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원경제학의 기틀을 다지다

1. 머리말

동리(東籬) 이재창
(李載昌, 1930~2017)

동리(東籬) 이재창(李載昌, 1930~2017)은 필자의 은사이다.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에서 필자는 동리 선생의 지도로 〈일천제의 성불에 관한 연구-열반경을 중심으로〉(1982년도 석사학위 청구논문)와 〈원시불교의 사회 · 경제사상 연구〉(1992년도 박사학위 청구논문)라는 학위논문을 썼다. 선생께서 정년 퇴임한 후, 외람되게도 필자가 그 빈자리를 이어 앉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다.

선생과 필자의 인연은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교양학부 교양 필수 과목이었던 ‘불교문화사’ 수업을 선생에게서 듣게 된 것이다. 선생에 대한 인상은 그때부터 ‘잔잔한 미소’ 또는 ‘국제 신사’였다. 선생의 성품은 이형기 교수가 쓴 〈잘 삭은 빙그레〉라는 ‘이재창 박사 회갑 송시’에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당신은 언제나 말이 없습니다.
다만 조용한 빙그레
석가모니 들어 보이신 연꽃 한 송이에
가섭존자 혼자 응답한
잔잔한 미소가 당신의 몫입니다.

— 중략 —

아무리 고달파도 그냥 빙그레
아무리 기뻐도 그냥 빙그레
그러면서 당신이 60년 동안
새김질 되풀이한 팔만사천의 법문이
이제는 드디어 잘 삭은 빙그레 하나로
우리 둘레를 가득 채웁니다.

찬양할지로다 말 없는 말씀이여
시끄러운 소음과 숨 막히는 매연을
다만 빙그레, 빙그레로 맑게 걸러낸 마음이여
그 마음 오늘도
석가모니 드신 연꽃에 응답하는
이재창 박사를 찬양할지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선생과는 40여 년의 시간을 함께했지만, 선생께서 화를 내신 기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로 늘 ‘빙그레’ 웃으시며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대했고, 항상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풀어나갔다.


2. 동리 이재창의 생애

1) 학자로서의 삶

동리 이재창 선생(이하 경칭 생략)은 1930년 3월 4일(음력)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에서 부 이종욱, 모 김정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6 · 25 전쟁 중인 1951년 8월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법정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훗날 그가 ‘사원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학부에서 경제학 전공을 한 것이 큰 원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1953년 3월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은 동 대학 불교학과에 입학했다. 1955년 4월부터 경기여자초급대학(현 경기대학교 전신)에서 3년간의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1957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9년에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서 강사로서 1년간 강의를 담당했고, 숙명여자대학교 정경대학에도 출강하였다.

1960년 4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전임강사로 취임하여 안정적으로 학문연구와 후학 지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조교수로 승진하고 1964년에는 부교수로 승진했다. 1967년에는 〈대한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서 한국불교 발전을 위한 주옥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

 

동국대 동문 일색인 이재창 교수의 가족. 왼쪽부터 외손녀 심수진(일문), 딸 이선용(연영), 이재창 교수, 딸 이현정(언론정보대학원) 씨(2008년).

1968년에는 동국대학교 학생처장을 지냈고 1969년 교수로 승진했다. 1970년 9월에는 미국 아이오와(Iowa) 주립대학교 교환교수로 미국에 건너가 1년간 체류한 후 귀국했다. 1978년 동국대 불교대학장(2년간)에 취임했다. 당시 불교대학에는 불교학과, 인도철학과, 철학과, 승가학과, 불교미술학과 등 5개 학과가 있었는데 조교는 단 1명이었다. 필자는 당시 불교대학 조교로 6개월간 근무하였는데, 그의 부드러운 리더십 아래서 합리적인 행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980년에는 도서관장(2년간) 보직을 맡고 1983년에는 불교문화연구원장에 취임하여 7년 동안 연구원 발전에 힘썼다. 1985년에는 한국불교학회장에 피선되어 약 6년간 불교학 연구 발전의 재도약을 향한 주춧돌을 놓았다. 필자는 이재창 교수의 학회장 임기 후반부에 학회 간사를 맡아 일하기도 하였다.

 

이재창 교수는 1986년, 광복회 이사로 선임되어 3년간 봉사하였다. 1990년에는 동국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냈고 같은 해 11월에는 불교대학원 초대원장에 취임하였다. 그가 이렇게 동국대의 여러 주요 보직을 맡게 된 것은 세상에 대한 안목 및 학자적 역량뿐만 아니라 원만한 인간관계와 합리적인 리더십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1993년 정년퇴임 때까지 교수로서의 33년을 불교학 연구와 강의에 매진했다.

그는 동국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한 후에도 대한불교 천태종 교양대학인 금강불교대학 제2대 학장(1993~2007)에 취임하여 재가자의 불교교육 확대와 향상에 기여하였다. 1996년에는 천태종 연구기관인 ‘천태불교문화연구원’ 원장(1996~2007)에 위촉되었고, 1999년에는 학교법인 금강대학교 이사(1999~2007)로 재임했다. 또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이사로 재임하기도 했다.

2) 배구인으로서의 삶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구기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배구를 좋아하다 보니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반 대표 선수로, 대학교 때는 학과 대표 선수로 불려 나가곤 하였다. 그런데 필자의 스승인 이재창 교수는 배구를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배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배구를 좋아하고 사랑했으며, 배구 경기를 즐겼던 것 같다. 그러면서 배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갔고 국내외의 배구 단체 인사와도 긴밀한 교류를 하면서 배구 심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런 인연이 쌓이면서 배구 심판원으로서 실력을 인정받아, 부교수로 승진했던 1964년 10월 국제배구연맹(Federation of International Volleyball)으로부터 배구 국제심판원 자격을 획득하여 1981년 12월까지 약 17년간 국제심판원으로 활약했다. 필자가 이 교수의 강의를 수강하였을 때도, 국제 배구 경기가 있을 때는 이 교수가 해외 출장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종종 휴강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필자를 비롯한 많은 학생에게 스포츠맨십을 겸비한 배구 국제심판원은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다.

1968년 1월에는 배구 국제심판원 경력을 바탕으로 대한배구협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1975년에는 문교부에서 발간한 《배구》(체육교육자료총서 26)라는 책을 펴냈다. 그 후 1989년도까지 대한배구협회 기획이사, 심판이사, 국제이사 등을 두루 역임했고, 1985년에는 아세아배구연맹(Asian Volleyball Confederation) 심판위원회위원으로 피선되었다. 나아가 1989년에는 대한배구협회 부회장 및 아세아 배구연맹 감사에 피선되어 상당 기간 일하였다. 이처럼 이재창 교수는 국내외의 배구 단체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 봉사하면서 대한민국의 배구 발전에 많은 공헌을 남겼다. 그는 ‘학자로서의 삶’이 본업이었지만, ‘배구인으로서의 삶’도 그에 못지않은 본업이었던 것 같다.


3. 이재창 교수의 학문 세계

1) 연구 성과 개관

이재창 교수의 학문을 대표하는 저술은 1993년에 ‘불교시대사’에서 출간된 《한국불교사원경제연구》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사원경제학’은 바로 이 저서를 통해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저술은 1976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출간한 《고려사원경제의 연구》의 증보판의 성격을 갖는다. 다음 주요 저술은 1994년에 우리출판사에서 펴낸 《한국불교사의 제문제》이다. 여러 학술지에 발표한 한국불교사 관련 논문들을 한데 묶은 단행본이다. 다음으로 1998년 경학사에서 펴낸 《불교 경전의 이해》가 있다. 이 책은 1982년 동국대 불전간행위원회에서 출간한 ‘현대불교신서’시리즈의 하나인 《불교경전개설》의 내용을 증보한 것이다.
공저(共著)로는 《불교의 국가 · 정치사상연구》(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1973), 《불교문화사》(신흥출판사, 1976), 《늘 깨어 있는 사람》(흥사단출판부, 1984), 《동양불교인명사전》(東京 新人物往來社, 1989) 등의 저서가 있다. 또한 번역서로는 1980년 동국대 불전간행위원회에서 펴낸 《법현전》이 있다.
주요 논문은 〈사원노비고〉(해원 황의돈 선생 고희기념 사학논총, 1960) 등 30여 편에 이르고 대부분 《한국불교사원경제연구》와 《한국불교사의 제문제》에 실려 있다.

영어로 쓴 논문으로는 ‘Problems of Labor and Productivity in Buddhist Temples’(Buddhism and the Modern World, 1977), ‘Buddhist Education in Modern Society’(Journal of Sino-Indian Buddhist Studies No. 4, 1984), ‘Contemporary Buddhist Education in Korea’(Journal of Sino-Indian Buddhist Studies No. 5, 1986), ‘Some Suggestions for Successful Buddhist Education’(Journal of Sino-Indian Buddhist Studies No. 7, 1990) 등이 있다.

2) 학문 분야

최근 우리나라에서 불교학문은 크게 불교교학, 불교사학, 응용불교학으로 분류된다. 이재창 교수의 주요 학문 분야는 불교사학이며 그중에서도 한국불교 교단사, 그리고 한국불교 교단경제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불교교학과 응용불교학 분야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이러한 내용을 종합하여 그의 학문을 사원경제사, 한국불교교단사, 경전학, 응용불교학의 네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한국사원경제사

동리 이재창은 한국사원경제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1953년 봄 피난지 부산에서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 관심과 꿈의 결과물이 바로 《한국불교사원경제연구》라는 단행본이다. 이 책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고려 사원경제의 연구〉를 모태로 탄생하였다.

제Ⅰ장은 ‘3국 · 통일신라시대의 사원경제’에 관한 내용이다. 사원전과 사원노비의 발생에 대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의거하여 설명한다.

제Ⅱ장은 고려시대의 사원경제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고려시대에 사원경제가 발전하게 되는 배경과 사원의 조성 과정을 밝히고 사원노비의 노역 분야 및 규모에 대해 언급했다. 사원령이 확대되는 과정을 사급, 시납, 투탁, 매입, 탈점 등으로 체계 있게 정리하여 소개했다. 사원에서 공예품과 주류 등을 생산하고 판매하여 부를 축적함으로써 결국 사원이 타락하게 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사원의 화식업으로서 ‘보(宝)’에 대한 연구, 그리고 여러 종류의 법회와 반승(飯僧)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재창 교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조선에 들어와 숭유억불의 국시(國是)에 의해 불교가 호된 핍박과 수난을 겪게 된 불교 내적인 원인은 바로 고려시대 사원경제의 지나친 발전에 따른 사원의 치부와 타락에 있다고 하겠다. 조선 건국 후 유불(儒佛)이 교체케 된 것은 이러한 불교 내적인 원인 위에 다시 주자학으로 무장한 척불론자들의 득세라는 불교 외적인 원인이 겹쳐진 결과라고 하겠다.

제Ⅲ장은 조선시대 사회의 불교교단에 대한 내용이다. 여기서는 먼저 조선조 불교의 성격과 불교정책에 대해 개괄한다.

그는 조선조의 불교를 한마디로 ‘억압과 수난의 불교’로 정의하면서 “조선조 500년을 통하여 불법은 사태(沙汰)를 당하고 승려는 핍박 · 천대를 받는 법난이 계속되었으며, 위정자들은 숭유척불의 사상에 의하여 철저한 배불정책으로 일관하였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억불 정책은 제3대 왕인 태종(太宗)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그 구체적인 억불책을 다음 일곱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사원의 수를 줄이고 승려를 환속시킴. 둘째, 사원 소유의 토지를 국유로 몰수함. 셋째, 사원노비를 거두어 군정(軍丁)에 충당함. 넷째, 도첩제를 엄하게 함. 다섯째, 종파를 11종에서 7종으로 병합함. 여섯째, 왕사와 국사를 폐함. 일곱째, 능사(陵寺)의 제도를 폐지함.

세종(世宗)은, 비록 만년에는 호불왕이 되었지만, 초기에는 태종보다 더욱 가혹하게 불교를 배척하였다. 즉, 불교 종파를 7종에서 선 · 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내불당을 폐하였으며, 도성 내의 사원을 철폐하고 오직 흥천사와 흥덕사만을 남기고,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할 정도였다.

이재창 교수는 1차 자료인 《태종실록》 《세종실록》 《세조실록》 등의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일본과 한국의 연구서적(2차 자료)을 섭렵하여, 신분적 천대와 경제적 약탈을 견뎌야 했던 눈물겨운 수난의 불교 역사를 더욱 상세하게 밝혀냈다.

양반들을 접대 · 환송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조금만 소홀하면 승려들은 이내 곤장으로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양반 행차가 사찰을 향해 들어갈 때면 승려들 전원이 나가 영접을 하는데, 이때 그들은 땅 위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채 쳐다보지도 못하고, 승려가 직접 그 가마를 메는 경우도 있었다.

이 시기의 사찰은 관용의 메주를 만들어 바쳐야 했고, 산과(山果) · 산채(山菜) 기타 산중의 소산물을 본읍(本邑)에 봉납해야 했으며, 향교 · 서원과 향청의 하급관리, 고용인 등에게까지 산과와 산채를 바치는 것을 관례로 하였으며, 각처의 사대부들이 절을 지날 때마다 지팡이, 짚신, 산과, 산채, 빨랫돌, 다듬잇돌 등 갖가지 물건을 요구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조 불교도들은 법난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갖은 수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도처에서 봉기하여 국난을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 승려들은 도성 출입 금지라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국토 수호를 위해서 남 · 북한산성을 쌓고 그 수비를 담당했다. 산성 수비에 필요한 경비까지도 승려들 스스로 마련하였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승려들은 불법 수호를 위해 자구책을 강구하였고, 사원과는 별도의 사유 동산이나 부동산 등을 갖게 되었다. 승려들은 탁발, 기도, 전지의 개간 등을 통해 수입을 얻는 한편, 미투리 · 제지 등의 수공업, 나아가 누룩 만들기, 품팔이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전답을 마련하고 그것을 절에 헌납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여러 문헌에 근거하여 일목요연하게 밝히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미증유의 법난을 당하여 비참하기 비할 데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던 조선조의 불교가 그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오늘에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후기 승려들의 이러한 눈물겨운 멸사봉공하는 보사(補寺) 행위의 결과이었기에 그들이야말로 진정 위법망구의 보살들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제Ⅳ장은 조선시대 ‘승려 갑계(甲契)’에 관한 내용이다.

이재창 교수는 위기 상황에 내몰린 조선조 말엽의 사원경제를 소생시키기 위한 승려들의 자구책의 하나로 ‘갑계’ 활동에 주목하였다. 갑계란 동갑계(同甲契)라고도 하는 것으로, 사찰 안에 거주하는 같은 나이(동갑)의 승려들이 소정의 곗돈을 내어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조직된 계이다.

조선조 후기 사찰에서는 여러 종류의 계가 있었다. 신도들을 계원으로 하는 계에는 미타계(염불계), 관음계, 지장계, 칠성계 등이 있었고, 스님들만으로 조직된 계로는 갑계, 도종계, 사종계(문중계), 어산계, 서청계(서기직을 맡은 승려들로 구성), 판청계(장례시 상여를 메는 승려들로 구성)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사원전을 매입하고 확대시켜 어려운 사원경제를 극복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갑계였다고 한다.

그는 특히 갑계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범어사와 통도사의 갑계 보사비(補寺碑) 내용을 심층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두 절에서 갑계 활동이 성행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라는 사실과 이전의 보사 내용이 주로 사원의 보수였던 데 비해 당시의 보사 내용은 주로 헌답과 금전적 보시였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하지만 그는 ‘갑계’ 연구를 진행하면서 자료적 한계로 말미암아 갑계의 정확한 발생 시기라든가 일반적인 갑장(甲長)의 존재 여부 등을 명확히 밝힐 수 없는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러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을까. 그는 후학들의 반박과 지적을 기대해 마지않는다고 선포했다. “반박과 지적이 많아져서 졸문(拙文)이 갈기갈기 찢어져 만신창이가 되는 날, 한국사원경제사는 보다 선명히 제모습을 나툴 수 있을 것이다.”라는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선언 속에 표명된 그의 학문적 겸손함이 필자를 숙연하게 만들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학문적 개방성과 겸손함은 “한국사원경제사는 불교사적인 입장, 사학적인 입장, 그리고 경제사적인 입장에서의 연구가 꾸준히 계속되고 집대성된다면 장래가 매우 밝아질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진술 속에도 잘 드러난다.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개방적 태도와 겸손한 자세는 영원한 덕목이 될 것이다.

(2) 한국불교교단사

동리 이재창 교수는 흔히 ‘사원경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민병천 박사의 다음 진술이 그 한 예이다.

선생은 불교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불교와 경제를 접목하여 한국학계에 새로운 장르인 ‘사원경제학’이란 학문을 체계화시키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불교학 전공 이전에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하였고, 아니 그보다 불교사원에 더 강한 애정이 있었기에 한번 시도하고자 한 믿음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선생은 한국불교사원경제학을 체계화시키는 데 선구자가 된 것입니다.

필자가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이재창 교수의 학문 분야는 ‘한국불교사’, 더 좁히면 ‘한국불교교단사’라 할 수 있고, 교단사 가운데서도 ‘교단경제사’에 천착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한국불교교단경제사’ 전공자였던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한국불교사원경제사’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통상 ‘사원경제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한국불교사의 제문제》(1994)

1994년에 우리출판사에서 펴낸 《한국불교사의 제문제》라는 단행본의 내용을 보면 그의 전공을 금방 알 수 있다.

 

여기에 수록된 논문을 살펴보면, 신라시대에 관한 것이 1편이다. 〈중국 · 신라의 구법승과 간다라〉가 바로 그것이다. 고려시대에 관한 논문은 4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고려불교의 승과 · 승록사제도〉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 개립〉 〈고려후기 전통선의 동태〉 〈고려시대 승려들의 호국활동〉 등이다. 여말선초에 관한 논문은 〈여말선초의 대일관계와 고려대장경〉 1편이다.

조선시대에 관한 논문은 〈조선시대 초기의 불교정책〉과 〈조선시대 선사의 염불관〉 그리고 〈조선시대 불교의 주체적 전개〉 등 3편이다. 최근세에 관한 것으로는 〈한국불교사에 나타난 사찰 및 종단의 통폐합〉 〈일제하의 한국불교〉 〈밀교사상의 현대적 의의와 전개〉 〈한국불교 교단론〉 등 4편이다.

이 중에는 물론 〈조선시대 선사의 염불관〉 등과 같은 불교사상 관련 논문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이 불교 교단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학문 분야는 ‘한국불교교단사’라고 해도 무방할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가 ‘한국불교교단사’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이재창 교수는 1960년대 말부터 한국사를 전공하는 일반 사학자들 가운데 다수가 한국불교사 연구에 뛰어드는 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불교의 교리적 · 사상적인 연구가 중심이었던 한국불교학계에 일반 사학자들의 ‘사회적 측면’의 연구가 새바람을 일으켜 한국 불교사학 발전에 이바지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불교 내적인 특수성과 전통을 소홀히하는, 지나치게 일반적인 역사학적 접근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였던 것 같다. 다음의 진술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한국불교사 연구에 관한 이와 같은 긍정적인 점이 있는 반면 사회적 측면의 연구가 지나치게 사회 쪽에 포인트를 두는 경우도 있게 되어 불교 내적인 특수성을 고려에 넣지 않음으로 인한 문제점도 없지 않았던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재창 교수가 교리사나 사상사보다도 교단사에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불교 내부적 관점에서 일반 사학자들의 한계와 문제점을 보완하고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한국불교사의 제문제》를 읽으면서 가슴 뭉클했던 경험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특히 〈중국 · 신라의 구법승과 간다라〉와 〈여말선초의 대일관계와 고려대장경〉을 읽으며 뭉클했던 것 같다. 논문을 읽으면서 가슴 뭉클한 경험을 한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그는 〈중국 · 신라의 구법승과 간다라〉를 쓰기 위해 동국대학교 개교 80주년 기념 간다라 학술조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구법승들의 기행문을 참고하면서 현지를 답사하였다. 답사 과정에서 천 수백 년 전의 구법승들이 보았던 간다라의 불교유적이 너무도 많이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에 매우 마음 아파했던 것 같다. 그러한 느낌이 논문 속에 용해되어 있어서 필자로 하여금 가슴 뭉클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간다라가 갖는 불교사적인 의의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간다라는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라는 점이고, 둘째, 간다라는 지리적으로 불교 동점의 길목이어서 구법승들의 발자취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 셋째, 2세기 이후 한동안 세계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특히 두 번째 사실을 유념하면서 《사기》 《법현전》 《대당서역기》 《낙양가람기》 등의 여러 문헌을 인용하며 험난하기 그지없는 가혹한 구법의 길에 대해 상당히 상세하게 밝혔다. 다음은 그가 인용한 《법현전》의 한 부분이다.

사하(沙河)는 원귀와 열풍이 심하여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위로는 나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망망하여 가야 할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 수가 없고 오직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죽은 사람의 마른 뼈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 줄 뿐이다.

이러한 인용문 등을 읽으면서 필자는 죽음을 각오하고 험하고도 험한 길을 떠난 구법승들의 굳건한 구도 의지와 뜨거운 열정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말선초의 대일관계와 고려대장경〉은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로부터 조선 세종(世宗) 때에 이르는 약 100년간에 걸친 고려 ·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이 연구의 초점은 고려 충정왕 때부터 심히 창궐했던 왜구가 무슨 이유로 조선조 세종 이전에는 현격히 감소했는가 하는 점을 밝히는 데 있다. 선생님은 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왜구가 얼마나 창궐하였는가를 여러 문헌에 근거하여 밝히고 있는데,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끊임없이 왜구가 우리나라를 괴롭히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왜구의 출몰이 현격히 줄어든 것은 결국 일본이 ‘고려대장경’을 청구한 때문이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필자는 일본이 고려대장경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이재창 교수는 한국불교사 또는 교단사에 관해서도 매우 흥미롭고 독창성 있는 연구업적을 남겨 놓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불교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의 다음 당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의 한국불교사 연구는 불교사학자와 일반 국사학자의 연구가 상호보완적이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불교사학자는 사회 쪽에 시선을 둘 것을 잊지 말고, 국사학자는 불교 내적인 데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한자리에서 격의 없는 대화와 진지한 토론의 기회 등을 자주 갖는다면 한국불교사학의 앞날은 현저한 발전을 이룩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3) 경전학

필자의 학부 시절에는 이재창 교수의 《불교경전개설》은 매우 유용하고 소중한 불교 경전의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동국대학교는 물론 주요 사찰의 강원이나 교양대학에서 불교 경전 전반에 대한 개괄적 이해를 돕는 데 이 책은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것으로 안다.

1982년에 출간된 《불교경전개설》은 문고본이었기 때문에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하기 위해 그는 1998년에 《불교 경전의 이해》라는 증보판을 펴냈다.

이 책은 크게 총론과 각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Ⅰ편 총론에서는 불교경전에 대한 기초적이고 전반적인 사항을 다루고, 제Ⅱ편 각론에서는 원시경전 18종류와 대승경전 29종류를 간략하되 심도 있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흔히 불교성전과 불교경전을 같은 의미로 혼용해 쓰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엄밀하게 말해서 성전은 넓은 의미이고 경전은 좁은 의미로서, 경전은 성전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경전(經典)을 “불교의 교조인 석가세존의 교설을 문자화한 경문(經文)”이라고 정의했다. 이에 반해 성전(聖典)은 “경전은 물론 후대 불교도의 저술, 불교의 역사 · 전기서, 기타 불교에 관계된 일체의 저술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서, 성전은 불교 연구에 관한 자료 문헌을 모두 망라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성전은 인도, 중국, 한국을 비롯한 불교가 전파된 여러 나라에 걸쳐서 2,600여 년의 역사를 통해 점차 증가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그 수량은 참으로 엄청나다.

이처럼 방대한 성전 가운데서도 경전은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예부터 그 분량이 5,000여 권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경전에 관한 연구는 불교학의 기초 분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이재창 교수는 이러한 ‘불교학의 기초 분야’를 ‘경전학’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이 경전학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으로, ①부질(部帙)의 정리 ②내용의 분류 ③성립사의 연구 ④범어 · 팔리어 · 서장어 및 한역본의 비교 연구 ⑤중국에서의 전역(傳譯)과 주석서에 관한 연구 등을 제시했다.

특히 그는 ‘경전의 권위’ 문제에 대해서 불교인들이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 언급한바, 불교인들이 필히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본다. 경전의 권위 문제라 하는 것은 현존하는 경전이 석존의 가르침을 원래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첨가되어 증광된 것이라는 주장(이른바 加上說)에서 비롯된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후세 사람들이 창작한 동기와 사정’ 그리고 ‘작품의 성질과 내용’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볼 때 경전의 권위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설혹 경문(經文)의 내용이 문학적이어서 객관적 사실이 아닌 경우가 있다거나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지옥 또는 극락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하더라도, 굳이 그 사실 여부를 따질 필요는 없다. 이재창은 경전은 그러한 것들을 아이디어로 한 종교적 이념의 산물이기에 해석 여하에 따라 영원한 생명력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4) 응용불교학

 

《불교경전의 이해》(1998)
《현대사회와 불교》(1981)

《한국불교사원경제》의 제5장은 그 성격과 내용이 앞의 4장들과 사뭇 다르다. 제5장의 제목은 〈불교의 사회 · 경제관〉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사회 · 경제사상이다. 이 주제는 엄격하게 말해서 ‘한국불교사원경제’에 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없다. 불교의 기본적인 사회관과 경제관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재창 교수는 한국불교의 사원경제도 근본적으로는 불교의 사회 · 경제사상으로부터 연원한다고 보고 마지막 장에 이 내용을 포함시켰다고 생각된다.

 

〈불교의 사회 · 경제관〉은 서언, 불교의 사회관, 불교의 경제관, 결어 등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핵심 내용은 제목 그대로 불교의 사회관, 불교의 경제관이다. ‘불교의 사회관’에는 (1) 불교 사회관의 기본이념 (2) 사회 제관계의 윤리 (3) 불교적 이상사회론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고 ‘불교의 경제관’에는 (1) 불교경제관의 기본정신 (2) 불교의 교단경제 (3) 불교에서 보는 경제 각론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경제 각론에서는 생산론, 분배론, 화폐론, 재의 효용론, 직업론 등이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주제와 내용을 볼 때 이 논문은 ‘불교사학’이 아니라 ‘응용불교학’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굳이 이것을 ‘한국사원경제사’와 분리시켜 언급하는 것은 기실 필자의 전공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전공분야는 응용불교학으로서 세부적으로 ‘불교사회사상’ 또는 ‘불교사회경제사상’이다. 그래서 학부에서는 주로 〈불교사회경제사상〉을 강의하고, 대학원에서는 〈불교사회학〉과 〈불교경제학〉을 강의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불교의 사회 · 경제관〉이라는 이재창 교수의 논문은 필자의 학문적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필자의 졸저 《불교사회경제사상》은 그의 논문에 기초하여 조금 더 보충하고 범위를 확장한 것에 불과하다. 선생께 늘 감사드린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리 이재창 교수(1930~2017)는 어렸을 적부터 불교적 환경에서 성장하여 불교와 평생을 함께하였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그는 학생들은 물론 모든 사람에게 항상 온화한 미소와 따뜻한 말씨로써 대하였다. 그는 거의 전 생애를 동국대에 봉직하면서 연구와 교육은 물론, 학생처장, 불교대학장, 도서관장, 불교문화연구원장, 대학원장, 불교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치면서 학교 발전과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한국불교학회’의 창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학회의 기초를 다졌고, 학회 회장으로 수년간 재임하면서 학회 발전을 견인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학자의 삶을 살았지만, 배구인의 삶도 그 비중이 적지 않다. 배구 국제심판, 대한배구협회 이사(기획이사, 심판이사, 국제이사), 아세아배구연맹 심판위원회 위원, 대한배구협회 부회장, 아세아배구연맹 감사 등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배구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동리 이재창의 주 전공 분야는 ‘한국사원경제사’이지만 넓게는 ‘한국불교사(불교교단사)’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경전학’의 기초를 놓고 ‘응용불교학(불교사회경재사상)’의 새 지평을 열어 보였다. 필자는 단지 그 가운데 한 분야인 ‘불교사회사상’ 연구에 천착하고 있지만 늘 선생께 부끄러울 뿐이다. ■

 

박경준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 박사. 주요 논문으로 〈불교적 관점에서 본 자연〉 〈노동소외 극복을 위한 불교적 접근〉 〈불교사상으로 본 사회적 실천〉 등과, 저서로 《민중불교의 탐구》(공저) 《원시불교 사상론》 《불교사회경제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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