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교학 연구와 복원에 평생을 바치다

1. 효당의 생애

1) 개요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1904~1979)

효당 최범술(曉堂 崔凡述, 1904~1979)은 불교계의 원로로 독립 운동가이며 교육자로, 또 사천군에서 제헌 의원을 지낸 정치가이며 현대 한국 차도(茶道)의 중흥조로 알려졌다. 원래 젊은 시절 이름은 영환(英煥), 당호는 금봉(錦峯), 법호는 효당(曉堂)이다. 그는 1904년 음력 5월 26일 진시에 경남 사천군 서포면 밤섬(栗浦)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국내외에서 동지들과 함께 열렬한 항일투쟁을 하다가 일제 총검하에 무려 수십 회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전한다.

해방이 되어서는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대한불교단체 대표에 피임되었고, 이 해에 해인사 주지가 되었으며 또 국민대학을 창설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948년 5월 10일 삼천포 · 사천 지역에서 출마하여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뒤 1951년 해인중고등학교를 창설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국민대학에서 분리된 해인대학을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만년에는 오로지 불교인으로서, 평생 전념해온 원효 성사의 사상 및 그 교학의 복원과 연구에 전념하여 도제양성에 힘을 기울였고, 또한 잊혀가던 차문화를 중흥시켜 현대 차도(茶道)의 중흥조로 불렸다.
1969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1979년 7월 10일 서울에서 입적했다. 그리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 10월 9일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원효, 의천, 초의, 만해 등에 관심이 많았으며, 〈해인사사간루판목록〉 〈원효대사반야심경복원소〉 〈십문화쟁론복원을 위한 수집자료〉 등의 논문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등의 저서가 있다. 또 《한용운전집》(신구문화사, 1973)과 《대각국사문집》(건국대학교출판부, 1974)을 간행하였다.
특히 1973년에 단행본으로 한국 최초의 차도개론서인 《한국의 차도》를 저술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1939년 문일평의 《호암전집(湖岩全集)》 2권에 실린 〈차고사(茶故事)〉와 같은 저술이 있었지만, 내용이 소략한 한 개의 장(章)에 불과했다. 이 《한국의 차도》는 다시 1975년에 보련각에서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상업적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출판된 이래 많은 사람에게 차도의 입문서가 되었고, 구성과 내용에서 그 후 쏟아져 나온 많은 관련 서적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특히 두드러진 점은 효당이 처음으로 초의와 그의 저술인 《동차송》을 번역하여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한국 근대 차도의 중흥조로 자리매김을 시킨 점이다. 또, 1977년 효당이 결성시킨 한국 최초의 전국적인 차 모임인 ‘한국차도회’는 오늘날 여러 차와 관련된 단체들의 모체가 되었다.

원래 효당 최범술은 젊은 시절부터 일제 강점기의 시대 상황 속에서 불교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당시 시대조류들에 속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고 교유하였다. 이를 통하여 당시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 참여와 불교의 수행, 교학 연구를 하며 점차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스스로의 종교적 가치의 회향처로 삼았다. 이것은 효당을 궁극적으로 원효 교학의 복원에 매진하게 했다.

원효 교학 복원의 배경으로는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불교의 ‘보편성’과 신라의 지역적 ‘특수성’인 낭가적(郞家的)인 전통과의 접점에 원효를 두고서 그 사상적 가치의 주체성을 찾는 효당의 국학적인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경험적 토대 위에 기초한 원효 교학의 복원이 가지는 ‘국학(國學)’으로서 성격은 아쉽게도 그의 생전에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기존의 효당의 제자들이나 불교계와 달리 효당 문집의 〈간행사〉에서 편자가 효당의 복원작업을 ‘국학’으로 설명한 것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또, 동시에 이러한 복원연구의 보편성은 그가 가졌던 불교관이 무엇인지에 기초한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10대였던 해인사 시절에 겪은 만해의 강연에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에 근거한 것으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만년에 그가 던진 물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2) 원효 연구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효당의 원효 복원작업은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에서 보편성을 의미하는 불교와 지역적으로 특수성을 가진 당시 신라(낭가사상)의 접점에 원효를 두고서 이를 기반으로 하여 국학적인 모색을 도모함에 있었다. 그러한 효당의 원효 교학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 연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당시 연세대 사학과 졸업반으로 효당에게 논문지도를 받던 원화(元和) 채정복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간행하던 《동방학지》에 〈해인사사간루판목록〉(1970년 《동방학지》 11집)과 〈원효성사 반야심경복원소〉(1971년 《동방학지》 12집)가 실리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를 계기로 당시 연세대 사학과의 교수들이었던 황원구, 이종영, 고성환 등이 다솔사를 방문하여 효당의 여러 연구물을 살펴보고 투고(投稿)를 논의하였다. 뒤이어 효당은 한국사상사의 대표적 연구자인 홍이섭 교수와도 교유하여 김해 〈남강 조정환 선생 구국기적비(南崗 曺正煥先生 救國紀蹟碑)〉를 건립할 때 비문을 촉탁하였다. 또한 당시 연세대 신학과 교수로 도서관장이었던 한태동도 1971년경에 다솔사를 방문하였다. 이후 효당은 연세대의 《동방학지》와 외솔회의 《나라사랑》 등에 활발하게 기고하였으며 《한국의 차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등의 여러 단행본도 연이어 출간하였다.

특히 이처럼 효당과 교유한 인사들 중에서 한태동 교수는 그 부친인 송계(松溪) 한진교 선생이 젊은 시절의 효당과 연관성이 깊은 상해 임정의 요인이었던 인연으로, 1937년에 해인사에서 인간(印刊)한 《고려대장경》을 1976년에 연세대학교에 수탁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효당이 1973년에 건국대 이영무 교수를 통해 알려진 원효의 《판비량론》의 복원에서 수학적인 난수표 대조법을 응용한 연구가 있었다고 한태동 교수는 회고하였다. 이는 불교해석학에 관한 효당의 고민이 담긴 그 무렵의 노트 필기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효당의 원효 연구는 입적 후인 1987년 〈《십문화쟁론》 복원을 위한 수집자료〉로 화쟁 연구의 일부분이 정리되어 발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생전의 효당에게 원효 연구에 관한 영향을 받은 경우는 서울대 박종홍 교수, 일본 대정대 이만용 박사와 고려대 김충렬 교수 등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광명학원 제1회 졸업기념 사진. 앞줄 오른쪽 3번째가 효당, 4번째가 김동리(교사), 왼쪽 끝이 김동리 첫 부인


2. 효당의 불교 연구

1) 수학기(修學期)

(1) 불타관

효당은 20대 중반의 유학 시절인 1928년에 《금강저(金剛杵)》에 〈불타의 면영(面影)〉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당시 효당은 다양한 사회사상과 과학적 지식을 섭렵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수정주의와 고행주의를 버리고 제행무상의 도리 속에서 자기애를 버린 부처가 깨달은 무아의 경지는 결코 개성을 망각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개성을 발휘시킨 것으로 본 것이었다. 즉, 시간적으로 상주(常住), 공간적으로 유일(唯一), 시공간을 지배하는 주재(主宰)가 실체로서 우리의 육체나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이 무아를 통하여 묘유한 실상의 진면목을 보게 되므로 스스로 실재한 개성을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고 하였다. 또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현실을 떠난 무단적 공상이 아니며, 만유(萬有)의 이법(理法)인 ‘무상’을 설하는 부처를 신봉한다고 인식하였다. 

(2) 계율관

이러한 인식 속에서 효당은 불교의 계율을 ‘가름의 결’로 보았다. 효당은 불교를 승과 속의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 승속의 구분은 본질이 아닌 하나의 용으로 여겼다. 그렇기에 효당은 계행을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흘러나오는 흐름으로 보았으며 그 흐름은 스스로의 ‘결’에 따른다고 하였다. 이는 팔정도에서 시작된 계와 그에 따른 행동 규범인 율의 본질을 계에서 정으로, 정에서 혜로, 혜에서 해탈로 가는 수행의 흐름, 즉 ‘결’로 본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선불과 후불이 서로 상속하여 계승한다. 효당에게 원효는 이러한 흐름(결)을 계승한 정풍적(正風的)인 존재였다고 정의하였다. 그래서 원효, 부설, 진묵 등이 그 자증(自證)으로부터 나온 신념의 고함이 비록 무계행(無戒行)이라도 반야에는 무방(無妨)이라서 보현행원의 개차(開遮)가 상징된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법화경》의 〈수학무학인기품〉에 의하면 라훌라가 받은 수기도 먼 후세에 부처의 큰아들(長子)이 되어서 성불함을 이른다. 이는 후세불 또한 사회적 존재임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효당의 이러한 자연스러운 계행에 대한 견해는 차도의 범절(凡節)로도 이어진다. 이것은 ‘멋’있는 생활이다. 즉 계행이 온전히 체화되어 사회화가 되는 순간인 것이다.

이러한 효당의 계율관은 그가 가진 사회관이었고 동시에 전통적인 풍류도들의 낭가사상(郎家思想) 속에서 대승보살의 도리를 설명하였다. 그 표현이 바로 ‘가름의 결’이었다. 그가 생각한 대승적인 지계자(持戒者)는 ‘스스로 결이 고운 사람’이었다. 효당은 이러한 자각을 이미 20대 중반의 일본 유학 시절에 잡지에 기고하였다.

2) 사회활동기(下化衆生)

(1) 단행본

효당은 뒤에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보련각, 1974년)에서 지계(持戒)가 사회화되어 회향되는 경지를 직접 헌향게로써 풀어 설명하였다.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광명운대(光明雲臺) 주변법계(周遍法界) 공양시방(供養十方) 삼보자존전(三寶慈尊前)”에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계에서 정, 정에서 혜로 이어지는 삼학이 해탈로 결을 따라 이어져서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케 하는 해탈지견으로 삼보에 회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사회성을 효당은 원효가 말하는 ‘일심(一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 진여인 대사회성으로 유(有) · 무(無)의 양극단을 버린다고 하였다. 또 이것이 ‘중도(中道)’라고 하였다. 이것은 효당에게 궁극적으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보살도였고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인 군자의 도리였다. 그래서 효당은 보살이란 큰 어른이라고 하였으며 일관되게 원효를 대승보살로 평생토록 존숭하였다.

이러한 효당에게 스승인 만해의 존재는 현현(顯現)보살이었다. 특히 만해가 말하는 ‘님’의 의미를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대승의 뜻으로 여겼다. 여기서의 대승이란 바로 진여, 즉 ‘대사회성’이다. 특히 효당은 만년에 이르러 기고문을 통해 이것을 먼 궁극의 진리가 아닌 ‘내가 사람이다’라고 하는 확실한 자성(自性)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젊은 시절의 효당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부처님이건 하느님이건 또한 그 누구에게도 동정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만해가 말했던 그 ‘사람’으로서의 ‘자각’이었다. 즉 효당이 불성이나 여래장과 같은 표현을 굳이 강조하지 않았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냥 부처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자각’이었다. 부처의 전제는 중생의 존재이지만 사람은 그냥 ‘사람’ 그 자체인 것이다. 그 사람의 ‘삶’이 사회적이기에 대승인 것이다. 그런데 그 사회성이 각각 부처와 중생으로 분리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효당은 대승의 진리가 ‘일심’이라고 말하였다.

(2) 기고문

이처럼 효당의 삶과 불교를 일관하는 주제는 불교의 대사회성이었고 그것은 끊임없는 자각에 있었다. 사람다운 자각의 의미는 당연히 사회 속에서 성취되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승속의 이원론에 자각의 의미를 구분 짓지 않았다. 효당의 이러한 견해는 그가 만년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친 다양한 주제의 기고문을 통해서 표현되는 등, 사회에 대한 불교의 동질성을 버리지 않았다.

한 가지 예로 들자면 효당은 그가 만년이던 1976년 《법륜》 83집에 〈전국불교도에게 고함〉을 기고하여 우리 불교의 맥을 의례에 기초한 밀교적 전통에 두고 여러 전통이 섭수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특정한 맥에 한국불교가 치우침을 경계하였던 점도 불교가 가지는 사회성을 중요시하던 그러한 시각 때문이었다. 그는 수행의 전통이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산중에 고립된 불교를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보지 않았다.

(3) 문집자료의 정리

① 《한용운전집》 발간

효당을 비롯한 만당의 당원들이 최초로 문집 간행의 뜻을 모은 것은 1945년 5월 만해의 1주기를 위해서 모인 자리였다. 그러다가 만해의 대기(大朞)를 끝낸 1948년 5월에 만해 한용운전집 간행추진회를 조직하는 데 뜻을 모으게 되었다. 그때 모인 사람은 효당을 비롯하여 박광, 박영희, 박근섭, 김법린, 김적음, 허영호, 장도환, 김관호, 박윤진, 김용담 등이었다. 이들은 각각 자료를 수집하였고, 이렇게 모은 유고는 박광이 보관하였으나 6 · 25 동란으로 간행작업은 중지되었다.

그 뒤 전쟁이 끝나고 조지훈, 문영빈을 비롯하여 당시 주로 고려대 학생들이었던 인권환, 박노준, 서정기, 이화형, 이기서, 변영림 등이 자료를 수집하고 임종국이 편집을 기획하였으나, 박광으로부터 유고를 건네받은 효당을 둘러싼 정치적 사건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오랫동안 지체되었다. 그러다가 민동선, 김관호, 문후근, 이철우, 인권환, 박노준, 이화형, 조위규 등과 효당이 제3차 간행위원회를 조직하여 1973년에 신구문화사에서 출간하게 되었다. 특히 효당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만해의 연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이를 1971년 《나라사랑》2집에 먼저 발표하였고, 다시 보완하여 만해 전집에 이를 수록하였다.

② 《대각국사문집》의 발견

효당은 1937년에 고려국간장경(高麗國刊藏經)의 인경불사를 동감(董監)하던 중에 해인사에 소장된 국간장경(國刊藏經) 이외에 사간장경판의 모든 판본을 한 장도 빠짐없이 인간(印刊)했다. 그런 후 잡다한 부분을 정리하고 결책(結冊)하여 그 판본의 서적명목(書籍名目) · 권차(卷次) · 재차(第次) · 판상(板狀) · 판형(板型)과 결책된 책자의 크기에 관한 것 등을 자세히 조사하던 중에 대각국사의 문집을 발견하였다. 이후 그 존재를 처음으로 소개한 것이 1970년의 《동방학지》 제11집의 〈해인사사간루판목록(海印寺寺刊鏤板目錄)〉이었다.

……天(自1卷至12卷) · 地(自13卷至20卷) 2책은 의천 자신이 撰한 것으로서 序 · 記 · 表 · 狀 · 疏文 · 詩 등으로 되어 있다. 일반은 이것을 다음 있는 人字冊의 外集에 對稱하여 內輯이라고도 한다. 仁宗 4년에 쓴 金富軾銘가운데 〈生前有以其文寫而刻之者取其板焚之〉라 함을 보아 이 《大覺國師文集》의 편찬에 있어 적어도 兩次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현 체제로서는 제20권인데 《大覺國師文集》 제23이라는 일장이 보이는바, 이 권 제23이라는 문제되는 張文의 내용이 今外集 제4권 4정의 希仲書와 同한 것을 보면 원래 이 문집의 편찬이 現行本과 旧本이 달랐던 것이며 目次도 相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別表와 如히 仝外集人字冊卷次12 이하 부분도 역시 현행본 이외의 구본이였던 것을 말하는 좋은 証件이라 한다.

특히 여기서 효당이 주목한 부분은 다음과 같은 원효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丁 : 大覺國師文獻에 나타난
1. 圓宗文類十二卷中第二〔題和諍論下〕에서 指摘된 同異·眞俗·色空·探幽와 罔象
2. 祭曉聖文에서 和百家異諍之端을 主로 한 文證戊 : 甲類型文獻中의 中斷된 곳의 推定과 이에 대한 空白部分을 考證 補完한다. 己 : 戊의 決定結果에서 聯關된 內容으로부터 乙類型과 丙類型의 內容部分을 檢討한 후에 다시 丙類型과 丁類型이 뜻하고 있는 論旨에 契合되게 先後部分을 體系的으로 編成키로 한다.

3) 원효교학과 국학

(1) 복원의 방법

앞서 부분적으로 서술한 바와 같이 전체 효당의 복원작업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 논문들의 발표된 순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해인사사간루판목록〉 《동방학지》 11집, 1970년
②〈원효성사반야심경복원소〉 《동방학지》 12집, 1971년
③〈판비량론〉 복원 부분 《건국대학교학술지》 15집, 1973년
④〈《십문화쟁론》 복원을 위한 수집자료〉 《원효연구론총-그 철학과 인간의 모든 것》 1987년

여기서 열거된 효당의 복원작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서로 연관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첫째, 효당이 《대각국사문집》에서 주목한 부분은 ‘2. 제효성문(〈祭芬皇寺曉聖文〉)에서 화백가이쟁지단(和百家異諍之端)을 주로 한 문증무(文證戊)’에서 원효에 대한 고려시대 의천의 평가였다.

이를테면 義天의 祭曉聖文에서 〈天台九旬之說但尙理觀〉이라 한 것을 보면, 天台宗祖의 三大部인 《摩詞止觀》 30권, 《法華玄義》 30권, 《法華文句》 30권이 설하고 있는 一心三觀 三千諸法 一色一香 無非中道는 단지 理觀만 崇尙한 데 대하여 그 자신은 內心으로 未洽하였던 것을 알 수 있고, 그 반면에 元曉聖師에 대한 敬仰의 표시로서는 ‘天幸으로 일찍 어려서부터 佛乘을 생각하여 모든 先哲의 學德을 歷觀하여도 元曉聖師의 右에 갈 스님이 없다’는 것을 强調하면서 ‘百家의 異諍을 和하여 釋迦世尊一代敎旨의 至公한 論을 얻고 있다’고 말하는 具體的인 이유를 明示하고 있다.

둘째, 이를 통해서 ‘1. 원중문류십이권중제이(圓宗文類十二卷中第二)〔제화쟁론하(題和諍論下)〕에서 지적된 동이(同異) · 진속(眞俗) · 색공(色空) · 탐유(探幽)와 망상(罔象)’을 고려시대 의천이 원효의 화쟁에 대해서 파악한 해석의 구조로 보았다. 이에 대하여 효당 스스로 다음과 같이 복원작업에서 그 연관성을 두었다.

이에 나는 年來로 元曉聖師의 敎學에 對한 그 一端으로써 元曉聖師의 撰述하신 論疏等에 對한 復元佛事를 試圖하였던 바 그의 百餘種目中多少의 原書가 復元成就되었고 그의 代表的著論인 《十門和諍論》 等의 復元과 함께《般若心經疏》 等의 復元이 이제 論述하는 바와 같이 成就된 것을 自足히 여기며 ……(중략)…… 勝緣으로 안다. 

즉, 시간상으로 발표된 순서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원중문류십이권중제이〔제화쟁론하〕에서 지적된 동이 · 진속 · 색공 · 탐유와 망상’에 상응하는) 〈원효성사반야심경복원소〉를 (‘제효성문(〈제분황사효성문〉)에서 화백가이쟁지단을 주로 한 문증무’에 상응하는) 《십문화쟁론》의 복원을 위한 전제로 두었다.
그런데 효당의 〈원효성사반야심경복원소〉의 기술 순서와 〈《십문화쟁론》 복원을 위한 수집자료〉의 목차는 모두 아래의 밑줄을 친 부분과 같이 사학적(史學的)인 검토를 전제로 하여 교학을 복원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 〈원효성사반야심경복원소〉의 기술 차례
1. 聖敎量 [般若心經의 聖典成立史觀(史的考察)]
2. 漢譯된 異本과 譯主와 註疏諸家의 略記
3. 特히 元曉聖師敎旨를 主로 한 經意의 槪要
4. 今經科目의 施設

○ 〈《십문화쟁론》 복원을 위한 수집자료〉의 목차
1. 聖師傳記 
2. 撰述書銘目錄
3. 現存部分에 索出된 諸文獻目錄

(2) 국학의 전제

이처럼 효당은 원효전기와 저술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십문화쟁론》 복원을 위한 수집자료〉의 시작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스스로 집필의 방침인 ‘1. 충실한 조사’와 ‘2. 정확한 보고’를 전제로 목차의 순서를 ‘1. 성사전기’ ‘2. 찬술서명목록’ ‘3. 현존 부분에 색출된 제 문헌목록’으로 하였다. 그러나 효당의 복원작업에서는 아쉽게도 원효전기의 연구가 별개의 항목으로는 진행되지 못하였다. 다만 복원작업을 위한 전제로 모색된 점이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 〈《십문화쟁론》 복원을 위한 수집자료〉
“……丙 : 誓幢和尙碑銘中에 보이는 十門和諍論序文이 指示하는 雨驟空空之論雲奔或言我是言他不是或說我然他不然과 憎有愛空의 諍을 會하여 通融함으로써 十門和諍論이라 名稱함이라는 데 依據하여 發現된 部分……”

또 직접적으로 원효에 대한 기록은 아니지만 원효와 관련된 인물의 행장(行狀)도 부분적으로 검토되었다.

○〈해인사사간루판목록〉
김부식이 찬한 《대각국사비문》의 반야공관 관련 부분.

특히, 이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효당이 의도한 원효복원의 궁극적 목표였던 《십문화쟁론》에서 성사 전기의 사학적 검토를 첫 번째 단계로 고려한 점을 볼 때, 불교라고 하는 보편적 진리에서 원효가 가지는 사상사적 특수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즉, 사학적 검토를 통하여 반야공관(般若空觀)을 원효교학 복원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관점에서 주목할 문제는 원효가 종교적 전이(轉移)인 오도(悟道)를 일으킨 동굴 무덤이 그가 수행한 혈사(穴寺)와 관계가 깊은 점이다.

이에 대하여 《서당화상비》를 살펴보면 “……□而□□ 大師神測未形 知機復遠 □□□歸 移居穴寺 緣以神廟非見神不喜 意欲和光 故白日……”라고 하였다. 이 밑줄 친 부분은 중국의 정사(正史)에서 신라가 일월(日月)을 숭배한 여러 기록에 비추어 보면 ‘……원효가 혈사(穴寺)로 옮겼는데, 신묘(神廟)가 멀지 않은 이유로 신(神)이 기뻐하지 않음을 보고 뜻을 조화로운 빛에 두고서 그런고로 밝은 태양에……’라고 직역할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원효가 도당유학(渡唐遊學)을 시도하기 전일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대부분 견해는 ‘……신묘가 멀지 않고 신이 기뻐하지 않음을 보고, 또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뜻이 있어서……’처럼 ‘백일(白日)’은 빼고 ‘화광동진’으로만 잘못 해석하고 있다.

즉, 비슷한 구조의 장소이지만, 성스러운 혈사와는 정반대의 속된 고분(古墳)에서 원효는 성속(聖俗)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오도(悟道)를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과적으로 원효의 깨달음이 자생적(自生的)인 구조로 성과 속이 충돌하여 소멸된 삼계유심(三界唯心)의 반야공관이라는 점을 추정케 한다. 이는 효당이 복원작업의 출발점으로 《반야심경복원소》를 삼은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와 같은 이 땅에서의 자생적 깨달음은 사상사적(思想史的)으로 한국학의 출발점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기에 중국의 윤색(潤色)인 해골 물과 같은 사족은 본질을 도리어 흐리게 한다.

원래 이러한 자생적인 종교적 각성의 경험은 원효처럼 문무왕과 친인척 관계로서 동시대를 산 김유신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에서도 보인다. 그가 17세 때 신령한 노인인 난승(難勝)으로부터 화랑으로서 깨달음을 얻은 중악(中嶽)의 석굴(石窟)과 고구려 원정을 위해서 기도를 한 현고잠(懸鼓岑)의 수사(岫寺)는 원효의 혈사와 유사한 성격의 종교적인 수행이나 제의의 장소로 볼 수 있다.

 

다솔사 주지 시절의 젊은 효당(1930년대)


3. 효당의 불교관

1)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우리의 사상사적 특수성과 접점이 되는 효당의 보편적인 불교관에 대한 물음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말로 귀결된다. 이것은 만해가 해인사 강연에서 ‘부처나 신에게 동정받는 사람이 되지 마라’고 한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효당은 이 물음의 이유로 삶에 대한 방향감각을 들었다. 그러나 이에 불교가 신을 말하지 않음은 숙명론이 아닌 중도를 그 해답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불교의 종교 생활을 행원(行願)의 형식을 빌려서 설명하였다. 또 이 종교 생활의 지극한 신심이 귀명(歸命)이며 그 지향처는 일심(一心)으로 대자대비한 삼보를 향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삼보의 불은 광명(光明)함을 말함이고, 법은 정대(正大)함을 이르며, 승은 화합(和合)이다.

 

《한국의 차도》(1973)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1973)

일심이란 ‘한마음’이 아닌 우주와 사회에 대한 실체인식인 공정성(公正性)이나 혹은 스스로의 대사회성(大社會性)으로, 이것이 없으면 유(有) · 무(無)의 양극단에 빠진다고 설명하였다. 이를 《대승기신론소》에서 원효가 말한 “믿음의 원리는 알뜰한 데 있다(信理實有)”는 말로써 설명하였다. 이 알뜰함은 진리와 방편(門)을 의심하지 말고 수지행(修止行)과 관상(觀相)으로 의심하지 않는 데 있다. 여기서 지(止)는 방편이고 관(觀)은 목적이 된다. 이러한 지관의 수련으로 문(門)에 대한 의심을 풀어야 함을 말하였다.

또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도 대생명의 자비를 깨친 이에게 귀의하는 것으로 이는 “나는 사람이다”라는 대사회성의 자각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효당은 잡념을 없애고 업장을 소멸하기 위해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은 만인에게 평등한 진리로 ‘공상역공(空相亦空)’이고, 근기가 낮은 중생도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여 극락왕생할 수 있는 것은 만인에게 평등한 자리로 ‘공공역공(空空亦空)’이고, 우리가 보살행으로 이 사바와 극락을 오갈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진리다운 바로 ‘소공역공(所空亦空)’이 된다고 원효의 삼공(三空)을 빌려서 설명하였다.

효당은 “이를테면 오탁악세를 떠나 현실도피를 한다면, 연화세계는 생각할 수 없다. 이를테면 모순과 부조리한 현실의 진흙 속에서 진리의 오묘한 꽃은 창조되는 것이다. 이 점이 원효대사의 사상이었다”라고 말하였다. 나아가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에서 “즉 비록 어느 때 그 사람에게 무슨 공이 있는지 무슨 천재적인 포부가 있는지 알 수 없더라도 어떤 기회에 당도하여 톡 말이 떨어질 때는 뇌성벽력같은 소리가 난다(雖無功用, 應機發語, 猶如天鼓.)”라고 말한 점을 언급하였다. 이것은 마치 《춘향전》에서 주인공의 신분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 진실한 말이 공감을 불러일으킴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를 원효는 간파했다고 보았다. 

2) 결어

만해의 강연에서 영향받은 효당의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화두가 ‘화쟁’으로 귀결되었는지는 역사적으로 미완의 답변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효당의 질문이 가지는 현실은 여전히 우리 속에 남아 있다. 부처 또한 그러한 의문으로 성불하였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효당이 생전에 추구하였던 원효를 통한 불교와 국학의 길은, 현실에서 만해가 어떤 존재에게도 동정받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해인학림 강연의 일갈에서 받은 영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어서 중생 속으로 가야 한다는 상투적인 가르침이 아닌 ‘사람의 길’이었다. 그렇기에 ‘사람의 삶’이 사회 속에 완성된다는 진실어(眞實語)가 바로 대승이고 대사회성이라는 효당은 그것을 원효의 화쟁론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효당은 그 진실어가 바로 일심이기에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자각을 스스로 구하였다. 나아가 그 자각은 부처와 중생으로 나누어질 수 없었다. 사람의 삶이 성패의 이변(二邊)으로만 나누어진다면 그 편협함이 사회성을 해치듯이, 모든 궁극적인 도리도 부처와 중생으로 나누어지면 더 이상의 궁극이 아니다. 그 궁극은 중생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인 부처를 말함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효당은 원효의 일심을 대사회성으로 보았다. 그래서 효당은 그 일심을 스스로와 일반 대중에게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고 사람인 ‘하나’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물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효당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銘文)이 있다.

사람으로 무릇 태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을 쾌히 던짐이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대승진리를 실천함이요
출세간의 이변을 여윈 진정한 출격(出格) 대장부인 것이다.

이 이변(二邊)을 여읜 진정한 길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

 

최화정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후 동국대 일반대학원 불교교학 박사과정 수료. 주요 논문으로 〈효당 최범술의 삶과 불교〉 등이 있으며, 《효당 최범술 문집》 《불교문화사전》의 다도(茶道) 관련 필진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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