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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내면의 권승 / 이홍섭
추모 특집 | 설악무산 스님, 그 흔적과 기억
[75호] 2018년 09월 01일 (토) 이홍섭 시인

1. 인연

설악무산 스님과의 인연은 내 나이 삼십 대 초반 초가을 어느 한 날에 맺어져, 내 나이 오십 대 중반 강릉의 한 병원 응급실까지 이어졌다. 이 질긴 인연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삼십 대 초반 어느 날, 기자 생활이 싫어 잠시 잠수를 탔던 나에게 고 이성선 시인께서 연락을 주셨다. 내설악 백담사의 어느 스님께서 이 시인을 찾으니까 한번 뵙고 오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당시 웬 스님이 나를 찾으시나 의아해했지만, 이성선 시인의 각별한 부탁이라 거절할 수가 없어서 홀로 내설악 산길을 올라갔다.

단풍이 막 물들던 초가을 내설악은 내가 그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천하의 절경이었다. 당시 내설악은 지금과 다르게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아무도 오르지 않는 길을 홀로 걸어 올라가며 여기서 딱 한 철만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님을 뵙고 나서 이 한 철이 수십 철로 바뀌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시 백담사는 건물이 달랑 몇 채밖에 없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체적으로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무장의 안내로 들어간 방 안에 한 스님이 몹시 피곤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당시 제대로 된 절도 할 줄도 모르는 청맹과니였다. 스님은 나를 뻔히 보시더니 “스님한테 절할 줄도 모르노. 원래는 세 번인데 빨리 한 번만 해라.”라고 말씀하셨다. 엉거주춤 절을 하고 일어나자 스님은 대뜸 “니 나하고 일 한번 안 할래?”라고 툭 던지셨다. 절은 스님들만 사는 곳인 줄 알았던 나는 금세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니 만해 스님 알제. 이제부터 내가 만해 장사를 좀 해볼라 하는데 일할 놈이 필요해서 니를 불렀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보름 정도 말미를 달라고 청했다. 그리고는 일주일 뒤에 다시 백담사를 찾았고, 스님과의 ‘만해 장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내 직책은 제3교구 소식지 《설악불교》의 주간. 백담사 중창과 ‘만해축전’뿐만이 아니라, 신흥사 본 · 말사의 소식 전반을 사부대중과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이 임무는 훗날 《낙산사보》를 창간해 낙산사 복원 불사를 알리는 데까지 이어졌다.
   
2. 꽃밭

어느 날, 스님께서 주섬주섬 가사장삼을 챙기더니 “오늘은 좀 먼 길이다. 괜찮재. 택시 불러 놨다. 가자.”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스님과 택시에 올랐다. 여러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스님의 고향 마을이었다. 스님을 모신 지 십여 년 동안 나는 스님에게서 고향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스님의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스님의 모친 얘기를 젊은 스님들에게 들은 적이 있다. 모친이 물어물어 아들을 찾아왔으나, 그 아들은 상좌에게 어머니를 잘 대접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끝내 도망치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스님께 언젠가 여쭤보리라 했는데 이루지 못한 터였다.

스님은 고향 변두리의 한 작은 여관을 잡았다. 그리고 짐을 풀었다. 다음날이 발인이었다. 그날 밤 스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장조카에게 시켰재.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을 꽃으로 덮으라고. 장례식장이 꽃밭이었을 거라. 내가 어머니 속을 참 많이 썩여드렸다. 너는 효도해라.”
스님은 덧붙이셨다.

“시골에서는 화환이 많은 게 제일이라. 아마도 어머니가 모셔진 병원에서는 자식이 대단한 고관대작쯤이라도 되는지 알았을 끼다. 세상사란 것이 그런 거다. 저세상 가시는 날까지 화환 하나 없이 쓸쓸해서야 되겠냐. 알겠재.”

발인 날 아침 나는 서둘러 스님 방을 찾았다. 스님은 가사장삼을 갖춰 입으셨으나 끝내 일어나지 않으셨다. “가서 친척들과 울고불고하면 뭐하겠노. 니나 가서 보고 와라.” 나는 스님께서 몰래 연락한 친척 두 분과 함께 장지가 있는 고향의 작은 마을을 찾았다. 사과밭이 유난히 많은 골짜기 마을이었다. 발인장에는 장지로 함께 떠날 두 개의 화환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스님과 인연이 깊은 모 총리 출신 인사와 총무원장 스님 명의의 화환이었다. 그 두 개의 화환을 보자 장례식장을 덮었을 꽃밭이 상상이 갔다.

장지까지 따라가 마무리까지 보고 여관으로 돌아와 스님께 말씀드렸다. “마을 입구 훤한 자리에 묻히셨습니다. 참 좋은 자리던데요.” 나는 묘소의 위치를 상세히 말씀드렸다. “그래. 해가 잘 들어야 할 텐데. 맞은편에 사과밭이 많지? 예전부터 사과가 많이 나던 마을이었지. 참 찢어지게 가난한 마을이었는데……” 스님은 이틀 동안 음식에 입을 대지 않은 채였다. 스님은 끝내 고향 마을에 들리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얼마 뒤 나는 할머니상을 당했다. 할머니가 모셔진 병원의 장례식장에는 화환이 적었다. 나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꽃집에 전화를 때렸다. 그리고 한꺼번에 여러 개의 화환을 주문했다. 물론 화환에 이름이 들어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나는 꽃밭 앞에서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머니가 이 세상 마지막 머무시는 곳을 꽃밭으로 꾸미신 스님의 마음이 더욱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3. 필화(筆禍)

스님께서는 여러 글과 인터뷰들을 통해 스스로를 ‘낙승(落僧)’이라 표현하셨다. 이 표현 속에는 일체의 형식을 싫어하시고, 평생 자유를 추구하신 스님의 면모가 잘 배어 있다. 낙승을 자처하셨던 스님께서 가장 싫어하신 말은 권승(權僧)이란 말이었다. 스님께서는 서울에 머무실 때도 조계사 근처로 가는 것을 극도로 꺼리셨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곳에서 이 권승이라는 말 때문에 필화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과정은 이랬다. 내가 그동안 발표한 글들을 모아 산문집 한 권을 낸 적이 있는데, 모 신문사 기자가 이 산문집이 마음에 들었는지 거의 지면 한 면을 통틀어 기사를 썼다. 당시 나는 그 기자와 일면식도 없었다.

출판사로서는 대박이 터졌는데, 나는 스님으로부터 피 터지는 독박을 썼다. 문제는 기사 속에 들어있는 ‘권승’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다.

기사 내용에 따르면, 기사를 쓴 기자가 몇 편의 산문 속에 등장하는 스님이 누군가 궁금해서 불교계 신문 기자들에게 물어보았더니 하나같이 설악산 주인이며, 종단을 움직이는 권승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기사를 본 스님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스님께서는 내가 기자 출신이고, 더구나 기사가 신문지면 한 면을 덮을 정도로 크게 나왔으니 당연히 그 기자와 술이라도 나누었을 것이라고 넘겨짚으셨던 것이다. 기자와 일면식도 없었던 나로서는 미칠 일이었다. 나 역시 권승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하던 터였기 때문에 더욱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스님은 한동안 나를 찾지 않으셨다. 나 역시 뿔이 나서 스님을 찾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과 나 사이를 잘 아는 지인 한 분이 찾아와 내가 먼저 스님을 찾아가 뵙는 것이 어떠냐고 넌지시 물어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스님께 편지를 썼다. 만약 내가 그 기자와 일면식이라도 있었으면 스님 앞에서 도끼로 혀를 자르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지금도 지인이 그 살벌했던 편지를 스님께 전해드렸는지 궁금하다. 얼마 뒤 스님께서 나를 다시 찾으셨는데 차마 편지에 대해 물어볼 수 없었다. 편지를 받아들고 간 그 지인도 얼마 뒤 병으로 세상을 떴기 때문에 끝내 편지의 소재는 확인해볼 수 없었다.

스님께서 입적하신 뒤 여기저기서 스님을 높이느라 여러 표현을 쓰는 것을 보았다. 그중에는 스님께서 극도로 싫어하신 표현들도 있었다. 생전이었다면 방과 할이 난무할 일이다. 늘 피부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 피모대각(被毛戴角)의 삶을 경계하셨던 스님께서는 임종게를 통해 이마저도 훌쩍 뛰어넘으셨다.
스님께서는 일평생 취모검 날 끝에서 삶과 죽음을 견주어보며 자기를 들여다보는 정진을 멈추지 않았던 진정한 ‘내면의 권승’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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