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보고 | 한국불교 희망을 찾아서

지하철에서 만나는 짧은 글 깊은 성찰

마음 그릇에 산사의 풍경 소리를 담아보자

소나무가 진달래에게 말했습니다.
“가지만 앙상한 가을날의 네 모습, 딱도 해라.”
진달래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습니다.
“눈에도 안 띄는 봄날의 네 꽃은 어떻고?”
소나무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밤에는 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이튿날입니다.
소나무가 진달래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봄에 피우는 그 연분홍 꽃은
정말이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
진달래가 환히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름답긴 뭘,
눈서리에도 지지 않는 너의 그 푸른 잎새야말로
그렇게 미더울 수가 없지.”
소나무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제는 왜 그렇게 기분이 나빴는지
오늘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소나무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지하철 역사(驛舍)에 걸린 ‘풍경소리’ 포스터, 〈한 생각 바꿨더니〉란 글이다. 정진권 수필가(한국체대 명예교수)의 작품이다. 소나무와 진달래의 대화를 통해서, 칭찬하고 격려하는 자세가 서로를 행복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번잡한 지하철 역사를 오가는 이웃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던 이 글은 7차 교육과정 개편과 함께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 실렸다. “긍정적 사고가 어린이들의 문장력과 정서적 가치 판단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평가”됐다는 것이 주최 측의 설명이다.

불자들에게는 더없이 친숙한 부처님 가르침이 이렇듯 종교적 색채를 덜어내고 일상의 언어로 대중들과 소통하는 한 중심에 ‘풍경소리’가 있다. ‘풍경소리’의 짧은 글들은 분주히 지하철을 이용하는 현대인의 일상에 마음에 점 하나 찍어주듯 다가가, 마침내 하염없는 울림으로 남는다.

지하철에는 오랫동안 ‘사랑의 편지’가 있었다. 목사인 류중현 교통문화선교협의회 대표가 삶에 지친 이들에게 교회가 앞장서서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자며 1985년부터 ‘사랑의 편지’라는 편지 형식의 글을 주위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1987년 5월 지하철기독교선교협의회를 통해 서울시 지하철 각 역사에 우편함을 설치, 우편함 안에 담긴 ‘사랑의 편지’를 누구나 자유롭게 꺼내서 읽도록 했다. 역사 안에 액자를 설치하고 한 달에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사랑의 편지’를 교체하는 오늘날의 형식으로 바뀐 것은 1988년의 일이다. 올해로 30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사랑의 편지’를 눈여겨보던 젊은 불자 이용성이 있었다. 조계종단에서 일하다가 1998년 조계종 사태 이후 일자리를 잃은 터였다. 부처님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해볼까, 고심 끝에 뜻맞는 이들과 기독교의 ‘사랑의 편지’와 같은 불교 포교용 게시판을 설치하는 데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1999년 5월의 일이다.

주위에 의견을 물었다. 모두가 격려하는 분위기였다. 놀랍게도 민주주의불자회의 서동석 대표는 이미 이 작업을 추진한 경험까지 있었다. 서울지하철공사 법우회와 논의했으나 당시 법우회의 역량상 현실적인 사업으로 구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용성은 동료들과 앞으로 생길 수 있는 다양한 변수까지 펼쳐놓고 논의를 진행했다.

구체적인 구상을 마치자 서울지하철공사 법우회장을 만나는 것으로 첫 활동을 시작했다. 좋은 문장과 좋은 디자인으로, 지친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자는 기획에 이영일 법사와 강행복 판화가가 합류했다. 취지에 공감하는 불교계 인재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임을 ‘법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 풍경소리’로 정했다. 맑고 그윽한 산사의 풍경 소리처럼 ‘마음속의 나’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자는 의미였다. 불교계에 찬불가 음반을 기획 제작하는 포교단체 ‘좋은 벗 풍경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 그쪽에도 양해를 구했다. 범종단 사업으로 운영돼야 한다는 취지에서 27개 불교 종단 모임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의 산하 단체로 등록을 추진했다.

7월 31일, 남다른 노력과 열정 끝에 서울지하철공사로부터 115개 지하철 역사에 게시판 설치를 승인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 9월 28일 성운 스님을 대표이사로 하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 부설 법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 ‘풍경소리’가 정식으로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1999년 연말에 서울지방철도청 소속 수도권 전철 100개 역사에 게시판 설치가 승인되었다. 2000년 5월에 서울시 도시철도공사 소속 147개 역사에 게시판이 설치되면서 서울과 수도권 전 구간 365개 역사에 ‘자비의 말씀’이 설치되었다. 2001년부터 게시판 ‘자비의 말씀’은 ‘풍경소리’로 이름을 바꿨다.

하나의 역사에 두 종류씩 4개의 액자를 설치하다 보니 115개 역사에 걸어둘 460개의 게시판이 만들어졌다. 포스터가 완성되면 역장의 허락을 받고, 붙일 장소 네 곳을 찾는 게 일이었다. 그 시작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들이 도맡아 했다.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이제는 지역마다 지부가 운영되고 있다. 전국에서 자원봉사하는 ‘포교위원’ 100여 명이 역사의 포스터를 관리 중이다. 이들은 포스터를 받으면 집이나 회사 인근의 역사를 찾아가 포스터를 교환하고, 액자를 닦고, SNS를 통해 홍보한다. 개인적으로 1개 역에서 많게는 10개 역까지 담당한다. 지방의 일부 기차역에도 게시판이 설치되어 있다. 수당이 나오지 않는 자원봉사지만, 차를 몰고 기차역마다 순회하며 포스터를 교환하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 풍경소리 포교위원들은 1년에 한 차례씩 연수회에 모여서 ‘풍경소리’의 발전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감동과 평온으로 마음의 고요를 되찾아 주는 ‘풍경소리’

아들이 어렸을 적에
바닷가에 데리고 나간 적이 있습니다.
“아빠, 바다의 끝은 어디에요?”
“저기 끝에 보이는 수평선보다도 더 먼 곳에 있단다.”
집에 돌아올 때쯤 되어서야 나는
우리가 서 있던 해변이 바로
‘바다의 끝’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나 고뇌하고 있다면
자신의 발밑을 한번 눈여겨보십시오.
해법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특히 자기에게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맨 처음 지하철 역사에 내걸렸던 ‘풍경소리’ 1호 글이다. 지금은 출가해 은산 스님이 된, 이영일 법사의 작품이다. 첫 시작부터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은 운영진들을 신명 나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풍경소리’ 사무국에선 자비의 말씀에 담길 글을 모았다. 누구라도 언제나 좋은 글을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모인 글들을 고르고 정갈하게 다듬을 편집위원을 구성, 편집위원회를 조직했다. 시조시인 김원각 선생(2016년 타계)과 수필가 맹난자 선생을 필두로 다양한 작가진이 구성됐다. ‘풍경소리’가 출범한 이래 지난 20여 년 세월 동안 ‘풍경소리’에 글을 쓰고, 모인 글을 추리고 챙겨온 맹난자 선생은 ‘풍경소리’를 한마디로 ‘마음의 고요’라고 표현한다.

“맨 처음 시작할 때 불음(佛音)을 전하되 불교사상을 강조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말자는 게 기본이었어요. 말씀을 전하되 힐링이 되고 아울러 각성(覺醒)되게 하자는 게 모토였죠. 지하철을 이용할 때면 풍경소리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내내 서서 읽는 이웃을 보는 게 보람이었어요. 복잡한 지하철 역사 안에서 진지하고 차분하게 풍경소리를 접하는 그들의 표정을 보면, 마치 산사의 청정한 공기를 마시는 듯한 그런 분위기였지요. 마음의 고요를 찾는 이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도 참 좋았어요”

‘풍경소리’에 담긴 맑은 생각들은 쉽고 일상적인 언어로 부처의 가르침과 사상을 전하되 불교적 색채를 걷어내고, 훈계성 내용도 걸러내며 완성되었다. 타계한 김원각 선생은 불교의 명구들을 예의 촌철살인 필력으로 정리해냈고, 맹난자 선생은 동양의 지혜, 문학 속 성찰의 글들을 엮어냈다. 누구라도 친근하게 공감할 수 있는 이들 진솔한 이야기들은 대중 곁에 한 편, 한 편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림 작업은 그동안 판화가 강행복, 전각가 정병례, 판화가 남궁산, 한국화가 박준수, 조병완 작가가 해왔다. 한국적 여백의 미를 충분히 살린 디자인은 초창기 명상적이면서도 압축적인 글과 조화를 이루며 큰 사랑을 받았다. 저마다 땀 흘려 일군 역작들이었다. 이 가운데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한 달에 두 번씩 작업해온 박준수 작가를 만나 작업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다시 2017년부터 현재까지 정병례 작가와 매달 한 점씩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좋은 글에 어우러지는 동양적 필선을 통해서 기운생동의 작품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초기엔 글 하나에 70여 점의 그림을 그린 뒤, 그중에 한 점을 골라 보내곤 했죠. 한 달 동안 140여 점을 그리면서 ‘풍경소리’의 메시지에 몰입했던 거죠. 다행히 그 시절 포천수목원 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해 있던 터라, 앞선 사계절의 변화, 대자연의 변화를 풍경소리에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심오한 글이 그림을 통해서 보다 친근하게 전달됐다는 독자의 반응도 기쁘게 전해 들은 적이 있었고, 시원한 바다 그림 한 장으로 마음에 충만을 얻었다는 연락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자, 어떻게 하면 새를 꺼낼 수 있을까?

‘풍경소리’에 담긴 기운생동의 작품 덕에 마음에 작은 위안을 받은 대중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지하철 역사에 놓인 ‘풍경소리’ 포스터는 가로 42cm, 세로 72cm의 크기다. 이 안에 담긴 법음이 그저 고마운 부처님과 진배없던 모양이다. 글을 읽곤 포스터 앞에서 두 손 모아 반 배하는 이웃들이 있었다. 그조차 모자라 지폐를 고이 접어 액자에 꽂아두고 가는 이웃들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우리 불교도 이 좋은 글을 지하철에서 읽게 해줘서 뿌듯하다’는 전화를 받는 건 일상이었다.

그동안 선보인 ‘풍경소리’ 글 중에서 화제작은 단연, 김성동 작가의 〈병 속의 새〉였다.

여기,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깊고 넓어지는 병이 있다.
조그만 새 한 마리를 집어넣고 키웠다.
이제 그만 새를 꺼내야겠는데
그동안 커서 나오지를 않는다.
병을 깨뜨려서도, 새를 다치게 해서도 안 된다.
자, 어떻게 하면 새를 꺼낼 수 있을까?

소설 《만다라》를 통해 화제를 모았던 내용이다. 이 글이 압축적으로 정리돼 ‘풍경소리’에 실리자, 시민들은 ‘어떻게 하면 새를 꺼낼 수 있을까?’ 하는 화두에 몰입했다. 곳곳에서 퀴즈 풀듯이 ‘정답은 이게 아니냐’고 묻기도 하고, ‘정답을 알려달라’는 문의까지 가장 핫(hot)한 반응을 불러 모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당산철교 운행이 중지되어, 2호선 승객들이 당산역에서 내려 버스로 환승해야 했던 때였다. 이용성 사무총장의 이야기다.

“2000년의 어느 날 을지로3가역에서 빨리 와달라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달려가 보니 역무원들이 화사한 얼굴로 반겨주는 겁니다. 융숭한 대접을 받는 느낌이었죠. 승객이 두고 간 편지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에 번잡한 당산역에서 환승하면서 무수히 무임승차를 했다는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풍경소리’를 읽고는 뒤늦은 참회를 했답니다. 편지와 함께 그동안의 무임승차비를 넣었고요. 더구나 자신의 마음을 바꾸게 한 ‘풍경소리’에도 후원 성금을 전했습니다. 역무원들이 한마디씩 하더군요. 정말 대단한 ‘풍경소리’라고요.”

울림이 있는 글은 이렇듯 한 생각을 변모시키고, 한 사람을 성찰하고 참회하게 만든다. 죽음까지 생각했는데, 우연히 지하철 ‘풍경소리’를 읽고 마음을 바꿨다며 사무국으로 고맙다는 연락을 해오는 이가 있었고, 글 내용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서 불교 교리를 묻는 전화도 틈틈이 걸려왔다. 이른 아침 아내와 다투고 아침조차 거르고 나왔는데, ‘풍경소리’ 한 구절에 문득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전화를 걸었다는 고백도 있었다. 사는 동안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는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얘기들을 하염없이 쏟아내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풍경소리’다.

돌아보면 과거 조회시간 교장 선생님의 훈화에 진로를 정하고, 문득 펼쳐 읽은 책 속 한 구절이 삶의 지표가 된 경우가 허다하지 않던가. 보고 즐길 것이 많아 정신없는 세상에서 한 구절에 눈길이 닿아 마음까지 고쳐먹게 하는 일을 지하철 역사의 ‘풍경소리’가 해내고 있다.

게시판의 포스터를 며느리에게 읽히고 싶다며 제발 하나만 달라고 연신 조르는 어르신도 있었고, 갖고 싶은 욕망에 집어 들고 가는 식의 훼손도 더러 있었다. ‘풍경소리’ 직원이 막창집 화장실 소변기 앞에서 ‘풍경소리’ 액자를 발견한 적도 있다. 시내 유흥주점의 메인 벽에 풍경소리 포스터가 멋지게 걸려 있다는 제보도 받았다. 확인해보니 지인이 개업 축하 선물로 전했다는데, 분명 어느 지하철역에서 사라져버린 액자였을 것이다. ‘풍경소리’를 시작하면서 이용성 사무총장이 바로 멋지고 세련된 디자인에 중점을 뒀다니 대중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셈이다,

“좋은 글과 그림이 더 많은 이웃에게 울림을 주려면 디자인을 간과할 수 없다고 봤지요. 그래서 적어도 풍경소리는 기존의 것보다 훨씬 주목받게 만들겠다는 것, 그리고 기존의 것보다 게시판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 붙이겠다는 원력을 세웠지요. 디자인 작업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좋은 글에 좋은 그림, 한국적 분위기에 어우러진 세련된 디자인은 지친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위안이 돼 주었다. 이후 사랑의 편지 디자인에도 변화가 생길 만큼 ‘풍경소리’의 앞서가는 안목은 성공적이었다.

포스터에서 시작, 엽서, 전시회, 출판물로 다양하게 변주되는 문화콘텐츠

‘풍경소리’ 포스터는 액자 없는 곳에 걸어도 좋을 만큼 두꺼운 종이를 활용했다. 포스터를 만들 때 생겨나는 자투리로는 엽서를 제작했다. 엽서는 군부대와 교도소 등지에 무료로 배포된다. 원하는 경우 사찰 홍보엽서를 제작하기도 한다. ‘풍경소리’ 엽서는 뒷면은 엽서 용도로 쓰이고, 앞면은 풍경소리의 명구를 가슴에 새길 수 있어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지닌다. 지금도 군법당에선 사병들에게 이 엽서에 사연을 쓰게 하고, 잘 쓴 편지를 골라 포상을 하는 이벤트가 종종 열린다. 1년 지난 재고 엽서는 부처님오신날이면 절을 찾는 일반인과 불자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희망하는 사찰에 배포하고 있다.

지난 2001년에는 도서출판 샘터사 편집인이 ‘풍경소리’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동안 선보인 풍경소리의 내용을 엮어서 현대인들에게 여유와 휴식을 주는 책을 내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빈틈없는 출판사에서 먼저 출간을 제안할 만큼 ‘풍경소리’는 이미 2년 사이에 자리 잡았다는 증거다. 산사의 풍경 소리처럼 소박하지만 영혼을 밝혀 주는 이야기, 침묵의 공간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짧은 이야기들이 엮여 《풍경소리》라는 같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2004년에 《풍경소리 2》가 출간되었고, 이후 2012년 이 두 권을 풍경소리의 이름으로 재출간했으며, 판권이 법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 ‘풍경소리’로 넘어온 뒤로 1, 2권의 개정판에 이어 올해까지 《풍경소리》 5권이 나왔다.

그뿐만 아니다. 한 달에 두 종류로 선보인 포스터들은 지하철 역사를 벗어나 전시장에서 관람객들을 만나고 있다. 지역의 문화공간, 사찰의 행사 현장, 테마파크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았다. 전시회는 ‘풍경소리’를 한자리에서 모아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지하철 역사에서도 전시회가 별도로 열렸다. 얼마나 도움이 되었던지, 좋은 글들을 접하게 해줘서 고맙다는 전화가 사무국으로 답지했다. ‘풍경소리’ 포스터 작업에 참여한 정병례 작가의 경우 풍경소리 포교기금 마련 전국 순회 작품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문화콘텐츠란, 하나의 콘텐츠를 문화를 통해 다양하게 상품화해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가리킨다. ‘풍경소리’의 시작은 지하철 역사의 포스터였으며, 앞으로도 지하철 역사를 빛내는 포스터겠지만, 엽서로 만들어져 이웃들 사이에 울림을 주고, 전시회를 통해 마음을 쉬어가게 하고, 책을 통해 좋은 가르침을 곱씹게 하며 다양한 문화상품으로 변주되고 있으니 성공하는 문화콘텐츠로서 가능성을 보여준다.

 지하철역사 통로에 전시된 풍경소리 포스터

풍경소리를 지켜온 원동력은 원칙과 가치의 수호

저녁 7시, 퇴근길 직장인들이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4호선 길음역에서 ‘풍경소리’ 포스터를 가리키며 사람들과 인터뷰를 시도했다. 반갑게도 몇몇은 ‘풍경소리’ 마니아였다. 

“좋은 글귀 앞에선 발길을 멈추게 될 때가 있어요. 사진을 찍어서 공유하지요.”
—30대 여성


“출근길에 일부러라도 게시판 쪽으로 가서 읽곤 합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는 게 하루를 시작하는 데에 좋더라구요.”
—40대 남성

“더 잘 보이는 데에 놔두면 좋겠어요.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60대 남성

‘풍경소리’가 이렇게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지, 내년이면 20주년이다. 지난 20여 년 세월 동안 ‘풍경소리’가 곧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사무국에서 원칙과 가치를 흔들림 없이 지켜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재정적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단체에는 무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구역별로 사찰 협찬을 받지만, 거액은 받지 않습니다. 포스터 몇 장에 얼마 하는 식으로 팔거나 사찰의 큰 지원을 받게 되면 본말이 전도될 수 있기 때문이죠. 운영이 어렵더라도 돈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자들의 십시일반 후원금은 그래서 소중합니다. 얼마를 줄 테니 우리 스님의 글을 실어달라는 식의 특정한 요구도 거절합니다. 늘 항상 맨 처음 시작할 때의 취지에 맞는가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깎은 머리를 하루 세 번 만져보라는 승가의 일일삼마(一日三摩)의 정신처럼 늘 첫 생각, 첫 마음의 그 본분을 잊지 않고 진정성을 기반으로 운영하는 ‘풍경소리’다.

그동안 몇 차례의 어려움이 있었다.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종교 선전물이라는 오해를 받으며 철거 위기에 놓인 적이 있었다. 포털사이트 아고라에서 진행된 철거 반대 청원에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11일 만에 백지화됐다. 2015년에는 게시판 광고계약을 체결하지 않을 경우 철거 등의 후속 조치를 취한다는 논란도 있었지만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앞으로 또 어떤 일로 지하철 혹은 전철 역사에서 철거 움직임이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우리는 적어도 풍경소리를 읽으며 힘을 얻은 시민들 덕에 또다시 끄떡없을 것을 믿는다.

이용성 사무총장은 완공된 부산 지하철에 ‘풍경소리’ 게시판을 만드는 일이 험난한 과정이었다고 회고한다.

“게시판에 대한 거부가 완강했습니다. 예닐곱 달에 걸쳐서 정성스럽게 담당자를 찾아가 부탁했지요.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담당자의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곧바로 ‘사랑의 편지’를 운영하는 목사님께 전활 드렸죠. 우리가 허락받았으니, 사랑의 편지도 함께 걸자고요.”

앞서 시작한 ‘사랑의 편지’ 쪽 노하우를 벤치마킹하면서 성장한 ‘풍경소리’다. 이들은 게시판 철거 소식이 들릴 때면 함께 공조해 싸우던 전사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사랑의 편지’는 경쟁자가 아닌 동행자로서 서로 박수 치고 격려하며 좋은 말씀을 전하고 있다. 더불어 좋은 세상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첨단 디지털 시대에도 모두를 깨우는 밝은 빛, ‘풍경소리’

뎅그랑 뎅그랑, 한 음절밖에 안 되지만, 그 풍경 소리가 지친 영혼을 맑혀주듯이 ‘풍경소리’는 이 삭막한 시대에 단 몇 줄의 글귀로 대중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산사의 풍경 소리가 잠시 휴대전화를 꺼둬야겠다는 생각을 일으키듯이 ‘풍경소리’는 이 바쁜 시대에 가던 길마저 멈춰 서서 성찰하게 한다.

풍경은 바람이 불지 않으면 소리 내지 않는다. 풍경소리는 바람이 빚어내는 소리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깊은 울림과 긴 여운을 만들어낸다. ‘풍경소리’는 첨단 디지털 시대에 가장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한다. 바쁜 일상 속 대중교통의 현장에서 발길을 멈추지 않고서는 읽을 수 없는 글이건만, 누구라도 서슴지 않고 그 앞에 멈추어 선다. 읽고, 되새기며 음미하고, 가슴에 담아두는 소리가 ‘풍경소리’다.
도선사 주지이자 ‘풍경소리’ 대표인 혜자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풍경소리’ 이용성 사무총장
“부처님 가르침은 자구에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 지혜는 산사의 단청 위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깨우침의 희열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하늘의 복이 아닙니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십시오. 전동차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도 잠시 짬을 내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십시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다른 ‘세상’을 발견하는 일이 행복과 지혜를 구하는 일일 것입니다.”

스님의 말씀처럼 ‘풍경소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도구가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에 작은 화두로 새기게 되면 좋겠다.

그간 소소한 어려움은 늘 있어 왔으나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풍경소리’는 어느덧 서울 수도권을 비롯하여 대구와 부산, 인천, 광주, 대전의 741개 역사에 2,157개 게시판을 통해 정법을 전하고 있다. 지하철, 혹은 전철 역사가 늘어날 때마다 ‘풍경소리’ 포스터는 더불어 늘어갈 것이고, 이를 읽고 가슴에 새기며 힘겨움을 치유하는 이웃도 늘어갈 것이다. 

고개 들어 주위를 둘러보기보다 휴대전화에 코 박고 살아가는 시대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최첨단 정보기술 시대에, 과연 지하철 역사의 포스터로 전하는 부처님 가르침은 어떤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까. 이용성 사무총장은 말한다.

“2,600년을 이어온 부처님 가르침이 디지털 시대라고 해서 그 가치가 바뀌진 않습니다. 지금의 형태가 유지돼야 하는 이유지요. 다만 대중에게 전달되는 형태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겠죠. 글로벌 시대에 맞게 영문 표기를 병기한 것도 변화하는 시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시대에 맞는 매체 형식이나 방식도 고민 중입니다.”

찻집 테이블마다 대학노트 한 권씩 놓여 있던 시절이 있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활용하라는 찻집 주인의 배려였다. 노트를 펼쳐 끄적끄적 쓰기도 했고, 앞서 다녀간 이들이 써놓은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피식거리며 웃기도 하고, 금싸라기 같은 한 구절을 수첩에 옮겨 적으면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시절, 술집 벽에도 의미 있는 청춘의 노래들이 빼곡했다. 요즘처럼 틀에 박힌 ‘아무개 왔다 간다’라거나 ‘철수♡영희’ 따위의 낙서와는 달랐다. 짤막한 한 줄 글에도 정서가 담겨 있었고, 사유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흔적 없이 사라진 시대인가 싶지만, 그래도 지하철 역사에 가면 한쪽 벽에는 어김없이 ‘풍경소리’가 놓여 있다. ‘풍경소리’의 글을 음미하는 동안, 우리는 지친 일상에서 잃어버린 보석 같은 정서와 명징한 사유와 마주할 수 있지 않은가. ■
 

이윤수 
방송작가. 《대중불교》 기자와 《주부생활》 기자를 역임하고 1990년 불교방송 개국과 함께 방송작가가 되었다. 1993년부터 KBS 1라디오에서 지금까지 쉬지 않고 원고를 쓰고 있다. 현재 KBS 1라디오 〈정관용의 지금 이 사람〉과 KBS 한민족방송 〈통일백세〉를 집필 중이다. 뒤늦게 고려대 대학원에서 문화콘텐츠를 전공, 2012년 〈연등축제의 역사와 문화콘텐츠적 특성〉으로 학위를 받아 연등회 1호 박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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