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특집 | 설악무산 스님, 그 흔적과 기억

지난 5월 26일 저녁 무렵 지리산 산행 중에 스님께서 원적에 드셨다는 부음을 들었다. 순간, 사방이 홀연히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면서, ‘당래의 의지처이신 스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라고 속으로 되뇌고 외쳤다.
바로 산행을 중단하고 동반 산인들과 헤어져 서울로 올라왔지만…… 당래의 의지처이신 스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스님을 만나 뵙고 이런저런 가르침을 받은 지 오래되었지만, 그동안 다른 특별한 말씀이 없으셨는데, 1998년에 들어서 평택검찰청 청장으로 근무할 무렵 스님께서 “검사 그거 할 만하나. 걸릴 것 뭐 있노. 무섭게 해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해에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았고, 당래(當來)라는 법명도 주셨다.

계첩에 스님의 말씀과 시가 여러 줄 적혀 있었지만, 나는 스님께서 늘 들여다보시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공사(公私) 생활을 해왔다.

‘당래’는 무엇인가. 너의 마음속에 정의와 부정의, 평화와 전쟁, 자유와 노예, 극락과 지옥이 있으니 그 마음속에서 미륵을 찾으라는 말씀이 아닌가. 공직에 있는 사람이니 인류와 나라의 미래 용화의 세계를 만들어 보라는 뜻도 있지 않을까.

스님이 바로 당래의 의지처로서 늘 마음속에 자리한 것이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봉직하면서도 스님을 비교적 자주 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2010년 2월에 헌법재판소에서 사형제도에 대한 위헌제청사건을 심리 · 선고한 일이 있다. 그 당시 헌법재판소의 다수 결론은 사형제도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사건의 헌법재판관으로서 사형제도가 헌법에 위반된다는 위헌의 소수의견을 냈다.

“……생명권이 우리 헌법상 인정되는 기본권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인간의 생명에 대하여는 함부로 사회과학적 또는 법적인 평가가 행해져서는 아니 된다. 즉, 모든 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각 개인에게 그 생명은 절대적 의미를 가진다.”라고 하는 사형제도 위헌 소수의견 서술은 그 무렵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시사를 받고, 얻은 바가 많아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11년에 들어서 35년간 법조 공직에만 있던 사람이 갑자기 부처님의 인연 덕인지 종립 동국대 총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무렵 느닷없이 스님께 ‘만해마을을 동국대에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더니, 한참 쳐다보시다가 “그게 그렇게 하기 어려워…….”라고 하셨다. 그로부터 1개월 후에 다시 만나 뵈었더니 ‘총장은 신뢰하니까 총장이 그대로 있으면 좋은데, 총장이 평생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렵다’라고 하시더니, 그 수개월 후에 만해마을로 부르셔서, ‘총장 말대로 만해마을을 동국대에 주기로 했다’고 하셔서, 가볍게 드렸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동안 스님께서 해오신 만해사상실천선양회의 관련 일을 정리하시고, 보다 크신 생각으로 교육 · 연구에 크게 기여할 수 있도록 동국대에 주시기로 한 것이다. 동국대는 스님의 큰 뜻에 따라 만해마을을 미래의 교육 · 연구 · 불교의 빛나는 터전이 될 시설로 확보하게 되었다.

만해사상의 선양이 바로 무애도인이신 스님의 필생 숙원(宿願)이었는데, 그 만해사상 실천 · 선양의 공간을 동국대에 내주신 것이다. 당시 동국대의 모든 성원은 스님의 그 엄청난 시설 증여에 대해서 어떻게 보답할까를 고민하였다. 여러 가지 방안을 직간접으로 말씀드렸다가 역정만 듣게 되었고, 결국 동국 성원의 고마운 마음의 표시로 스님의 시를 작은 비에 새겨서 올리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스님의 대표적 시인 〈아득한 성자〉를 예술대학의 조소 전공 교수가 대리석 판에 새겨서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에 모시게 된 것이다. 흥천사나 백담사에 부치하자고 건의 드렸으나, 보는 사람이 제일 적은 진전사로 하라는 엄명이 계셨다.

“…… 죽을 때가 되었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동국대 총장 임기가 끝나갈 무렵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참 어렵네…… 당래야 잘 됐지 뭐.”라고 하시면서 백담사 무금선원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아무런 말씀 없이 “다 흘러가는 물이다. 바람에 이는 파도다.”라고 하시면서 차를 내려 주셨다.

‘당래의 지친이요, 의지처이신 스님’

오래전 아마도 1990년대 중반 무렵의 일이 아닌가 한다. 여름 휴가를 얻어서 집의 아이들을 데리고 백담사로 간 일이 있는데, 그때 스님께서 경희대의 김재홍 교수와 함께 계시다가 초등 · 중등의 우리 아이들에게 시와 부처님에 대해서 긴 시간 가르치셨던 적이 있다. 그 애들이 벌써 30대 중반을 넘어서 나름대로 사회활동을 여법하게 하면서 그때 그 스님의 가르침을 지금도 이야기하고 있다.

스님의 시 한 줄을 읽어본다.

…… 저기, 길가에 버려진 듯 누운 부도
돌에도 숨결이 있어 검버섯이 돋아났나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 건가
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이라도 자아낼까
곰곰이 뒤돌아보니 내가 뿌린 재 한 줌뿐이네

‘스님. 당래의 의지처이신 스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khobud@kccworl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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