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특집 | 설악무산 스님, 그 흔적과 기억

조실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75년 여름 이맘때쯤 설악산 신흥사에서였다. 그때 나는 불문에 들어 성준 화상에게 어리석은 몸(癡身)을 맡기고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공동생활을 하는 절에서는 각자 소임이 맡겨지는데 나는 성준 화상의 시자(侍者)였다. 시자란 세속 말로 비서라는 뜻이지만 나는 은사 스님의 심부름이나 하는 어린 수행자였다.

어느 날 영남에서 스님 한 분이 오셔서 성준 화상을 찾았다. 그분이 바로 무산 조실스님이다. 조실스님은 그 무렵 장년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두 분이 만나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대화의 내용은 잘 모르겠으나 용건은 대략 이러했다.

“저는 밀양 성천사 인월 화상 앞으로 동진출가했으나 계첩이 없습니다. 인월 화상은 대처를 해서 조계종의 승적이 없으므로 저를 거둘 수 없습니다. 이에 화상의 탑전에 무릎을 꿇으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 성준 화상 앞으로 입실건당(入室建幢)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잠시 물러났는데 성준 화상은 ‘나이가 많다’면서 고암 노스님 앞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조실스님이 시를 쓰는 훌륭한 분이니 사형으로 모시고 싶다고 했다. 그 말 때문은 아니겠지만 은사 스님은 오후에 입실을 허락했다. 조실스님은 가사장삼을 갖추고 제자의 예를 올렸다. 그리고는 하룻밤 묵지도 않고 떠나갔다.

뒷날 두 분은 편지로 법거량(法擧揚)을 했는데 은사 스님이 ‘달마는 왜 수염이 없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조실스님은 〈달마십면목〉이라는 시를 써서 1975년 《현대시학》에 발표하고 그 잡지를 스님에게 보냈다. 그 시는 스님의 첫 시집 《심우도(尋牛圖)》에 실려 있다.

뒷날 나는 환속해서 세간에 살게 되었다. 멀리는 가지 않고 절집 근방에서 출판사를 하면서 한 10년, 그리고 또 10년은 스님에게 의탁해 시자를 하면서 보냈다. 그리고 요즘은 절집 불사(佛事)를 거들며 지내고 있다.

속가로 나오다 보니 아내도 생기고 자식도 생겼는데 그중에는 비구니가 된 처제도 있다. 법명은 원교 스님. 그 스님이 몇 년 전 시집 한 권을 들고 찾아왔다. 스님의 첫 시집 《심우도》였다. 처제는 한때 신흥사 학생회에 들락거렸는데 어느 날 스님을 뵈었더니 이 시집에 서명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처제는 그 시집을 읽고 발심(發心)이 됐는지 출가해서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원교 스님은 집에 들른 길에 조실스님을 한번 뵙고자 했다. 원교 스님은 나를 앞세워 조실스님을 찾아뵙고 수십 년 동안 간직해온 그 시집을 돌려드렸다. 시집을 받아든 조실스님은 ‘나는 초판본이 한 권도 없는데 이제 하나 간직하게 됐다’면서 기뻐했다. 나는 지중한 인연이란 이렇게 상속부절로 돌고 도는 것이라는 것을 이 작은 일로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중노릇 해보면 참 좋아요. 세상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땀을 뻘뻘 흘려야 하지만 중은 앉아서 절도 받고 돈도 받고 그러잖아요. 세상에 이렇게 좋은 자리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 당신도 고단하게 살지 말고 중노릇이나 해보세요.”

스님은 가끔 시인 묵객들과 어울려 이런 농담을 건네곤 했다. 그러나 스님은 절 받고 돈 받는 일을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누가 절을 하려면 자주 맞절을 했다. 앉아서 받아야 할 절은 한 번만 하게 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시주님들의 절을 넙죽넙죽 받느냐는 것이었다. 돈은 절대 주머니에 오래 놔두지 않았다. 승속 간에 오가는 사람들 객비(客費)로 다 내놓았다. 스님은 때만 되면 제자들이 주지로 있는 절에서 모은 정재(淨財)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필요한 곳을 골라 여기저기에 나누어주었다. 잡지를 내고, 장학사업을 하고, 불우이웃을 돕고 이런저런 불사를 하는 데 쾌척했다. 수백억을 들여 지은 만해마을은 동국대학교에 기증했다.
“절 돈은 내 돈 아니다. 중들이 무슨 노동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걸 자기 통장에 넣어두려 하냐. 옛 스님이 재색지화(財色之禍)는 독사보다 무섭다 했다. 그러니 먹고살 것 빼놓고는 다 되돌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불교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는 길이다.”

지난해 겨울 결제일이었다. 밤 11시 반은 된 것 같은데 갑자기 조실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만해마을로 오라는 것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스님은 아주 맑은 얼굴을 하고 앉아 계셨다. 절을 하고 가만 있었더니 ‘요즘 사는 게 어떠냐’ ‘별일은 없느냐’ 하고 일상적이고 자잘한 질문을 했다. 나는 ‘별일 없습니다’라고 단답형 대답을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조실스님은 ‘그러면 됐다’고 하면서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라’고 했다. 나는 침구를 손보아드리고 옆방에서 코를 골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자 스님은 곧 무문관으로 들어간다면서 어서 가라고 했다. 나는 절 한 번 하고 나왔다. 스님 곁에서 잔 마지막 밤이었다.

조실스님과 이런저런 인연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형님이 한 분 있다. 지난봄 조실스님을 영결하던 날 그 형님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객석에 ‘시자 김병무’라는 이름표를 달아놓고 거기에 앉으라 했다. 내가 은사 스님과 조실스님 두 분을 모신 시자여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영결식이 끝나고 그 형님이 한참 하늘을 쳐다보더니 이런 질문을 했다.

“언젠가 사형님이 조실로 추대되던 날 네가 내게 ‘조실이 뭔지 아시우?’ 하고 물었잖아. 내가 우물쭈물하자 너는 ‘마음대로 하는 것이 조실입니다.’ 하고 자문자답했더랬지. 오늘 이 영결식을 보고나니 어떤 생각이 드는지 궁금하네.”

나는 영결식장에 걸린 조실스님 영정을 바라보며 지체 없이 이렇게 답했다.

“마음대로 하는 것이 조실이지요. 살아서는 사는 일을 마음대로 하고, 죽을 때는 죽는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조실이지요. 우리 조실스님이 그런 분이지요.”

그러자 형님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조실스님이 돌아가시자 여기저기에서 많은 기사가 났다. 문재인 대통령은 빈소에는 조화를 보내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는 기사가 났다.

불가에서 ‘마지막 무애도인’으로 존경받으셨던 신흥사와 백담사 조실 오현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의 한글 선시가 너무 좋아서 2016년 2월 4일 〈아득한 성자〉와 〈인천만 낙조〉라는 시 두 편을 페이스북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이제야 털어놓자면, 스님께선 서울 나들이 때 저를 한 번씩 불러 막걸릿잔을 건네주시기도 하고, 시자 몰래 슬쩍슬쩍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주시기도 했습니다. 물론 묵직한 ‘화두’도 하나씩 주셨습니다. 언제 청와대 구경도 시켜드리고, 이제는 제가 막걸리도 드리고 용돈도 한번 드려야지 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됐습니다.
얼마 전에 스님께서 옛날 일을 잊지 않고 《아득한 성자》 시집을 인편에 보내오셨기에 아직 시간이 있을 줄로 알았는데, 스님의 입적 소식에 ‘아뿔싸!’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스님은 제가 만나 뵐 때마다 늘 막걸릿잔과 함께였는데, 그것도 그럴듯한 사발이 아니라 언제나 일회용 종이컵이었습니다. 살아계실 때도 생사일여, 생사를 초탈하셨던 분이셨으니 ‘허허’ 하시며 훌훌 떠나셨을 스님께 막걸리 한 잔 올립니다.

나는 그 기사를 보고 스님은 대통령에서부터 길거리 노숙자까지 챙기지 않은 사람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만해 스님이 경허 스님의 행장을 쓰면서 ‘고승이 죽으면 허물은 사라지고 법(法)만 남는다’고 했다. 스님인들 왜 허물이 없겠는가. 약주도 자시고 담배도 피웠으니 스스로 말씀한 대로 ‘낙승(落僧)’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자였던 내가 보기에 조실스님 같은 분은 앞으로도 쉽게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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