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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어부 / 유자효
추모 특집 | 설악무산 스님, 그 흔적과 기억
[75호] 2018년 09월 01일 (토) 유자효 시인 · 언론인

“지금 어데 계신교?” “집입니다.” “뭐하시는교?” “그냥 있습니다.” “펏뜩 오이소.”

오현 스님이 계시는 오피스텔과 내 집은 걸어서 10분 거리다. 서둘러 갔더니 스님은 자그마한 방 안에 홀로 동그마니 앉아 계신다.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일어서신다.

“밥 먹으러 갑시다.”

스님은 식사를 많이 하지 않으신다. 근처 식당에 마주 앉아서 내게 이것저것 집어주시며 많이 먹으라신다.
스님을 안 것은 내가 20대, 스님은 30대 때였다. 1968년 나는 《시조문학》 초회 추천을 받았는데, 그해 스님은 3회 천료를 하셨다. 그리고 1979년, 나는 전봉건 선생의 권유로 월간 《현대시학》에 월평을 썼는데 5월호에 스님의 첫 시집 《심우도》를 ‘승려의 시조’란 제목으로 다룬 바 있다. 그러나 내가 스님을 직접 뵌 것은 1990년이었다.

KBS 파리 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나는 친구 김재홍 교수가 인솔한 경희대 학생들의 백담사 탐방에 동행했다. 그때 스님을 처음 뵀는데 무척 반가워하셨다. 시봉을 하는 상좌에게 “내 시가 좋다고 칭찬하신 선생님이시다. 잘 모셔라.”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고 ‘그 월평을 보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또 어느 자리에서 “유자효는 60년대야.”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을 때 1968년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신문〉의 학 · 예현상모집에 당선한 것을 염두에 두셨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만남은 늦었으나 스님과 나는 피차 문명(文名)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재홍 교수의 권유로 스님께서 백담사에서 만해축전을 시작했을 때, 나는 스님과 친구와의 인연으로 행사 사회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2회 때부터 축전 입재식과 만해대상 시상식 사회를 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으니 오로지 스님의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서초동 작은 오피스텔에 홀로 계신 걸 보며 “절에 계시는 게 편하지 않으시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내가 절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이런저런 잔소리를 해대면 젊은 중들이 힘들어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세상살이에는 남의 비위를 맞추는 게 중요하다.”며 웃으셨다.

한번은 ‘암이 온 것 같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부위를 직접 살펴보았다. 모양은 암과 흡사하나 내 경험으로는 탈장이었다.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간단한 수술로 치유했다. 치아로도 고생하셔서 내가 아는 치과에서 틀니를 보정 받으신 적도 있다.

어느 저녁 어스름, 그날도 스님의 부름을 받고 오피스텔로 들어서는데 문득 “자효야.” 하고 부르시는 것이었다. 스님께서 나의 이름을 허물없이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탁자에 마주 앉아서 뚜벅 말씀하시길 “나는 요즘 잠을 잘 자지 못해. 까마득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야.”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인도로 가야겠어. 도착하면 여권과 소지품을 다 버리고 가는 데까지 가다가 죽어야겠어.”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큰스님에게서 문득 나의 육친 형과도 같은 정을 느꼈다.

스님은 최근 몇 년 동안 죽음을 준비하셨다. 한번은 “만해마을은 동국대학으로 넘기고, 만해대상은 조선일보로 주면 잘 할 것 같은 데 어떨까? ” 하고 물어보시는 것이었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이었다. 두 가지 다 스님이 심혈을 기울인 사업이었다. 나는 대뜸 ‘아, 정리하려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도암 시술 후 하안거와 동안거에 빠짐없이 드신 것도 그런 준비가 아니었을까? 입적 한 달 전 나와 나눈 마지막 통화에서도 병석의 문인들을 걱정하셨다.

스님은 말씀하셨다. “종교인이 돈이 많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그래서 자신은 개인 통장이 없고, 수중에 있는 돈이 전 재산이라는 말씀이었다. 그 돈도 스님을 거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생전에 많은 문인을 도우셨고, 입적 직전 갖고 계신 ‘전 재산’을 용대리 주민에게 주신 것도 그와 같은 언행일여(言行一如)의 실천이었다. 스님은 마지막 동안거 이후 서초동 숙소마저 정리하셨다.

스님이 미국에 계실 때 인연을 맺었던 한 성공한 체육인이 ‘여행이나 하시라.’며 여비를 넉넉하게 보내온 적이 있다. 스님은 가까운 문인들을 초청해 함께 지중해를 다녀오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혼자 좋은 걸 보면 무슨 재미냐?’는 말씀이었다. 나는 원로 문인들을 비즈니스석에 모시고, 자신도 원로인데도 이코노미석으로 가시며 일행을 보살피는 것을 보며 많은 감명을 받았다. 문인들은 스님의 신세를 많이 졌다. 특히 시조단은 스님이 계심으로써 위상이 달라졌다. 앞으로 우리 문단이 이런 어른을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스님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죽음은 끝이야. 아무것도 없는 것이야. 일찍이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셨고, 조사 스님들께서 다 보신 것인데 아직도 몰라.”

나는 불교계를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신흥사 조실이신 대종사 옆자리에 예사로 앉아 말상대를 한다. 내게 스님은 오로지 시인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아무 생각 없이 앉았다가 스님들이 큰절을 올리는 것을 보곤 황급히 자리를 피한 적도 있다. 내 생애에 오현 스님이라는 우리 시대 최대의 시승(詩僧)을 만난 것은 나의 행운이었다.

오늘도 나는 스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유 선생, 거서 머하시능교? 퍼뜩 오이소.” 

부처 이후
무수한 부처들처럼
부처 이전
무수한 부처들처럼
스님
이제 보셨나요
맞으신가요?
— 졸시 〈적멸-오현에게〉

그날 저녁은 유별나게 물이 붉다붉다 싶더니만
밀물 때나 썰물 때나 파도 위에 떠 살던
늙은 어부가 그만 다음날은 보이지 않데
— 조오현 〈인천만 낙조〉

yoojah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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