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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산(霧山)의 다섯 얼굴 / 이근배
추모 특집 | 설악무산 스님, 그 흔적과 기억
[75호] 2018년 09월 01일 (토) 이근배 예술원회원 · 중앙대 초빙교수

1. 총통각하(總統閣下)

나는 산을 모른다. 겨레의 영산(靈山) 백두산 천지를 일곱 번이나 근참(覲參)했어도 그 천변만화, 불가사의를 어찌 이를 수 있으랴. 중국의 어떤 시인이 “고려 땅에 태어나서 금강산 한번 보았으면(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하고 소원했다는 금강산을 네 번이나 발걸음했어도 산을 보았다고 할 수가 없으니 그렇다.
어디 백두, 금강뿐이겠는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라도 산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늘 하물며 짙은 안개로 몸을 가린 산의 얼굴을 누가 보았다 하겠는가. 그런데 부처님의 가피(加被)신가. 반세기 저쪽 내 서른 살 때 스님 시인 무산(霧山) 조오현을 만난 것이다.

1960년대 초 · 중반만 해도 우리나라 시조단은 영성(零星)하기 그지없었다. 1964년 12월 30일 한국시조작가협회 창립 때 스무 명 남짓하였으니, 시조에서 신인 하나가 탄생하는 것이 크게 주목을 받을 때였다. 그때 조오현은 산도 아니었고 더욱 안개산은 아니었다. 1968년 《시조문학》 추천으로 등단했을 때, 조오현은 그저 시인이었다. 설악무산을 법호(法號)로 쓰기 시작한 것은 훗날 설악산에 주석하면서부터다. 조오현은 언제나 김정휴와 붙어 다녔다. 김정휴는 기골이 장대하고 눈이 부리부리해서 율 브리너 같았는데 그에 비해 조오현은 꼬장꼬장한 스님티가 역력했다.

1970년대 들어서부터인가. 우리는 두 분을 ‘정휴당(正休堂)!’ ‘오현당(五鉉堂)!’ 하고 집 당(堂) 자를 붙여서 불렀다. 시조단뿐만 아니라 문단에서 나는 비교적 두 당(堂)과 가까웠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정휴당이 오현당을 ‘총통(總統)’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총통이라면 대만에서 장개석 이름 뒤에나 붙는 호칭인데, 스님이자 시인인 조오현에게 왜 최고 권력자에게 주는 칭호를 쓰는 것일까?

지금 생각하면 한 번쯤 물어볼 만도 한데 나는 그저 그럴 까닭이 있으려니 하고 흘려만 버리고 있었다. 그 총통각하께서 열반하시매 아하! 나는 그제야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렇다. 안개산의 얼굴은 하나의 ‘총통각하’였다. 절대권력자의 아우라와 위엄이 있고 그 안에는 만 중생에게 은혜와 복락을 베푸는 원력이 있음이라. 정휴당은 그 부리부리한 눈으로 일찌감치 이를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2. 사화집 《심우도(尋牛圖)》

금오산(金烏山)은 구미시, 칠곡군, 김천시의 경계에 걸쳐 있는 산인데 구미시 남통 동쪽 금오산 마루에 해운사(海雲寺)가 있다. 1973년 겨울 그 절 주지로 계신 조오현 시인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까닭인즉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직을 놓고 나의 은사이신 김동리 선생과 《현대문학》 주간인 조연현 선생이 나라를 두 쪽 낼 것 같은 대전을 벌였는데, 어느 날 이문구가 찾아와서 시조분과 회장으로 나가달라는 것이었다. 장순하, 이우종 두 분이 이태극 선생의 뒤를 잇는 시조분과 회장에 출마했는데 모두 조연현 깃발을 들었으니, 당선은 어렵겠지만 김동리 쪽에 누구라도 이름을 걸쳐야 하지 않겠느냐는 설득에 나는 덜컥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표가 많은 대구에 가서 이호우, 이우출, 배병창 등 ‘낙강’ 동인들을 만나고 아직 군인이던 이상범 소령과 해운사에 한 표 얻으러 갔다. 케이블카를 타고 금오산을 오르니 시골 큰 대감댁 행랑채만큼이나 작디작은 절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주지 스님은 천 원짜리 노잣돈 한 푼 챙겨주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그리고 서너 해쯤 지났을까. 오현당이 설악산 신흥사 주지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는데 1978년 어느 가을날 오현당께서 첫 사화집 《심우도》 원고를 들고 북창동 한국문학사로 찾아오셨다. 그간 정도 들었던 터라 여러모로 내게 맡기는 것이 편했던지 몇 자 발문까지 쓰라고 했다.

나는 시고(詩稿)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눈을 씻고 또 씻었다. 산승(山僧)이 쓰는 시조가 그저 그러려니 했더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디 문예창작과나 국문과를 다닌 것도 아니고 깊은 산사에서 독경이나 하고 절 살림하는 수행자 신분인데, 어디서 이런 읽어낼 수조차 없는 글자들을 쏟아낸단 말인가? 그때라도 좀 더 눈 밝고 귀 밝은 이에게 발문을 넘길 것을 에라 모르겠다 하고 책 뒤에 붙여냈으니 이 부끄러움을 어찌할꼬! 다만 당대 최고라는 일중 김충현의 제자(題字)에다 포크로스 은박 하드커버에 케이스까지, 지금 봐도 당시 시집으로는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게 책을 꾸몄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3. 토함산 불국사 통일대종

1987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미국에 가서 영어라고는 “디시 워시(dish wash)” 한 마디만 하다 돌아온 무산 스님이 광화문 내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반갑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데, 꽤 두툼한 봉투를 불쑥 건네며 토함산 불국사에서 통일대종을 주성한다는데 거기 종신에 새길 명문(銘文)을 원고지 5장만 써보라는 말씀이었다. 200자 원고지 5장에 50만 원이면 한 장에 10만 원이니 나로서는 높은 글값이었다. 서울올림픽을 기념하여 조성하는 성덕대왕신종보다 2배 크기의 세계 최대의 범종에 새길 글을 지으라고? 원고료를 받았으니 써보긴 해야겠는데 불교라는 높은 산 깊은 강을 내 어찌 넘겨다볼 것이며 무딘 솜씨로 무엇을 쓸 수 있으랴. 그래도 글값을 해야겠기에 어름어름 몇 자 써서 갖다 드렸더니 한 달쯤 뒤에 총통께서 다시 찾아오셨다. 이번에는 아주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내 어쭙잖은 글이 ‘합격!’이란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나 2백만 원을 손에 쥐었으니 그저 감읍할밖에.

사연은 이랬다. 1차로 문단, 학계, 언론계의 노대가들에게 원고청탁을 했었는데 모두 부적합 판정이 나서, 제2진으로 청탁할 때 총통께서 글값이나 챙겨주려고 나를 추천했는데 황소가 뒷발로 우렁이 잡듯이 내 글이 당선작이 된 것이다. 총통께서도 속으로 흡족하셨을 것이고 나 또한 총통의 체면을 세워드린 것이 기뻤다. 그 종명(鍾銘)이 소문이 나서 불교방송 개국 모연문, 개국식 발원문, 개국기념탑 비문 등을 비롯해 큰절의 불사에 글 심부름을 했으니 총통께서 베푸신 큰 은총을 세상에 알리지 않을 수 없다.

4. 현대시조 100년 대회

마침내 설악산 산감(山監)(무산 말씀)으로 신흥사 주지에 복위(復位)하신 무산 스님은 백담사 중창(重創)을 이루시면서 1926년 만해 선사가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을 지으신 것과 독립운동, 불교유신 등 항일기(抗日期)에 끼치신 업적을 기려 ‘만해축전’을 일으켰다. 국가와 민족, 종교와 이념을 뛰어넘는 ‘만해대상’은 평화, 실천, 예술 등 각 분야에서 큰 업적을 쌓은 이 시대 스승들을 찾아 시상함으써 국격을 높이고 불교의 위상을 널리 심어주었다.

2005년에는 만해축전의 하나로 월레 소잉카 등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하여 세계 40여 개국 대표 시인들과 한국 시인들이 금강산에 가서 ‘세계평화시인대회’를 열었다. 북한에서도 참가하기로 약속이 되었었는데 갑자기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불발되었으나, 하나뿐인 분단국가에서 통일 염원의 시인대회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스님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시조 중흥에 남다른 마음을 썼다. 금강산을 다녀오고 두 달쯤 뒤 스님에게서 아주 특별한 전화가 왔다. “내년 만해축전에는 시조대회를 하고 싶은데 사천이 맡아주시오.” 1961년 시조로 등단한 뒤에 이름만 걸어놓고 한 일이 없는데 내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준 것이다. 나는 먼저 현대시조의 발원지를 찾는 공부부터 시작했다. 육당 최남선은 시조집 《백팔번뇌》 후기에서 “시조로 처음 활자에 신세 지은 지 스물세 해”라 했으니 1903년이 현대시조의 원년이 될 것이나 작품을 찾을 길이 없었다. 학자, 교수, 시인들과 토의를 거듭한 끝에 1906년 7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대구여사가 발표한 〈혈죽가〉 3수가 기록으로 나온 최초의 시조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하여 2006년을 ‘현대시조 100년의 해’로 선포하기로 했다. 7월 21일을 ‘시조의 날’로 선포하고 ‘세계민족시대회’ ‘한국대표시조 작곡발표음악회’ ‘한국시조 100선 출간’ 등의 행사를 서울과 만해마을에서 벌였다. 전국에서 시조 중흥의 횃불이 타올랐다. 마침내 ‘시조여! 시조 만세!’가 백두대간을 흔들던 대역사였다.

5. 《한국대표명시선 100》

내가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다. “시로 해가 뜨고 시로 달이 지는 나라, 시로 농사짓고 시로 길쌈하고 시로 나라살림 하는 나라.” 그렇다. 이 겨레는 누구랄 것도 없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인’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이것은 저 향가에서부터 내려오는 시의 역사가 증거하는 것이요, 대학에서 시 창작을 가르치면서 저절로 머릿속에 박힌 생각이기도 하다. 1만 명을 헤아리는 시인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시를 쏟아내고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책의 나라인데, 정작 겨우 신문학 백 년 한국시문학사를 담아내는 시집은 서점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 터에 한번은 무산 스님이 “사천 선생! 우리 문학에 꼭 필요한 숙제가 있으면 계획서를 만들어 와요.”라고 했다. 나는 그 사업이라면 현대시, 시조를 아우르는 ‘한국대표명시선 100’ 출판이라고 했더니 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내로라하는 문학 출판사들이 시집을 발간하면서도 시문학사를 꿰는 시 전집을 내지 않(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A회사는 친일 등 이유를 붙이지만 이념적 순종주의를 고집하고, B회사는 아예 1950년대 말 이후로 선을 긋고……, 이쪽저쪽 이러저러한 장애물이 걸려서……못하는 것이었다. 단순무식이 전 재산인 나는 막무가내로 자유시와 시조를 통합하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한국시문학사를 바로 세우는 작업에 들어갔다. 시간은 촉박했지만 ‘만해축전’에 맞추어 완벽까지는 어렵더라도 ‘그만하면’이라는 평을 들을 수 있도록 안간힘을 썼다. 이 노력이 낙제점은 아니었던지 스님은 5대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해서 이 사업의 성공을 알리라고 했다. 《한국대표명시선 100》은 이렇게 스님의 후원으로 한국시문학사와 출판 역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을 세우게 된 것이다.

좁은 지면에 급하게 쓰다 보니 글이 천방지축(스님의 임종게)이고 정작 남은 이야기는 대하(大河)인데, 안개산 얼굴을 내 어찌 다 그릴 수 있으리오. 무산 큰스님 한 번만 더 뵈오면 안 되나요?


 lkb.4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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