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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불교공동체 ‘아속’에서 한 달
[0호] 2018년 11월 15일 (목) 조현 한겨레신문 기자
조현 /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 논설위원 & 수행·치유·공동체 웹진 ‘휴심정’ 방장

절처봉생(絶處逢生)이란 말이 있다. 절체절명의 판국에서 요행히 살길이 생긴다는 것이다. 3년 전 내 상태는 절처(絶處)였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등 통증으로 8년 정도 고통을 받고 있었다. 유명 대학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았으나 아무 이상이 없다고만 했다. 그러나 등 통증은 갈수록 심해지기만 했다. 분명히 통증은 있는데,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만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처음 통증이 시작될 무렵 대상포진을 앓은 것을 기억해내고는 스스로 ‘대상포진 후 신경통’이라고 명명했지만, 대학병원에선 의사에 따라 그 통증이 대상포진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애매한 말만 했다. 등 통증은 열을 동반하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화장실에 가서 물을 컵에 떠서 등쪽에 부어 속내의를 젖게 해 차가운 느낌이 있어야 그나마 앉아있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참기 어려워 대학병원에 가면 일시적으로 통증을 못 느끼게 하는 마취주사를 등쪽에 놔주곤 했다. 근본 치료가 아니라 임시방편 시술만이 행해졌다. 양방에서 방법이 안 보이자 한방과 온갖 대안적인 치료를 찾아 나섰다. 침, 벌침, 자석, 뜸, 사혈, 부항, 운동 치료, 경락 마사지, 안마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먹을 수 있는 건 거의 먹어봤지만 차도가 없었다. 도무지 길이 보이지않았다. 더구나 통증이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데다 병원에서 이상이 없다고 하니, 아무리 아파도 신문사를 쉴 수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열과 통증이 눈으로 번졌다. 눈 포도막염으로 염증이 망막을 덮어 눈이 붙고 빨갛게 충혈되고 눈을 뜨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 눈 포도막염은 자칫 실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무서운 병이다. 5년 전에도 스위스를 여행하던 중 눈 포도막염이 발병해 바젤대학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은 적도 있었다. 눈 포도막염은 나은 듯하더니 몇개월만에 다시 발병했다. 포도막염으로 눈을 뜰 수 없으니 3개월 이상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1년의 병가를 냈다.

 국내 병원에서 원인도 치료법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한 지인으로부터 들은게 타이 아속공동체 이야기였다. 경남 산청 기독교대안학교인 민들레학교 김인수 교장 선생님이 꼭 한번 가보라고 권유한 것이다. 김교장은 기독교인임에도 불교공동체인 아속공동체에 매년 학생 10여 명을 데리고 한 달씩 살고 올만큼 배울 것이 너무나 많고,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곳이라고 했다. 특히 아속에서는 항문 관장을 통해 몸의 독소를 빼내 건강을 되찾게 해주는데, 내가 그곳 사람들처럼 맨발로 시골길을 거닐고, 해독까지 하면 몸이 좋아질 것 같다는 거였다. 국내에서 도저히 길이 안보여 아속을 갔다가 내 병도 쾌유의 전기가 되고, 온갖 사회 평폐를 낳은 자본주의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공동체적 삶까지 탐구하게 됐다. 그곳에서 기자적 직업병이 발동돼 탐사를 시작해 타이와 인도, 미국, 일본의 5개 공동체를 휴직기간 직접 살아보고, 귀국해서도 국내 마을공도체들을 탐사해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이들을 위한 마을공동체 탐사기’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는 책까지 냈으니, 아속과의 만남이 바로 봉생(逢生)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아속은 환희라는 뜻이다. 특히 ‘고통이 없는 상태’의 환희다. 통증에 시달렸던 내가 열망할법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몸이 아프면 누구나 배부른 돼지가 되긴 어렵다. 괴롭기에 자신을 철학하게 된다. 아픈 것은 내 몸둥아리만은 아니다. 자본주의 적자생존 시스템에서 너무도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무분별한 개발과 생태계 파괴로 지구 온난화를 보이며 지구도 고통의 신음을 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고도성장의 특혜는 소수에게만 집중되고 있다. 그러니 물을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은 이토록 발전되고 마천루가 솟고 물건이 넘치고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한데, 정작 다수는 왜 지하방에 갇힌 죄수처럼 부자유스럽고 어둡고 괴로운 것일까. 지구상에서 매일 3만 7천 명씩이 굶어 죽는데도, 소수 권력자와 부자의 욕망만은 왜 암처럼 무한성장할까. 인간의 욕망은 어떤 도덕도, 어떤 종교도, 어떤 투쟁으로도 끝내 초월할 수 없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물음엔 메아리마저 없다. ‘어차피 세상은 그런 것 아니냐’며, 부서지고 깨어진 상처를 안고 현실 도피를 위해 공동체를 찾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순을 자각하고, 암흑 속에서도 가슴속에 타오르는 등불 하나만은 결코 꺼트릴 수 없어 공동체를 찾고 만들어가는 이들도 있다.

 방콕에서 차로 10시간가량 떨어진 타이 중서부 시사켓의 시사아속이 그런 곳이다. 처음 아속에 간 건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권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독특한 건강법이 우선 관심사였다. 처음 5일간은 아속의 방식에 따라 단식과 관장을 했다. 그렇다고 공동체에서 몸만 챙기고 있을 수만은 없다. 공동체에서는 구경꾼은 허용되지 않는다. 공동체 사람들은 관객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일단 문 안에 들어오면, 일상사를 함께하라’는 게 대부분 공동체가 방문자들에 요구하는 것이다.

 단식과 관장을 하면서도 노동을 했다. 단식을 한다고 누워 있지만 않고 조금씩 일을 하는 게 활력을 위해 도움이 되는 듯도 했다. 그렇게 단식과 노동을 병행하는 동안 컨디션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관장을 통해 몸 안에 오래도록 쌓여 있던 독소들이 빠져 나오면서 맑아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아속을 좀 더 차분하게 살펴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아속은 불교 국가인 타이에선 비주류로 볼 수 있다. 주류 불교의 타락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국왕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불교 국가에서 불교 권력의 타락을 비판하고 나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다름없는 짓이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타이의 주류도 무시할 수 없는 5개의 공동체 마을을 포함한 아속 왕국을 만드는 기적을 이뤄냈다. 잠롱 스리무앙 전방콕시장도 아속 출신이다. 잠롱의 멘토가 바로 아속의 창시자 보디락 스님이다. 그건 놀라움의 시작일 뿐이었다. 시사아속은 20여만 평의 드넓은 마을이다. 공동 홀과 공동 식당, 학교 등이 모여 있는 센터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의 집들과 공장, 학교, 숲, 논밭이 방사선으로 뻗어나가 있다. 어떻게 이런 한적한 시골에 기상천외한 이상을 품은 공동체가 생겨날 수 있었을까. 40여 년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공동체는 ‘이상’ 없이 시작하기도 어렵지만, ‘이상’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다. 공동체에서도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자야 한다. 많은 공동체가 중도에 파산한 것은 갈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식주 해결 같은 현실 능력이 없어서기도 하다. 공동체도 이윤 창출이 필요하다.

 시사아속 게스트하우스 2층에서 내려다보면 건너편엔 허브 약을 만드는 간이 공장과 그 약을 파는 가게가 나란히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와 허브 공장 옆 한편엔 어디선가 줄기째 잘라온 꽃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장미처럼 줄기에 가시가 달린 빨간 꽃이다. 도로엔 줄기에서 잘라 햇볕 아래 널어놓은 선홍빛 그 꽃들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앞엔 아침이면 학생들이 대여섯 명씩 와서 꽃을 잘랐다. 아이들과 어울려 나도 꽃을 자르다 보니, 그곳이 첫 일터가 되었다. 줄기에 달린 가시에 찔리지 않게 조심만 하면, 일은 어려울 게 없었다. 아이들은 아침에 2시간가량 수다를 떨며 그 일을 하고 돌아갔다. 그러면 허브 공장의 아주머니 몇 분이 와서 그 일을 대신했다. 그들도 동남아시아 특유의 여유가 있었다. 이런 목가적인 일터는 아이들의 출입이 금지되는 외부 공장들과는 다르다. 공장에 다니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출근할 수 있다. 아이들은 일하는 엄마 주위에서 친구들과 뛰어논다. 며칠 뒤엔 분위기를 바꿔 허브 세제를 만드는 곳에서 일해 보았다. 샴푸를 플라스틱 병에 담고 라벨을 붙이는 일이었다. 몇 번 해보니, 속도가 붙어 한나절에 할 일을 두시간만에 끝냈다. 그러면 그들은 새 일감을 가져오지 않고, 이제 쉬어도 좋다고 했다.

 시사아속내엔 유치원과 초등, 중고등, 기술학교 등 학교가 3개 있다. 유치원과 초등학생 대부분은 이 공동체에서 사는 집 아이들이다. 그러나 중·고등학교와 기술학교 학생 대부분은 외지에서 왔다. 학비만이 아니라 먹고 입고 자는 것 일체를 공동체에서 해결해준다. 거저먹는 것은 아니다. 시사아속 내엔 여러 개의 작은 공장이 있다. 공동체 안뿐 아니라, 차로 10~20여 분 거리에 여러 개 있다.  40명 안팎의 중고등부와 기술학교 학생도 많은 일을 했다. 공부를 위해 모든 것에 열외인 한국의 아이들과는 너무 달랐다. 새벽이면 유치원생까지 빗자루를 들고 나와 거리를 쓸거나, 공용 강당과 화장실을 청소했다. 그들에게서 일을 싫어하는 기색이 없다. 그 비결은 무엇보다 노동을 강제하지 않는 데 있는 듯 했다. 공동체 외곽의 논에서 볏짚을 거름으로 뿌릴 때였다. 서너 명의 아이는 볏짚을 싣고 카레이서처럼 논을 질주했다. 나머지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차로 싣고 온 볏짚이 흙과 섞이도록 곡괭이로 긁었다. 어떤 아이들은 볏짚을 친구에게 뿌리며 서로 뒤쫓고 뒹굴어대고, 어떤 아이들은 서서 수다를 떨고, 한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선생님이나 다른 아이들은 상관치 않았다. 일하는 사람은 최선을 다했지만, 어떤 아이들은 놀 자유를 만끽했다. 아이들은 대강당에서 수업도 놀이처럼 했다. 교실엔 웃음과 소음이 진동했다. 공동체 가장자리엔 드럼과 기타, 북 등을 갖춘 야외 음악실이 있었다. 아이들은 자주 그곳에 모여 신기를 발산했다. 한국의 많은 아이가 새장에 갇힌 새라면, 이들은 스스로 살아가고 즐기는 법을 배우는 숲속의 새들 같았다.

 모든 공동체원이 자유분방한 건 아니었다. 하루 한 끼만 채식을 하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스님과 수녀들이 있었다. 한번은 학생들이 농장에 간 데서 20여 명의 아이들을 따라가 보니, 교장 선생님이자 수녀인 아수가 큰 밭에서 홀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 말 없는 실천적 삶이 아이들의 모델이 되어주는 듯 했다. 촌장격인 아뻠이나 아수는 출가 비구니가 아니었고 유니폼을 입지도 않았다. 그들은 맨발로 다니며,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일을 했다. 그런데도 내가 두 시간 이상 쉬지 않고 일을 하면 아뻠은 가만히 다가와 “힘들지 않느냐”며 “쉬고 싶을 때는 언제든 쉬어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시사아속 정문 옆엔 대형 마트가 있다. 시사아속이 운영하는 곳이다. 시사아속에서 생산하지 않는 의류나 생필품도 판매한다. 마트 옆엔 우리나라 시골 5일장 같은 장이 있다. 아속에서 생산된 야채 등 농산물을 판매하는 곳이다. 시골의 읍이나 면 소재지도 아닌 곳인데도 이곳 마트엔 멀리서까지 손님들이 찾아온다. 가격이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아속의 경제 철학은 이윤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장사를 하면서 이윤을 남기지 않는다니, 이상치고는 너무나 허황해 보였다.

 아속은 타이 전역에 있는 6개의 마을들과 공장들, 레스토랑들이 이들은 이들을 다 합쳐 ‘부니욤 네트워크’로 부른다. 그들의 경제 원리가 ’부니욤(공덕주의)’이다. 공덕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선행이다. 종교조차 ‘공덕 없이도 단박에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느니 ‘선행 없이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신념이 대세다. 각 종교에선 정당성을 지닌다 해도 인간의 이기적 욕망에 편승하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성인은 운명을 아는 것을 넘어 운명을 만들어간다고 한다. 서로 돕는 공덕과 선행이 확산되지 않고, 막가파적 이기적 욕망의 약육강식만이 지배하는 세상은 지상천국이 아닌 지상지옥이 될 게 뻔하다.

 공동체란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에서 시작된다. 사람뿐 아니라 태양과 공기와 물과 농산물과 다른 존재들의 은혜가 없이는 한순간도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 그래서 혼자만의 깨달음, 혼자만의 구원은 공동체적 생명 원리에 반한다. 많은 공동체가 자신만이 뭔가를 얻겠다며, 이웃들과 단절된 폐쇄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속은 철저하게 열려 있다. 아속의 경제 행위도 이윤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다. 즉,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원가와 판매가의 차이를 최소화하는 것을 최고로 여긴다. 원가를 공개하고, 농산물은 원가 이하에 팔거나 거저 주기도 한다. 명절 때는 모든 식품을 1바트에 판매한다. 1바트는 우리 돈으로 30원가량으로, 타이에서도 과자 하나 사먹기 어려운 푼돈이다. 아속은 이윤을 높이려 할수록 부도덕해지고 영적 손실을 피할 수 없는 반면, 자기의 탐닉을 최소화할수록 ‘영적 이득’이 증가한다고 여긴다.

 아속은 갈망과 혐오에서 벗어나는 실천을 가장 중시한다. 시사아속 입구엔 ‘의·식·주·약’이라고 쓰인 입간판이 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아속이 생산하는 것 가운데 소비주의에 부화뇌동하는 제품은 없다. 하나같이 삶의 필수품뿐이다. 사람들은 허영을 채우려 소비를 늘리며 생명을 죽이고, 지구를 파괴하고 있지만 아속인은 많이 팔아 많이 남기고 많이 소비하려는 갈망에서 벗어나는 소박한 삶을 몸소 실천한다. 이런 모범이야말로 허브약과 다른 ‘영혼의 약’이다. 이들은 자신의 생산품들로만 삶을 영위하는 ‘자족경제’를 꾸린다. 그리고 그 혜택을 고을 이웃과 나눈다. 아속공동체 안엔 밖으로 직장에 다니는 사람 등 다양한 이들이 함께 하고 있지만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승려와 수녀, 이에 동조하는 많은 공동체원이 있다. 그래서 허황돼 보이는 부니욤 경제가 실현된다. 이토록 싼 가격으로 물건을 공급하고 봉사하면서도 공동체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 전체적으로 더 커지고 풍요로워지고 있다.

 2008년부터 시작된 금융 위기로 아시아 전체가 기우뚱할 때조차 아속은 조금도 장애 없이 발전해 자족 경제의 힘을 보여줬다. 부니욤 네트워크는 현재 30개의 크고작은 공동체와 9개의 학교, 6개의 채식레스토랑, 4개의 유기농비료공장, 3개의 쌀 방앗간, 2개의 허브 의약품 공장, 하나의 병원, 160헥타르의 농장을 갖추고 있다. 결실은 아속만의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90년대 푸미폰 국왕이 농업 국가 타이의 자족 경제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타이교육부는 아속의 학교들을 모델로 지정해 서양 추종 교육이 아닌 타이다운 대안교육을 본받도록 했다. 또 포틸락의 추종자인 잠롱 스리무엉 전 방콕 시장이 탁신 총리의 경제 자문이 되면서 금융 위기로 파산 위기로 몰린 농민을 위한 ‘빚으로부터 탈출 프로젝트’를 실시해 농민을 5일씩 아속에 보내 교육시켰다. 무려 30만 명이 아속에서 자연 농법과 자급자족 방식 등을 터득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많이 벌어 많이 쓰면서도 더 못 벌고 더 못 써 안달하며 괴로운 보통 사람과 달리 아속인은 적게 벌어 적게 쓰고 많이 베풀었다.

 아속공동체 하모니의 비결도 독특한 ‘식사 나눔’이다. 아속은 포틸락을 비롯한 출가자들이 모태가 된 공동체다. 타이나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불교 국가에선 아직도 스님이 새벽에 탁발하는 문화가 유지되고 있다. 아속에서도 탁발 문화는 같지만, 그 탁발 음식을 스님들끼리만 나누는 바깥과 아속의 나눔 방식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속에서도 스님들이 새벽 6시쯤 온 마을을 돌며 탁발한다. 공동체 사람들은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이나 과일과 빵 등을 가지고 길가에 나온다. 사람들은 스님들이 기러기처럼 줄 지어 가면, 바루에 공양물을 담아준다. 스님들은 공양 받은 음식을 마을 한가운데 담마홀로 가져와 식탁 위에 올려 뷔페처럼 차려놓는다. 식탁엔 스님들이 탁발해온 음식만 차려지는 게 아니다. 식사 때가 가까워지면 어른, 학생 너나 할 것 없이 공동 부엌에 우르르 몰려가 누구는 야채를 썰거나 다듬고, 누군가는 양념을 빻고, 누군가는 밥을 해 뚝딱 늘여놓는다. 쌀국수와 숙주나물이 곁들어진 팟타이, 돔얌쿵, 빨간 국물의 파파야 샐러드인 쏨땀 외에도 밭에서 방금 솎아와 삶은 야채들로 푸짐했다. 친환경적이고 맛깔스런 음식을 먹는 재미가 보통 쏠쏠한 게 아니었다. 스님들이 먼저 음식을 바루에 담아가도 90%가량은 남아 있다. 그러면 누구나 와서 음식을 접시에 담아 먹는다. 그것만이 아니다. 집에서 요리를 해먹기 어려운 노인은 도시락 통을 가져와 점심과 저녁까지 싸간다. 개개인은 몇 스님에게 공양을 올렸을 뿐인데, 그 공양물이 공동체 전체를 먹이는 잔치가 된다. 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공양을 올리는 사람들도 누구나 가져가기 쉽게 1인분씩 비닐봉지에 담아 공양을 올린다. 시사아속에선 더 푸짐한 음식을 마련해 빈민가에 가서 잔치를 베풀곤 한다.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게 결국 모든 이와 나누며 공덕을 베푸는 자선이 된다.

 아속다운 것은 어찌 보면 먹는 것보다 잘 비우는 데 있다. 시사아속은 병든 몸을 디톡스(해독)하는 관장으로 유명하다. 시사아속의 공동 화장실은 구조가 독특하다. 변기 말고, 벽 쪽에 콘크리트 침대가 있다. 화장실 밖 빨래 줄엔 디톡스 통 수백 개가 널려 있다. 패트병 밑동을 잘라내고, 뚜껑에 얇은 고무호스가 달린 통이다. 시사아속 사람들은 화장실 침대에 누워 혼자 항문 관장을 한다. 정제수를 이 통에 담아 미니호스를 항문에 넣어 물이 장에 흘러들어가게 한 다음 변을 눈다. 아속 사람들의 얼굴이 그처럼 맑은 것은 채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디톡스 덕인 듯도 하다. 그들은 일상 에서 시시때때로 관장을 했다.

 나도 시사아속을 간 게 공동체 체험보다는 실은 병 치료를 위해서였다. 아속에서 사나흘이 지나자 디톡스에 들어갔다. 시사아속의 촌장격인 수녀 아뻠이 디톡스 전문가다. 보통 4~5일간 단식과 동시에 하는 디톡스의 전 과정은 그의 지시에 따른다. 새벽에 코코넛 오일을 한 입 가득 머금고 20분간 있다가 뱉는 것을 시작으로 하루 세 번 ‘리턱’이란 노란 가루를 효소에 타 마시고 저녁엔 레몬즙 등을 마신다.

 단식과 함께 매일 관장을 하기 때문에 며칠이 지나면 변의 양은 현저히 줄고 염소 똥처럼 동글동글한 변이나 기름이나 거품과 같은 독소가 배출된다. 그러면 아뻠이 그 변을 막대기로 저어보고 몸 상태에 대해 얘기해준다. 단식과 관장 후 변을 보면 그동안 어떤 음식을 먹고, 술·담배를 어느 정도 하고, 어떻게 살아왔고, 어디가 안 좋은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인근에 사는 가난한 할머니도 나와 함께 디톡스를 했다. 그때 게스트하우스엔 중국 광저우에서 온 밍웬이라는 30대 여성이 머물고 있었다. 그는 발에 습진이 심해 아시아 전역으로 용하다는 곳들을 찾아다니다 방콕의 디톡스센터에서 50만 원가량을 주고 디톡스를 했는데, 원조인 이곳에서 무료로 해주자 자기도 “여기서 할 걸”하며 아쉬워했다. 최근 시사아속을 다녀온 산청민들레학교 김인수 교장 선생님에 따르면, 타이에서 의료법이 강화돼 시사아속에서는 디톡스 프로그램을 중단했다고 한다. 대신 아뻠에게 배운 이가 인근에 치유센터를 만들어 우리 돈 10여 만 원으로 4박 5일 디톡스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5일간의 단식과 디톡스를 끝내니, 뱃살도 들어가고, 날아갈 듯 가뿐했다. 단식 후 처음 먹은 게 호박죽이다. 피줌 수녀가 만든 것이었다. 피줌도 아뻠처럼 방콕에서 대학에 다니다 포틸락에 귀의해 아속공동체에 합류했다. 정치학도로 정치인이 되겠다는 명문가의 재원이 세속적 삶을 포기하고 출가자와 같은 길을 걷겠다고 하자, 처음엔 가족의 반대가 컸다고 한다. 방콕의 산티아속에서 30여 년간 활동하며 포틸락을 보좌해온 피줌은 몇 년 전부터는 실무에선 은퇴해 시사아속공동체에 내려와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냥 쉴 피줌이 아니었다. 피줌은 새벽이면 죽을 쒀서 자전거를 타고 공동체 안에서 식사를 준비하기 어려운 노인 집부터 보온병에 담은 죽을 돌린다. 그 호박죽은 천상의 맛이었다.

 시사아속의 아침은 새벽 5시에 시작됐다. 그 아침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비로 길을 쓸며 청소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내 의문도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 노동의 현장엔 승려들도 누구나 다름없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출가자들은 직접 마당을 쓸고, 돌을 나르고, 건물을 고치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남방 불교권인 타이에서 통념상 출가자들이 일을 하는 것은 상상키 어렵다. 그저 신자들이 주는 보시와 공양이나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출가자의 일상이다. 아속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속 내 일반인의 집들은 멋들어졌지만, 승려들은 판자 몇 개 얽어놓은 오두막인 쿠티에서 자고, 철저히 하루 한 끼만 먹고 살았다.

 아속은 승려와 일반인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승려가 주인이고, 재가자는 객으로 느껴지는 한국의 사찰 공동체와도 다르다. 5개의 마을을 비롯한 아속공동체엔 갈색 승복을 입은 출가 비구와 비구니 100여 명 외에도, 승복을 입지는 않지만 무소유를 실천하며 헌신하는 독신 여성들로 ‘수녀’ 격인 30여 명의 시카매트, 또 가족들과 함께 아속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아속의 공장에서 일만 하는 노동자들, 밖에서 살지만 아속에 교사로 참여하는 사람들, 아속에서 살지만 직장은 밖으로 다니는 사람들, 이토록 다양한 사람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시사아속에서 일하며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그토록 다양한 부류가 한 울타리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승려들의 솔선수범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의 지도력이란 카리스마적 권위를 얘기한다. 물론 40여 년 전 아속 깃발을 든 보디락은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카리스마는 사이비 교주에게도 있다. 진정한 권위란 도덕으로부터 나온다.

 보디락이 시사아속에 들른 것은 시사아속에 머문 지 보름이 지나서였다. 그때 보디락 스님이 예고 없이 하루를 묵었다. 80대 노승인 그가 시사아속에서 묵는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보디락은 깡마르고 뼈 위에 살갗만이 씌워진 듯했다. 그 속에서 눈빛만은 형형했다. 보디락이 맨발로 공동체 마을에서 탁발을 한 뒤 설법을 하기 위해 마루로 올라서기 직전이었다. 수돗가에서 흙 묻은 맨발을 씻기 위해 가사를 들어올렸다. 언뜻 보이는 종아리는 쭈글쭈글한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힘줄이 불끈 솟은 80대 노승의 종아리에서 혁명가의 결기가 엿보였다. 인간 세상의 이기적 욕망에 홀로 맞서 싸우는 작은 거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타이의 주류 교단이 가장 껄끄러워하는 인물이다. 한국에선 승단의 타락을 비판하는 자 자신이 더욱 탐욕에 차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하기에 공감을 얻지 못할 때가 많다. 보디락은 철저한 계율과 무욕, 무소유로 출발한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 아니라, 무욕으로 탐욕과 맞선다.

 보디락은 세상의 혁명을 외치기 전에 자신을 먼저 혁명했다. 그는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부친은 가족을 버리고 가출했다. 어머니는 열 살 때 세상을 떴다. 그 아래로 6명의 동생이 있었다. 소년 가장인 그에겐 험진 세파를 홀로 뚫고 나가야 하는 무거운 짐이 지워졌다. 그는 온갖 일을 하며 동생들을 돌봤다. 예술가가 되려는 자신의 꿈도 포기하지 않았다. 예술 대학을 마치고 애초 그림을 그렸던 그는 작곡가와 텔레비전 프로그래머로 데뷔했는데, 단기간에 타이 최고가 됐다. 눈부신 성과였다. 그는 방콕에서 호화로운 주택에서 살며 최고급 차를 굴렸다. 근근이 생계를 이어온 6명의 동생도 그의 돌봄으로 부유한 삶을 누렸다.

 그런데 타이 안방에서 스타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어느 날 그는 머리를 밀어버렸다. 그리고 채식주의자가 되어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부와 명성과 안락이 왕자 고타마 붓다를 정복할 수 없었듯이 나 또한 정복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가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나 방송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선언했을 때 모두 그가 미쳤다고 했다. 그는 욕망이 아닌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했다. 그러나 불교 국가인 타이에서 승려도 아닌 젊은 전직 방송 엔터테이너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승복은 중요치 않지만, 사람들에겐 승복이 중요하다며 출가를 단행했다. 출가 전 어떤 결심을 했건 출가 후엔 승복으로 얻는 대접에 빠져 한 생을 보내고 마는 게 출가자의 일생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는 당연한 행보에서 또 벗어났다. 그는 2년이 되자 명상을 마쳤다고 했다. 공부를 마쳤다는 것이다. 드디어 명상과 진리를 삶에서 증명해 보일 때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는 승가에서도 미친 중 취급을 받았고, 파문당했다. “높은 자리에 있는 고승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들은 영적 구원도 얻지 못했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왕조차 거스를 수 없다는 불교 주류 승단에 그는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종교를 빙자해 탐욕을 채우는 타락을 가장 크게 꾸짖었다. 그는 “당근은 이미 많은 사람이 사용했기에 내가 사용할 것은 회초리다”며 고 말하며 그 자신은 “아기들이 잠들게 요람을 흔들어주는 보모가 아니다”고 도 했다. 그는 자신이 먼저 깨어 있기 위해 철저히 하루 1식만 하며 계율에 철저했고, 아속의 다른 승려 모두 그렇게 하도록 했다. 그는 “너무도 강한 악의 흐름에 맞서야 하기 때문에 엄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방콕포스트>의 한 기자는 “타이에서 구호품을 업자에게 팔아넘기고, 미신을 이용해 돈을 벌고, 화려한 집에서 살면서 비싼 차를 타고, 보시금을 빼돌리는 승려에겐 보디락은 가장 껄끄러운 인물이다. 그는 성상을 숭배하지도 않고 어떤 미신적인 예식도 배제하고 자신에게 철저하며 이웃에게 헌신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디락이 어떤 삶을 살든 주류 교단의 권위에 도전하지만 않았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불교에서 그나마 고요히 마음을 챙기는 승려들은 존중받을 만하다. 보디락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어느 정도 명상을 하면 삶 속에서 명상하며 붓다가 말한 무욕의 평화 세상을 실현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 방문객이 보디락을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운 좋게도 노 혁명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에게 먼저 왜 출가자들이 이곳에서는 명상을 하지 않고, 노동까지 하느냐고 물었다. 그것이 밖의 승려와 아속 승려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이 명상입니다. 일이야말로 명상이지요. 매순간 일하면서 일거수일투족에서 명상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종일 생 전체를 명상만 하는 것은 베이비나 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한 베이비란 명상 초보자를 뜻했다. 처음엔 젖을 먹지만, 좀 더 자라면 세상의 거친 음식을 먹으며 소화해내야지 끝내 젖만 먹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어 ‘왜 공동체를 만들었느냐”고 물었다. 그가 답했다.

 “고타마 붓다가 말한, 삶을 사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말만이 아닌. 가르침만이 아닌 곳.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그런 곳 말입니다.”

 그에게 “아속을 이처럼 성공적으로 만들었는데 왜 타이 밖까지 널리 알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우리 자신이 먼저 아속답게 사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지요. 우리 스스로가 단단해지면 저절로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게 됩니다.”

 이제 공동체 밖 세상 얘기로 나아갔다. 다음은 그와의 문답이다.  

 돈이 전부인 세상이 됐습니다. 그게 행복의 첫째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것으로 행복해질 수 없는지요?

 “그 상태로 행복하다면 그대로 두세요. 그러나 물질로도 행복해질 수 없다면 물질의 힘이 아닌, 마음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나요?

 “욕망에서 벗어나 현재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짓궂게도 이번엔 내 욕구를 드러내 보이며 그를 실험했다. 

 “보디락이나 아속에 대한 책자를 저희 신문사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할 수 있게 출판권을 줄 수 있는지요?”

 오직 타이어로만 말하고 통역을 통해서만 소통했던 보디락이 이번만은 영어로 답했다.

 “아웃 오브 차지(돈 안 받는다).” ‘뭘 그런 걸’, ‘얼마든지 갖다 쓰라’는 표정이었다. 허락도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설사 누군가 무소유를 얘기한다 해도 내면에 소유욕과 명예욕이 있을 수 있다. 그는 아니었다. 불교에선 현세를 욕망의 지배하는 세상, 즉 욕계라고 한다. 욕계에선 재단할 수 없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오래전 예술가의 일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예술을 시작한 것 같았다. 관념이나 허구가 아닌 예술, 실상 세계에서 이상을 하나씩 실현해가는 ‘삶의 예술’ 이다.

 시사아속을 나오는 날이었다. 이른바 선진국 객들이 후진국에 와서 거저 얻어먹는 게 좋아 보이지 않아 기부금을 내놓았다. 그런데 아뻠이 돈을 돌려주는 게 아닌가. 아속의 규정은 그가 누구라도 일곱 번 방문하기 전엔 기부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속에선 손님들이 기부하는 것보다 함께 노동하며 참여하는 삶을 더 원한다고도 덧붙였다.

 시사아속에서의 생활은 건강에도 큰 보탬이 된 데다 많은 영감을 주었다. 보디락까지 만났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방문 목적을 초과 달성한 것을 기뻐하며 놀아도 좋을터였다. 병가를 낼 때 ‘일을 떠나 1년은 쉬기만 하며 건강을 챙긴다’던 다짐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 직업병이 그리 두지 않았다. 아속을 더 알고 싶고, 더 보고 싶고, 더 확인하고 싶은 궁금증이 발동하고 말았다. 결국 아속에서 가장 큰 공동체인 라차타니아속으로, 치앙마이의 아속레스토랑으로, 최초의 아속공동체인 바톰아속으로, 방콕의 산티아속까지 아속공동체의 지부들을 휩쓰는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됐다.

 아속은 우본라차타니와 치앙마이, 바톰, 방콕 등 6곳에 아속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치앙마이 아속 레스토랑은 시내에서 차로 30분가량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외국인까지 모여들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돈으로 1천 원 정도면 다른 식당에선 1만 원을 내고도 먹기 어려운 채식 요리들을 먹을 수 있었다. 대신 음식은 자기가 담아오고, 먹은 식기도 직접 씻어야 한다. 아속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자기가 먹은 식기는 직접 씻는 것처럼 손님들도 그래야 한다. 방콕에서 차로 1시간 반 거리인 바톰 아속공동체에 가자 공동체가 텅 비다시피 했다. 연말이 되면 타이 전역의 아속공동체 사람들이 1백만 평이나 되는 우본라차타니아속 공동체에 모여 함께 보낸다고 한다. 젊은이와 학생들은 모두 그곳에 가고, 노인과 승려와 수녀 몇 명이 남아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옆엔 수녀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다. 그는 낮엔 이 공동체 정문 옆에 있는 아속 레스토랑에서 봉사했다. 새벽부터 집에서 음식을 요리해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고는 나를 불렀다. 음식을 가져가라는 것이다. 정성스런 음식을 매일 매일 할머니에게 받아먹자니 송구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바톰 아속 정문 앞엔 아속 레스토랑 말고도 아속 슈퍼도 있고, 건너편엔 아속이 운영하는 대형 마트도 있다. 정문 옆에는 호수가 있어서 가장 경치가 좋은 땅엔 과일이나 커피 채소 등을 파는 노점상이 그득했다. 아속 땅인 그곳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내줘 장사를 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그래서 이 근처에서 쇼핑도 하고, 식사도 하고, 군것질도 하고 호수 가에서 쉬기도 할 겸 먼 곳에서도 차를 끌고 찾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아속의 베풂으로 이 거리가 고을의 명소가 되었다.

 바톰 아속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이는 비구니인 꺄오 스님이다. 아침이면 그와 함께 출가자들의 오두막인 쿠티 구역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쓸었다. 식사를 하고는 함께 바나나 나무를 거름으로 만들기 위해 잘라서 토막 냈다. 조그만 꺄오 스님은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하루 한 끼만 먹으니 힘도 없어 보였다. 그와 함께 바나나 나무를 썰면서 오래도록 함께 머물렀다. 스님의 쿠티엔 살림살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치약, 칫솔, 조그만 담요, 그릇과 수저 하나가 전부였다. 어떻게 저렇게 살아가나 싶을 정도로 단출했다. 한 끼만 먹고 참새처럼 야윈 몸으로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저토록 평화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그의 평화와 헌신에 아무것도 보답할 게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렸다.

 바톰 아속을 떠나던 날, 꺄오 스님이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는 단풍잎 모양의 편지지에 ‘나의 아들아’로 시작되는 편지를 주었다. 그가 내 나이를 알지 못해서든, 종교적인 수사이든 상관이 없었다. 그는 아무리 보아도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심성을 가졌기에 ‘아들아’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 편지지엔 아인슈타인의 말이 적혀 있었다. “참된 종교는 일상의 삶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선량함과 정의를 품고, 한 사람의 완전한 영혼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아속은 현대 문명의 병폐를 인식하고,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우리 몸에 대해서도 눈이 아프면 눈병 치료약만을 주는 대증 요법식 처방만 내리는 서양의학과 달리 독소를 빼내 몸을 정화시켜 활력과 건강을 되찾게 하는 근본적인 접근법을 썼다.

 아속은 자연 마을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함께 모인, 인위적인 마을이다.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자본주의 삶의 잔인성과 파괴성을 보고 대안을 선택해 사는 마을이다. 이 정도 되려면 종교적 귀의 이상의 가치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인이 보기엔 아속은 너무 이상적일 수 있다.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창조적 소수를 경애의 눈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쳐다보기가 버거우니 ‘돌아이’로 치부할 수도 있다. 탁류에서 노는 자신을 정당화하려 오히려 이상적 공동체들을 컬트쯤으로 희화화할 수 있다. 공동체를 시작한 이들은 우리가 결단하지 못할 때 결단했고, 그 실험을 앞장서 행한 선구자다. 모든 세상이 자본주의 홍수에 휩쓸려 이기적 성장만을 추구하며 온갖 생명을 멸종 위기로 몰아넣고, 이번 세대만 살고 말 것처럼 자원을 고갈시키며 온 바다까지 쓰레기 더미를 쏟아 부을 때 이들은 ‘이래서는 지구가 천 개라도 남아날 수 없다’면서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이들을 ‘컬트’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경애의 마음으로 배워야 하고 찬양 고무해도 부족하다. 아속 사람들은 혁명가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기적인 유전자를 지녔다는 인간에게 이런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 인류의 희망이다.

 괴테의 말처럼 여행이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 자체를 위해서다. 우리는 그들이 목적지에 도달했느냐를 따져 묻기보다는 그들이 지향하는 바를 봐야 한다.

 그들의 삶이 혁명적이긴 하지만 석가처럼 처자식까지 버리고 무소유로 거리로 나서기를 요구치는 않는다. 독립 운동이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처럼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던질 것도 요구하진 않는다. 그 무엇보다 가족과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가족과 친구, 이웃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면서 하는 혁명이니 혁명 치고는 특이하고 유쾌한 혁명이다. 가치관의 변화를 통한 삶의 전환이 고난은커녕 아주 행복하고 평화롭게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삶은 유토피아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칼 융은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도 내면 생활의 투사라고 했다. 내적 만족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정서적 좌절감을 공동체가 채워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것이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이상향을 동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속은 좌절감을 채워줄 만큼 화려해 이상향이 아니라, 그런 욕망과 집착조차 놓아버리고 삶의 가치관을 달리 했기에 이상향이 되었다.

 이상향은 장소 개념이라기보다는 가치의 문제다. 즉, 삶의 목표를 어디다 두느냐다. 여기가 아닌 거기에 가고 싶다는 욕구의 바퀴만 헛돌릴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지금은 혼삶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지금의 추세가 그대로 이어져도 우리 삶에서 디스토피아없이 늙어 죽을 때까지 행복할 수 있다면, 이대로 쭉 살아가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왜 굳이 추세와는 ‘다른 삶’을 제시하겠는가.

 앞으로 마을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한층 고조될 것이다. 그런데도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추세가 쉽사리 멈추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유주의 시대는 기존의 억압에서 해방을 최고의 미덕으로 만들어놓았다. 즉, 얽매이지 않고 홀로 편하게 사는 게 최고라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는 얘기다. 자본주의로 인해 어려서부터 ‘엄마와 가족과 대가족과 이웃’이라는 공동체를 빼앗긴 세대는 안전 기지를 상실한 트라우마로 ‘인간 귀차니즘’이 생기고, ‘인간과 더불어 사는 것’을 두려워하게 됐다. 여기에 자본까지 인간을 노예처럼 부리기 쉽게 개성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각자도생을 부추기며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심어주고 있다.

 앞으로는 수십 년의 노년을 홀로 살아가고, 고독사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질 것이다. 그런 시대를 앞두고 인간으로서 어떻게 존엄을 유지하며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지, 신적인 자본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지를 따져본다면 마을공동체만 한 대안을 찾기 어렵다. 재력도, 권력도, 대단한 능력도 없다면 더욱더 그렇다.

 수백 만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는 동물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동물이 보기에 인간은 거의 신만큼이나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가 됐다. 그런데 보통의 인간이 볼 때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자본이 그렇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만큼이나 인간과 슈퍼 자본가의 차이 또한 현격해지고 있다. 개인은 자신의 욕구와 개성대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우리의 심리 상태까지 정확하게 포착한 슈퍼 자본에게 보통의 인간은 동물과 다름없이 점점 사육되고 조종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 건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는 점이다. 동물은 협력을 통해 인간의 압제에 저항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도 어렵다. 그러나 인간은 마을공동체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고 협력할 수 있고, 저항할 수 있고, 우리를 지켜낼 수 있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우리에겐 그런 지성이 있으며, 민주주의와 선거권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라는 게 무색해질 만큼 모래알이 되어 힘을 잃어가는 사이, 대자본은 신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속 사람들은 그 대자본의 농간에 순수히 따르는 삶을 사는게 우리의 숙명은 아니며,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고, 실제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등대가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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