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특집 | 설악무산 스님, 그 흔적과 기억

1. 나는 할 일을 다했다

지난 2016년 5월 21일, 설악무산 조실스님께서는 하안거 결제법회에 앞서 설악산문 현판 제막법회를 주관하셨다. 국내 최대 규모로 조성된 설악산문에는 ‘조계선풍시원도량설악산문(曹溪禪風始原道場雪嶽山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날 조실스님께서는 “나는 이제 설악산에 와서 할 일을 다했다. 혹시 훗날 문도들 사이에 시빗거리라도 생기면 이 현판을 한번 쳐다보아라. 그러면 나의 뜻을 알 것이다.”라고 내게 말씀하셨다.

2. 법거량과 법통

조실스님께서는 나에게 본사 주지 소임을 맡기실 때 여러 번 법거량을 하셨다. 내가 코앞의 것들에 욕심을 내는 ‘현실주의자’인지, 길게 보는 눈을 지닌 ‘미래주의자’인지를 검증하셨다. 검증이 끝나시자 곧바로 품신 서류를 준비하라 이르셨고, 나는 삼배를 올려 예를 갖추었다. 스님께서는 ‘용성, 고암, 성준, 무산으로 이어져 온 법통이 이제 잘 전해졌다’고 말씀하시고는 훗날에도 이 법통을 잘 지키라고 당부하셨다.

3. 진솔함과 진정성

조실스님께서는 나를 비롯한 제자들을 단 한 번도 속이신 적이 없다. 속은 것이 있다면 제자들이 자기의 마음을 어쩌지 못해 자신한테 속은 것뿐이다. 스님은 항상 가능성을 열어두고 말씀하셨고, 그것을 향해 최선을 다하라고 독려하셨다. 일문이 열리면 백문이 열리듯이, 이치를 깨쳐 다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셨다. 스님의 법문이 승속 구분 없이 대중들에게 큰 감화를 준 것은 바로 스님의 이 진정성, 진솔함 때문이었다. 스님께서는 수줍음도 많이 타셨는데 이 수줍음 속에는 언제나 진정성과 진솔함이 녹아 있었다. 소탈함, 자유로움, 섬세함, 자상함 등은 다 이 진정성과 진솔함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4. 세 마디 법문

조실스님께서는 겉으로는 엄해 보이셔도 결코 칭찬에 야박하지 않으셨다. 스님께서 지시하신 일들을 원만히 처리하고 전화로 결과를 보고 드릴 때면 늘 “고맙다.”라거나 “애썼다.”라고 짧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짧은 말씀을 듣고 나면 엄청난 에너지와 크나큰 칭찬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를 포함한 스님의 제자들은 이 세 마디를 듣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스님의 칭찬은 생명을 살리는 큰 가르침이었다.

5. 외롭게 가는 게 수행자

조실스님께서는 수행자가 지닌 천애의 외로움을 갖고 계셨지만, 이 외로움을 뛰어넘는 활달함 또한 지니고 계셨다. 그러하셨기 때문에 속인들의 외로움까지도 잘 헤아려 늘 위로를 아끼지 않으셨고, 당신을 닮은 활달한 문인들을 존중해주셨다. 하지만, 스님께서 아무리 외로움과 활달함을 겸수한 도인이라 하셨더라도, 스님 시에 나오듯이 삶이 지닌 아지랑이와 같은 속성에는 쓸쓸함과 허망함을 감추지 않으셨다.

조실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전 마지막 부처님오신날을 보내실 때, 스님께서는 유독 이 쓸쓸함과 허망함을 드러내 보이셨다. 나는 스님의 손을 잡아드리면서 “스님, 스님 말씀대로 삶이 본래 허망한 것이고, 끝까지 외롭게 가는 게 수행자 아니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렸다. 이 말씀을 드리고 난 뒤 스님과 나는 서로 마주 보며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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