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특집 | 설악무산 스님, 그 흔적과 기억

무산 스님이 입적하신 후 곰곰이 손꼽아보니 나와 스님과의 인연이 40여 년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스님이 나에게 해준 언행은 하나하나가 큰 가르침이었다.

스님과의 첫 만남은 이러했다. 1977년 무렵, 이른바 국책사업, 대통령 역점사업의 일환으로 설악동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무산 스님은 신흥사 주지로 계셨고, 나는 이 사업의 실무 책임자인 강원도의 지역계획계장이었다. 사업지구가 설악산국립공원 구역 내이긴 해도 모두 신흥사의 사찰 땅이었고, 내가 속한 강원도는 사업 집행 주체였으니 우리는 서로 어떤 면에서는 협력적이기도 하고 상대적이기도 한 당사자로서 만난 셈이었다. 사업 진행 과정에서 양측은 서로 요청, 간청, 주장, 설득, 엄포(?) 등등의 첨예한 긴장 관계에 있었다.

하루는 스님을 뵈었더니 내게 “이번에 시집이라고 해서 만든 건데……” 하면서 책 한 권을 주셨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첫 시집 《심우도(尋牛圖)》였다. 나는 그 책을 받아들고 절에서 나와 절 앞쪽 다리 있는 등산로변 바위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얹어놓고 꼼짝하지 않은 채 단숨에 읽었다. 물론 그때는 내 공부가 짧아 그 시를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다 읽고 책을 닫는 순간 ‘아, 이제 내가 이 스님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건 설악동 사업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완료가 되었다. 첨예한 이해관계로 가장 심한 논란이 되었던 구설악동 지구는 보다 공공적인 성격의 지금의 소공원 형태로 정리가 되었고, 비선대, 비룡폭포, 계조암 등 3개 등산로변의 난립한 휴게소는 모두 18동만 새로 지어 존치하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설악산과 신흥사의 장래 가치를 위해서도 3개 코스 휴게소를 아예 모두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해관계와 민원들 또한 얼기설기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반발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사업을 마무리했다. 그 정도로 성과를 거둔 것만도 당시 상황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그야말로 ‘통 큰 결단’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스님은 그 후 평생을 두고 그 얘기만 나오면 후회를 했다. “그때 내가 김진선의 얘기를 들었어야 했는데……”라고. 설악동 정비사업이 맺어준 스님과의 40년 인연이다.

그로부터 15년쯤 후, 내가 강원도 기획관리실장으로 있다가 내무부 연수원 교육을 1년 다녀온 후 잠시 후속 인사를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내가 스님께 신흥사에 와서 책이나 좀 보며 쉬겠다고 했더니, 얼른 신흥사의 옛 주지 스님 방의 뒷방을 내주었다. 그 방은 내가 설악동 사업 때 스님 뵈러 가면 뒷방으로 가셔서 부스럭부스럭 곡차 한잔 준비해주시던 바로 그 방이었다. 나는 그 방에 있으며 ‘강원도를 위해 장차 무얼 해야 하는가’ 하면서 메모를 했다. 그것이 바로 ‘동계올림픽’이고 ‘속초 국제관광엑스포’였다. 그러니까 굳이 덧붙인다면 신흥사 뒷방이 평창동계올림픽의 산실이었던 셈이었다.

인연은 참 귀하고 묘한 것이어서 나는 그 후 다시 강원도 부지사로 부임했다. 그때 스님은 날 보고 만해기념사업을 하겠다고 제안하셨고, 나는 문득 만해 선사와 큰스님이 닮았고, 이건 ‘숙명’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로부터 도지사 3선 마칠 때까지 15년간 만해축전, 만해마을 조성 등을 함께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나는 만해에 대해 공부하면서 존경하는 인물로 ‘만해 한용운’을 꼽게 됐다. 이런 일들을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내가 군수직도 거치고 내무부에 올라와 과장을 하고 있을 적이었다. 1년에 한두 번씩 전세를 전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는 계기가 왔다. 공무원조합아파트 회원으로 가입한 것이다. 그렇지만 부금을 넣는 것이 자꾸 연체되어 끙끙거리게 되었다. 그 소문을 들었는지 어느 날 스님을 뵈었더니 ‘요새 세상에 군수까지 한 관직자가 제집 한 칸 없어 쩔쩔매는 주제는 청렴결백한 것이 아니라 불출(不出)이다’ 하고 혀를 찼다. 아마도 스님은 입적할 때까지도 나를 바라보면 ‘에고 불출 같은 화상아.’ 하셨을 게 틀림없다. 사실은 근래까지도 뵈올 때마다 입에 풀칠하는 일을 걱정하셨으니까.(스님, 늘 걱정만 끼쳐 죄송합니다.) 

2004년도 이쪽저쪽 기간 동계올림픽 관련하여 강원도와 전라북도가 유치 도전권 때문에 첨예하게 맞붙어 샅바 싸움을 하고 있을 때였다. 스님이 어느 날 내게 “김 지사, 고마 그거 손 탁 놓고 전북에 넘겨줘 버리소.” 하셨다.

나는 얼핏 알아차리고 있었다. 스님이 그냥 그러시는 게 아니라 뭔가 정치적인 그림을 그려보면서 그러신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이것만은 끝내 스님 뜻을 따를 수 없었다. 왜인가? 그럴 경우 전북에는 중요한 경기종목의 올림픽 기준 시설이 안 되기 때문에 전북은 물론 자칫 한국이 올림픽을 영영 유치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원칙과 진실에 관한 문제이어서다.

스님 입적하시기 두 달 전쯤 어느 날 전화를 해 만해마을로 나를 부르셨다. 갔더니 이런저런 얘기를 마치 무언가 총정리하듯 하셨다. 언젠가부터 큰스님께서 장래를 생각해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계시는 것은 나도 진작부터 알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날은 얼른 들으면 평소와 비슷한 말씀 같긴 해도 자세히 들으니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건 유언 같은 말씀이다’라는 생각에 미쳤고, 반사적으로(평상시는 그런 적 없는데) 수첩을 꺼내서 말씀의 핵심을 메모하면서 듣기 시작했다. 메모는 대충 이러했다.

-나는 살 만큼 살았고 이제 더 살기 싫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것도 어렵지만 죽는 것도 쉽지 않다.
-병원에서 준 약 그대로 저기 있다. 그 약 먹으면 머리가 멍해져 싫고, 안 먹으면 속이 쓰리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다. 그래서 곡차를 좀 먹는다. 그라문 견디고 잊을 수 있어 그런다.
-내가 저 해골(늘 방에 두고 있던 해골상을 가리키며)을 평생 화두로 삼아오지 않았는가.
-사람은 누구나 결국에는 회한을 남기게 마련이다.

이런 말씀에 더해 그간 정리했던 몇 가지 일에 대해서도 얘기했고, 용대리 주민 대표에게 친필로써 사인까지 한 이른바 ‘유언장’(이미 잘 알려진)에 담긴 내용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평상시 자랑하는 법이 없던 스님이 그날따라 미국 등지에서 받은 무슨 인증서 같은 것 등등 죄다 꺼내놓고 읽어보라고도 하고 사진도 찍으라고 했다.

스님은 그간 내가 오대산 자락에 컨테이너 마련해놓고 지내는 것에 대해 몇 번씩이나 걱정하면서 만해마을에 와있으라고 강권했는데, 그날 다시 그 얘기를 꺼냈다. 만해마을에 와 있으면 거주비가 들 텐데 그건 당신께서 조치해 놓겠노라고까지 했다. 내가 오늘은 안 되겠다 싶어 “그 문제에 대해서는 검토해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3일 후인가 만해마을 교육원장이 내게 전화해 큰스님께서 1년 치 거주비용을 결제하시면서 김 지사 방 준비하라는 당부를 하셨다고 했고, 이에 나는 곧바로 원장 등을 만나 1년에 한겨울 4개월만 와 있겠다고 정리를 했다. 스님은 나와는 그걸 마지막으로 원적(圓寂)에 드셨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렇게 권하기 전에 누구를 보내 오대산에 머물던 내 거주 형편을 살펴보고 오라고 했단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어찌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스님과의 약속인 겨울만이라도 만해마을에 가 있기로 한 약속은 도저히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스님 안 계시는 만해마을은 마음이 허전하여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다.

스님은 나의 이런 말을 들으시면 또 “허허, 거 참!” 하며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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