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거듭 평화를 말하다

1. 머리말

불교는 오랫동안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로 인정받아왔다. 이렇게 불교가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로 인정받아온 데에는 불교가 초기불교 시대 이래로 종교를 이유로 전쟁을 일으킨 역사가 없다는 것에도 기인할 것이다. 즉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킨 역사를 가진 다른 종교와는 달리 불교는 불교를 내세워 전쟁을 일으킨 역사를 찾기 힘든 것이다.

또한 불교에서 불살생계는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에게 중요했으며, 따라서 인간은 물론이고 다른 생명도 소중히 하는 것은 수행의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 이유로 출가자는 식생활에서도 육식을 멀리해야 했는데, 특히 동아시아 불교전통에서는 철저한 채식을 유지하는 것을 수행 원칙으로 삼았으므로 살생을 멀리하는 평화적인 종교로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근현대에는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로서 불교의 위상이 의심받을 만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즉 근대 일본 제국주의의 전개과정에서 일본불교는 제국주의화 과정의 도구 역할을 자임하였던 역사적 사실이 있다. 또한 미얀마에서는 최근에 소수파에 불과하지만, 극우불교단체 수장인 위라투(Wirathu)가 로힝야족 학살을 자행한 미얀마 군부를 지지하였으며, 로힝야족 학살을 비판하는 국제사회에 ‘무력’으로 저항하겠다는 의지까지 내비치기도 했다.

따라서 불교는 전통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로서 위상을 유지해왔지만, 몇몇 사례를 보면 불교가 과연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인지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초기경전부터 대승경전까지 불교의 평화사상, 즉 비폭력과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문헌을 살펴보면서 평화와 비폭력을 중요하게 여겨왔던 불교 전통의 내용은 무엇이며, 또한 불가피하게 폭력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인정받은 경우는 어떤 경우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자비심을 유지할 것이며, 어떻게 평화와 비폭력을 중시하는 불교의 전통과 모순되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한 불교문헌의 내용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와 더불어 평화를 사랑하고 폭력을 멀리하는 불교 전통에서 볼 때, 불교의 근본정신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는 사례는 없는지, 그런 경우는 어떻게 평가해야 불교의 전통과 상충되지 않는지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2. 계 · 정 · 혜 수행과 평화의 관계

불교의 수행은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으로 표현되곤 한다. 즉 모든 고통을 벗어나 지극히 행복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계율을 지키고 정(定)을 닦아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 · 정 · 혜에는 순서의 개념도 포함되어 있어서 먼저 계율을 지켜야 하는데, 계율을 지키면 번뇌를 조복 받아 정(定)을 닦을 수 있고, 정(定)을 닦으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수행에는 먼저 계율을 지키는 것이 요구되는데, 계율에는 재가자의 계율과 출가자의 계율이 있지만, 재가자의 기본적인 계율로는 초기불교 시대 이래로 오계(五戒)가 인정되어 왔다. 출가자의 계율에서도 살인은 4바라이(波羅夷)에 속하는 중대한 파계 행위이지만, 재가자가 지켜야 하는 오계의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도 바로 불살생계(不殺生戒)이다. 즉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 제일 먼저 등장하고 있다. 상윳따 니까야에는 부처님이 급고독 장자에게 불살생에 대하여 설하는 내용이 있다.

장자여, 생명을 죽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금생의 두려움과 증오를 쌓게 되고 내생의 두려움과 증오도 쌓게 되며 정신적인 괴로움과 슬픔을 쌓게 된다.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면 이와 같은 두려움과 증오는 가라앉는다.

즉 살생을 하면 두려움과 증오가 쌓이고 괴로움을 겪게 되므로 자신의 번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살생을 여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숫타니파타》에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와 같은 재생족(再生族)이든, 수드라와 같은 일생족(一生族)이든, 출신을 불문하고 생명을 해치는 것은 자비심이 없는 천한 사람이라는 내용이 있다.

한 번 생겨나는 것이건 두 번 생겨나는 것이건 이 세상에 있는 생명을 해치고 살아 있는 생명에 자비심이 없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시오.

그리고 《법구경》에는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폭력과 살생을 삼가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어느 누구나 폭력을 무서워한다. 모든 존재들에게 죽음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서 너 자신을 인식하라. 괴롭히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

이와 같이 초기경전에는 자신의 번뇌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나에게 나의 생명이 가장 소중하듯이 모든 존재에게 그들의 생명은 가장 소중하므로 자비심을 실천하기 위해서 살생과 폭력을 여의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즉 불살생과 비폭력을 실천하는 것은 수행을 위한 것이며, 자비심을 실천하는 것에 그 취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초기불교 시대에 자비심을 실천하는 것은 수행자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는데, 자비심과 관련된 사무량심(四無量心) 수행에 대하여 중아함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아난다야, 나는 이전에 너를 위하여 사무량(四無量)을 설명하였다. 비구는 마음이 사랑[慈]과 함께하여 일방(一方)에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닐고, 이렇게 이방(二方) · 삼방(三方) · 사방(四方) · 사유(四維) · 상(上) · 하(下)의 일체에 두루 하며, 마음은 사랑과 함께 하기 때문에 맺음도 없고 원한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어, 지극히 넓고 매우 크고 한량이 없이 잘 닦아, 일체 세간에 두루 차서 성취하여 노닌다. 이렇게 슬픔[悲] · 기쁨[喜]도 또한 그러하며, 마음은 버림[捨]과 함께 하기 때문에 ……(중략)…… 아난다야, 이 사무량을 너는 마땅히 모든 젊은 비구들을 위하여 설명하고, 그것으로써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만일 모든 젊은 비구들을 위하여 이 사무량을 설명하여 가르치면 그들은 곧 안온을 얻고 힘을 얻고 즐거움을 얻어, 몸과 마음이 번거롭게 달지 않아 몸이 마치도록 범행(梵行)을 행할 것이다.

즉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네 가지 마음을 무량(無量)하게 닦으면 안온을 얻고 힘을 얻고 즐거움을 얻어서 오래도록 청정한 수행을 할 수 있으므로, 수행자들은 사무량심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무량심 수행과 같이 자비심을 닦는 것은 중요한 수행이었으며, 따라서 살생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수행자에게 용인될 수 없었다. 심지어 수행자는 자신의 육체에 폭력이 가해지더라도 상대방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자세로 인정되었다.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설법(說法) 제일로 인정받던 부루나 존자는 전법(傳法)의 과정에서 거칠고 모진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썩어 무너질 몸을 해탈하게 하였으므로 감사하게 여기겠다는 각오를 석가모니 앞에서 다진 후에 전법을 위해 길을 떠났다. 또한 석가모니도 자신의 종족이 코살라국 유리왕(流離王)의 침입을 당하게 된 상황에서도 마른 나무 밑에 앉아서 침입자가 스스로 물러나기를 바라는 평화적이고 간접적인 의사표시를 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유리왕이 자신의 원한을 풀고자 거듭하여 침입하자 결국은 석가족의 과보는 피할 수 없음을 토로하였다.

그러므로 초기불교 시대에 자비심을 기르고 폭력과 살생을 멀리 떠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수행이었으며, 심지어 자신이나 동족이 죽게 되더라도 어길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수행자가 철저하게 불살생계를 지키고 폭력을 멀리하였던 것은 사소한 잘못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밤낮으로 정(定)을 닦으면, 그 결과로 지혜에 의한 해탈과 열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한은 원한으로 풀리지 않으며, 악업의 과보는 피할 수 없으므로, 분노를 여읨으로 분노를 이기고 선(善)으로 악(惡)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수행자가 폭력과 살생을 멀리하면서 계 · 정 · 혜를 닦아서 도달할 수 있는 열반의 경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다. 먼저 부처님은 열반을 불사(不死, amata)라고도 하고, 절대안온(絶對安穩, yogakkhema)이라고도 하고, 청량(淸凉, sītibhāva)이라고도, 최고락(最高樂, parama sukha)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열반은 길상(吉祥, siva), 안전(安全, khema), 청정(淸淨, suddhi), 섬 또는 등불(dīpa), 피난처(saraṇa), 보호소(tāṇa), 피안(pāra), 평화(santi) 등의 개념으로 정의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열반의 경지는 수행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기를 원하는 경지로서 영원함, 즐거움, 안전함, 청정함, 평화로움 등을 두루 갖추고 있는 경지이며, 이런 까닭에 대승경전에서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열반의 네 가지 덕(德)으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열반을 향한 수행의 과정은 자비심을 기반으로 폭력과 살생을 멀리하면서 평화를 실천하는 과정이며, 그러한 수행의 결과로 얻게 되는 열반에는 영원함, 즐거움, 안전함, 청정함과 함께 평화로움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열반을 향한 수행은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서 궁극적이고 영원하고 의지할 수 있는 청정한 행복과 함께 평화를 얻는 과정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3. 사회적 평화와 그 구현 방법

열반을 향한 수행 과정에는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실천이 뒤따르게 된다. 즉 오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뭇 생명에 대한 불살생을 실천해야 하며, 그들의 소유물을 빼앗거나 거짓말하거나 잘못된 음행을 하는 것을 삼가야 하며, 또한 맑은 정신을 유지하여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므로 오계를 지키는 것 자체로 사회평화를 위한 실천을 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렇게 계 · 정 · 혜의 수행은 사회평화를 지키고 진작시키는 기능이 있지만, 경전에는 정치를 책임진 위치에 있는 군주는 사회평화를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먼저 사회평화의 실천에 관련된 초기경전의 내용부터 살펴보고 다시 대승경전의 내용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초기경전

초기경전에 나타난 사회평화와 관련된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정치에 대한 것이다. 전륜성왕은 초기경전에서 이상적인 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는 군주로 등장하는데, 장아함 《전륜성왕수행경》에는 전륜성왕의 정치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즉 전륜성왕은 먼저 정법(正法)을 세우고 정법을 갖추어 보호하고 정법으로 통치해야 하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들은 부왕에게 아뢰었다. “전륜성왕의 정법은 어떤 것입니까. 또 마땅히 어떻게 행하리까.” 왕은 아들에게 말했다. “마땅히 법에 의해 법을 세우고 법을 갖추어 그것을 공경하고 존중하라. 법을 관찰하고 법으로써 우두머리로 삼고 바른 법을 보호하라. 또 마땅히 법으로써 모든 궁녀를 가르치고 또 마땅히 법으로써 보호해 살피라. 그리고 모든 왕자, 대신, 모든 벗, 모든 관리 및 모든 백성, 사문, 바라문을 가르쳐 경계하라. 밑으로는 금수에 이르기까지 다 마땅히 보호해 보살펴라.”

즉 전륜성왕은 정법을 갖추어서 정법으로 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전륜성왕은 정법을 갖추기 위해서 덕이 높고 지혜로운 스승을 찾아서 언제나 배워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너는 왕국에 있는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소행이 맑고 참되고 공덕이 구족하며 부지런히 힘써 게으르지 않고 교만을 버리고 욕을 참아 어질고 사랑하며 ……(중략)…… 이런 사람이 있거든 너는 마땅히 자주자주 찾아가 언제나 물어야 한다. “무릇 수행함에 있어서 어떤 것이 선하며 어떤 것이 악한가. 어떤 것이 범함이 되고 어떤 것이 범함이 되지 않는가. 어떤 것은 친해야 하고 어떤 것은 친하지 않아야 하는가. 어떤 것은 지어야 하고 어떤 것은 짓지 않아야 하는가. 또 어떤 법을 베풀어 행하면 오랫동안 즐거움을 받겠는가.”라고.

즉 전륜성왕은 개인적으로는 덕이 높고 지혜로운 스승에게 배우고 스스로 수행을 해야 하며 또 한편으로는 정법에 입각한 정치를 실천해야 하는데, 정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스승에게 배우고 실천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법을 실천하는 전륜성왕은 마땅히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또 나라에 외로운 이와 노인이 있거든 마땅히 물건을 주어 구제하고 가난하고 곤궁한 자가 와서 구하는 것이 있거든 부디 거절하지 말라.

이와 같이 스스로 수행하면서 정법을 배우고 갖추어 실천하면서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는 전륜성왕에게는 주위의 모든 나라가 저절로 굴복하게 되어 전륜성왕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때 동방의 모든 작은 나라 왕들은 이 대왕이 오는 것을 보고 금그릇에는 은가루를 담고 은그릇에는 금가루를 담아 왕에게 와서 머리로 절하고 아뢰었다. “잘 오셨습니다. 대왕이여, 이제 이 동방의 토지는 살찌고 풍성하며 백성들은 불꽃같이 왕성합니다. 그들은 성질이 어질고 화하며 사랑하고 효도하며 충성되고 유순합니다. 오직 원컨대 성왕이여, 여기서 정치를 행하소서. 우리는 마땅히 좌우에서 모셔 명령을 받겠습니다.”

즉 정법을 갖추어 실천하는 전륜성왕에게는 주위의 모든 나라가 저절로 굴복하므로 폭력을 사용하여 정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법을 갖추어 실천하는 전륜성왕의 정치도 언젠가는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실패하게 되는데, 전륜성왕의 정치가 실패하는 계기는 정법을 잃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부왕은 갑자기 목숨을 마쳤다. 이전의 여섯 전륜왕은 다 서로 이어받아 바른 법으로써 다스렸다. 그런데 오직 이 한 왕은 제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면서 옛 법을 이어받지 않았다.

이렇게 정법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한 왕은 주위의 신하들에게 옛날의 법을 물어서 통치하지만, 그럼에도 제대로 정법을 배우고 갖추지 못한 까닭에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지 않자 이들은 마침내 살기 위해 도둑질을 하게 되고, 이러한 도둑질에 대하여 왕은 처음에는 도둑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지만 나중에는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는 도둑질을 멈출 수 없다고 판단하여 도둑들에게 형벌을 가하게 된다.

이렇게 도둑들에게 형벌을 가하게 되면서부터 백성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만들게 되고, 이로부터 나라 안에는 강도와 살해가 횡행하게 되고, 또한 사람들의 수명이 8만 세에서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온갖 악행이 나라 안에 더욱 늘어나고 넘쳐나서 수명이 10세까지 줄어드는데, 이때에는 중생들이 극히 악한 행동을 저지르게 되고, 그런 극악한 행동을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존경받는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전륜성왕수행경》의 내용을 보면, 전륜성왕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법을 실천하는 것인데, 만일 정법을 제대로 갖추어 실천하지 않게 되면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지 않게 되고 그로 인해 나라 안에 평화가 깨지고 폭력이 난무한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즉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정치를 하는 사람이 정법을 배우고 실천하면서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구제해야 하는데, 정법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하지 않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나라 안에 온갖 혼란과 폭력이 생기고 평화가 깨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륜성왕수행경》을 보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정법을 올바르게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전륜성왕의 정치에서 정법(正法)은 평화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정법의 법(法, dharma)에 대해서는 다양한 정의가 있다. 그중에서 스펠만(J. W. Spellman)은 법의 의미를 ① 올바르고 타당한 것 ② 보편적인 진리 ③ 관습 또는 전통의 규약 ④ 정의 ⑤ 영원한 것 ⑥ 불변하는 것 ⑦ 법(law) ⑧ 이 모든 것들의 변형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정의를 기준으로 정법의 개념을 종합하여 정리해 보면 정법에는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언제나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핵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전륜성왕은 ‘누가 보아도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법을 배우고 갖추고 또 그 법을 실천하는 정치를 하므로 나라 안이 평화로워지고 주위의 모든 나라를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평화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가 보아도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법이 존중받고 그런 법으로 사회가 움직여지고 다스려져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폭력이 없는 평화롭고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설명만이 초기경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초기경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자따까》에는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와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426번째 《자따까》인 《디삐 자따까(Dīpijātaka)》에는 어느 날 암컷 산양(山羊)이 표범을 만나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여러 가지 말로 설득하다가 실패하여 결국은 잡아먹히는 것을 보고서, 보살은 ‘좋은 말도 나쁜 놈에게는 소용없고, 그저 용기 내어 그와 싸워야 한다.’는 게송을 읊었다는 내용이 있다. 즉 좋은 말로 설득해도 전혀 통하지 않고 결국은 폭력을 사용하여 나를 죽이거나 큰 피해를 주려고 하는 상대에게는 용기 내어 싸울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따까》에 불가피하게 폭력이 사용될 수밖에 없는 경우를 인정하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은 《자따까》가 주로 일반 대중에게 불교를 쉽게 전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즉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열반의 증득을 위해 신명(身命)을 바치는 초기불교 시대의 수행자들과 세속에 살면서 사회생활을 하는 일반 대중은 불살생과 비폭력에 대해 그 입장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자따까》에는 세속에서 생활하는 일반대중의 경우에 좋은 말도 통하지 않고 또한 죽이거나 큰 피해를 주려는 상대방에게는 불가피하게 방어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초기경전에는 전륜성왕의 통치를 이상으로 삼고 있는데, 전륜성왕의 통치는 《전륜성왕수행경》에서 볼 수 있듯이 ‘누가 보아도 올바르다고 할 수 있는 법’을 배우고 갖추어 실천하면 평화로운 사회를 유지할 수 있고 주위의 다른 나라들이 저절로 굴복하므로, 폭력을 사용하거나 전쟁을 겪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자따까》를 보면, 세속에서 생활하는 일반 대중은 좋은 말이 통하지 않는 악인들에게는 불가피하게 방어적으로 폭력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인정하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2) 초기경전 이후 대승경전까지

초기경전에는 세속에서 생활하는 일반 대중이 불가피하게 폭력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에 대한 내용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초기경전 이후의 경전에는 폭력 사용이 필요한 경우에 대한 현실적이고 다양한 설명이 등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경전으로 우선 《대살차니건자소설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정법을 실천하는 왕은 나라 안에서 역적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거나 외국의 군대가 침입하는 경우에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사용해야 함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자비심을 가지고 폭력을 최소화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는 우선 적군의 군사력을 살펴보아 적군의 군사력이 나와 같거나 강하다면 친한 벗이나 선지식을 통해서 화해를 하거나 적군에게 물건을 주어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적군의 군사력이 나보다 강하고 나는 무리가 적다면, 방편으로 용맹하고 씩씩하여 대적하기 어려운 모양을 나타내어 적군을 놀라게 하여 싸움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적군의 군사력이 나와 같거나 강하다면 외교를 비롯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정법을 실천하는 왕은 세 가지를 생각하여야 하는데, 우선 적군은 스스로 중생을 죽이고 다른 사람이 죽이는 것도 막지 않지만, 나는 중생을 죽이지 않을 것을 생각해야 한다. 둘째, 가능한 한 싸우지 않고 역적의 왕을 항복시킬 것을 생각해야 한다. 셋째, 가능한 한 죽이지 않고 적을 포로로 붙잡을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가능한 한 백성의 고통을 구해주고 살생을 피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비심을 가지고 전쟁에 임할 때는 군사의 배치를 지혜롭게 해서 군사들이 용감하게 전투에 임하여 승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며, 만일 이렇게 자비심을 가지고 전투를 한다면 설사 살생을 하더라도 참회하면 그 죄는 소멸되며, 나아가 정법을 실천하는 왕이 사문을 보호하고 백성을 보호하려고 자비심으로 살생을 피하려는 전쟁을 한다면 오히려 복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살차니건자소설경》에는 정법을 실천하는 왕은 적군이 침입한 경우에 우선 전쟁을 피하기 위한 방편을 찾아야 하며, 그럼에도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경우에는 자비심을 가지고 백성의 피해와 살생을 최소화하려고 해야 하며, 그런 전쟁을 통해서 정법을 닦는 수행자를 보호하고 백성들을 보호한다면 오히려 복이 있다는 것이다. 즉 나라를 지키고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왕은 불가피하게 폭력을 사용함을 인정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자비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선교방편경》에는 《대살차니건자소설경》과는 또 다른 성격의 폭력을 인정하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즉 보살인 선장은 5백 명의 상인을 태우고 가다가 한 강도가 5백 명의 상인을 죽이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지옥에 환생하는 업보를 받는 것을 감수하고 그 강도를 죽였는데, 죽은 강도는 살생의 업보를 짓지 않게 되어 오히려 하늘에 환생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방편불보은경》에는 상인 5백 명에 대한 살육적인 공격을 막기 위해 보살은 오랜 친구임에도 산적(山賊)을 위해 일하는 염탐꾼을 죽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즉 살생의 동기가 자비심에 있는 경우, 다중(多衆)을 위해 소수의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살생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섭대승론》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보살은 수백 명의 성문과 보살을 살리기 위해 내가 살생을 한다면 지옥에 환생할 것이지만, 강도가 죄업을 받아 지옥에 떨어지느니보다 내가 지옥에 환생하는 편이 더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방편경》과 《대방편불보은경》과 《섭대승론》은 보살이 다중(多衆)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자비심을 가지고 소수의 악인(惡人)을 살생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대반열반경》에는 또 다른 성격의 폭력을 인정하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이 경에는 “보살은 전생에 왕이었을 때 대승의 가르침을 비방하는 몇 명의 바라문들을 발견하였으며, 나쁜 업으로부터 바라문들을 구하고 불교를 보호하기 위해 바라문들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지만, 그 행위의 결과로, 결코 그 이후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았으며, 대승경전을 옹호하는 것에는 이와 같은 한없는 세력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정법을 지키려는 사람은 오계를 받지 않고 위의(威儀)를 닦지 않더라도 칼과 화살과 창을 가지고서 계를 지키는 청정 비구를 수호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오계를 받지 않았지만 바른 법을 수호한다면 이를 대승이라고 부를 것이며, 바른 법을 수호하려는 자는 칼과 무기를 들고 설법하는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이와 같이 《대반열반경》에 대승과 바른 법을 지키기 위해서 살생을 하거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이 등장하는 것은 《대반열반경》이 성립할 당시의 시대상이 경전의 내용에 반영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즉 《대반열반경》에는 대승을 설하는 법사(法師)를 파계한 비구들이 칼과 막대기로 위협하였던 사태에 대한 설명과 함께 부처님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무리들까지 나타났던 상황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대반열반경》이 성립될 당시 불교 교단은 극심한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정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칼과 무기를 들어도 된다는 내용이 《대반열반경》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반열반경》에는 또한 불교 교단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비구들을 일천제(一闡提)라고 하여, 개미 새끼를 죽여도 살생의 죄가 있지만, 일천제를 죽인 것은 죄가 없다고 하면서 일천제를 증오하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대반열반경》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결국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는 논리로 귀결되고 있다. 따라서 일천제의 불성을 완전히 부정하였다고 할 수 없는데, 그럼에도 일천제에 대한 증오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위급한 시대 상황과 함께 정법(正法)이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천제와 같은 개념은 후기의 대승경전에는 찾아보기 힘들며 오히려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일천제라는 존재는 대승불교의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대반열반경》에는 부분적으로 정법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이 있지만, 《대반열반경》을 포함하여 그 이후의 대승경전에서는 오히려 불성을 가진 모든 중생의 생명이 소중함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회귀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대살차니건자소설경》 《선교방편경》 《대방편불보은경》과 《섭대승론》 《대반열반경》 등의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이들 경전에서는 불가피하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 경우에도 몇 가지 기준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먼저 여러 경우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준은 첫째 나라와 인명 또는 정법을 지켜야 하는 책임을 진 재가자가 행사하는 폭력의 인정, 둘째 방어적인 폭력의 인정이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적용되는 기준은 정법을 지키기 위한 폭력의 인정, 둘째 다중(多衆)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소수의 악인(惡人)에 대한 폭력의 인정, 셋째 자비심을 유지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행사하는 폭력의 인정 등이다.

그러나 불교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기준을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도 발견된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나타났던 일본 불교인들의 모습이다. 즉 근대일본 제국주의화 과정에서 일본불교는 도구 역할을 자임하면서, 화엄의 일즉다(一卽多)를 ‘천황이 곧 국가요, 국가가 곧 국민’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화엄불교를 제국주의적 일본정신을 발양하는 데 이용하였던 것이다.

물론 당시 일본불교는 일본불교사 최대의 법난을 맞이하여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동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앞장섰던 일본 불교인들의 모습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방어적으로 폭력을 인정하였던 대승경전의 내용과는 큰 차이가 있다. 즉 《대반열반경》의 내용을 기준으로 보면, 재가자들이 정법을 지키기 위해 방어적으로 사용하는 폭력은 인정하되, 또한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진 존재이며 생명의 소중함을 긍정하고 있으므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에서 사용되는 폭력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제국주의적 침략에 불교의 가르침을 이용하는 것은 평화와 비폭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불교의 근본정신과는 부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이 대승불교의 교리를 비불교적으로 악용하는 것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는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불교인들이 정치적 · 사회적 · 종교적 이해관계에 집착하여 불살생과 비폭력과 자비심과 같은 근본적인 불교의 정신을 망각하였던 것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최근 미얀마에서 극우불교단체가 로힝야족 학살을 자행한 미얀마 군부를 지지하면서, 로힝야족 학살을 비판하는 국제사회에 출가수행자가 공격적으로 ‘무력’ 사용을 언급한 것은 초기불교부터 대승불교까지의 불교 전통을 살펴보아도 이례적인 현상이며, 불교 전통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로힝야족에 대한 미얀마 극우불교단체의 공격적인 대응은 영국 식민지 시대 이래의 오랜 역사적 · 민족적 · 종교적 분쟁의 영향과 함께 현재 미얀마의 정치상황에도 영향을 받고 있지만, 평화와 비폭력을 중시하는 불교의 전통에는 위배되고 있다.

즉 초기경전에는 부루나 존자가 보여주었듯이 전법의 과정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평화적 수단을 버리지 않았고, 전륜성왕은 정법을 실현하면서 폭력 사용을 자제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음이 나타나고 있다. 또 대승경전에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한해 방어적인 폭력만을 인정하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불교는 초기불교 시대 이래로 가능한 한 평화로운 수단으로 평화롭고 행복한 결과를 얻는 것을 추구하려고 노력하였음을 볼 수 있다.

나아가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자비의 정신에서 출발하였음은 석가모니의 깨달음의 과정에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석가모니는 고대 인도의 수행법과 다양한 고행으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마침내 어릴 적 농경제(農耕祭)에서 경험하였던 선정의 경험을 기억해내고 그 선정방법으로 수행하여 대각(大覺)을 성취하였던 것인데, 어릴 적 농경제에서 경험하였던 선정의 내용은 바로 먹고 먹히는 중생들의 참상에 대한 자비심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즉 출가하여 온갖 수행법과 고행으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던 싯다르타는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깊은 선정에 들어서 마침내 깨달음을 증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의 깨달음은 중생에 대한 자비심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렇게 본다면 정치적 · 사회적 · 종교적 · 민족적 이해관계에 집착하거나 여타의 다른 이유로 자비의 정신을 잃어버린다거나 또는 침략전쟁에 불교의 가르침을 이용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근본정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4. 맺음말

초기불교 경전을 보면 계 · 정 · 혜의 수행과정은 불살생과 비폭력을 지키고 평화를 유지하면서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열반, 즉 청정한 행복과 함께 영원히 의지할 수 있는 평화를 얻는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불살생과 비폭력은 중생에 대한 자비심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으로서, 불살생과 비폭력이라는 수행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초기불교 시대의 수행자들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쳤던 것이 경전에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초기경전에서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륜성왕의 정치에서도 불살생과 비폭력의 원칙은 유지되고 있다. 즉 전륜성왕은 ‘누가 보아도 올바르다고 할 수 있는 법’인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솔선하여 구제하므로, 이웃 나라와도 무력으로 충돌하지 않으며 이웃 나라들은 자발적으로 전륜성왕에게 굴복하게 되어 천하를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철저하게 정법에 입각한 정치를 하면 저절로 평화로운 사회가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초기경전에는 출가수행자들이 불살생과 비폭력의 원칙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으며 전륜성왕도 정법에 근거한 통치로 비폭력의 원칙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지만, 세속에서 생활하는 재가자들은 불가피하게 폭력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인정하는 내용도 일부 경전에 나타나고 있다. 즉 《자따까》에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고 나를 죽이려고 하거나 큰 피해를 주려고 하는 악인(惡人)에게는 맞서서 싸울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초기경전에 일부 등장하는 불가피한 폭력 사용을 인정하는 내용은 대승경전에서는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하여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폭력 사용에 대한 기준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즉 《대반열반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에서 발견되는 여러 경우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준은 나라와 인명 또는 정법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는 재가자가 행사하는 방어적인 폭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적용되는 기준은 정법을 지키기 위하여 또는 다중의 생명을 지키려고 소수 악인을 제어하기 위하여 또는 자비심을 유지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행사하는 경우의 폭력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에서 특별한 경우에 폭력 사용을 인정하는 것은 세속에서 생활하는 재가자의 입장에서 수긍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그러나 오랜 불교의 역사를 보면, 비폭력을 추구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로서 불교의 근본정신에서 벗어난 경우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함께 면면히 이어온 불교의 근본정신은 지혜와 자비이며, 자비가 없는 판단과 언행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는 부합할 수 없으며, 불교에서 인정할 수 있는 올바른 판단과 언행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장성우 /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강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주요 논문으로 〈초기불교의 경영사상 연구〉(박사학위 논문) 〈원측 유식의 불성론과 그 정체성〉 〈4차 산업혁명과 불교의 경제윤리〉 등이 있다.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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