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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았다 / 김한수
추모 특집 | 설악무산 스님, 그 흔적과 기억
[75호] 2018년 09월 01일 (토) 김한수 조선일보 종교전문기자

‘놀랐다’ ‘꿈에도 몰랐다’ 등등 다른 표현도 많다. 외람되더라도 할 수 없다. 솔직히 표현하면 ‘속았다’는 게 맞다. 그리 급히 가실 줄은 몰랐다.

“보고 싶은 사람들 몇몇 불러서 다 만났다. 임종게도 써놓았다. 그리고 내 행장(行狀)도 맡겨 놨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몰랐다. 괜히 한번 해보시는 말씀인 줄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게 진짜 마지막이었다. 지난 5월 26일 입적(入寂)한 설악(雪嶽) 무산(霧山) 스님 이야기다.

사실, 필자는 스님과 첫 만남부터 ‘속았다’. 스님을 처음 뵌 것은 2003년 가을. 어느 날 오후 휴대전화가 울렸다. “저는 오현 스님 심부름하는 사람인데, 지금 어디어디로 오시죠.”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승복 바지에 상의는 내의 차림인 노스님이 계셨다. “오현 스님이시죠?” “아니요, 저는 오현 스님 심부름하는 사람입니다.” 머쓱해진 필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노인’(?)이 주는 물건을 받아 신문사에 전하고는 잊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백담사 만해마을에선 조선일보가 소장하던 희귀본 만해 저서를 만해문학박물관에 기증하는 행사가 있었다. 신문사 간부진이 대거 찾아간 자리에서 손님을 맞은 이는 다름 아닌 ‘그 노인’ 아닌가? 솔직히 든 생각은 ‘아니, 왜?’였다. 그 자리에서 개인적인 의문을 풀 수는 없었다. 속으론 ‘이런 고약한 노스님이 계시는가?’ 했다. 그렇게 스님과 15년 인연이 시작됐다.

이후 10년간 인연은 평이했다. 스님은 뵙기 어려웠다. 항상 ‘사람의 병풍’ 뒤에 계셨다. 매번 ‘만해축전’ 때 현장 부근에 계셨지만 직접 육안으로 보긴 어려웠다. 가끔 무대 뒤에서 관계자들에게 호통만 치셨다. 그런 모습조차도 필자 역시 ‘관계자’ 비슷했기 때문에 목격할 수 있었다. 있어도 없는 사람, 그게 무산 스님이었다.

스님이 곁을 주기 시작한 것은 거의 10년 동안 낯을 익힌 다음이었다. 가끔 저녁 먹고 있으면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가 왔다. 극존칭으로 ‘시간 되시면 오늘 오시라’는 내용이었다. ‘혹시?’ 하며 달려가 보면 정작 특별하지 않았다. 살아온 이야기, ‘만해 장사’ 이야기를 하실 때도 있었다. 때로는 다른 손님도 있었다. 가끔씩 ‘5분만 더 있다가 가라’고 손을 잡을 때가 있었다. 그 ‘5분’은 30분이 되기도 했고, 1시간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더 특별한 메시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공석, 사석에서 수많은 법문을 듣는 복을 누렸다. 그것도 뒤늦게 지나고 나서야 복인 줄 알았다. 그 많은 법문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는 말씀은 이런 것이다. “세상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어.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모두 저 살려고 그러는 거야.” 그 수많은 법문 가운데 이 말씀만 기억나는 것은 당시 필자에게 가장 가슴에 와닿는 말씀이었기 때문일 게다.

2014년 가을 초입이다. 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시월 보름, 조계종 기본선원이 백담사에 문을 연다는 기별이었다. 그때까지 기본선원은 돈만 들어갈 뿐, 표시가 나지 않는 기관이었다. 1~2학년과 3~4학년 과정 교육이 각각 다른 교육기관(사찰)에서 이뤄지곤 했다. 이걸 통합한 것이 무산 스님이었다. 이날 의식 시작 시간은 오전 10시. 필자는 그 시간에 맞춰 백담사로 바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스님은 마음이 급촉했다. 오전 8시쯤 인제군 원통에 도착한 필자의 전화가 울렸다. “어디고?(어디인가요?)” “원통인데요.” “빨리 와라.”
오전 8시 30분쯤 만해마을에 도착하니 이미 일행이 백담사로 올라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스님을 모시고 함께 올라간 길. 감동이었다. 결제법회에서 무금선원장 신룡 스님은 무산 스님의 시 〈침목(枕木)〉을 낭송했다. 내려오는 길, 스님은 매우 흡족해했다. 혼잣말처럼 “출가해서 오늘처럼 좋은 날은 처음이다.”라고도 한 것 같았다.

만해마을에 도착해서 “아까 신룡 스님이 ‘침목’을 낭송하시던데요?”라고 묻자 “그래?”라며 금시초문이라는 듯 말했다. 그러더니 “내 시이지만 참 좋지.”라며 바로 〈침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낭송했다. 또 속았다. 그리고, 놀랐다. 분명 100여 명 넘는 사람이 들은 당신의 시를 못 들었다는 듯 읊다니. 그리고 아무리 자신의 시지만 첫 구절부터 마지막까지 한 치 오차 없이 완벽히 외는 것이었다. 그 무렵부터 필자는 무산 스님의 ‘안거 해제 법어’를 들으러 백담사를 찾기 시작했다.

스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5월 23일, 수요일이었다. 이날 스님이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은 “모두 다 바람에 이는 파도야.”였다. 혼잣말처럼 읊었다. 당신의 시 〈파도〉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그의 눈은 감겼는지 떠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파도〉의 모든 구절은 한 줄, 한 글자도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보여준 것이 임종게였다. 이제는 유명해진 “천방지축, 기고만장, 허장성세로 살다 보니/ 온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이라는 시이다. 무산 스님은 자신의 임종게마저 읊어주고, 어려워 보이는 구절은 손수 해석도 해줬다.

그때도 몰랐다. 그냥 자신의 시를 이야기하는 줄로만 알았다.

마지막으로 스님 육성(肉聲)을 들은 건 지난 7월 13일 강원도 속초 신흥사에서 열린 49재 때다.

“여러분은 부처가 되려고 올해 하안거에 왔습니다. 부처가 되려고 하면 부처가 안 됩니다. 부처로 살면 부처가 됩니다.”

마지막 순서에 그의 생전 육성 법문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엔 “이걸로 끝!”이라는 육성도 나왔다. 녹음 속 청중의 폭소가 터져나왔다. 조실(祖室)스님이 이렇게 법문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 녹음을 듣는 청중들 얼굴에도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생전의 무산 스님이 연출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던 것 같다. 잇따라 필자를 ‘속였던’ 스님의 뜻을. 스님은 생전에 ‘큰스님’이란 호칭을 정말 싫어했다. 대신 ‘낙승(落僧)’ 즉 ‘떨어진 중’이라고 스스로 칭했다. 스님이 필자를 ‘속였던’ 모든 순간은 “야! 이 바보야. 큰스님 찾지 말고, 너를 찾으라.”는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필자가 지우지 못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있다. 200자 원고지로 계산해 반(半)장쯤 쳐서 보내면 답장은 “알았다” 아니면 “고맙다”라고 보내온 오현 스님의 답장이다. 앞으로도 이 답장을 지우지 못할 것 같다. 

hans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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