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특집 | 설악무산 스님, 그 흔적과 기억

첫 번째 만남

백담사에서 처음 만해축전이 열렸던 해의 일이다. 만해 한용운의 문학을 새롭게 평가하는 심포지엄에서 나도 논문 하나를 발표하게 되었다. 백담사 경내에 들어서면서 나는 만해 한용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이 산사에서 뜻밖에도 아주 소중한 노스님을 한 분을 처음 뵙게 되었다. 허름한 승려복의 노스님이 절간 마당에 떨어진 휴짓조각을 주워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그 노스님은 경내로 들어서는 우리 일행을 향하여 합장하시면서 어디서 오시는 분들이신가 하고 물었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숙여 절하고는 각자 자기 이름을 대었다. 나도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문학평론가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이 스님은 내 말을 듣고는 크게 웃으신다.

“쓸데없는 공부에 매달려 계신 분이로구먼. 문학평론이라니…….”

나는 깜짝 놀랐다. 처음 뵙는 스님인데 이런 식의 대화에 내가 어떻게 응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저 멋쩍게 웃고 말았다.

“평론이라는 것은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참 허망하기 짝이 없는 언어의 그물질이지요. 바탕 자체가 없는 글이 되기 쉬우니까요.”

나는 어이가 없었다. 비평 활동을 그래도 수십 년간 해오면서 이런저런 책을 내기도 했는데, 이 노스님은 그것을 허망한 그물질이라고 지적하신다. 내 표정이 굳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셨는지 그 노스님이 내게 다시 한마디를 더 하신다.

“글이란 자기 혼이 담겨야 제 글이지요. 그런데 요즘 평론이라는 것은 대개 남이 만들어 놓은 방법론을 빌려다가 다른 사람이 쓴 작품 가지고 왈가왈부 시시비비만 하지요. 그러니 허망할밖에요.”

노스님은 말씀을 마치면서 “그냥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하고는 내 손을 잡아주신다. 나는 노스님의 말씀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나 자신이 해 오고 있는 문학 공부의 허점을 그대로 지적하신 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그만 기가 죽었다. 마치 크게 한번 ‘할방’이라도 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 노스님이 궁금했다. 그 노스님이 설악산 신흥사의 회주이신 조오현 스님이란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마지막 말씀

미국 뉴욕주립대학의 하인즈(Heinz Insu Fenkl) 교수가 연락해 왔다. 하인즈 교수는 무산 조오현 스님의 시조에 빠졌다. 불교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으며 동양 사상이나 철학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다. 그가 조오현 스님의 시조를 읽고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전 세계 시인들 가운데 선시(禪詩)를 직접 쓰고 있는 현역 시인으로 무산 스님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스님의 선시는 그 의미가 아주 깊은데도 쉽게 이해된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는 스님의 작품 가운데 선정(禪定)의 세계를 그려낸 단시조 108편을 골라 번역하여 For Nirvana(적멸을 위하여, 컬럼비아대학 출판부)를 수년 전에 발간했다. 그리고 다시 《절간 이야기》의 영역본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인즈 교수는 《절간 이야기》에 조오현 스님의 새로 쓴 서문을 꼭 실었으면 한다면서 내가 여름방학에 한국에 나가게 되면 스님께 부탁을 올려달라고 했다. 나는 미국 출발 전날, 백담사 무금선원에 연락을 했다. 지난해 식도암 수술을 받은 후 스님은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그대로 절간에 머물러 계셨다. 한국에 도착하면 선원으로 큰스님을 찾아뵙겠다는 말씀도 드렸다.

내가 백담사를 찾은 것은 지난 5월 24일이었다. 부처님오신날이 지난 뒤였다. 시자(侍者)가 나를 스님 계신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스님은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다. 많이 야위신 모습이었지만 그 카랑카랑하신 음성은 여전하였다. 큰스님은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박사님은 언제까지 버클리대학에서 가르치실 것인가요?”

“당초에 약속이 2020년까지입니다. 그런데 내년까지만 하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스님은 그렇게 약속을 바꾸어도 되는 일인가를 내게 물으셨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했다.

“박사님 돌아오실 때까지는 살아 있을 겁니다. 의사도 한 3년은 문제없다고 하였으니. 임기 다 마치고 맡은 일 잘 마무리하고 오세요.”

나는 큰스님의 음성으로는 앞으로 10년도 걱정이 없어 보이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인즈 교수가 부탁한 영역 《절간 이야기》의 서문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큰스님은 손을 내저었다.

“그 책에 무슨 서문이 필요가 있나요? 그냥 엮어내라고 하세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이야기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그 말씀에 더는 책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자리를 뜨려 하자 큰스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그 책에 서문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반갑게 “예.” 하고 대답을 드리니 큰스님은 《절간 이야기》 가운데 일곱 번째 것을 서문으로 쓰라고 하셨다. 나는 분부대로 하겠다고 인사를 드린 후 방을 나왔다. 시자가 나를 따라오면서 큰스님이 오늘 아주 즐거우신 모습이라고 귀띔했다. 그리고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벌써 두 달 가까이 조석 공양을 거의 못하시지요. 겨우 미음 조금 넘기시는데 요즘은 그것도 힘들어하십니다.”

큰스님 암 수술하신 부위의 식도가 거의 막혀서 음식을 삼키실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곡차(막걸리)로 입을 추기실 뿐이라면서 한숨을 쉬었다. 다시 수술하여 식도로 관을 삽입해야 한다는데 큰스님은 그런 의사의 처치를 듣지 않으신다고 했다. 아무래도 큰스님이 걱정이라는 것이다.

나는 하룻밤 백담사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저녁 공양 끝나신 후에 잠깐 다시 큰스님을 뵈올 생각이었다. 그리고 시자가 정해주는 방에 들어와 가방을 풀고 노트북을 꺼냈다. 컴퓨터에 보관된 파일 가운데 내가 엮었던 큰스님의 시 전집 《적멸을 위하여》(문학사상사)를 열었다. 거기서 《절간 이야기》의 일곱 번째 이야기를 찾았다. 그것은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이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임제 스님의 법제자 관계(灌溪) 스님은 임종하던 날 시자와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앉아서 죽는 것도[좌탈(坐脫)] 진기할 것이 없고, 서서 죽는 것도[입망(立亡)] 신통치 않고, 거꾸로 서서 죽는 것도[도화(到化)] 그리 썩 감심(感心)이 안되니……. 옳지! 나는 이렇게 가야겠다.”
하고 일어나 마당에 가서 잠시 서 있다가 한 발짝, 두 발짝,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발짝까지 걸음을 떼어놓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 걸어가던 모양 그대로 죽었답니다.
이 일화를 우리 절 늙은 부목처사에게 했더니 부목처사는 뻐드렁니를 다 내어놓고
“살아보니 이 세상에서 제일로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은 아무래도 죽는 날이 될 것 같니더.”
하고 빙시레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다시 큰스님을 뵙지 못했다. 큰스님은 절 아래 주민들을 불러 밤이 늦도록 말씀을 나누셨다. 대신에 나는 방에서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을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밤잠을 설치면서 설악 백담의 계곡 물소리를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큰스님은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다. 나에게 서울로 올라가라고만 하셨다. 밖에 병원의 응급차가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설악산문에 선원을 크게 열어 놓고 현대 선시조를 개척하신 무산 조오현 대종사는 2018년 5월 26일 열반에 드셨다. 큰스님은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을 그렇게 택하셨다. 스스로 떠나실 날짜를 혼자서 가늠하셨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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