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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불교의 평화론
특집 | 불교, 거듭 평화를 말하다
[76호] 2018년 12월 01일 (토) 담마키띠 dammakiththi@hanmail.net

- 사르워다야 평화운동을 중심으로

1. 머리말

전쟁과 평화는 분노와 자애로 풀이할 수 있다. 그동안 인류는 수많은 전쟁을 일으켜 왔으며, 인류의 역사는 오로지 힘과 전쟁의 논리에 의해 단정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인류의 역사 속에는 평화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종교를 통해 평화가 주로 언급되어 왔다. 하지만 종교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붓다의 가르침은 평등과 정의로 규정할 수 있다. 스스로가 먼저 평화로워진 후에 타인의 평화까지 일으키는 것이 붓다의 핵심 가르침이다. 불교 외에 다른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이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테레사 수녀, 킹 목사, 간디 등이 바로 그러한 사람으로, 이들의 등장으로 사회의 흐름이 바뀔 수 있었다.

스리랑카는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차례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통치 속에서 전통적 사회질서와 문화가 무너지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정치적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갈등의 시발점이 되었다. 1948년에 식민통치에서 벗어났지만 197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전한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다수 민족과 소수 민족 사이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스리랑카 내부의 갈등을 지배적 위치에 있는 불교계 싱할라족과 힌두교계 타밀족 무장단체 간의 문제로 단정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논리에 동의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치적인 요소를 문제의 핵심 요인으로 본다. 스리랑카 민족 갈등 문제와 관련한 폭력의 현대적 양상은, 피상적인 관찰만으로도 맥락이 매우 복잡하여 그 근본 원인을 한 가지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스리랑카에서 일어난 갈등, 내전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문제를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이런 점을 이해하면 타 종교, 타민족과 함께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바로 사르워다야(sarvodaya) 평화운동의 목표였음을 명확히 알게 된다. 그동안 스리랑카에서 분쟁의 해결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있었지만,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공통적으로 불교사상적 영향하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필자는 스리랑카 현대사에서 발생한 내부적 비극과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불교계에서 전개한 평화운동을 소개하여 향후 한반도 평화 실현에 일조하고자 한다.

 

2. 불교의 평화 정신에 대한 스리랑카 불교계의 관점

1) 폭력과 비폭력

불교에서는 우리에게 자아와 타인의 분별을 넘어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 마땅히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증오, 공격성, 물욕을 불러일으키는지 볼 수 있다. 이러한 행동들은 그 자체로 자라나서 개인뿐만 아니라 문화 전체에 강력하게 뿌리를 내린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미래의 언젠가 또다시 세계 곳곳에서 살인, 폭행, 테러가 발견할 수 있음을 예견할 수 있다. 불교에서 계율을 중시하는 것은 각 개인의 도덕성을 키우고 위와 같은 악순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이다. 불교의 오계의 첫 단계는 자기 중심성을 해체하고 타인에 대하여 마음으로 느끼는 바를 고취하는 것이다.

불교의 업 사상은 직간접적으로 폭력 행위를 통하여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는 삶을 피하도록 권한다. 또한 붓다는 구체적으로 무기, 살아 있는 존재 등의 거래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불교는 특별히 종교 전쟁이라고 불릴 만한, 즉 불교를 믿기를 꺼리는 이들에 대해서 불교를 강요하고자 전쟁을 일으킨 역사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불교국가인 스리랑카는 역사적으로 많은 전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왕국이 아니라 불교를 위함’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원전 2세기의 스리랑카에서 일어났던 국가 독립 전쟁에 대하여 “자유는 공동체의 물질적 진보와 영적인 진보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국가 독립을 위해 외국 침입자에 맞서 싸우는 것이 이미 (당시에) 불교전통으로 성립되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불교에 따르면 ‘정당한’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증오, 잔인함, 폭력과 학살을 정당화하고 변명하고자 고안되어 유통되는 잘못된 용어만 있을 뿐이다.”라고 단언하였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지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정부 주도의 형태로 일어나는 전쟁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성찰이 필요하다. 실제로 붓다 당시에도 많은 전쟁과 폭력, 차별에 따른 다양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붓다가 어떤 해결 방법을 사용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붓다는 석가족(śākya)과 코리야족(Koliya)이 로히니(Rohini) 강의 물을 두고 대치하는 일이 발생하자 직접 전쟁터로 찾아가서 개입하였다. 그리하여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말리게 된다. 이 사건을 붓다가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보면 종교적으로 비폭력 사회 실현을 위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 예시로 삼을 수 있다. 강력한 폭력의 사악함으로 인해서 자신과 타인이 모두 불행하게 되고 결국 멸망하게 된다. 그것의 예로, 전쟁으로 인하여 석가족이 멸하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우리가 폭력으로 폭력에 맞서면 그것이 결국 상대방의 비탄과 복수심을 강화하게 되어 사태가 더 악화될 뿐이다. 그래서 붓다는 “증오는 증오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친절을 통해 사라진다. 이는 영원한 진실이다”라고 했다. 이런 붓다의 가르침을 세계적인 메시지로서 전달할 필요가 있다.

불교적인 비폭력(Ahimsā, 아힘사)을 도덕적 예시를 통해 소통하고 추구하게 되면 깜짝 놀랄 만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분노를 정복하는 것은 겸손과 자비, 사악을 정복하는 것은 선과 지혜, 인색을 정복하는 것은 관용과 베풂, 거짓말을 정복하는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종교적 비관용과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비폭력 투쟁을 한 것, 그리고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미국에서 벌인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 같은 것은 세계적인 비폭력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폭력을 정당화하고 행사하는 수백만의 동료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오늘날 불교도들이 평화를 위해 싸울 수 있고 인간의 삶에서 폭력을 줄이는 데 공헌할 수 있는 기회와 국가들이 존재한다.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폭력이 문제나 갈등을 해결해주지 않음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2) 스리랑카 사회의 노력

불교에서 말하는 폭력과 갈등에 대한 태도를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붓다의 말씀을 살펴 봐야 한다. 붓다의 폭력의 의미, 폭력을 비판하는 이유뿐만 아니라 폭력 행위의 근본적인 원인도 알 수 있으며 마음에서 평화를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방법까지 알 수 있다.

불교 경전에서 정신적, 언어적, 신체적 학대의 모든 행태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든 타인에 관한 것이든 ‘폭력’의 잠재적인 예시로 정의된다. 상좌부불교 사회인 스리랑카를 포함하여 어떤 사회에서든 폭력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고, 정도의 차이와 함께 여러 차원이 존재한다. 폭력의 원인은 반드시 하나라고 할 수 없고, 현대 사회현상을 위협하는 폭력은 다양한 원인이 있으며 그 행위자도 여럿이 될 수 있다.

스리랑카 민족 갈등 문제와 관련한 폭력의 현대적 양상은 피상적인 관찰만으로도 그 맥락이 매우 복잡하여 근본 원인을 한 가지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스리랑카에서 일어난 갈등, 내전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문제를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이 현재 스리랑카의 문제를 하나의 원인을 통해서 진단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예를 들어 국민의 경제적 가난이나 공산주의 정치 운동,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의 테러 행위 등으로 인한 폭력 발생의 원인과 행태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다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스리랑카가 상좌부불교의 핵심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40년간 극단주의자들, 테러리스트들, 정부군에 의해 행해진 다양한 폭력 형태가 존재해온 이유를 확실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스리랑카 내부의 각종 폭력 행위는 불교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위배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스리랑카는 2,300여 년 동안 불교 전통을 지켜온 나라이며 역사적으로 18번의 전쟁을 겪었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민족 간의 갈등은 500년 동안 서양에서 받았던 많은 압박과 갈등에 그 원인이 있으며, 서양 식민통치가 만들어온 차별 사회의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불교 전통이 있어서 그나마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서로 다른 다섯 민족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스리랑카가 불교 전통을 지켜왔던 덕분으로 볼 수 있다. 남아시아 이웃 나라들에 비해 스리랑카는 카스트, 민족, 종교 등 극단적인 문제들을 상대적으로 잘 극복하고 있다. 2010년에 스리랑카에서 발생한 ‘쓰나미(Tsunami)’에도 갈등 없이 원만하게 힘을 합쳐 극복했던 것은 사르워다야에서 오랫동안 가르쳐왔던 ‘쓰라마다나 운동’의 영향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스리랑카 불교계에 문제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수천 년간 유지되어 온 불교 전통을 무너뜨리려는 극단적 행위를 통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부의 문제에 지나지 않으며, 이를 확대해석해서 불교 전체의 문제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스리랑카의 승려들이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어서 국가 내 정치, 사회, 환경 등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앞장서고 있다. 예를 들면 북쪽과 서쪽의 불교유적지를 훼손하는 현 상황,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서부의 여러 세계적인 밀림을 개발하고 코끼리 등 보호대상 동물들을 죽이는 것 등 많은 문제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승려들이 의해 많은 시위를 주도하기도 하고, 폭력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일련의 사건들은 불교와 직접적 관련이 없으며, 여러 민족과 종교가 연관되어 벌어지는 일이다. 이러한 일련의 문제에 대한 시민의 불만을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이 이용하고 있는데, 실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단순하게 해석하고 있는 현실이 자못 안타깝다.

이처럼 오늘날 스리랑카 사람들 대부분은 당면한 각종 문제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민족적, 종교적, 경제적 상황과 무관하게 고통을 겪고 있다. 중립적인 목소리들은 언제나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 및 사회적, 종교적 공간의 양자 모두에서 곡해되고 무시된다. 이는 스리랑카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의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갈등해소를 위한 붓다의 가르침을 돌아보지 않는다. 특히 경제적,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편견에 기초해서 성립된 극단적 사회일수록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경우는 불교 덕분에 평화를 위한 많은 기도 활동과 종교지도자들의 각종 모임을 통해서 이 문제를 새롭게 풀어가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3. 스리랑카 내부의 갈등과 내전 전개

1) 스리랑카 내부 갈등의 배경

스리랑카는 인도의 남동쪽, 인도양에 위치한 섬나라다. 과거에는 실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국토의 면적은 6만 5610㎢이다. 정글에서부터 고산지대까지 다양한 식생을 관찰할 수 있다. 이 나라에는 다섯 민족과 다섯 개의 종교가 있다. 인구는 약 2,205만 명(2016년 기준)이다. 싱할라족(Sinhala) 74.9%, 타밀족(Tamil) 15.4%, 무슬림(Muslim) 9.2%, 버그르족(Burger) 0.5%로 구성되어 있다. 싱할라족은 싱할라어를 사용하면서 타밀족과 무슬림족은 타밀어를 사용한다. 종교 인구는 불교 69%, 힌두교 11%, 이슬람교 7.6%, 기독교 7.5%, 기타 4.9%로 분포되어 있다. 싱할라족 대부분이 불교, 타밀족 대부분이 힌두교 신자이며, 나머지 싱할라족과 타밀족이 기독교와 로마 가톨릭을 신봉한다. 무슬림들은 거의 이슬람교를 믿는다. 이 글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민족과 종교 간에 어떻게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타밀족은 인도 타밀과 스리랑카 타밀의 두 종류로 나뉜다. 인도 타밀 쪽은 영국 식민지 시절 인도에서 노동을 하러 왔다가 정착한 사람들의 후예이다. 두 타밀족 간에도 갈등이 있었다. 인도에서 온 타밀족은 대부분이 홍차 노동자로 살아왔다. 스리랑카는 1815년경 대영제국의 침략을 받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스리랑카를 식민지화한 영국은 식민지 지배의 협력을 얻기 위해 싱할라족들의 지지를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싱할라족은 영국을 침략자로 보고 격렬하게 저항했고, 싱할라족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실패한 영국은 소수민족인 타밀족의 지지를 끌어냈다. 이후 영국은 싱할라족과 타밀족 간의 대립과 분열을 부채질하며 스리랑카를 지배해왔다. 게다가 영국은 인도 남부 지역에서 살고 있던 타밀족을 차 재배에 고용할 노동 인력으로 이주시켜 싱할라족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러던 차,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들이 소유하고 있던 해외 영토와 해외 식민지에서 탈식민지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스리랑카 역시 1948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독립 과정에서 스리랑카의 모든 주요 권력은 다수인 싱할라족이 장악하였고, 이들은 소수민족인 타밀족에 대한 차별 정책을 펼쳤다. 반다라나이케(Bandaranayake)가 총리가 되면서 더욱 강력한 싱할라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1972년 헌법 개정을 통해 싱할라어와 불교를 우대하는 정책을 취한 결과 타밀족의 분리운동은 더욱 강화되었다.

민족 간의 문제가 악화되면서 1977년 발생한 분쟁으로 약 300명이 죽고 3만5천 명의 타밀족이 난민촌에 수용되었다. 이후 발생한 분쟁에서 타밀족 급진파 조직이 거주지인 자프나(Jaffna)에서 정부군을 습격하여 싱할라족 병사 13인을 살해했다. 이에 따라 싱할라족의 무차별 보복전이 전개되었다. 타밀족 상점이나 주택이 싱할라족 폭도들의 공격을 받았다. 분쟁이 극에 달했던 1983년 7월은 스리랑카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였다. 그래서 스리랑카 사람들은 7월이 되면 ‘까만 7월[Kalu July]’이라 하여 민족 간에 혹시 발생할 수도 있는 분쟁을 두려워하곤 한다.

타밀족은 인구의 규모나 누가 먼저 스리랑카에 살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오랫동안 두 종족이 사이좋게 지내왔으나 언제부터인가 싱할라족 지도층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민족 갈등이 이용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단순히 싱할라와 타밀이라는 종족의 차이 때문에 스리랑카에서 분쟁이 일어났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정치, 경제, 사회 등 현실적인 여건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내전 상황과 같은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점이 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1970년 스리랑카 남부에서 인민해방전선(JVP)이 발족했고, 이들에 의해 두 차례의 무장 폭동이 발생했다. 1971년에 약 8천 명의 사람들이 죽었으며, 1989년에는 프레마다사(Premadasa) 대통령이 인민해방전선(JVP) 민병대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치열한 게릴라전이 벌어졌으며 1989년 11월 로하나 위제위라(Rohana Wijeweera)가 살해되는 등, 인민해방전선 지도자들은 한 명 한 명 제거되었다. 1989년 말 대부분의 인민해방전선 지도자들이 살해되거나 감옥에 갔으며 폭동으로 살해당한 사람들이 6만여 명이었다. 살해된 사람들 대부분이 청년들이었는데, 승려와 대학생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체가 강에서 바다로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선을 먹지 않았다. 이 같은 역사를 보면 종족의 차이만으로 스리랑카의 분쟁이 일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서로 존중하며 사고의 자유를 인정하는 민주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다.

 

2) 인도 정부의 개입과 내전 상황 전개

예로부터 스리랑카는 인도와 가장 가깝게 지내며 양국 간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져 왔다. 스리랑카는 독립 이후 식민지 시기에 영국인에 의해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이주해 왔던 농장의 타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였다. 스리랑카 정부는 30만 명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지만 나머지 15만 명에게는 시민권 발급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인도 정부의 요청으로 나머지 15만 명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스리랑카 정부군은 게릴라 섬멸 작전을 끊임없이 시도하였다. 그러나 반정부 게릴라 활동은 인도 타밀나두(Tamil Nadu)주의 지원하에 계속되었다. 스리랑카 정부는 국방비 과다 지출로 경제적 부담이 커지면서 인도의 개입 없이 사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인도의 타밀나두주가 타밀 게릴라 단체에 무력을 지원함으로써 인도와 스리랑카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으며, 인도에 대한 주변국들의 의구심은 더욱 증대되었다. 인도는 집권당인 인도국민회의당(Indian National Congress)이 자신들의 정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대외적인 정책상의 업적이 필요했기 때문에 최대 현안인 타밀 사태를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1987년 7월 29일 양국 간에 체결한 평화협정 내용에 따라 인도는 스리랑카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하고, 스리랑카는 타밀족 밀집 거주지인 동북부 지역의 자치권을 확대하기로 했다. 또한 스리랑카 정부가 요청할 경우, 인도는 인도평화유지군(IPKF)을 스리랑카에 주둔시킬 수 있도록 했다. 1987년 7월 30일 스리랑카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인도평화유지군은 스리랑카 동북부 지역에 진주하면서 타밀 게릴라 단체의 무장을 해제하기 시작하였다.

1989년 6월 1일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스리랑카 주권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인도평화유지군이 7월 31일 이전에 완전히 철군할 것을 인도 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인도 정부는 자치권 이양을 비롯하여 인도 · 스리랑카 평화협정이 충분히 이행되지 않았으며, 동북부 지역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스리랑카의 철군 요청을 거부하였다.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국내적으로 야당과 인민해방전선으로부터 인도평화유지군의 철군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맹렬히 비난받았다. 특히 인민해방전선은 국민의 대정부 불만과 반인도 감정에 편승하여 6월 14일 버스와 철도의 대규모 파업을 선동하고 격렬한 테러활동을 전개하면서 사회불안을 가중시켰다. 이에 스리랑카 정부는 6월 20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인민해방전선의 반정부 활동을 진압하는 데 힘썼다.

스리랑카의 내부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2002년 노르웨이 정부를 필두로 해외 여러 나라가 본격적으로 중재에 나서기 시작했다. 2002년부터 5차례 평화회담이 노르웨이, 태국, 일본, 스위스에서 개최되었다. 정부와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 양측은 노르웨이 정부의 중재로 제네바 정전회담을 2006년 2월 22일과 23일에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2009년 4월 스리랑카 정부군이 LTTE의 최후저지선 안으로 진격함에 따라 LTTE는 협소한 지역에 포위되었다. 종전이 임박하였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부군은 LTTE가 억류하고 있던 약 10만 명의 시민을 안전지대로 구출하였다. 2009년 5월 17일, 1983년 이래 26년간 휴전과 전쟁을 반복하며 지속된 스리랑카 내전은 정부군이 LTTE의 장악 지역을 완전히 수복함으로써 끝났다. 라자팍사(Rajapaksa)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선언하였다.

2009년 5월 18일 LTTE 지도자 베루필라이 프라바카란(Velupillai Prabhakaran)이 정부군에게 사살됨으로써, 스리랑카 내전은 군사적 의미에서 사실상 종식되었다. 5월 19일 라자팍사 대통령은 국회에서 내전 종식을 선언하는 대국민 연설을 하였으며, 내전 기간 약 7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하였다. 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약 30만 명의 국내 피난민(IDPs)의 인권과 구호 문제, LTTE 장악 지역인 동북부 지역의 지뢰 제거와 개발 문제, 타밀인을 비롯한 소수인종에 대한 정치적 화해 문제가 주요 과제로 부상하였다.

스리랑카의 민족 갈등과 같은 현상들을 분석할 때 폭력, 극단주의, 전쟁 및 인권 탄압이 핵심 문제를 이루고 있음은 자명하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실업률이 날로 늘어나고 인구 전체가 골고루 적정한 삶과 보건의료와 교육의 혜택을 누리기엔 부족하고, 부의 재분배는 심각한 불균형을 보인다. 국가 문제에 있어서 정치적 제도는 부패하고 공공 책임이 부족하고, 공적, 사적 수준에서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며 정치적, 개인적 이득에 있어서 종교가 오용되는 등 많은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1948년 독립 이래 지난 70년간 스리랑카에서 권력을 잡았던 모든 정부가 가난한 이들의 자기 개선을 위한 적절하고 충분한 자원을 제공하는 데 실패했다. 어려운 경제 상황은 민족적 편견과 민족적 · 종교적으로 서로 다른 이들에 대한 적대감을 증폭시켰다.

 

4. 스리랑카의 평화운동

1) 사르워다야(Sarvodaya) 평화운동

‘사르워다야’는 산스끄리뜨어로 ‘모두의 일어남’이라는 뜻이다. ‘사르워다야’는 아리야라트네(Ariyarathne) 박사가 대학생 봉사단을 발족하여 어려운 농촌 지역으로 내려가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결성되었다. 현재는 스리랑카 전체 마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만5천 개의 마을이 참여하고 있다. 이 단체의 상근 활동가는 모두 1,500여 명이며 자원봉사자 20만 명에 달하는 스리랑카 최대의 비영리단체이다. 이 단체는 4,335개 기관을 통해 9만8천여 명의 아동을 돌보고 있다.

지난 50여 년간 활동해온 사르워다야는 현재는 복지, 난민, 인권, 평화, 여성, 아동, 출판, 재활, 명상센터, 친환경적인 농업기술센터, 경제개발 프로그램 등으로 체계적인 조직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단체의 기본정신은 모두 불교사상에서 찾을 수 있는데 “불교적 가치와 불교원리에 따라 스리랑카의 정신적, 경제적 재건을 위한 봉사를 운동의 목적으로 한다.”고 천명한 바 있다. 다양한 가치를 가진 문화 속에서 시작된 사르워다야 운동의 원칙은 참신하다. 단체행동은 나눔, 고운 말씨, 건설적 행동, 평등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기본적으로 독립성, 공동체 참여, 노동과 다른 자원의 나눔을 가장 큰 자산으로 여기며,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 운동이 추구하는 이념인 ‘개발’이라는 용어는 보다 정신적인 가치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리야라트네는 사르워다야 운동에서 ‘개발’이라는 용어는 ‘인간이 정신적으로 깨우쳐 나가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모든 것들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르워다야가 지향하는 ‘개발’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해 온 서구적 모델의 개발 개념이 아닌, 공동체 스스로가 지녀온 고유의 ‘전통문화나 생활양식 속에서 발견한 가치’를 통해 그 활동을 전개해 나가는 새로운 개념을 담고 있다. 이러한 개발 활동을 통해 사르워다야 운동은 ‘빈곤이 없는(No-poverty), 그렇다고 풍요도 없는(No-affluence) 사회’ 건설을 지향하며, 선진국의 지나치게 풍요로운 생활 양태를 뛰어넘는 ‘또 하나의 대안사회(An alternative society)’ 개념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신념을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끊임없이 발산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사회 건설을 위해 아주 구체적인 사항들을 실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것들, 즉 깨끗한 물, 소박하고 충분한 식사, 깨끗한 평상복 두 벌과 외출복을 포함한 의복 총 6벌, 간소한 주거 공간과 청결한 수건, 탁상보 등을 갖추고, 생활의 규율을 바르게 하며, 생활의 가치를 농업이나 교육, 면학, 예술문화 활동에 둘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이다. 4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해온 사르워다야 운동은 오늘날에도 그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나가며 국내외의 관심을 끌고 있다. 또한 스리랑카가 오랫동안 안고 온 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지원하는 데 사르워다야의 평화운동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2) 사르워다야 쓰라마다나 운동

쓰라마다나는 ‘노동 보시’라는 의미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비정부기구 공동체 운동의 하나인 사르워다야 쓰라마다나 운동(Sarv-odaya Shramadana Movement)에 스리랑카 전체 마을의 절반인 1만5천여 개 마을에서 참여하고 있고, 이들 마을이 공동체 운동을 펼치면서 사르워다야 쓰라마다나 운동의 정책과 활동 전반을 스스로 조정하고 있다. 아리야라트나가 중심이 되어 1958년에 시작한 운동이며, 전국 345개의 구역 단위 센터를 통해 민족, 종교, 카스트, 계급 등에 상관없이 전국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다. 이 운동을 통해서 예방적 의료교육, 치료 서비스, 법적 서비스, 구호와 복구, 여성 임산부 서비스 등을 많이 제공했다. 그뿐만 아니라 주거 문제, 에너지 문제, 소자본 신용제도, 소규모 사업개발 등 다양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스리랑카에서 1977년, 싱할라족과 타밀족 간의 분쟁 발생으로 ‘까만 7월(Kalu July)’을 맞을 때까지, 매일 매일 일어나는 민족 분쟁을 줄이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했으므로 이때부터 쓰라마다나 운동을 5단계(Pancavidha)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 다섯 단계를 ‘5R’이라고 불렀다.

첫째, 피해를 받은 주민들에게 필요한 응급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므로 ‘구호(Relief)’를 첫 번째 ‘R’로 삼았다.

둘째, 피해를 받은 주민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회복하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정신적, 물질적 도움을 주는 캠프를 꾸린다. 그래서 ‘복귀(Rehabilitation)’를 두 번째 ‘R’로 삼았다.

셋째, 이렇게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 피해를 당했던 모든 주민에게 평등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을 화해(Reconciliation),세 번째 R로 불렀다.

넷째, 파괴된 집, 학교, 수도, 병원 등 모든 서비스를 정부와 힘을 합해 다시 조립하는 과정이 복원(Reconstruction)이라는 네 번째 ‘R’이다.

다섯째, 각종 피해를 당했던 주민들이 다시 마을의 전통을 세우기 위한 심리적, 정신적 상담 프로그램들을 만들었다. 파괴된 마을을 다른 사르워다야 마을과 같이 재건하고자 재각성(Reawak-ening)하는 것이 다섯 번째 ‘R’이다.

이와 같은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감에 따라 마침내 쓰라마다나 운동은 스리랑카 국민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공감과 신뢰를 얻게 되었다. 이제는 마을, 사찰, 교회 등을 청소할 때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함께하고 있다. 민족, 종교, 계급, 성차별 없이 누구나 복 받는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펼치는 것이다.

또한 사르워다야 운동은 5단계로 마을 개발을 실현해 간다.

1단계는 추구하는 이념과 공동체 정신을 소개, 권장하고 이것이 쓰라마다나 캠프 전체에 퍼져나가도록 한다. 2단계로 참여하는 사람들(주부, 청소년, 노인, 어린이, 농부 등)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3단계는 마을 단위의 사르워다야 공동체를 출범시켜 필요한 것들의 우선순위를 설정, 토론하여 시급한 일부터 자원과 노동력을 모두 사용한다. 4단계에는 직업훈련을 하고, 마을 신용금고를 만들어 활용하는 등 사회개발프로그램이 계속되면 소득이 높아지고 독립적인 지역사회가 된다. 마지막 5단계는 마을 단위에서 벗어나 다른 지역사회와 경제적인 공유가 가능하고 다른 공동체와 협력하며 지역사회 운동을 벌여 나간다. 즉 의식, 경제, 힘의 개발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이 단체는 1961년 처음으로 아누라다푸라에서 쓰라마다나 캠프를 열고 운동의 이름을 ‘사르워다야’로 하기로 결정했으며, “불교적 가치와 불교 원리에 따라 스리랑카의 정신적 · 경제적 재건을 위한 봉사를 운동의 목적으로 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1967년부터 100개 촌락의 계몽운동을 시작한 사르워다야 운동은 1971년 400개의 촌락으로 확대되었으며, 10년 뒤에는 2,000개의 촌락으로 확산됐다. 사르워다야는 1970년대부터 외국인 후원자를 모집하였다. 대표적인 지원 단체로는 NOVIB(네델란드), FNS(독일), NOR AD(노르웨이), Helvetas(스위스) 등이 있으며, 한국에는 참여불교 재가연대가 후원하고 있다. 현재 사르워다야 운동의 상황은 전국 33곳의 지역센터, 345곳의 구역센터를 중심으로, 1만1천여 개 마을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 가운데 505곳이 마을금고를 운영해 농민들에게 9억 루피 이상을 대출해 주었고, 3,359개 마을은 독립적 법인체로 인가되어 주민자치형 공동체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3) 사르워다야와 승려들의 역할

사르워다야 운동의 기본 사상은 불교의 가르침 위주로 구성되었다. 중도 사상, 사무량심 수행, 10바라밀 등은 사르워다야의 근본 사상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가르침이 중심이 된 봉사단체에 많은 승려가 활동하고 있다. 그중 둔따네 수마나팃싸(Tuntane Suma-nathissa), 가네그마 사라낭카라(Ganegama Sarana-nkara), 키리매티야웨 반야사가라(Kirimatiyawe Pańńās-āgara), 내달라가무웨 지나난다(Nadalagamuwe Jinananda), 야티바우웨 라타나사라(Yatip-awwe Ratanasāra) 등이 핵심적인 지도자들이었다.

사르워다야 운동의 영향을 받아 스리랑카에서 탄생한 세계적인 학자 승려가 바로 월폴라 라훌라이다. 월폴라 라훌라는 사르워다야 평화운동이 사람들 저마다의 삶을 새롭게 보이게 했다고 말했다. 스리랑카에서 불교 민족주의 전통을 강화한 월폴라 라훌라는 평화의 길을 모색해왔다. 교육의 자유를 위하여 그는 위드요다야 대학교(Vidyodaya University)의 총장직도 그만두었다. 많은 학생의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자유롭지 않은 교육을 원하지 않았기에 사임하였고, 총장직에서 물러난 후 많은 중요한 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는 마침내 빨리불교대학을 설립하여 본격적인 평화운동 행보에 나섰다. 붓다의 가르침을 계급사회에서 그대로 설법 · 실천하자면 계급사회에 내재된 살육의 논리와 정면충돌할 각오를 해야 하는데, 이는 주류 불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살육의 논리에 의한 일방적 제압이 불교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계급사회를 비판했다. 그는 20세기 중반 승가 종단의 계급제도에 대한 여러 문제를 비판하며 평등한 승가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르워다야에 영향을 받아 오늘날까지도 평화운동에 관심을 가진 승려들이 많다. 그중 일본에서 이주민 활동을 하는 소마시리(Somasiri)는 히로시마 원폭 피해를 다룬 일본의 인기 만화 《맨발의 겐(はだしのゲン)》(전 10권)을 스리랑카어로 번역, 출판하고 스리랑카에서 반핵 ·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현대불교신문〉 기사에 의하면 “한 세대의 배움은 다음 세대로 전해져야 한다.”고 말하는 소마시리는 “1년 전 《맨발의 겐》의 출판권을 계약하고 싱할라어로 펴낸 이유가 일본의 이야기일지라도 그 속에서 스리랑카에 평화의 가치를 전하고자 했기 때문”이라며 “앞선 세대의 뼈저린 교훈은 그다음 세대의 절대 가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내전을 겪었던 소마시리는 “내전이 종결된 지 6년이 되었지만 스리랑카에서 그 흔적은 여전하다”며 “사마 마하 사원은 지금도 난민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고아를 돌보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현재는 젊은 승려들도 작은 단체를 운영하여 사회평화를 위해 많이 애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앞으로 스리랑카 사회평화를 위해 승려들의 역할이 적지 않게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5. 맺음말

사람들은 미래의 어느 날, 전 인류가 하나 되어 피부, 언어, 민족, 종교 등으로 말미암은 각종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는 날을 꿈꾼다. 나아가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의 실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최대 위기는 빈곤, 폭력, 그리고 환경오염이다. 필자는 오늘날 인류가 스리랑카의 사르워다야와 같은 운동을 통해서 우리가 정신적, 윤리적 이해를 명철하게 갖지 않으면 이러한 문제들은 해결은커녕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불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붓다의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이라는 발원을 담아, 인간답고 평등하고, 차별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일이다.

필자는 스리랑카의 사르워다야와 같은 평화운동이 세계 여러 사회에 새로운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본다. 평화를 위한 지성적인 노력을 위해서는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평화운동이 필요하고, 불교계의 국제적인 협상 능력도 필요하다고 본다. 스리랑카뿐만 아니라 많은 불교국가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분쟁을 붓다의 지혜와 보살의 자비사상을 통하여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연구는 앞으로 절실히 필요하다.

스리랑카가 독립하면서 표출되기 시작한 각종 불만을 정치인들은 민족과 종교 갈등으로 교묘히 조장해 나갔다. 이들은 싱할라어를 모국어로 선포하면서 영어 사용을 자제하는 운동을 일으켰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공공의 영역에서 계속 영어를 사용하였고, 이 때문에 영어를 모르는 일반인들은 오히려 정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기가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반면에 타밀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타밀어가 모국어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결과가 빚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월폴라 라훌라 등의 승려들이 지적하며 스리랑카에서 평등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민족 갈등의 해결법에 있어 스리랑카 정부의 또 하나의 문제는 1970년대까지 여러 민족이 함께 살았으나 이후 각각 지역을 나누어 살게 하면서 결과적으로 각 민족의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 안에 갇혀 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말미암아 민족 간 상호 문화적 교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각 민족 간에 많은 오해가 생겨났다.

필자는 오늘날 한국도 다문화 사회를 맞아 시행하고 있는 해결 방법이 1970년대 스리랑카와 닮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함께 섞여 사는 것이 앞으로 당면할 수도 있을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본다. 갈퉁(J. Galtung)이 “평화적인 세계질서에는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힘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중 한두 가지만으로 평화를 구축할 수 없다”고 말한 바와 같이 평화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평등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스리랑카는 오랫동안 불교 전통을 지켜온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갈등을 발생시켰던 것은 민족주의 전통을 앞세웠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점을 이해해서 앞으로는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평등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많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불교적 관점으로 폭력의 성격을 살펴볼 때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심리적 상태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은 모든 말과 신체적 행위에 앞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극도로 폭력적인 사건에서조차 가장 중요한 원인은 건강치 못한 심리 상태가 근원적 원인일 수 있다. 불교의 관점에서 폭력, 갈등에 관한 생각과 폭력적 활동은 번뇌이다. 폭력은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번뇌에 빠지게 한다. 따라서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번뇌에 빠졌을 때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불교계는 평등, 행복과 평화로운 사회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더불어 민족, 종교, 정치 등의 다양성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평화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

 

담마키띠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강사. 스리랑카 켈레니야대학교,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불교학 박사). 한국스리랑카 마하위하라 사원 주지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공사상에 관한 연구〉 등과 저서로 《스리랑카에서의 삼장 보존과 현대화 과정》 A comparative study on Mahayana Sutra of the World Father (loka pitṛu) and the Christian Gospels’ Universal Father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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