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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마주쳤던 사명당의 평화론
특집 | 불교, 거듭 평화를 말하다
[76호] 2018년 12월 01일 (토) 이철헌 cheadlee@hanmail.net

1. 시작하는 말

평화란 전쟁이나 갈등 없이 평온함을 말한다. 전쟁을 경험한 사람은 제발 전쟁만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몸을 떤다. 전쟁이 없는 세상이 바로 평화로운 세상이다.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선 먼저 내가 평화로워야 한다. 내가 평화로운 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라 할 수 있다. 열반은 곧 적정(寂靜)이며, 적정은 산스끄리뜨 샨띠(śānti)를 번역한 말이다. 샨띠는 평화라 번역하므로 열반은 곧 평화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는 〈플래툰(platoon)〉이란 영화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본질을 볼 수 있다. 전우가 죽는 걸 보면서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현실에서 살고자 하는 본능에 사로잡히고 이성을 잃어버린다.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군인들이 민간인을 처참히 짓밟고 유린하는 장면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린다. 전쟁이란 자신이 살기 위해 적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다. 전쟁을 수행하는 건 군인이지만 더 큰 피해를 입는 건 무기를 들지 않은 민간인들이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살아남은 자는 지옥보다 더한 현실을 맞이해야 한다.

용병대장 요다지와가 붓다께 말했다. “스승들의 전통을 이어온 이전의 무사들이 말하기를 ‘전쟁에서 도전하고 분투하는 무사가 다른 무사들에게 죽어서 임종을 맞게 되면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패전군이라는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전쟁에서 도전하고 분투하는 용병의 마음은 ‘이 중생들을 죽여 버리리라. 베어 버리리라, 잘라 버리리라, 파멸시켜 버리리라, 전멸시켜 버리리라.’ 하는 생각으로 이미 저열하고 타락했고 삿된 염원을 가졌다. 전쟁에서 도전하고 분투하는 이러한 그를 다른 무사들이 죽이고 임종을 맞으면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패전군이라는 지옥에 태어난다.”고 했다.

붓다는 전쟁에 참여하는 용병들의 마음에 살생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저열하고 타락하고 삿된 염원을 가지게 되므로 용병들은 죽어서 지옥에 태어난다고 했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이 적을 죽이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붓다는 전쟁이란 애당초 지혜와 자비가 없는 악이고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걸 말한 것이다.

전쟁이란 어떤 경우라도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평화로운 나라에 아무런 이유 없이 외적들이 침략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적이 나와 내 가족을 죽이려 들면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원하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도 있는 법이다.

 

2. 임진왜란과 조선불교 그리고 율장(律藏)

임진왜란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 1598)가 내부 단결과 다이묘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선을 침략한 명분 없는 전쟁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도착한 일본군은 불과 20일 만인 5월 3일 한양을 점령했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20만에 조선군은 패전을 거듭했다.

일본군은 군인만 죽이는 게 아니라 백성들을 처참하게 죽였다. 또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개처럼 목줄을 묶어 인신매매상에게 팔았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이 10만 명이며,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팔려간 조선인이 1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정유재란 때 일본 군의승으로 참여한 케이넨(慶念)은 이렇게 기록했다.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금속 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어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았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 죽여 갈라놓으니 다시는 볼 수가 없다. 남은 부모 자식의 공포와 탄식은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오는 때와 같이 공포와 서러움 속에서 몸을 떨고 있다.

전주를 떠나가면서 가는 도중의 벽촌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죽이는 참상은 차마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일본 승려조차 ‘괴로워서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다. 내 평생 이 같은 경험이 한 번도 없고 또한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의 잔악성을 나타내는 게 바로 교토에 있는 코 무덤이다. 전리품으로 약 2만 명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가져가 묻은 무덤이다.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산 자의 코도 베었기에 임진왜란이 끝난 뒤 코가 없는 백성이 많았다고 한다.

신립(申砬) 장군이 이끌던 조선군이 탄금대에서 패하자 선조는 4월 30일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떠났다. 의주로 향하던 선조를 맞이한 서산대사(1520~1604)는 왜군들이 백성들을 처참히 살육하고, 약탈과 방화로 전국을 초토화하는 현실을 전해 들었다. 그리곤 전국 승려들에게 나라를 위해 일어나라는 격문을 보냈다. 전국의 승려들은 의승병을 조직하여 왜군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황해도에서 의엄(義嚴), 강원도에서 사명대사, 충청도에서 영규(靈圭), 전라도에서 처영(處英) 등이 의승장이 되어 전투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도 의승군이 참여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의승군에 대한 불교계 평가는 나누어진다. 왜적이 쳐들어와 한양을 빼앗기고 백성들이 살육당하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긍정적으로 보는 게 대다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승려가 전쟁에 가담하여 살인한다는 건 잘못된 일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승려가 전쟁에 참여하는 문제를 율장인 비구계와 대승보살계를 통해 살펴보자.

율장에서 살인은 승가에서 함께 살 수 없는 바라이죄다.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타인에게 명령해서 죽이는 경우, 죽음을 찬탄해서 자살을 권하는 경우, 독약이나 칼이나 포승 등의 살생 도구를 주어서 자살을 돕는 경우 등이 모두 바라이죄에 해당한다. 그리고 출가자가 적법한 이유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군대를 보러 가면 참회해야 하며, 용무가 있어 군영에 들어가 3일 이상 머물면 참회해야 하며, 용무가 있어 군영에 머물더라도 전투하는 걸 보면 참회해야 한다.

전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살인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터로 나가면 군영에 머물러야 하고 행군을 해야 하고 전투를 해야 한다. 율장에 따르면 승려가 전쟁에 참여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대승보살계는 어떤가? 《범망경보살계본》에도 열 가지 무거운 죄의 맨 처음으로 살생계가 있다.

불자가 스스로 죽이거나 사람을 시켜서 죽이거나 방편으로 죽이거나 찬탄하여 죽이거나 (살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으로 죽이면 살생 인(因)과 살생 연(緣)과 살생 법(法)과 살생 업(業)이니라. 또는 모든 생명을 고의로 죽이지 말지니라. 보살은 상주하는 자비심과 효순심을 일으켜서 방편으로써 모든 중생을 구호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음을 멋대로 하여 거침없이 살생하는 것은 보살의 바라이죄니라.

비구의 바라이죄인 살인은 대승보살에게도 바라이죄다. 생명에 대한 계율은 대승에 들어와 오히려 강화되었다.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은 중생들을 연민하는 자비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범망경보살계본》 48가지 가벼운 계 가운데는 율장에도 없는 고기를 먹지 말라는 식육계(食肉戒)가 있다. 고기는 결국 살생을 통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생의 기구를 쌓아두지 말라는 축살생구계(畜殺生具戒)가 있다.

불자라면 칼 · 몽둥이 · 활 · 화살 · 창 · 도끼 등 전투하는 무기를 쌓아두지 말며, 그물 · 올가미와 같은 살생 기구들을 쌓아두지 말라. 보살은 부모를 죽인 자라도 오히려 갚음을 하지 않거든 하물며 모든 중생을 죽이겠는가. 중생을 살해하는 기구를 쌓아두지 말 것이니 쌓아두는 자는 경구죄를 범하는 것이니라.

보살은 중생을 이익되고 즐겁게 해야 하는데 살생 기구를 갖추는 건 자비로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군대 관련 계에는 국가의 군사가 되지 말라는 통국입군계(通國入軍戒)와, 싸우는 걸 보지 말라는 허작무의계(虛作無義戒)가 있다.

불자는 이익을 위해 나쁜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 나라를 오가며 군대를 모으게 하고 장수를 부추겨 서로 싸우게 하여 많은 중생을 죽게 하지 말라. 보살은 군대를 왕래하여 일부러 나라의 도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는 자는 경구죄를 범한 것이니라.

악한 마음으로 남녀가 싸우거나 군대 장병이나 도적들의 싸움을 보면 …… 경구죄를 범한 것이니라.

군대를 일으켜 서로 많은 중생이 죽도록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남녀나 군대 장병이나 도적들의 싸움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대승보살계에서도 살생하거나 살생 기구를 갖추거나 싸움을 보는 걸 금지했다.

그런데 대승보살계는 개차법(開遮法)이란 게 있다. 개차법은 대승불교의 기본 계율관이다. 개차란 지범개차(持犯開遮)를 줄인 말인데 상황에 따라 지니기도 하고 범하기도 열기도 하고 막기도 한다는 의미다. 이 개차법을 계를 범한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되며 오직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 자기에 대해선 철저히 지키고 막아야 하지만 중생을 위해선 범하고 열어야 한다.

살인에 대해서 원효(元曉)는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에서 ‘대승의 견기보살(遣機菩薩)이 삿된 견해를 가진 자를 죽인다면 죄가 없고 오히려 복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중생의 근기를 통달한 대승보살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그들을 제도할 수 없어 사람을 죽이면 죄가 아니라 복이 된다.’고 했다. 법장(法藏)은 《범망경보살계본소(梵網經菩薩戒本疏)》에서 각 계를 해설하면서 통국(通局)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인용해 살생계에도 통하는 게 있으니 살생을 해도 범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공덕을 짓는 게 있다고 했다.

보살이 도적이 재물을 탐해 많은 중생이 죽이고자 위협하는 걸 본다면, 또는 대덕의 성문 ‧ 독각 ‧ 보살을 살해하려고 한다면, 또는 무간지옥에 떨어질 업을 지으려 한다면, 이를 보고서 생각하기를 ‘내가 저 악한 중생의 목숨을 끊으면 나는 지옥에 떨어지리라. 내가 저 목숨을 끊지 못하면 저 중생은 무간업을 지어 큰 고통을 받으리라. 내가 차라리 저를 죽이고 지옥에 떨어질지언정 저 사람이 무간지옥의 고통을 받지 않게 하리라.’ 했다. 이와 같이 보살이 기쁜 뜻으로 사유하고 저 중생에게 착한 마음이나 무기심(無記心)으로써 이 일을 알리고 난 뒤, 깊이 참회하고 연민하는 마음으로 그 목숨을 끊는다. 이러한 인연이면 보살계를 범하는 게 아니라 많은 공덕을 짓는 것이다.

악인이 많은 중생을 죽이면 무간지옥에 떨어지게 되므로 보살은 자신이 대신해 지옥에 떨어지리라 원을 세워 악인의 목숨을 끊으면, 보살계를 범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공덕을 짓는다고 했다. 악인을 죽임으로써 많은 중생을 구하고 악인이 무간지옥의 고통을 받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법장은 살생 기구를 갖추는 것에 대해서도 “불법을 지키고 중생을 조복하기 위해 살생 기구를 쌓아둔 것은 범한 게 아니며, 악인이 구걸함에 따라 부수는 척하거나 부수지 않으면 범하는 게 아니다.”고 했다. 그리고 군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선심으로 저들을 조복 받고 화목하게 하기 위해 군에 들어가고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범하는 게 아니다.”고 했다.

대승계율에 따르면 삿된 견해를 가져 무간지옥에 떨어질 악인을 제도하기 위해 보살이 자비심으로 무기를 가지고 전쟁에 나가 살인을 한다면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복을 짓는 행위가 된다.

나라가 적군에 짓밟히고 백성들이 살육당하는 현실에서 승려가 자기 안일을 위해 산속에서 수행에만 전념하며 세상일을 외면한다면 이는 대승불교라 할 수 없다. 의승군의 참전은 삿된 견해를 가진 자, 악마를 죽이고 많은 사람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침략한 적으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자비심에서였다.

《화엄경》 〈입법계품〉에는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익과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자애라 한다. 그리고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불이익과 고통을 없애주고자 하는 마음을 연민이라고 한다. 자애와 연민이 곧 자비다.”라고 했다.

불교는 자비를 실천하는 종교다. 모든 행위는 자비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3. 사명당의 승군 활동과 고뇌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1544~1610)는 서산대사의 심법(心法)을 받고서 금강산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왜적이 금강산 유점사에 침입해 승려들을 포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명대사는 고성으로 들어가면서 문도들에게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것은 원래 중생을 구호하기 위해서다. 이 왜적들이 저렇게 퍼져 있으니 함부로 잔인하게 해칠까 두렵구나. 내가 마땅히 가서 저 미친 왜적들을 타일러 이 흉한 무기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친 왜적들이 흉한 무기로 중생들을 함부로 잔인하게 해치지 못하도록 타이르기 위해 적진으로 간다는 것이다. 이는 자비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유점사에 들어간 사명대사는 왜장을 설득해 잡혀 있던 승려들을 구하고 영동 9군에서는 약탈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았다.

사명대사가 의승군을 조직해 전투에 참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서산대사의 격문이었다. 격문을 받은 사명대사는 승려들에게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살면서 먹고 쉬고 편안히 지내면서 나이를 먹고 지내온 것은 털끝만 한 것이라도 모두 임금님 은덕이다. 이 어렵고 위험한 때를 당해 어찌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겠는가?” 하면서 총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사명대사가 전투에 참여한 심정은 갑오년 9월에 올린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에서도 “과거 세월은 모두 국왕의 성은 덕분입니다. 출가한 몸이라고 하지만 한시도 임금님을 잊은 적이 있겠습니까? 분통하게도 살무사와 전갈의 맹렬한 독이 온 나라에 퍼져 있고 산 사람이 어육(魚肉)처럼 되니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사명대사는 백성들이 처참히 살육된 광경을 보고서 “하늘이 벌써 추워지니/ 흰 눈이 함박처럼 내리네/ 붉은 머리와 푸른 옷들은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 어육(魚肉)이 된 우리네 백성이여 송장 되어 길에 서로 베개 삼아 누웠네/ 통곡하고 다시 통곡하니/ 날 저물고 산은 창창하기만 하구나/ 아득한 바다는 어디메뇨/ 미인은 하늘 한끝에 있네.” 하고 비탄한 심정을 읊었다. 전쟁의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사명대사는 산속에서 자기 수행만 할 수 없었다.

사명당이 의승군을 조직해 봉기한 동기는 이러한 기층민에 대한 자비심이 근원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면은 불교의 중생구원이라는 방향성이 왜란이라는 가혹한 현실에서 적극적인 실천적 경향으로 표방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의승군의 총지휘자는 서산대사였으나 나이가 많아 실제 의승군을 지휘한 이는 사명대사였다. 그는 평양성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했고, 전쟁이 잠시 멈춘 때엔 군량미를 비축하고 화살을 생산하고 성벽을 쌓았다. 이러한 전공으로 조정으로부터 종2품 당상관인 동지중추부사의 교지를 받았다.

사명대사가 전투에 참여해 많은 공을 세웠으나 이보다 더 큰 공은 조선과 일본과의 강화 노력에 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권율의 추천으로 네 차례나 적진으로 들어갔고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와 세 차례 회담했다.

제2군을 이끌던 기요마사는 어머니 이토(伊都)의 영향으로 열렬한 일련종(日蓮宗) 신자였다. 군기(軍旗)에도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글씨를 적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닛신(日眞)과 세이칸(淸韓) 등의 승려를 대동하여 승전을 기도했다. 서생포에서 사명대사와 3차례 회담을 했는데, 이때 사명대사의 인품과 법력에 감화를 받았다. 첫 번째 회담에서 기요마사는 종이 10여 장을 보내와 사명대사 글씨를 받아 갔다. 비록 기요마사와의 회담이 전쟁을 끝내는 데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과 강화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1598년 11월 19일 유키나가가 마지막으로 부산을 떠나면서 7년간의 전쟁은 끝났지만 조선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전 국토는 황폐화되었다. 조정과 백성들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원한에 치를 떨었다.

임진왜란은 그때까지의 조 ‧ 일 관계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일본은 강화를 요청했지만 왜적을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조선에서 어느 누구도 일본과 강화를 말할 수 없었다. 특히 경작지가 적고 쌀은 수확되지 않아 조선 무역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쓰시마(對馬島)는 전란으로 국교가 단절되자 큰 어려움에 빠졌다. 전쟁으로 조선 무역은 끊어지고 카키츠(喜吉) 조약(1443) 이래 매년 조선으로부터 받았던 세사미(歲賜米) 200석도 끊어졌다. 부산 왜관에도 갈 수 없게 된 쓰시마는 한시라도 빨리 국교를 회복하고 한시라도 빨리 조선 무역을 재개하고 싶었다.

1600년 9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통일하고 조선과의 강화에 의욕을 나타내자 대마도가 진행해온 조선 교섭에도 탄력이 붙었다. 이에야스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에게 조선과 통호관계를 맺는 것은 양국의 이익으로 서로 원한을 잊고 길이 호린(好隣)을 맺음이 마땅하다며 이 뜻을 조선에 전하라고 했다. 이러한 명령을 내린 이유에 대해 이에야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조선은 일본의 가장 가까운 나라이므로 서로 선린관계를 맺음이 도리다. 둘째 임진왜란에 의해 형성된 조선 ‧ 명 간의 연합적 군사위협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교섭의 중요한 목적이며 또한 조선과 강화하여 사신 왕래가 가능해진다면 일본 국내외에 태평이 초래할 것이다. 셋째 조선과의 호린(好隣) 체결로 그 나라의 내정을 살필 수 있고, 더욱이 일본의 무용(武勇)도 조선에 전해질 것이므로 나라를 길이 보전하는 방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조선과의 강화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시 전쟁이 일어날 거라며 위협하면서, 한편으로는 강화를 위해 조선인과 중국인을 송환하는 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선은 동포를 송환하면서 강화를 거듭 요청하는 대마도의 성의를 언제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조정은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임시방편으로 일본의 거센 강화 요청을 무마하고자 했다. 조선은 유정과 손문욱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일본 사신에게 전달했으나 여러 해를 미루며 보내지 않고 있었다.

비변사는 사명대사를 추천한 이유에 대해 “유정이 왕년에 여러 차례 가토 기요마사 진영을 드나들어 기요마사와 문답할 때 큰소리를 치며 굴하지 않았는데, 기요마사가 이를 매우 좋게 여겨 매양 유정의 사람됨을 일본인에게 칭찬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탈출해 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왜인들이 송운(松雲)의 이름을 전해가며 칭찬했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조선에서 승려인 송운대사를 비공식적으로 일본에 파견한 것은 일본 측에서 정식으로 사죄를 하지 않는데 조선에서 먼저 사신을 파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조정에서 사명대사를 탐적사로 선정한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명대사는 의승장으로서 임진왜란에 직접 참여해 전쟁의 실상을 체험했으므로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둘째, 7년간의 전쟁 동안 울산 서생포에서 왜장 기요마사와 3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진 경험이 있었다. 셋째, 기요마사를 향해 “그대 목이 우리나라 보배다.”라고 말한 내용이 일본에 널리 알려져 설보(說寶) 화상이라 명성이 높았다. 넷째, 일본은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며 오랫동안 외교문서는 승려들이 맡아 왔으므로 같은 승려인 사명대사가 일본 승려와 만나 외교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유리했다. 다섯째, 일본의 정세를 탐정하는 목적이므로 관료가 아닌 승려라면 경계심이 적어 정보수집에 유리할 수 있다. 여섯째, 대마도에서 강화를 요구하기는 했지만 아직 조 ‧ 일 간에는 전쟁의 증오감정이 뿌리 깊게 남아 있고, 대마 사절을 억류한 상태에서 대마도로 건너간다는 것은 생사를 건 위험한 임무였기에 모두 가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사명대사가 대마도에 도착하자, 도주인 소 요시토시는 곧바로 가노(家老)인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를 에도(江戶)로 파견하여 대사가 섬에 온 사실을 이에야스에게 보고했다. 이미 이에야스로부터 국내 정치의 구심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조선과 강화를 교섭하라는 명령을 받은 소 요시토시는 대사의 도일을 조선강화의 기회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내년 봄 교토에서 송운대사를 만나고 싶다며 대사를 교토까지 동행하라고 명령했다. 이에야스는 사명대사가 강화를 논의할 정식 사신은 아니라 할지라도 조선에서 보낸 사자(使者)이므로 사명대사를 통해 강화 교섭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그리고 조선 사신을 만나는 자리에서 막후의 위세와 아들 히데타다(秀忠)의 존재를 내외에 과시하고 싶었다.

후시미조(伏見城)에서 이에야스는 사명대사에게 “자신은 임진왜란 때 간토(關東)에 있었고, 그 침략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조선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며 강화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선에 다시 침공하는 일은 없다.”고 약속했다.

이에야스는 선조 대대로 정토종 신자였으나, 덴카이(天海, 1536~ 1643)에 귀의해 천태종의 간에이지(寬永寺)를 도쿠가와 쇼군 집안의 기도사원으로 삼았다. 말년에 이에야스는 거의 매주 승려를 불러 불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정도였으므로 정치적 목적 이외에 고승으로 명성이 높은 사명대사를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허균은 석장비에서 “대사가 이에야스(家康)를 만나서는 ‘양국의 생령들이 오래도록 도탄에 빠졌으므로 내가 널리 구제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는데, 이에야스(家康)도 불교에 귀의한 자였으므로 대사의 말을 듣고는 신심을 내어 부처님처럼 공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명대사는 이미 일본 내에서 교종과 선종에 모두 뛰어나고 시문(詩文)을 잘하고 글씨도 잘 쓰는 승려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기에 사명대사가 일본에 갔을 때 저들은 부처님을 사모하고 복을 구하려는 습속으로 이르는 곳마다 환영하여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절하며 부처님이라 부르고 조사님이라 불렀다.

이에야스는 사명대사와의 회담에 매우 만족했다. 사명대사와의 회담을 주선한 공덕으로 소 요시토시는 에도막부 아래에 있던 조선과의 국교에 관한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았고, 이 공적으로 히젠(肥前)에 2,800석의 영지를 받았다.

사명대사는 조 · 일 양국의 입장과 이해득실을 간파하여 전란 중에 납치되었던 피뢰인의 송환을 요구하고, 일본은 국교회복의 상징으로 조선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사명대사는 끌려갔던 동포 1,391명과 함께 귀국하고, 이후 지속적인 동포 송환을 요구하여 입적하기 전까지 3,775명을 쇄환(刷還)했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이후 보여준 활동은 지혜와 자비를 가진 고승이었기에 가능했다. 이에야스를 비롯한 일본의 군신들과 외교를 담당한 일본 승려들이 사명대사를 존경한 것은 선과 교에 능통한 고승이었기 때문이다. 불교를 탄압하는 조선에서 의승장인 사명대사와 불교를 숭상하는 일본에서 외교를 담당하는 승려와는 서로 처지가 달랐지만, 불교의 자비라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사명대사가 후시미조(伏見城)에서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를 만나 회담을 함으로써 일본과 강화 교섭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사명당의 법력에 감화를 받은 일본 승려들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승려의 신분으로 일본에 들어가 동포들을 쇄환해 돌아오는 사명대사의 활약은 민중들의 입을 통해 전승되면서 자연스레 전설로 만들어졌다. 방바닥이 타들어 가도록 불을 지펴도 수염에 고드름이 얼고, 벌겋게 달군 철마 위에 올라타라 하니 비를 불러 식히고, 길가에 늘어선 병풍의 내용을 모두 외우고, 구덩이에 독사를 넣고 유리를 덮은 뒤 앉으라 하니 염주를 떨어뜨려 알아차리는 등의 이야기들이 입으로 전해졌다.

이들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대개 외적의 폭력에 굴하지 않는 당당함과 간교한 적들의 수작을 물리치는 지혜로움을 지닌 사명당의 면모라 하겠다. 민족이 당면한 고난을 비겁하게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를 다해 나라를 구해낸 한 의사(義士)의 삶을 주목하고 그 정신을 전승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구비설화는 왜적을 철천지원수로 여기며 분노와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잃어버린 민족의 자존심과 패전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 만들어낸 결과다. 하지만 민중들이 사명대사를 얼마나 영웅시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훗날 신유한(申維翰)은 사명대사의 임진왜란 일기를 정리하면서 “마침내 교린과 화의를 성립시키고 백성의 생명을 건졌다. 그가 돌아와 조정에 보고한 뒤에 비로소 통신사를 보내 옛날처럼 친목 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송운대사를 보낸 일은 참으로 상책이었다.”고 평가했다.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수행하던 중 1607년 이에야스의 국서에 대한 회답과 끌려간 동포를 쇄환하기 위한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가 일본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일본 외교승 겐기츠(元佶) · 쇼타이(承兌) · 겐소(玄蘇) · 슈쿠로(宿蘆)에게 각각 편지를 보냈다. 안부를 묻고 현재 자기 처지를 소개하고는 지난번 일본에 간 이유가 널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인데 가보니 조선인이 다른 땅에서 생활하는 것이 마치 물과 불 속에 빠져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송환하지 않은 조선인들이 많으니 대장군에게 부탁해 모든 조선인을 돌려보내 달라 부탁했다.

사명대사가 이에야스의 고문이자 일본 외교승인 세이쇼 쇼타이(西笑承兌, 1548~1607)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에는 《수능엄경》의 게송 “이러한 깊은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세계를 받들 것이니 이는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라 하겠습니다.”를 인용했는데 《수능엄경》에는 이 게송의 앞에 “이제 과보를 얻어 보왕(寶王)이 되어서 이와 같이 항하사같이 많은 중생을 제도하고자 합니다.”라는 게송이 있다. 이는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는 게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이라는 말이다. 곧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면서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上求菩提 下化衆生]’ 불교의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이 출가수행자의 사명임을 강조하면서 조선 동포의 송환을 촉구하고 있다.

신유한은 임진왜란 전후를 통해 사명대사가 보여준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홀로 임금을 위해 충성하여 만 번 죽음에 나아가되 자기 몸을 생각하지 않고 산과 숲을 이루고 있는 창칼을 평지처럼 여겼으니 곧 선정이 아니겠는가. 지성으로 임금께 보답하고 하늘에 맹세하여 복수했으며 종묘사직을 근심하고 생령을 구하고 힘껏 중흥의 계책을 협찬했으니 곧 진정한 지혜가 아니겠는가. 한 돛배로 푸른 바다를 건너가 왜국 왕을 분명하게 꾸짖어 잡혀간 수천의 백성을 고래와 악어의 입에서 구출했으니 곧 대자비가 아니겠는가.

승려의 신분이면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지혜를 가지고 대자비를 실천했다고 칭송하고 있다.

생전에 대사와 형제 모두 교분이 있었기에 대사를 가장 잘 알고 있던 허균은 〈사명대사석장비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악마를 꺾고 고통에서 꺼내 주어/ 국가가 그 덕분에 병들지 않았는데/ 수포(獸袍)와 황금 인장을 내렸어도/ 그 총애를 뜬구름처럼 여겼다네/ 아득히 고해 속으로/ 동쪽 이단(夷亶)이 가라앉자/ 우리 자비의 배를 띄워서/ 저 완악한 오랑캐를 감화시켰다네

사명대사는 나라와 백성을 고통에서 구했으며 조정에서 벼슬을 주어 붙잡았으나 홀연히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일본과의 갈등으로 조정에서 부르자 배를 타고 일본에 들어가 왜적을 감화시키고 동포를 쇄환한 일은 자비의 실천이었다고 기록했다.

김중례(金仲禮)도 《분충서난록(奮忠緖難錄)》 서문에서 사명대사의 활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대사께서 어지러움 속에서 의병을 일으켜 나라가 위태롭고 어려울 때 힘을 다한 것은 흡사 절집에서 주장하는 자비(慈悲)나 적멸(寂滅)의 법문과 어긋나는 듯 보이지만, 부처가 세상에 나와서 널리 중생을 구제함에 있어서는 도 아닌 것이 없으니, 마침내 진여(眞如)의 정법에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그가 남쪽에서 돌아왔을 때 조정에서는 벼슬로써 상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끝내 옷깃을 떨치고 영원히 세속을 떠나 가야산에 자취를 감추었다. 공명(功名)과 영리(營利)로도 그의 계율을 바꿀 수 없었으니 대사야말로 소동파가 말한 이른바 ‘부처님의 심법을 얻은 분’이라 하겠으니, 이러한 경우가 실로 대사에게 해당되는 말이로다.

사명대사가 의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자 한 건 오직 중생을 구하고자 하는 자비심이었고 이는 계를 범한 게 아니라 오히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을 실천한 것이라고 했다. 세속의 명리를 구하고자 함이 아니었기에 조정에서 벼슬과 상을 물리치고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갔으니 참으로 부처님의 심법을 얻은 분이었다고 평가했다.

 

4. 맺는말

출가 수행하는 자는 세속의 번뇌를 떠나 지혜를 얻고 자기 내면의 평화를 이루고자 한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심인을 얻고 산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악행을 저지르는 왜적을 물리쳐 전쟁을 끝내고 나라와 백성이 평화로운 세상을 되찾고자 산문을 나섰다. 전쟁이 끝난 뒤엔 산으로 들어가 다시 자신의 평화를 찾고자 했다. 일본과의 갈등으로 나라가 불안해지자 일본에 들어가 이에야스와 회담해 다시는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일본으로 끌려간 동포들의 참상을 보고는 이들을 고향으로 쇄환했다. 귀국해서도 일본 외교승들에게 서신을 보내 동포송환을 촉구하고 있다.

1607년 조선은 이에야스의 국서에 대한 회답과 끌려간 동포들을 쇄환하기 위한 회답겸쇄환사를 보냈다. 이후 조선통신사 파견으로 이어지면서 260년간 동북아시아가 한 차례의 전쟁과 분쟁도 없이 평화와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이는 사명대사와 이에야스가 이룬 회담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선 먼저 내 마음의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내가 평화를 갖지 못하면 세상의 평화를 이룰 수 없다. 또한 세상의 평화 없이 내 마음의 평화도 없다. 내 마음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마거사는 이를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이전 사명대사는 마음의 평화를 이루었고 임진왜란 이후 사명대사는 세상의 평화를 이루고자 했다. 세상의 평화는 내 마음의 평화와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로 이루어진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을 맞이해 전투에 참여하고 일본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도 수행을 통해 내면의 평화를 가졌고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려는 자비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

 

이철헌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조교수.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철학박사).주요 논문으로 〈나옹혜근의 연구〉(박사학위 논문)와 저서로 《붓다의 근본 가르침》 《대승불교의 가르침》 《갈등치유론》(공저), 역서로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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