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는 교리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대승은 끝났다》
불광출판사, 2018년 3월 출간, 592쪽
참 오래된 문제 제기, “대승은 불교가 아니다.”

대승 경전들이 비불설이라는 주장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학술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일본의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 1715~1746)가 《출정후어(出定後語)》(1745)에서 ‘불교 경전은 시대를 거치면서 성립했고 단순한 것에 복잡한 것들이 덧붙여지면서 발생했다.’는 가상설(加上說)을 주장하면서부터다. 이후 무라카미 센조(村上尃精, 1851~1928)가 《불교통일론》(1901)에서 대승비불설론을 주장하면서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대승’이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라는 주장 내지는 논쟁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5세기경 저술인 니까야 주석서에는 ‘세 번의 합송(결집)에서 부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암송하는 자가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잘못 이해한 것에 대해 주석서는 ‘판단’을 했다는 이야기다. 10세기경 저술된 복주서에서는 ‘모순이 있는 말들’에 대해 구분하고 있다. 부처님이 A라고 말했는데 또 B라고 말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친설’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몇 차례 ‘대승비불설’ 논쟁이 있었다. 그중 가장 길었고 활발발했던 논쟁은 약 10여 년 전인 2009년, 〈법보신문〉 지상에서 벌어졌다. “대승 불설 부정은 ‘무지’ 탓”이라는 권오민 교수의 일성으로 시작된 논쟁(최초 주장 게재 지면은 《문/사/철》)은 “대승 경전은 붓다 가르침을 재해석해 가탁(假託)”한 것이라는 마성 스님의 비판으로 이어졌고 이후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졌다. 이어 논쟁은 권오민 교수의 반박에 전재성 교수와 황순일 교수가 비판 또는 문제를 제기하는 식으로 더 나아갔다.(물론 권오민 교수에 비판 또는 반론을 제기한 세 분 주장의 결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논쟁은 마지막으로 조성택 교수와 안성두 교수의 기고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이 늘 그렇듯 편을 가를 순 있을지언정 결론을 낼 수는 없다. 종교는 학문이나 논쟁의 영역에도 분명 발을 걸치고 있지만 ‘믿음’과 ‘수행’이라는 층위로 내려오면 논사들의 이야기는 그냥 망망대해에서 태풍을 만난 뱃사공의 처지가 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 책 《대승은 끝났다》는 그간 있었던 대승비불설과 그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기존의 대승비불설이 주로 교리나 사상의 측면에서 ‘대승이 불교일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반면에 이 책은 교리나 사상을 포함해 계율이나 수행까지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간 꾸준히 논의되어 왔던 교리에 대한 논의는 책을 읽어보는 것으로 가름하고 이 책에서 눈에 띄는 세 가지 주장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파대승현근본(破大乘顯根本) 1‐번역어

빨리어로 결집된 니까야나 한역 경전 모두 어떤 식의 번역어를 선택하느냐는 자신들이 이해한 교리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속에서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

이 책의 내용에서는 조금 벗어나지만 최근에 출간된 마성 스님의 《잡아함경 강의》는 주목할 만하다. (산스끄리뜨 경전을) 한역한 아함은 비아(非我, 오온은 아가 아니다)라는 용어를, 니까야는 무아(無我, 오온은 아가 아니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저자 마성 스님이 주장하듯이 아함경 결집을 주도했던 설일체유부에서는 무아를 비아라고 해석하려고 했고, 니까야 결집을 주도했던 상좌부 계통의 분별설부에서는 유아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번 호 《불교평론》의 북리뷰 참조)

이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한역된 경전의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저자 시현 스님은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책 속에서 비교적 설득력 있고 이해하기 쉬운 두 가지 예를 소개한다. 

우선 저자는 삼법인 중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예로 들고 있다. ‘일체가 모두 괴로움이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빨리어 원문은 “sab-be saṅkhārā dukkhā”다. ‘모든 형성작용들은 괴롭다.’로 풀이할 수 있다.
저자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 “부처님은 책상 자체가 고통이라고 말하는 바보가 아니다. 부처님은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속한다.’(상2-217)라는 자신의 말을 ‘형성작용들의 무상함에 관련해서 한 말이었습니다.’라고 해명했다.”(상4-449)

사실 이런 번역어로 인해 일체가 괴로움임을 증명하기 위한 억지 주장들이 횡행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저자가 제시한 한문 번역어는 行苦痛)이다. 사실 원문을 볼 수 있는 학자들에게는 큰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겠지만 불교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충분히 오해하고 곤혹스러워할 만하다. 나 역시 처음 불교를 공부할 때는 이 대목이 정말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예는 의도적인 오역이다. 소승(小乘, hīna-yāna)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제는 학계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지만 얼마 전까지 그리고 지금도 아주 많이 쓰이고 있는 단어가 바로 소승이다. 이 단어의 정확한 번역어는 ‘열승(劣乘, 열등한 탈것)’이다. 그런데 이 열등한 탈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 재세 시의 대중이거나 기존의 정통 비구 · 비구니 대중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저자는 “이렇게 되면 결국 부처님은 제자들을 편 가르고 이간질하는 자로 평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며 대승 스스로 ‘대중 깨기’를 범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책 속에는 이런 식의 번역어 문제 때문에 기존 책에서는 쓰지 않는 저자만의 번역어가 계속 등장한다. 책 뒷부분에 있는 번역 대조표만으로도 꽤 가치가 있어 보인다.

파대승현근본(破大乘顯根本) 2‐계율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사상과 교리에만 치중하지 않고 계율이나 수행까지 대승이 가진 문제를 확대해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대승의 시조로 데와닷따를 지목하고 있다. 데와닷따가 주장한 다섯 가지 기초 사항들은 극단적이고도 정신적인 원리주의가 코드화되어 있는데, 이것이 후대에 관념론적 일체론으로 정점을 찍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런 관념론적인 일원적 실체론은 후대에 대승에서 ‘마음’ ‘아리야식’ ‘불성’ 등 유일하고 단일한 실체의 무엇 혹은 장소(상적광토나 극락)의 창조로 발전된다.

저자에게 데와닷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극단적인 정신적 원리주의가 계율이나 수행에 적용되면서 고행에 가까운 주장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처벌이 없고 덕행[戒] 중심인 대승의 계율은 범계의 기준을 구체적인 행동 양식에서 찾기보다는 마음 작용에 중점을 두게 된다. 그래서 마음에 음욕이 일어나면 벌써 파계로 간주하는 설명을 자주 만나게 된다. 반대로 마음만 깨끗하면 죄도 소멸한다는 주장도 횡행한다.

물론 부처님도 근본 규제에서 욕망의 마음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범행의 제목을 정하긴 했다. 마음 작용이 근본임은 대승만의 입장이 아니라 근본 규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삿된 마음만 일으켰을 때는 과실이라고만 했고 참회도 반성만으로 이루어진다. 이 외 범행의 제목은 대부분 몸의 작업과 말의 작업을 기준해서 정도에 따라 정해졌고 참회도 각각의 범행에 따라 경중을 나누어서 여러 가지고 정해졌다.
대승이 주장하는 식의 계율 창조는 보살계에 가면 그 정점에 이른다.

파대승현근본(破大乘顯根本) 3‐수행

또 하나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대승의 수행법 비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대승의 수행법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걸었던 수행법이 아니라 부처님의 ‘전생 수행법’이라고 일갈한다.

근본불교에서는 성스러운 8차선의 길(팔정도)이 승속을 아우르는 수행법이었음에 비해 대승에서 제시된 승속의 공통 수행법은 대개 ‘6바라밀’과 ‘네 가지 무량한 마음(사무량심)’으로 집약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6바라밀’과 ‘네 가지 무량함’ 등은 모두 부처님의 전생 수행법이라고 주장한다.
책 속의 다음과 같은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아무것도 없는 영역’(기존 번역 無所有處)이나 ‘인지가 있지도 없지도 않은 영역’(기존 번역 非想非非想處)은 외도들이 달성한 순수 고정됨의 수행법이었고 부처님도 보살 시절에 외도의 제자가 되어 달성한 수행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부처를 이룬 후에 차용했다. 매우 유용한 수행 과정이지만 그 자체로 직접적인 핵심이 될 수는 없는 수행법이다. 또한 단순히 두 영역을 다루고 주장한다고 해서 불교만의 수행법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부처님이 전생의 보살 시절에 닦은 수행법이라고 해서 불교만의 순수한 핵심 수행법으로 다루어질 당위성은 없다.(448쪽 ‘부처님의 전생 수행법’ 중)

그렇다면 저자는 무엇을 불교 수행법의 핵심으로 보는 것일까?

좀 의외의 결론(?)이긴 하지만 저자는 간화선에 다시 한번 주목한다. 그가 간화선을 가장 수승한 수행법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깨달음의 인가와 그 족보는 정법의 안목으로 보자면 바람직하지 않은 인습이지만 간화선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나름대로의 증빙 자료일 수 있다. 인가를 통한 깨달음의 족보에 정당성과 신빙성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깨달은 종장들의 역사적인 실존과 그들의 교류는 부정할 수 없고 계파가 다를지라도 서로서로 경지를 확인하고 인정한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 화두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을 때의 찰나적인 체험에 대한 묘사가 근본불교의 수행법으로 깨달았을 때의 묘사와 동질의 것이라는 점에서 간화선의 깨달음에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다.

△ 간화선의 의심 수행은 단순 관찰의 성질을 가진다. 관찰의 성질이 있다면 알아차림 수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수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선정 현상은 근본불교의 네 가지 명상들과 일치한다.

저자는 결국 의심 끝에 깨달음에 이르는 간화선의 깨달음은 근본불교의 깨달음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마치며

이 책 《대승은 끝났다》의 가장 큰 줄기는 기존의 대승비불설과 마찬가지로 교리에 방점이 찍혀 있다. 매우 자주 만나는 주장이라 좀 특이했던 ‘번역어’ ‘계율’ ‘수행’에 주목해 대강의 줄거리를 살펴보았다.

이 책은 전체적인 구성상 반론을 각오하고 저자 나름대로 느꼈던 여러 방면에서의 대승불교 사상, 교리, 수행에 대해 정리한 것이다. 어떤 영역에서는 글을 끝까지 끌고 가지 않고 문제를 보인 채 놓아둔 곳도 많다.
하지만 조계종 비구로서 이런 글을 세상에 내어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받아 마땅해 보인다. (물론 저자는 법명을 밝히지 않았고 필명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이해 가지 않는 바가 아니다.) ■

 

이상근 
출판기획자. 동국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월간 《대중불교》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불교계 출판사에서 기획 · 편집자로 10여 년간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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