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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이 세상을 바꾼다 / 박병기
특집 | 좋은 말 나쁜 말 그리고 불교
[75호] 2018년 09월 01일 (토) 박병기 bkpak15@knue.ac.kr

1. 머리말

말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이 물음은 한편으로 말의 힘을 묻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과 사회 자체의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사회변동론적 차원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그중에서 변동은 사회와 세상의 변동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따라 각각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열려 있지만, 적어도 바뀐 부분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확인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는 사회학적 개념이다.

우리말에서 변동(變動)과 변화(變化)는 서로 바꿔 쓸 수 있을 만큼 유사성을 지니지만, 전자가 좀 더 변화의 과정 자체를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일정한 차별성도 확보될 수 있다. 변화 또한 과정을 제외시키는 개념은 아니지만, 그 초점이 이전과 대비해 바뀐 상태에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차이에 유의하여 변화보다는 변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좀 더 엄밀할 수 있지만, 일상의 어법을 감안하여 혼용하되 변화라는 개념을 주로 사용하고자 한다.

‘말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말을 통한 세상의 변화 과정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을 통해 세상이나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그 세상 또는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을 바꾸는 것과 함께, 세상 또는 사회 자체의 변동을 시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둘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회 또는 공동체가 그 구성원들의 단순한 총합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명제가 통용되고 있는 현대 사회과학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그것 자체의 변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사회변동을 야기하는 많은 가설 중에서 혁명적 상황의 초래와 그 상황을 주도하는 혁명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것으로 부각되어 왔다. 러시아의 레닌과 중국의 마오쩌둥 등이 그런 인물들로 평가받아왔고, 그들이 중심 역할을 담당한 혁명은 20세기 인류 역사를 뒤흔든 변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의 혁명은 사회구조의 변화는 가져왔지만, 우리가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뒀는지에 대해서는 21세기 접어들면서 회의적인 시각들이 커지고 있다. 사회구조조차 다시 자본주의적 형태로 회귀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말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를 묻는 일은 사회구조의 차원이 아닌 각 개인이 사용하는 말과 그 말들의 주고받음인 대화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를 묻고자 한다는 점에서 사뭇 다른 층위의 느낌을 받게 한다. 개인과 사회 또는 공동체의 관계를 설정하는 이론 중에서 개인은 수많은 구성원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라는 관점은 거의 폐기되었지만, 현실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체감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가 과연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 하는 물음에 많은 사람이 부정적인 답을 찾게 되는 배경이 바로 이러한 개인의 왜소화 현상과 연결되어 있다.

한 개인과 그 개인이 사용하는 말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일정한 차별성을 지닌다. 한 개인이 사용하는 말이 그가 속한 사회 속에서 유효하게 작동할 수 있으려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언어게임의 규칙’을 준수하고 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그가 모국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체득했을 그 규칙을 제대로 준수할 때라야 비로소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도 전달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은 그 사회의 언어게임의 규칙을 내면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 언어게임은 다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개인들 사이는 물론 사회 전반의 독자적인 규칙을 전제로 작동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이 글의 초점은 한 사회 안에서 말의 위상과 역할에 맞춰져 있고, 그중에서도 변동의 차원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말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명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전제 속에서, 특히 붓다의 언어관에 근거해서 그 가능성과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것이 목표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명제, 즉 말이 세상을 바꾼다는 명제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근거를 붓다의 언어관과 실천의 맥락 속에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2. 붓다의 언어와 질문 유형에 따른 답변

붓다가 깨달은 진리는 다양한 형태와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져왔다. 전법(傳法)이라는 개념으로 상징되는 그 과정은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에서 불교(佛敎)의 핵심 과정이자 요체이다. 삼법인과 사성제, 팔정도로 이어지는 붓다의 진리는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포괄성과 총체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중에서도 주로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전하는 도구 또는 방편으로서 언어다. 진리를 깨닫고 난 후 그것을 전하는 일이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제대로 알아들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설령 알아들었더라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사람은 더욱 없을 것이라는 붓다의 전법 회의주의에 다른 의견을 갖고 접근한 것은 범천(梵天)이었다. 분명히 들을 귀가 있는 자가 있고, 그렇게 들은 자 중에서는 그 진리를 실천에 옮겨 열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범천의 간청은 불교, 즉 붓다의 가르침을 가능하게 한 촉매제가 되었다.
범천의 존재 양상을 놓고는 실재한다는 입장과 붓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존재자라는 입장 등으로 나뉠 수 있지만, 그 존재가 지니는 역할의 비중은 적지 않다. 우선 그는 붓다의 전법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고, 더 나아가 말로 진리를 전하는 일의 가능성과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세상 사람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들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는 불교의 성립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인간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꼽혀온 말 또는 언어에 관한 주목은 20세기 초반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로의 전회’를 통해 서양 현대철학의 중심 내용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주장은 모든 언어는 그것이 작동하고 있는 사회 또는 공동체의 언어게임의 산물이고 그런 점에서 온전히 개인적인 언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과, 그 언어로 표상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고 그런 영역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두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그 침묵의 영역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물음과 관련되는 윤리학과 종교의 진리가 포함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붓다의 진리는 침묵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말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명료하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철학의 역할이 부각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이후 분석철학 중심의 20세기 서양철학사의 중심인물로 자리하게 된다. 특히 그는 글과 대화에서 사용하는 개념의 명료성을 강조했고, 그것은 논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붓다의 언어는 어떨까? 기본적으로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다른 접근법을 택했던 붓다에게는 언어와 그 너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염화미소(拈花微笑)의 침묵과 초기경전의 수많은 반복적인 말씀들이 공존하는 붓다의 전법은 논리적인 차원에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한 지점을 보유하고 있었다.

비구들이여,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이 토론하기에 적합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그 사람이 질문을 받을 때 단언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질문에 대해 단언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분석해서 설명해야 하는 질문에 대해 분석해서 설명하지 않고, 되물어서 설명해야 하는 질문에 대해 되물어서 설명하지 않고, 제쳐두어야 할 질문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토론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다.

설법의 과정에서 대화와 토론의 중요성에 주목한다는 전제 속에서 붓다는 토론하기에 적합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다양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 인용에서는 우선 질문의 유형에 맞는 답변이 가능한 사람이 토론하기에 적합한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 이상의 상세한 설명이 필요 없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언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분석적으로 설명하거나 되물어서 설명하고, 아예 제쳐두어야 할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것이 붓다의 질문에 답하는 법이다.
먼저 단언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질문에 대해 살펴보자. 주석서에는 그 구체적인 사례가 제시되어 있다.

“눈은 무상합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물론입니다.”라고 단언적으로 설명을해야 한다. 이것이 단언적으로 설명을 해야 하는 질문이다.

붓다가 깨달은 진리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초기경전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기 마련이다.’라는 무상(無常)의 진리다. 이런 진리와 관련된 물음에 대해서는 당연히 망설임 없이 단언적으로 답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법인의 하나이자 사성제의 기본 전제가 되는 무상의 진리는 연기적 의존성과 공(空)의 진리로 이어지면서 불교의 핵심 관점을 이룬다. 이와 관련된 물음에서는 망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임을 확인하게 되는 지점이다.

그런데 어떤 질문은 그렇게 단언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분석적으로 설명하거나 되물어서 설명해야 한다.

“무상하다는 것은 눈을 말합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귀도 무상하고 코도 무상합니다.”라고 분석한 뒤에 설명해야 한다. 그것이 분석해서 설명해야 하는 질문이다.

“눈처럼 귀도 그러하고, 귀처럼 눈도 그러하지요?”라고 물으면, “무슨 뜻으로 물은 것입니까?”라고 되물은 뒤에 “본다는 의미로 물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해야 한다. “무상하다는 뜻으로 물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렇습니다.”라고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되물어서 설명해야 하는 질문이다.

분석해서 설명해야 하는 질문은 주로 개념의 외연(外延)이 명료하지 않은 채 던져지는 것이다. 무상한 것의 범위가 눈에 그치지 않고 귀나 코 등까지 확장되어야 하는데, 질문자가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일깨워주는 방식으로 분석(分析)을 택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되물어야 하는 질문은 포함된 개념의 내포(內包)가 명료하지 않고 애매한 경우에 해당한다. 눈의 무상을 말하고 있는데, 보는 기능에 초점을 맞춰 질문해 오면 그렇지 않다고 다시 초점을 무상으로 돌리기 위해 되묻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과 되물음의 과정은 스스로의 질문 속에 포함된 문제들을 본인이 제대로 알지 못할 때 깨우쳐주기 위해 택하는 대화와 토론의 과정이다. 실제로 우리의 대화와 토론 속에는 분석과 되물음이 필요한 질문과 답변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진행하고자 할 때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겉돌고 마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말을 통해 전할 수 있는 진리는 먼저 말의 논리에 충실함으로써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마지막 질문의 유형으로 ‘제쳐두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

“생명이 바로 몸입니까, 아니면 생명과 몸은 다릅니까?”라는 등의 질문에 대해서는 “세존께서는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제쳐두어야 한다. 이것이 제쳐두어야 하는 질문이다.

붓다의 무기(無記)와 관련된 질문에 관한 대응을 확인하는 부분이다. 생명이 몸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것인지를 묻는 질문은 진리를 전하는 일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그럴 경우에는 붓다께서도 답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제쳐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좀 더 세심한 고찰이 필요하다. 생명이 몸인지를 묻는 것이 진리를 전하는 일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지를 따져볼 수 있는 여지가 남기 때문이다. 만약 현대철학에서 부각되고 있는 몸철학의 관점에서 몸이 생명인지를 묻고 있다면, 이 물음은 그 생명으로서 몸의 무상성을 묻는 질문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고 불필요한 말싸움을 일으킬 목적으로 그렇게 묻고 있다면 제쳐두는 것이 토론의 진행을 위하여 도움이 된다.

이처럼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전하기 위해 침묵과 언어라는 두 통로를 모두 활용했고, 언어의 경우에는 논리와 분석을 경시하지 않는 자세를 보여주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특히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대화와 토론을 통한 진리에의 접근은 중시했고, 그 과정에서 질문의 유형에 따라 다르게 답변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질문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단언적으로 답변해야 하는 질문과 분석하거나 되물어서 답변해야 하는 질문, 제쳐두어야 하는 무기(無記)의 질문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질문의 유형에 따른 바른 대답이 주어질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면, 대화와 토론의 질은 높아질 수밖에 없고 그 과정과 결과 속에서 진리가 제대로 전달될 가능성 또한 당연히 높아지게 된다.


3. 말을 통한 사회변화 가능성과 은유의 실천력

가. 말을 통한 사회변화 가능성

사회변화를 추동하는 요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할 수 있고, 그 결과 역시 다양한 요인의 추출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사회변화를 초래하는 요인으로 과학기술의 발달 등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를 중심이 두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청교도 정신 같은 정신적 요소를 자본주의 형성과 발전의 추동력으로 보는 베버적 관점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서구 근대의 발전 과정에 주목하는 사회과학적 논의가 20세기 이후 대표적인 사회변동론으로 자리 잡아 우리에게도 전해져 통용되어 왔다.6)

그런 관점들은 이후 자연주의가 확산되면서 몸과 마음의 불이성(不二性)을 전제로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물질과 정신 사이의 유기적인 연계성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요구와 만나고 있다. 인간의 삶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적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물질적 기반에 온전히 함몰되는 것은 아니다. 즉 초월의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고, 우리는 그 가능성을 여러 가지 이유로 음식을 거부하는 단식 투쟁 등을 통해 확인하곤 한다.

이러한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삼아 인간과 사회의 변화 가능성에 관한 논의를 전개해볼 수 있다. 인간과 사회의 변화는 생산력의 증대나 감소 같은 외적인 여건의 변화에 따라 일어날 수 있다. 인류 역사 속에서 빙하기와 같은 흔적으로 새겨져 있기도 하고, 산업혁명에 따른 생산력의 급속한 증대가 가져온 생산 관계로서 사회구조의 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공업화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가 자유와 민주화를 향하는 욕구를 촉진시켜 민주주의 기반의 시민사회 정착으로 연결시킨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민주화의 과정 속에서 사회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다른 요인 하나를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변화의 요구를 온몸으로 표출하고 이끌었던 사람의 의지와 헌신이라는 변수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했던 말과 실천에 따른 열망의 공유이다.

우리는 이러한 요인들을 1980년대의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 2017년 전후의 촛불혁명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체험세계 속에서 확인하는 경험을 공유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처럼 사회변화를 추동하는 요인은 단지 물질적이고 외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이고 내적인 차원에서 더 강렬한 느낌으로 부각되어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린다.

이 작은 글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그중에서도 말의 힘이다. 말은 기본적으로 정신 영역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뇌에서 시작해서 구강을 통해서 발현된다는 점에서 육체적 기능으로도 분류될 수 있다. 말은 우선 감정과 무의식을 표출하는 통로이다. 잠꼬대나 단말마 같은 신음소리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이러한 말의 기능에도 충분히 유의할 필요가 있지만, 사회변화에 주목하는 우리의 관심사는 사회적 언어규칙 속에서 통용되는 일상 언어일 수밖에 없다. 그 일상 언어는 모국어 습득과정을 통해 각 개인에게 심어지고, 다시 지속적인 활용 과정이 더해지면서 사회적 언어게임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압력을 통해 의사소통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언어게임의 규칙은 기본적으로 사회질서의 유지를 전제로 작동한다. 현재의 질서를 규칙 자체 속에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을 담당하는 기성세대의 언어를 통해 그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가 담긴 언어를 지속적으로 전승함으로써 보수적 관점이 언어게임의 일차적 관점으로 채택된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성은 생산력의 변화나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통해 지속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기존의 언어게임 규칙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새로운 규칙 또는 혼란이 조성된다. 현재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인터넷 기반의 사회연결망 서비스(SNS)를 통해 확산되고 있는 ‘언어파괴’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언어파괴’라는 표현은 그런 점에서 새로운 언어게임 규칙의 등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기존의 규칙 안에 포함되어 있는 현행 사회질서의 유지 또는 강화에 저항하는 새로운 규칙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학문으로서 철학에서 세계를 변혁시키는 실천적 시도로 철학을 새롭게 정의하고자 했던 카를 마르크스의 관점 또한 노동과 잉여가치 중심의 새로운 개념 제시를 통한 사회변혁의 시도로 볼 수 있다. 그의 학문 자체를 변혁을 위한 언어게임 규칙의 변경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보면 사회변화가 언어게임의 규칙 변경을 초래하는 일과 언어게임 규칙의 변경은 서로 깊은 연관성을 지니면서 상황에 따른 선후 관계를 형성한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사회변화의 흐름이 언어에 반영되기도 하지만, 언어가 사회변화의 흐름을 이끌어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의 기본 질서에 일정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전환점에서 언어의 역할과 비중은 부각되고, 이때 변화의 핵심을 담아낼 수 있는 담화체계 또는 이론이 만들어지는 경우 그것이 변화를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진다.

말을 통한 사회변화는 이처럼 언어게임 규칙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 규칙은 다시 사회변화 자체를 담아내는 순환의 과정을 통해 그 시대와 사회의 언어게임을 이끌어간다. 결론적으로 말은 사회변화의 흐름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흐름을 이끄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역동성에 주목하면서 말의 변화를 언어게임의 규칙 변경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나. 은유로서의 사회변화

은유란 흔히 한 편의 시 속에서 등장하는 실재에 대한 상징적 묘사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랑을 장미꽃에 비유한다든지, 둘이 함께하는 여행에 비유하는 것을 은유(隱喩, metaphor)라고 표현한다. 이런 차원의 은유를 고전적 은유관이라 규정지으면서, 새로운 대안으로 개념적 은유이론(conceptual metaphor theory)을 제안하고 있는 레이코프(J. Lakoff)와 존슨(M. L. John-son)에 따르면, 은유는 그런 상징적 묘사의 차원을 넘어서는 물리적 과정과 실천적 힘을 지니는 개념이다. 

‘은유는 우리의 일상적인 무의식적 추론의 일부’이고, ‘인간의 몸이 세계 내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는 방식에 근거하여 학습하는 것’이다. 언어학자 레이코프와 철학자 존슨이 협업하여 정의하고 있는 은유는 이처럼 고전적인 은유 개념을 넘어서서 사고와 행위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된다. 우리는 은유라는 언어적 틀을 통해 사고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일상을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이 은유는 태어나 세상과 마주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하여 몸의 습관으로 갖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의 주장은 뇌과학의 성과에 기반한 인지과학의 틀 속에서 마련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들에게 은유는 단순한 상징적인 운문(韻文)의 수사가 아니고, 인간의 인지체계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자 사회적 실천의 기반이다. ‘우리 사랑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라는 문장 속에 포함된 의미를 가지고 그들의 생각을 더 쫓아가 보기로 하자. 이 은유는 사랑의 과정을 길을 걷는 일에 빗대 표현한 것이다. 이 문장에는 자신들의 관계에 대한 현실의 인지와 차후에 이루어져야 하는 자신의 실천 지향이 모두 담겨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유지해온 연인관계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인지하면서, 공식적인 이별을 통보하거나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실천적 압박을 느끼고 있다.
현실 인식은 객관적일 수 없다. 모두 자신의 은유 방식과 틀에 근거한 인식만 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인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은유가 통할 수 있는 공동의 언어게임을 가능하게 하는 규칙을 공유함으로써 그 주관성들 사이의 공통기반 또는 연결고리를 마련할 수 있고, 실제 우리의 일상은 그런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기도 하다. 공통기반 또는 연결고리는 동일한 언어 공동체 속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좀 더 강한 형태로 마련될 수 있고, 이것은 다시 모국어의 공유를 통한 의사소통과 행동의 교환에서 그 상징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사회변화는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자신이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거나 속해 있는 사회의 변화는 외형적인 도시의 변화 같은 양상으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 인지의 어려움을 수반한다. 또한 그러한 변화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어떤 방식으로든지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인지부조화의 고통을 동반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삶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싶다는 열망으로서 윤리의 지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변화를 향하는 지향과 열망, 실천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사회변화는 은유적 개념이다. 일단 그것은 언어의 차원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런 후에는 사고의 차원으로 다가오고 동시에 실천의 문제로 다가온다. 사회변화라는 개념을 일단 떠올릴 수 있게 되면, 과연 그것이 무엇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고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실천의 차원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사회변화라는 개념을 은유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지만, 그 은유가 자신이 체험하는 일상을 통해 형성되었고 또 변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상 언어의 점검과 실천의 반성을 통해 은유의 지속적인 재구성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국어라는 하나의 언어체계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은유의 방법과 기술은, 그런 점에서 시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닌 인간다움의 기본요소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은유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관성적인 특성으로 나타나 자신의 관점을 바꾸지 않으려는 저항의 몸짓이 될 수 있는 데서 생긴다. 그 문제를 직시하면서 사회변화를 모색하고자 할 때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내적 성찰과 그것에 기반한 대화와 토론, 실천이다. 이미 인지과학 연구 결과에 의해 인간이 합리적으로 사고하기보다는 ‘무의식적이고 은유와 같은 심적 구조에 의지해 서로 다르게 판단하고 사고한다.’는 사실이 경험적으로 지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자신의 삶과 사회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은유구조를 분석하고 성찰할 수 있는 담론적 차원의 실천과 그 과정을 공유할 수 있는 대화와 토론의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모인다. 이미 그런 시도들이 학교나 사회단체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좀처럼 토론문화 등이 나아지지 않고 있음을 우리는 체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이 현실을 직시하면서 은유구조로서의 말을 중심에 두는 사회변화를 모색하는 일이 얼마나 절실한 과제인지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의 말 문화와 그것에 속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일상 속 고통을 통해 충분할 만큼 느끼고 있다. 그런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삼아 붓다의 은유와 토론방식의 재검토, 그리고 그것의 현재화 등을 모색하는 일은 의외의 탈출구를 마련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4. 말을 통한 사회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은유를 근간으로 삼는 인간의 말과 대화가 단순한 의도의 표상을 넘어서는 실천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찾아낸 개념적 은유 이론에 따르면, 그 실천력은 각 개인의 내면세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임과 동시에 그가 사는 사회구조적 맥락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은유를 활용해서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사회적 맥락에서의 실천을 전제로 발화(發話)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말들은 중얼거림이거나 타자는 물론 자신과의 진정한 소통이 결여된 독백일 가능성이 크다.

사회적 차원의 대화가 구조화된 담화의 형태로 담겨 있는 텍스트들 또한 그 사회의 실천 관행들 속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며 소비된다. 그런 이유로 언어사회학자 페어클럽(N. Fairclough)은 담화를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언어학 안에서 이뤄져 온 면밀한 텍스트 분석과 함께 사회적 실천 관행을 사회구조와 관련지어 분석하는 거시사회학적 관점, 사회적 실천 사례를 공유된 상식적 절차들에 토대를 두고서 능동적으로 구성원들이 산출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간주하는 해석학 또는 미시사회학적 관점’이 동시에 활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상의 담화에 관한 분석과 해석은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변화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지닌다. 학문의 목적에 관한 다양한 의견이 가능하지만, 단순한 해석에 그치는 경우 허학(虛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말과 담화에 포함된 수많은 실천 관행들(practices)은 과거와 현재의 것임과 동시에 미래에 열려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들이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은유의 맥락과 대화의 참여 자세, 담화구조를 포함하고 있는 텍스트를 분석하고 성찰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우리 사회 자체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붓다의 은유와 대화법에서 강조되고 있는 사항들이 실천적으로 재해석되어 소환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작은 글의 일관된 문제의식이다.

붓다의 말에 의한 설법은 단언해서 말해야 하는 질문과 제쳐두어야 하는 질문을 제외하면, 분석해서 설명하거나 되물어서 설명해야 하는 질문과 응답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전하는 과정에서 그는 비유와 은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더 나아가 토론을 통한 활발한 논의의 과정도 중시했다.

수행승들이여, 질문을 받고는 다른 것으로 답변하고 밖으로 화제를 돌리고 화내고 실망을 드러내면, 그런 사람은 대화상대로 적합하지 않다. ……수행승들이여, 대화 상대로 적합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대화를 이끌어가는 방식에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질문을 받고는 공격하고 유린하고 조롱하고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면, 그런 사람은 대화상대로 적합하지 않다. ……(중략)……
수행승들이여, 집착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이 대화의 목적이고 대담의 목적이며, 관심의 목적이고 귀 기울임의 목적이다. 

붓다는 대화를 이끌어가는 방식을 중시했다. 진리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회피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고, 조롱하거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또한 그 질문 자체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 경청의 자세 또한 청정한 진리에 이르는 과정에서 꼭 갖추어야 할 태도로서 중시하였음을 우리는 위 경전 인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붓다에게서 대화의 목적은 집착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이고, 그 과정에서 주고받는 말은 ‘청정한 믿음을 주고 우리의 앎을 깊게 하는’ 매개체이다.

우리의 말은 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서 한계와 직면하곤 한다. 대부분 은유를 통해 표현되는 우리의 말은 그 은유가 형성되고 정착하는 과정을 쉽게 알 수 없는 한계와 그로 인한 무의식의 과정이 추가되면서 자신의 내면은 물론 대화의 장을 꼬이게 만드는 난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에게는 그 난관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능력이 동시에 주어져 있고, 우리가 그 능력을 활용해서 한층 더 나은 상태로 개선해보겠다는 의지만 발휘한다면 자신과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언어를 매개로 하는 진리의 전달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던 용수나 비트겐슈타인과는 달리 붓다는 그 어려움과 한계를 직시할 수 있다면 보다 적극적인 대화와 토론이 활용될 필요가 있음을 다양한 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특히 그는 대화와 토론의 장에서 주고받는 말들에 대한 정교한 분류와 활용 방안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고, 이러한 붓다의 제안은 토론문화가 전반적으로 정착하지 못한 21세기 초반 한국 시민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살려낼 필요가 있는 것들임에 틀림없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을 매개로 하는 한국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붓다의 대화법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두 차원으로 나누어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것으로 이 작은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하나는 나와 타자 사이의 불이성(不二性)을 전제로 나 자신의 화법(話法)에 대해 성찰하면서 바꿀 수 있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바꾸고자 노력하는 일이다. 자신의 언어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다양한 형태의 은유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우리 일상의 화법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타자에게 불필요한 오해나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역의 과정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별다른 이유를 찾기 어려운데도 다른 사람의 화법에서 거부감이나 불쾌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주로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사용하고 있는 은유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자신과 타자의 은유에 관한 주목과 성찰은 우리의 언어생활은 물론 일상의 행복을 위한 첫걸음일 수 있다.

다른 하나의 제안은 대화와 토론 문화의 개선과 정착을 위한 것이다. 대화를 할 때는 먼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를 갖는 일과 자신의 말을 명료하게 하는 일이 전제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어떤 주장을 하거나 질문을 해올 때 그것이 어떤 유형의 것인지를 살펴 그 유형에 맞는 답변을 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자신의 의견이 분명하고 그것이 진리에 가까운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는 명료하게 그 의견을 전달하면 되고, 상대방의 질문이 모호할 경우 되묻거나 분석하여 재질문해야 한다. 더 나아가 종교적 믿음과 관련된 강한 주장을 해올 경우에는 더 이상의 대화를 이끌어가지 않고 마무리하는 전략이 필요할 수도 있다.

토론 공동체가 정착될 수 있기 위해서는 특히 역습과 회피라는 전술을 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토론문화 속에는 상대방의 주장과는 관계없는 다른 사안으로 역습하거나, 질문의 본질은 외면하면서 다른 말들을 늘어놓는 회피가 일상적으로 들어와 있다. 이런 문화는 불교계와 같은 종교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붓다의 무기(無記)와 침묵은 결코 회피가 아니다. 답변이 필요할 경우 적극적으로 그 질문의 유형을 나눠가면서 성격에 맞는 응답을 하고자 했고, 토론공동체 안에서 감정적으로 반응하거나 회피하거나 역습을 하는 사람을 대화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설 수 있는 땅을 토론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나서서 좁혀갈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고, 그 출발점은 자신이 그런 부정적인 의미의 대화 상대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차원의 노력과 공동체 차원의 노력은 당연히 제도와 문화 자체의 뒷받침이 함께 마련될 수 있을 때 현실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대화 상대방의 의견 속에 포함된 일리(一理)를 찾아내고자 노력하면서 자신의 주장 속에도 진리의 일단이 담길 수 있도록 명료하고 진정성있게 표현하고자 노력하는 화쟁(和諍)이 인정받을 수 있는 문화와 제도가 정착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른바 ‘목소리 큰 사람’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문화가 지속될 경우 우리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의 목소리도 그가 가진 외적인 힘 등에 의해 좌우되지 않게 하는 헌법적 장치의 보완과 법적인 시행 방안 마련 등이 토론문화를 개선해가는 데 실천적인 배경이 된다. 이처럼 개인적인 차원의 노력과 사회적 차원의 제도보완이 함께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말 문화는 사회변화의 중심축 역할을 하면서 ‘청정한’ 미래사회를 이루어내는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윤리학과 도덕교육학을 전공했고,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철학과 계율을 공부했다. 전주교육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국도덕윤리과교육학회장으로서 2015 초 · 중 · 고 도덕과 교육과정 개정 연구를 총괄했다. 주요 저서로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등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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