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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평화론과 화쟁의 평화적 해석
특집 | 불교, 거듭 평화를 말하다
[76호] 2018년 12월 01일 (토) 이도흠 ahurum@hanmail.net

1. 머리말

지금 세계에는 폭력과 평화가 교차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의 정상이 만나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향하여 어렵지만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판문점에도 무장병력이 철수하고 사람, 정보, 물류가 휴전선을 넘어 오고 갈 기운들이 무르익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전면전의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인류는 역사 이래, 정확하게 말하자면 농경시대 이후 파멸과 죽음으로 몰아놓던 삼대 재앙-전쟁, 기근, 전염병-에서 거의 해방되어 풍요와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곳곳에서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국가와 자본의 이해관계, 종교 · 이데올로기 · 종족 사이의 배제와 갈등과 무지, 특정 집단의 탐욕에 의한 전쟁과 대량학살, 테러가 전 세계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한 해(2012년)에만 47만 5천 명이 폭력에 의해 살인을 당하였으며,” 이는 평균치에 가깝다. “매년 네 명의 어린이 가운데 1명이 물리적 학대를 받으며, 세 명의 여성 가운데 1명이 파트너로부터 물리적/성적 폭력을 당하며, 17명의 노인 가운데 1명이 폭력을 당한다.”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상위 10%가 국민 전체 소득의 절반을 차지한다. “국제구호기구 옥스팜은…… 지난해 세계 부자 8명의 재산 합계가 재산 규모 하위 50% 인구의 재산 합계와 같았다고 지적했다.” 신자유주의 체제로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구조적 폭력 또한 증대하고 있다. 난민이 늘어나면서 갈등이 고조되고 이들에 대한 배제와 폭력을 주장하는 극우 정당과 세력이 점점 더 세를 얻고 있다.

이 상황에서 전쟁과 테러를 없애고 갈등과 폭력을 최소화하면서 평화의 길을 모색할 길이 없는가. 불교는 이에 어떤 지혜를 줄 것인가. 불자는 아힘사(ahimsā)를 최고의 계율로 삼는다. 스님들은 물속의 미생물마저 죽이지 않기 위해 여수낭에 걸러 물을 마셨다. 하나의 생명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서로 관계와 조건과 인과로 얽혀 있다고 간주하여 무생물까지도 소중하게 여겼다. 불경은 어떤 경우에도 분노하지 말며 심지어 팔다리가 잘리는 그 상황에서조차 자비와 인욕을 유지하라고 가르친다. 이에 아힘사는 불살생(不殺生)을 넘어 비폭력 사상으로 확장한다. 거의 모든 갈등과 폭력이 소유욕과 탐욕, 나와 우리의 집착에서 비롯되는데, 승려는 삼의일발(三衣一鉢)을 제하고는 무소유의 삶을 살고 매일 탁발하라고 이르고, 탐욕을 말끔히 없애라 하며, 모든 것이 찰나의 순간에도 변화하여 무상(無常)하고 오온의 결합체로 무아(無我)하니, 나 자신에 대해서든, 생각에 대해서든 집착을 깨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전쟁과 학살도 서슴지 않는데, 불교는 부처마저 죽이라고 할 정도로 끊임없이 해체하고 극단을 지양하고 중도(中道)에 머물라 하기에 이데올로기와 망상, 도그마에 휘둘리는 것을 경계한다. 이처럼 불교는 어떤 종교나 사상보다도 평화의 지혜로 넘쳐난다.

원효의 평화론을 서술할 때 네 가지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첫째, 평화의 지혜와 가르침으로 넘쳐나는 불교의 보편적인 평화사상으로부터 ‘원효만의 특수한 평화론’을 분리해내는 것이다. 이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자칫 불교의 평화론을 원효의 평화론으로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둘째, 원효의 목소리와 연구자의 해석을 구분하고 종합해야 한다. 전자를 우선적으로 하지 않으면 연구자의 비약과 과잉해석으로 변질될 것이며, 전자를 바탕으로 후자를 수행하지 않으면 박제화하여 ‘지금 여기에서’ 맞고 있는 전쟁과 폭력에 대한 평화론으로 적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셋째, 내적 차원에 머물지 말고 사회적 분석을 종합해야 한다. 상당수의 불교 평화론은 마음의 평화, 곧 ‘샨티(śânti)’와 이를 위한 방편과 수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개인과 사회는 상호침투한다. 마음의 평화에만 머문 논리는 가난을 게으름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사회학적 인식이 없는 것이다. 넷째, 당위적이며 윤리적인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몇몇 불교 평화론은 경전에 나타나는 평화와 자비의 구절을 당위적, 윤리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에 머물고 있다. 전쟁을 행하는 이조차 수사적 차원에서는 평화를 원한다고 주장하기에 당위적이고 윤리적인 평화론은 공허하다. 전쟁과 폭력, 갈등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원인 분석과 각각의 원인에 부합하는 처방과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

이에 평화를 크게 내적 평화와 외적 평화로 나누어 이에 대해 원효의 목소리를 들어본 다음, 이를 바탕으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맞고 있는 전쟁과 폭력, 갈등의 원인을 살피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평화론을 원효의 텍스트에 찾아 해석하되, 이문(二門)과 일심(一心)의 화쟁을 꾀한다. 곧, 일상에서는 탐욕, 이해관계, 권력, 이데올로기 등의 요인에 의한 갈등관계를 분석하면서 일심을 지향하는 길을 찾는다. 이에 요한 갈퉁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보완하여 폭력을 유형별로 직접적 폭력, 구조적 폭력, 문화적 폭력으로 나누고 각 유형별로 원인과 화쟁의 대안을 모색한다.

 

2. 평화에 대한 원효의 목소리

1) 내적 평화

불교에서 마음의 지극한 평화 상태는 열반이다. 불자의 목표는 무명(無明)에서 벗어나 삼독(三毒)을 깡그리 없애고 열반에 이르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원효는 일심(一心)에 이르는 것과 열반을 동일시하였으며, 마명(馬鳴)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해석하면서 이에 이르는 장애요인과 극복의 길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중생이 오래도록 생사의 바다에 빠져 열반의 언덕에 다다르지 못하는 까닭은 다만 의혹(疑惑)과 사집(邪執)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요체는 중생이 의혹을 없애고 사집을 버리게 하는 데 있다. 의혹에 대해 널리 논한다면 여러 길이 있다. 대승을 구하는 자의 의혹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법(法)을 의심하는 것으로 이는 발심(發心)에 장애가 된다. 둘째는 교문(敎門)을 의심하는 것으로 이는 수행(修行)에 장애가 된다.

사집을 버린다는 것은, 여기에 두 가지 사집이 있으니 인집(人執)과 법집(法執)을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뜻을 버리는 것은 아랫글에서 말할 것이다.

둘째 이름을 나열하는 가운데 인아견이란 총상(總相)을 주재하는 자가 있다고 헤아리는 것으로 이를 인아집이라 칭한다. 법아견이란 일체 법이 각기 체성(體性)이 있다고 헤아리기 때문에 법집이라 일컫는다. 법집은 곧 이승(二乘)이 초래한 것이다. 이 가운데 인집은 오로지 불법을 취하는 안에서 대승을 처음으로 배우는 사람이 일으킨 것이다.

대승은 지혜와 자비를 양 날개로 한다. 대승의 목표는 한마디로 말해 위로는 지혜의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上求菩提 下化衆生]. 원효가 볼 때, 중생이 마음의 평화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크게 보면 의혹과 삿된 집착 때문이므로, 아라한(阿羅漢)처럼 자신만의 깨달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살(菩薩)로서 중생이 이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야 한다.

의혹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법(法)을 의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문(敎門)을 의심하는 것이다. 중생은 법이 하나인가 여럿인가 의심하기 쉽다. 법이 하나라면 다른 법은 없는 것이요, 다른 법에 현혹되어 헤매는 중생도 없는 것이니, 보살이 중생을 구제할 필요가 없다. 법이 여럿이라면 일체라는 것도 없으며 타자와 내가 다를 것이기에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라는 동체(同體)의 대비심(大悲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법을 의심하면 깨달음과 열반, 중생구제를 지향하고 실천하려는 발심(發心)이 일어나지 않는다.

중생은 어떤 문(門)을 통하여 불도(佛道)에 이를까 번뇌하며 교문을 의심한다. 붓다가 설한 교문이 한둘이 아닌데, 어느 문을 통하여 처음 수행을 할 것인가. 만일 그 여러 문들에 모두 의거해서 불도를 이루려 한다면, 한꺼번에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반면에 한두 문만이 옳다며 그 문만을 의거한다면 어느 문을 선택하고 어느 문을 버릴 것인가. 그러니, 교문을 의심하면 수행을 시작할 수도 없다.

마음의 평화를 가로막는 삿된 집착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인집(人執)과 법집(法執)이다. 법집은 일체 법이 공한데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는 성문승(聲聞乘)이든 연각승(緣覺乘)이든, 근본적으로 소승(小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개인의 깨달음에 치우쳐 중생구제의 큰길로 나아가지 못한 탓이다. 인집, 혹은 인아집(人我執)은 모든 것이 서로 조건과 인과로 얽히고 관련을 맺고 있다는 연기법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오온의 집합체일 뿐인데 내가 존재하거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설혹 나만의 깨달음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나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면 중생구제는 관념에서나 이루어진다. 그러니, 소승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대승을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화에 이를 것인가.

두 가지 문을 연 것은 두 번째 의심을 여의고자 하는 것이다. 비록 많아서 여러 교문을 밝힐지라도 처음 수행에 들어갈 때는 두 문을 벗어나지 않으니, 진여문(眞如門)에 의거하여 지행(止行)을 닦고 생멸문(生滅門)에 의거해서는 관행(觀行)을 일으킨다. 지행과 관행을 짝으로 부리면 온갖 수행이 이를 갖추고 있으므로 이 두 문에 들어가면 모든 문이 두루 통한다. 이처럼 의혹을 없애야만 수행을 잘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불도에 이르는 길은 여럿이다. 하지만, 《대승기신론》은 이에 대해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진여문(眞如門)이고 다른 하나는 생멸문(生滅門)이다. 생멸문에 의해서는 마음과 몸의 움직임을 알아차려 온갖 것이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하여 공(空)하며 일체가 고(苦)임을 깨달아 마음의 번뇌를 씻어내는 관행(Vipassanā)을 행한다. 진여문에 의해서는 모든 번뇌와 망상을 없애고 마음을 한곳에 모아 평안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르는 지행(Śamatha)을 행한다. 이렇게 지행과 관행을 짝으로 부려서 온갖 사념과 망상, 번뇌를 떨쳐버리고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사성제(四聖諦)와 연기의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번뇌와 분별심이 전혀 없이 청정한 무분별지(無分別智)와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다.

인아견과 이를 극복하는 방안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지면 관계상 하나만 예를 들면, “여래 법신이 필경 적막하여 허공과 같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것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인 줄을 모르기에 허공을 여래성(如來性)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마음에서 망령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마음 밖에 색(色)이 없다면 허공의 상도 없는 것이다. 마음이 망령스럽게 일어나는 것에서 벗어나면 일체의 경계가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진심(眞心)으로 모든 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모든 것에 담긴 진리를 통찰할 수 있다.

법아견을 극복하는 방편은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 해행발심(解行發心), 증발심(證發心)의 세 가지 발심이 있다. 신성취발심이란 세 가지 마음을 내는 것이다. 하나는 진여(眞如, Tathatā)를 생각하며 곧은 마음[直心]을 발하는 것이다. 둘째, 근원을 궁구하여 자신의 깨달음에 이르는 자리행(自利行)의 근본으로서 깊은 마음[深心]을 발하는 것이다. 셋째,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는 이타행(利他行)의 근본으로서 대비심(大悲心)을 발하는 것이다. 해행발심은 일심과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여섯 바라밀을 행한다. 증발심은 분별심이 없는 올바른 지혜인 무분별지(無分別智)로서 진심(眞心), 중생이 처한 상황과 근기(根機)에 맞게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심(方便心), 진심과 방편심이 의거하는 아라야식으로서 업식심(業識心)을 통하여 깨달음과 열반에 이르려는 열망을 갖는다.

 

2) 외적 평화

외적 평화는 간단히 말하여 사람, 집단, 국가, 구조와 제도의 배제나 폭력, 전쟁을 막는 것이다. 개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 불교는 어느 종교나 사상보다 엄격하다. “분노가 분노에 의해 사라지지 않으며 오로지 자비에 의해서만 사라진다는 것이 영원한 진리”라는 《법구경》의 가르침이 대원칙이다.

불교 교리 안에서 전쟁의 대안은 “자기정복, 방어전만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것, 외교나 무력의 과시를 통하여 전쟁을 피하는 것, 그래도 전쟁을 피할 수 없으면 자비심의 자세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 국제 차원의 갈등조정 기구를 만드는 것, UN을 넘어서는 헤게모니를 갖는 국제적 협의체, 더 나아가 화쟁의 세계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럼, 원효는 전쟁과 평화에 대해 어떤 진술을 했을까. 원효가 화쟁을 당시 삼국의 통일과 사회통합 등 사회문제에 적용했다는 것은 추측이나 억지일 뿐이다.

“현재 남아 있는 원효의 저술은 모두 불교에 관한 것뿐이다. 이 때문에 원효가 불교 이외의 여러 이론에 대해서 화쟁한 구체적 자료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원효는 화쟁을 불교에 국한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대립과 쟁론을 아우르는 화쟁(和諍)은 갈등과 대립을 해결하는 논리로 응용될 잠재성이 풍부하다.

여러 경전의 부분적인 면을 통합하여 온갖 물줄기를 한 맛의 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불법의 지극히 공평한 뜻을 열어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쟁론들을 아우른다.

화쟁의 축자적 뜻은 모든 이론과 논리의 대립과 갈등을 하나로 아우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화쟁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모든 대립과 갈등을 회통(會通)시킴을 의미한다. 회통이란, 글이 서로 다른 것을 통(通)해서 뜻[義]이 서로 같은 것에 맞추는(會) 것이니, 화쟁은 여러 사상과 논쟁 가운데 그 핵심과 대요를 파악해 곡해와 대립을 낳고 있는 부분을 서로 통하게 하며, 일심(一心)으로 세계의 실체를 파악해 모든 시비와 망령됨[妄]을 끊고 원융(圓融)을 이루는 사상체계이다. 이런 면에서 화쟁을 ‘소통’으로 해석한 견해도 일정 정도 타당하다. 하지만, 화쟁은 이를 넘어서며, 서양의 소통과는 근본 원리가 다르다.

마치 저 장님들이 각각 코끼리를 말하면, 비록 그 진실은 얻지 못하지만 코끼리를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불법의 본성에 대해 말하는 것 또한 이와 같다. 곧 6법이 바로 그것은 아니지만 6법을 떠난 것도 아니니, 이 중의 6가지 이야기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비유는 장아함경과 《우다나경》에 처음 나오는 이야기다. 부처님께서 사성제(四聖諦)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자이나교의 니간타 나타푸타(Nigantha Natapu-tta) 등 육사외도(六師外道)의 주장들이 이와 유사함을 말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활용하였다.

원효는 이 비유를 그대로 끌고 오되, 이분법으로 이편 저편을 극명하게 나누어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을 지양하기 위하여 화쟁의 논리로 뒤엎는다. 코끼리의 등, 다리, 꼬리만 만지고서 각각 언덕, 기둥, 밧줄과 같다고 하든 코끼리를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옳다[皆是]. 하지만, 누구도 코끼리의 전모를 보지 못한 채 부분을 전체로 오인하고 있으니 그르다[皆非]. 이를 바탕으로 조성택 교수는 화쟁을 개시개비(皆是皆非)로 해석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되 다른 사람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는 ‘평화로운 다툼’의 과정을 통해 점차 코끼리의 전모를 완성해 갈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화쟁은 개시개비를 넘어선다. 화쟁은 ‘대립물 사이의 조건과 인과, 작용에 대한 연기적 깨우침’이다. 한 예로, 군대에서 한 신병이 너무도 춥고 손이 시려서 차마 세수하지 못한 채 세숫대야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소대장이 이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식당에 가서 온수를 달라 하라.”고 했다. 신병은 그렇게 했다가 선임병에게 군기가 빠졌다고 두들겨 맞았다. 다음 날 아침 인사계가 신병에게 “식당의 김 병장에게 내가 세수할 온수를 달라 해서 가지고 와라.”고 시키고는 그리하자 신병에게 그 물로 세수하라고 일렀다.

소대장과 인사계 모두 신병에 대한 자비심도 있었고 개시개비의 화쟁적 사고를 하였다. 하지만, 소대장이 여러 조건을 고려하지 못하고 신병의 실체만 보았다면, 인사계는 선임병과 신병, 자신과 신병 사이의 연기 관계, 특히 거기에 스민 권력을 파악하였기에 소대장과 다른 사고와 행동을 한 것이다. 대립물 사이에 놓인 조건과 인과관계, 거기에 작용하는 권력관계를 무시하고 실체만 바라보고 개시개비 하면, 관념은 가능할지라도 현실의 장에서는 화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대사회는 계급 모순, 민족 모순 등 여러 모순이 얽혀 있고 사람과 사람의 연기에 권력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화쟁위원회가 4대강 사업, 쌍용자동차 노동자 대량해고 사태 등 치열한 갈등과 논쟁에 있었던 사회문제를 화쟁한다고 정부와 시민사회, 보수와 진보를 불러 협의했지만, 동기가 순수했다 하더라도 논의가 양비론으로 흐르다가 결국 정권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독재정권에 일차적 원인이 있지만, 화쟁위원회를 주도한 도법 스님과 조성택 교수가 화쟁을 개시개비식으로 해석한 것 또한 주요 요인이다.

이 가운데 대의는 시각(始覺)이 불각(不覺)을 모시고 불각이 본각(本覺)을 모시며 본각이 시각을 모시는 것을 밝히려 함이다. 이미 서로 모신다는 것은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다. 자성이 없다면 깨달음도 있지 않을 것이요, 깨달음이 있지 않은 것은 서로 상대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원효는 마명이 《대승기신론》에서 시각과 본각이 같고[同] 서로 의거하고[依] 있다는 것에 대하여, 시각과 본각, 불각이 서로 ‘대(待)’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대(待)’는 ‘기다리다, 상대하다, 대접하다, 모시다, 의지하다’ 등의 뜻이 있다. 이 가운데 ‘모시다’로 해석한 것은 필자가 화쟁을 ‘대립물 사이의 연기적 깨우침’을 넘어 ‘대립물 사이 중도(中道)의 깨우침’으로 보기 때문이다.

대립물이 실은 중도임을 깨우치려면 먼저 세계를 A or not-A의 이분법적 모순율을 넘어서서 A and not-A의 퍼지(fuzzy)의 논리 체계로 바라보아야 한다. 서양의 주류 철학은 이 세계를 이데아/그림자, 주체/대상, 현상/본질, 이성/감성 등 A or not-A의 이분법으로 바라보았고, ‘이데아인 동시에 그림자’ 식으로 A and not-A는 모순으로 간주하였다. 우리 또한 어두우면 밤, 밝으면 낮이라 한다. 하지만, 실제 세계는 ‘A and not-A’이다. 낮 12시라 하더라도 12시에서 0.00001초도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은 극점만이 낮이며, 1분만 지났다 하더라도 그만큼 밤이 들어와 있는 것이니, 하루의 모든 시간은 낮인 동시에 밤이다. 이렇게 실제 세계는 A이거나 not-A인 것이 아니라 A인 동시에 not-A, 곧 퍼지다. 그러니, 이 세계를 이분법에서 벗어나 퍼지의 관계로 인식하는 것이 실상을 바라보는 길의 시작이다.

화쟁의 중도는 실체론이나 현상을 벗어나 대립물을 서로 모시는 대대(待對)의 역동적인 관계로 인식한다. 화쟁은 화엄연기론을 바탕으로 삼아 대립하는 양자가 상즉상입(相卽相入) 하는 것임을 깨달아 양자를 대대적, 상보적(相補的), 차이적으로 인식한다. 화쟁은 변증법적인 것이 아니라 대대적(待對的)인 대화다. 내가 팔을 펴는 것이 양이고 팔을 구부리는 것이 음이라면, 팔을 펴는 순간에 구부리려는 기운이 작용한다. 이에 팔을 최대로 펴면 다시 구부리게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폄 안에 구부림이 작용하고 구부림 안에 폄이 작용해야 팔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음양론에서 파란 태극 문양에 빨간 동그라미가 있고, 빨간 태극 문양에 파란 동그라미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상대방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내 안에서 상대방을 보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으로 돌아가자. 원효는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부처와 중생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고 구분한 것을 대대의 관계로 아우른다. 금덩이는 땅속에 묻혀 있어도 원래 금덩이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이 본래부터 지극히 맑고 깨끗한 불성을 지니고 있으니 이것이 본각이다. 다만, 땅속에 묻혀서 금덩이로서 구실을 못하고 있을 뿐인데 땅 밖으로 나오면 되듯, 불법을 듣고 무명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는 것이 바로 시각이다.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것이 대승의 요체다. 누구든 무명을 없애면 자신 안의 불성을 드러내서 부처가 될 수 있다. 아라한보다 보살이 더 나은 것은 내가 부처가 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을 부처로 인도한다는 점에 있다. 팔정도와 육바라밀을 행하며 수행 정진을 하여 깨달아 설혹 부처가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 참부처가 아니다. 다시 중생으로 내려와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을 부처로 이끄는 그 순간에 진정 부처가 된다. 그러니,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깨닫지 못함 안에 깨달음이 있고 깨달음 안에 깨닫지 못함이 있다[眞俗不二]. 깨달음은 깨닫지 못함을 통하여 드러나고 깨닫지 못함은 깨달음을 통해 드러난다. 이렇게 대립되는 것이 서로 연기적 관계인 동시에 대대의 관계로 서로 조건과 인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모시고 있으니 대립물의 본성이 없는 것이다.

왜 원효는 소통, 화해, 종합, 개시개비를 넘어 대대의 화쟁을 구성했는가. 화쟁이란 쟁(諍), 곧 쟁론의 대립과 딜레마, 모순을 직시하고 양자의 연기적 관계를 묘파하여 끊임없이 소통하다가 대대의 전환을 하여 하나로 아우르는 것[和]이다. 예를 들어, 기술력만이 아니라 관리에서도 세계 최상위 기업인 삼성전자가 ‘갤럭시 노트7’을 단종까지 하면서 2조 원의 손실을 본 까닭이 무엇인가. 무게를 가볍게 하는 것과 전기 용량을 늘리는 딜레마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않은 채 절충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부피를 줄이면서도 전기 용량을 늘리는 혁신적인 전기 축전 테크놀로지나 메커니즘을 개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상태에서 융착돌기를 비정상적으로 높여 해결하는 방식을 택하다 보니, 절연띠와 갑 안에 두루마기 모양으로 말린 일명 ‘젤리롤’ 안의 분리막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여 음극판과 양극판이 만나면서 방전,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원효는 불교계 안의 여러 논쟁과 딜레마를 직면하고 이를 어설프게 절충하거나 단순히 소통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대립물의 연기를 살피면서 양자의 소통을 끊임없이 추구하다가 대대의 전환을 하여 양자를 하나로 아울러, 양자가 하나이면서도 둘이게 하였다. 이의 구체적 논리가 “불일불이(不一不二), 순이불순(順而不順), 비동비이(非同非異), 변동어이(辨同於異), 진속불이(眞俗不二), 무이이불수일(無二而不守一), 무불파이환허(無不破而還許)와 무불립이자견(無不立而自遣)”이다. 반야와 유식의 대립을 불일불이(不一不二)로, 언어와 진여(眞如)의 딜레마를 선령언구 후령의리(先領言句 後領義理)론으로,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대립을 진속불이(眞俗不二)로 화쟁을 하고, 사(事)와 이(理) 등 그 밖의 대립과 모순에 대해서도 순이불순(順而不順)이나 변동어이(辨同於異)를 통하여 하나로 회통(會通)한 것이다.

따르기도 하는 동시에 따르지 않아야 함[順而不順]은 각각의 주장을 대하는 기본이라 할 만하다. 어떤 것을 진리라 하여 전적으로 믿으면 도그마가 되어 그에 갇히고, 어떤 것을 허위라 하고 내치면 그 속에 일말이라도 진리가 있는데 이를 놓친다. 또, 진리도 다른 시간과 맥락에서는 허위로 변하고 허위 또한 다른 시간과 맥락에서는 진리로 변한다. 그러니, 어떤 것이 허위라 해도 그 가운데 진리인 점과 그것이 진리로 변할 수 있는 점을 잘 살펴서 따르고, 어떤 것이 진리라 해도 허위인 점과 허위로 변할 수 있는 점을 잘 살펴서 따르지 말아야 우리는 각기 다른 주장 속에서 온전하게 진리를 구할 수 있다.

궁극적 진리인 진여(眞如)나 도(道)는 언어를 떠나 있다. 말로 할 수 있다면 진여나 도가 아니다. 그래서 붓다와 달마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이를 깨닫고 언어도단(言語道斷)을 선언하고, 지극한 선정(禪定)을 통해서만 그 경지, 곧 부처님의 마음, 일심(一心), 진여(眞如)에 이를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선생이 수업 시간 내내 언어가 진리를 왜곡한다며 입을 다물고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로 일관한다면 학생들은 더욱 어리석음에 빠질 것이다. 중생들은 언어 없이 진리에 다가갈 수 없다. 그러면, 진리가 언어를 떠난 저편에 있는데 언어 없이는 이에 이를 수 없는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뗏목을 타고 언덕 너머에 이르고 손가락을 통해 달을 보듯, 붓다는 언어를 이용하여 궁극적 진리에 다다르되 언어를 떠나는 인언견언(因言遣言)의 방편을 세웠다.

원효는 먼저 언어를 이해한 다음 그에 담긴 뜻을 헤아린다는 선령언구 후령의리(先領言句 後領義理)론을 세우고, 이를 더욱 구체화하여 진여문과 생멸문처럼 문어(文語)와 의어(義語) 사이의 화쟁을 꾀한다. 일상의 언어처럼 문어(文語)는 진리를 왜곡하지만, 화두(話頭)처럼 의어(義語)를 통해 궁극적 진리에 한 자락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배에서 내려야 언덕에 이르고 손가락을 떠나 달을 보아야 하듯, 의어 또한 방편일 뿐이다. 언어를 떠나 진여실제(眞如實際)로 가야 한다.

반야는 모든 것이 공(空)이라며 존재를 부정하고 유식은 그 반대다. 내 눈앞에 사과가 있다. 이는 존재하는가. 시간만 작용해도 사과는 썩어 쓰레기로 변한다. 나는 사과라고 규정하지만, 시위 군중에게는 돌의 대체물이고 상인에게는 상품일 뿐이다. 사과는 사과 씨 없이 존재하지 못하고 온도와 빛, 토양, 영양분, 미생물 등 모든 조건이 맞아서 이런저런 원소들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구성물에 지나지 않으며, 찰나의 순간에도 원소들이 분해되며 변화하고 있기에 공이다. 씨는 씨이고 열매는 열매이며, 씨와 열매는 별개의 사물이니 하나가 아니다[不一]. 국광 종의 사과 씨는 육질이 단단하고 당도는 덜한 사과를 맺고, 후지 종의 사과 열매는 육질은 덜 단단하지만 당도는 높은 성질을 지닌 사과 씨를 품으니 씨와 열매가 둘도 아니다[不二]. 사과와 사과 씨 모두 상대방 없이 존재하지 못하고 금세 변하고 결국 사라져버리니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이다. 하지만, 씨가 땅에 떨어져 자신을 썩히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열매가 자기 몸을 흙에 던지면 씨를 남긴다. 이처럼, 모든 존재가 공하지만, 연기적 관계 속에서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저것을 생성하며, 서로 변화하는 조건을 형성한다.

이처럼 화쟁은 모든 대립과 갈등, 딜레마, 모순[諍]을 직시하고 양자의 연기적 관계를 묘파하여 끊임없이 소통하다가 대대(待對)의 전환을 하여 서로 대립되는 것이 상대방을 생성하게 하며[相反相成)] 하나로 아우르는 것[和]이다. 그러기에 원효가 불교의 쟁론을 회통하는 데 국한하여 화쟁을 이용하였지만, 이는 다른 대립과 갈등에 대해서도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성을 갖는다.

 

3. ‘지금 여기에서’ 화쟁의 평화론적 해석

1) 화쟁의 재해석을 위한 전제

8세기의 원효 사상이 폭력이 난무하는 21세기 오늘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화쟁을 전환 논리 없이 곧바로 사회에 적용하는 것이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면, 사회 적용이 불가하다는 주장은 비화쟁적이다.

8세기의 화쟁을 ‘지금 여기에서’ 전쟁과 갈등에 대한 평화론이나 남북의 평화통일론으로 응용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한가. 첫째, 맥락화와 재맥락화가 필요하다. 원효의 저술을 비롯하여 고대의 텍스트(T1)는 무엇보다 먼저 그 경전과 논저가 생성되고 해석된 조건과 맥락(C1), 발신자와 수신자가 대화하는 맥락에 비추어 해석하여 2차 텍스트(T2)를 생성하여야 한다. 여기서 그칠 것이 아니라 C1을 ‘지금 여기에서’ 인간이 맞고 있는 조건과 맥락(C2)으로 대치하여 해석하여 3차 텍스트(T3)를 생성한 후, 각각의 텍스트와 맥락 사이에서 무수한 대화를 하며 양자의 화쟁을 시도하여야 한다.

둘째, 화쟁은 쟁(諍)의 실상을 철저히 파악한 후에 그 대립과 갈등과 모순, 딜레마를 극복하고 아우르는 길[和]을 도모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시민과 국가, 노동과 자본, 남과 북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이를 무시한 채 쟁(諍)의 과정 없이 화(和)에 초점을 맞추면 유신체제를 옹호한 이데올로기나 분단모순을 은폐한 남북 통일론처럼 ‘거짓 화해’로 귀결된다.

셋째, 불일(不一)과 불이(不二)가 함께 동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불일에서 빚어지는 차이를 없애면 동일성으로 회귀하며, 불이로부터 생성되는 소통과 화해, 대대(待對)의 면을 보지 못하면 다투기 마련이다. 특히, 불일을 간과한 채 불이론으로 국가와 지도자를 옹호한 화쟁은 천박한 아부론으로 전락하거나 지배층의 합리화 논리, 전체주의나 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넷째, 화쟁의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화쟁의 목표는 일심의 본원으로 돌아가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중용에서 ‘중(中)’이 산술적 균형이 아니라 올바름이듯, 개시개비에 앞서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이다.

다섯째, 실체론을 완전히 벗어나서 연기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박경준은 연기설을 상의적(相依的)으로 해석한 것을 비판하며, “12연기설은 우리의 현실고(現實苦)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무명에 의해 나타나 있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모든 고통은 절대적 존재가 아니고 연기되어 있으므로 그 조건과 원인을 파악하여 그것을 극복하여”라고 말한다. 그의 지적대로, 연기(緣起)와 연멸(緣滅)이 하나다. 고통의 원인이 무명(無明)이라면 이에서 벗어나면 고통이 사라지듯, 원인을 없애면 결과가 달라진다. 말 그대로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어진다.” 조건과 인과에 대한 자각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모두를 뜻한다. 소통이나 개시개비의 화쟁은 대립자 사이의 연기를 따지는 것으로 나아가야 하며, 양자 사이에서 고통과 이를 낳은 현실과 조건, 인과관계에 대한 자각과 깊은 통찰과 창조적 비판, 조건을 변화시켜 고를 근본적으로 없애려는 적극적 실천 또한 아울러야 한다.

여섯째, 현대에 적용하려면 초역사적인 원효의 텍스트에 역사성과 사회성을 부여해야 하며, 대립물 사이의 연기에 작용하는 권력을 파악해야 한다. 원래 화쟁은 정적인 수평의 논리이고 불교의 쟁론을 아우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모든 장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현대 사회문제에 적용하려면 역동적인 수직의 논리로 전환하여야 하며, 이럴 때 대립물 사이의 연기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 권력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집단 사이에 주권권력, 훈육권력, 생명권력의 거시권력, 젠더, 사회적 지위, 나이, 학력 등 미시권력이 갑과 을의 관계로 만들거나 개인의 의식과 행위, 나아가 무의식을 제한하고 억압한다. 권력이 비대칭인 곳에서는 서로 경청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하더라도 개시개비의 화쟁은 불가능하다. 대립물 사이에서 권력이 작용하기에 이것을 평등하게 만들지 않는 한, 공정하거나 객관적인 화쟁은 거의 불가능하다.

 

2) 직접적 폭력과 변동어이(辨同於異)의 눈부처‐차이론

집단과 국가 사이에서 인간이 행하는 직접적 폭력 가운데 가장 사악한 것이 집단학살이다. 이는 문명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다. 왜 교양과 상식, 이성을 가장 잘 갖추고 보통교육이 실시된 20세기가 외려 집단학살을 자행하는 ‘극단의 세기’가 되었는가. 이의 원인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과 ‘순전한 생각 없음(sheer thoughtlessness)’으로, 스탠리 밀그램은 ‘권위에 대한 복종(obedience to authority)’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무런 생각이 없이 그저 조직에 충실한 아이히만에게 히틀러가 독일 우파 시민을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렸어도 유태인에게 하듯이 별 거리낌 없이 이를 수행했을까. 백인 어린이는 때리지도 못하는 신부가 왜 마야족의 어린아이는 별다른 죄책감이 없이 죽이는가. ‘생각 없음’보다, 권위에 대한 복종보다 대량학살이나 집단적인 폭력을 야기하는 근본 요인은 동일성에서 비롯된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이다.

원효의 변동어이론(辨同於異論)을 응용하면 상대방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동일성을 완전히 해체하는 눈부처-차이에 이를 수 있다. 동일성과 이에서 빚어진 갈등을 해소하고 눈부처-차이의 평화에 이르는 방법은 ① 만남, ② 대대의 대화, ③ 공정한 중재와 변증법적 종합, ④ 일심이문(一心二門)의 화쟁, ⑤-① 업의 받아들임, ⑤-② 아공(我空)의 깨달음, ⑤-③ 법공(法空)의 깨달음, ⑥ 공공(空空)의 깨달음의 단계가 필요하다. 이를 매개하는 것은 “공동 육아와 공개적인 식생활과 함께 먹기,” 공감을 확대하고 인간 사이의 협력을 증진하는 공감 · 협력 교육, 지혜의 공유, 음악과 예술을 통한 감정의 공유 등이다.

 

3) 문화적 폭력과 진속불이론

여성에 차별적인 가부장적 문화가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권력과 이 권력을 이용한 젠더 폭력을 낳는다. 이처럼, 직접적 폭력이나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는 문화적 폭력은 종교, 이데올로기, 언어와 예술, 과학을 포함하여 기호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문화 전반에 만연해 있다.

문화적 폭력에 대한 화쟁의 대안은 원효의 진속불이론(眞俗不二論)을 응용하여 눈부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눈부처 주체는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대자적 자유를 종합한다. 소극적 자유(freedom from)는 모든 구속과 억압, 무명(無明), 탐욕에서 벗어나 외부의 장애나 제약을 받지 않은 채 생명으로서 생의 환희를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누리면서 자신의 목적을 구현하고 인간으로서 실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적극적 자유(freedom to)는 자기 앞의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면서 모든 장애와 소외를 극복하고 세계를 자신의 의지와 목적대로 개조하면서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 노동과 실천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거나 수행을 통해 자기완성을 이룰 때 도달하는 희열감의 상태가 이 경지다. 대자적 자유(freedom for)는 자신이 타자와 사회관계 속에서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깨닫고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여 타자를 더 자유롭게 하여 나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눈부처 주체는 나의 삶이 다른 타자 및 생명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를 위하여 나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고 노동과 수행, 실천을 통한 세계의 변화와 자기 변화를 구체적으로 종합하는 속에서 실존의 의미를 찾고 타인의 아픔에 늘 동체의 대비심을 가지고 타인을 더 자유롭게 하여 나 자신이 자유로워질 때 환희심을 느끼는 존재다.

4) 구조적 폭력과 화쟁의 정의평화론

구조적 폭력에 대한 대안은 중생을 고통스럽게 하는 구조적 폭력에 대해 인식하고,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에서 비롯된 분노를 표출하여 구조적 폭력을 줄이는 실천을 하는 것이다.

5) 화쟁의 확장과 응용

한 예로 화쟁을 응용하여 남북통일의 방안을 모색하면, 7단계-① 남북의 통일을 위한 최소 합의 ② 비핵화와 맞바꾸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③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으로 규제 없는 전면적 교류와 협력(사람, 정보, 물류의 자유로운 이동, 개성공단 외에 철원, 금강산 공단 추가) ④ 눈부처 코리아 ⑤ 남북의 국가연합 ⑥ 낮은 단계의 연방제 ⑦ 완전한 통일국가-로 가능하다. 이 가운데 넷째 ‘눈부처 코리아’ 단계에서는 북한에 자본주의 정당과 자본주의 마을, 남한에 공산당과 공산주의 마을을 세우고 해방 이후 남북한의 문학, 역사, 사상과 사회에 대해 공동 교과서를 만들어 배우며, 서로 눈부처를 바라보며 정치, 경제, 사회문화, 교육, 사회체제의 모든 분야에서 대대(待對)의 화쟁을 구현하는 것이다.

 

4. 맺음말

평화를 내적 평화와 외적 평화로 나누어 이에 대해 원효의 목소리를 들어본 다음, 이를 바탕으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맞고 있는 전쟁과 폭력, 갈등의 원인을 살피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평화론을 원효의 텍스트에서 찾아 해석하였다.

대중의 마음이 평화롭지 못한 것은 의혹과 삿된 집착 때문이다. 의혹이란 법과 교문을 의심하는 것이다. 삿된 집착에는 인집(人執)과 법집(法執)이 있다. 지행과 관행을 짝으로 부려서 온갖 사념과 망상, 번뇌를 떨쳐버리고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무분별지와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른다. 유리창의 먼지만 지우면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무명(無明)을 마음에서 없애버리면 중생은 누구나 마음이 지극한 평화상태인 일심(一心)에 이르고 불성(佛性)이 드러난다.

화쟁은 모든 대립과 갈등, 딜레마, 모순[諍]을 직시하고 양자의 연기적 관계를 묘파하여 끊임없이 소통하다가 대대(待對)의 전환을 하여 하나로 아우르는 것[和]이다. 그러기에 원효가 불교의 쟁론을 회통하는 데 국한하여 화쟁을 이용하였지만, 이는 다른 대립에 대해서도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성을 갖는다.

직접적 폭력의 경우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인욕과 자비심 등이 대안이지만, 집단학살과 같은 경우 근본적인 원인은 동일성을 형성하여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행하는 데서 비롯된다. 원효의 변동어이론(辨同於異論)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눈부처의 차이론을 통하여 동일성을 해체하고 타자성(alterity)을 회복할 수 있다.

문화적 폭력에 대한 화쟁적 대안은 진속불이론(眞俗不二論)을 활용하여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증대하는 공감 · 협력교육과 수행을 통하여 대중을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대자적 자유를 구현하는 눈부처-주체로 길러내는 것이다.

구조적 폭력에 대한 대안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을 한 후에 권력을 대칭으로 만들고, 구조적 폭력과 사회적 고를 증대하는 세력, 제도, 시스템에 맞서서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 ‘자비로운 분노’를 하여 이를 없애는 실천을 행하는 것이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체제, 남한과 북한, 아날로그 세대와 디지털 세대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고 평화를 세우는 논리로 화쟁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대립과 연기관계를 묘파하여 대대(待對)의 전환, 곧 각자의 동일성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서로 차이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서로 섬기고 닮으려 하면서 결국 불일불이(不一不二)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갈등과 대립으로 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는 지구촌 곳곳에 하나둘씩 화쟁의 꽃밭이 만발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한다. ■

 

이도흠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 한국학연구소 소장, 계간 《문학과 경계》 주간, 민교협 상임의장 등 역임.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등이 있음. 현재 한국기호학회 회장,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지순협 대안대학 이사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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