문제는 주로 199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각 종단의 전쟁참여에 대한 참회와도 깊이 연동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서적으로는 히시키 마사하르(菱木政晴)의 《정토진종의 전쟁책임》(1993)과 《비전과 불교-비판원리로서의 정토교로부터의 물음)》(2005), 다이토 사토시(大東仁)의 《절의 종은 울리지 않았다: 불교의 전쟁책임을 묻는다》 (1994), 이치노헤 쇼코(一戸彰晃)의 《조동종의 전쟁-해외포교사 나카이즈미 치호(中泉智法)의 잡지기고를 중심으로》(2010)와 《조동종은 조선에서 무엇을 했는가》(2012)가 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조동종과 정토진종에서는 근대의 전쟁반대와 관련된 승려들에 대한 조명이 본격화되었다. 본 논고도 이들 저술에 기반한 것이다. 대표적인 서적을 들자면 우치야마에 대해서는 조동종 종무청 편의 《불종(佛種)을 심는 사람: 우치야마 구도의 생애와 사상》(2006), 다케나카에 대해서는 다이토의 《전쟁은 죄악이다: 반전승려 다케나카 쇼겐의 반골》(2008), 사나다 요시아키(眞田芳憲)의 《대역사건과 선승 우치야마 구도의 저항》(2018)이 있다. 다카기에 대해서는 다이토의 《대역의 고승 다카키 겐묘의 진실: 진종승려와 대역사건》(2011), 히시키의 《극락의 인원-다카기 켄묘 〈나의 사회주의〉를 읽는다》(2012)가 있다. 미네오에 대해서는 다나카 노부마사(田中伸尚)의 《붙잡힌 젊은 승 미네오 세츠도-미결의 대역사건과 현대》(2018)가 있다.

신불청은 불교의 사회운동 차원에서 비교적 일찍 연구되었다. 이나가키 마사미(稲垣眞美)의 《불타를 짊어지고 가두에: 세노오 기로와 신불청》(1974), 《세노오 기로 일기》(총 6권, 1974), 《세노오 기로 종교논집》(1975), 마츠네 타카(松根鷹)의 《세노오 기로와 신불청》(1975), 세노오의 가장 측근인 하야시 레이호(林靈法)의 《세노오 기로와 신불청: 사회주의와 불교의 입장》(1976)이 있다.

이들 저자는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치면서 자료를 모으고 역사를 복원해 냈다. 몇몇 저자들로부터 근린국가에 대한 과거의 사죄 때문에 우익들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겪기도 한다고 직접 들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의 기록은 물론, 고난의 시대에 목숨을 걸고 정의와 평화를 위한 전쟁반대를 외친 의로운 인물들을 세상에 드러내어 인류 평화에 주춧돌을 놓고 있는 양심적인 일본인들에게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

 

원영상
원불교 교무, 원광대학교 정역원 연구교수. 원광대학교 졸업. 일본 교토(京都)불교대학에서 일본불교사상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주요 논문으로 〈근대 일본불교와 민족주의-鈴木大拙를 중심으로〉 〈한용운과 세노오 기로의 불교혁신사상 비교연구〉 〈광복 후 분단체제에 대한 원불교의 대응과정 연구〉 등과 저서로 《동아시아불교, 근대와의 만남》(공저), 《일본문화사전》(공저) 등이 있다. 현재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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